Hunter Club RAW - chapter (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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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여우와 호랑이
165# 여우와 호랑이
서부연맹은 클럽 레전더리를 중심으로 포레스티아, 두억시니 등의 대형 클럽들이 연합한 세력이다.
현 맹주는 오정환. 구 클럽 레전더리의 오너이기도 했던 그는 그림리퍼 퇴치 당시, 서부연합군에서도 나름대로 지휘력을 입증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피에스타가 수작을 부릴 때 아이리스를 두둔하며 노구덕을 지지해줬던 사람이기도 했다.
맹주 오정환 아래로는 구 포레스티아 오너 염미정, 두억시니의 오너 드미트리가 부맹주를 맡고 있으며, 그 외에도 역전의 투사 콜트레인, 본 크러셔 바르트라, 대정령사 이세미, 혈검귀 문일봉 등의 쟁쟁한 강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 역시, 서부연합군 당시 일선 부대의 지휘관으로서 혁혁한 활약을 했던 인물들이었다.
“…아시다시피 서부연맹은 명령체계를 일원화한 레그나토르나 도미니온과는 다르게, 철저한 삼세(三勢)의 연합체계를 구축하고 있었어요. 얼마 전까지는요. 예전에 보고 드렸었죠?”
“응. 그랬었지.”
설명을 이어가던 소피아가 슬쩍 눈치를 주자, 임유진은 적당히 그녀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리고는 옆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노구덕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여보? 듣고 있어요?”
“음? 아, 미안. 잠깐 딴생각을….”
“후훗. 괜찮아요. 무슨 생각을 했어요?”
아침햇살처럼 미소 짓는 임유진의 얼굴이 눈부시게 다가온다. 그러나 노구덕은 지금 이 순간, 엊그제 품었던 안세희의 여물지 않은 육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아내들 면전에서 할 수는 없다. 곁눈질로 주위를 훑어본 노구덕은 탁월한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이런 장소니까. 옛 생각이 나서.”
“하긴, 그렇겠어요. 벌써 이렇게나 세월이 흘렀는데, 그때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니까요.”
임유진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급조한 변명치고는 꽤 효과가 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은 마녀의 산 초입.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외진 공터다. 또한 노구덕과 임유진 내외에게는 남다른 추억이 깃든 장소이기도 했다.
“아아~ 또 저는 모르는 얘기인가요…. 서럽네요, 정말.”
“너무 그러지 마렴. 돌아가는 길에 크래들타운이라도 들르도록 할까? 거기라면 소피아도 기억할 거리가 많잖니? 예전 아이리스 클럽 홀도 둘러보고….”
“우후후… 괜히 새삼스레 그러실 필요 없어요, 언니. 어차피 1년 마다 연례행사처럼 가는 곳이잖아요?”
“어머, 그랬나?”
한담을 나누는 세 남녀의 옆에는 레그나토르의 의원인 일라이자와 샤카가 다소 굳어진 얼굴로 앉아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박승찬과 박지현을 위시한 십여 명의 호위병력이 병풍처럼 기립해 있었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산기슭에 모여 있는 일단의 무리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광경이다. 하물며 그들의 정체가 대륙 서남부를 제패한 레그나토르의 요인들임에야.
엉덩이가 무거운 레그나토르의 간부들이 이런 외지까지 나와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 이곳 마녀의 산에서 서부연맹의 수뇌들과 비밀 회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한 명, 이 회담의 무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끼어 있었다.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몸매에, 적당히 달라붙는 편한 경갑을 착용한 앳된 소녀. 바로 앞에서 앉아 재잘거리는 소피아와 머리색만 제외하고 꼭 빼닮은 그 엘프 소녀는 다름 아닌 소냐였다.
원래대로라면 동부에서 복귀한 이후, 다른 병아리들과 함께 근신을 명받았을 터인 소냐다. 그러나 동부의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고, 노구덕의 상태도 악화되자 그녀에 대한 처분은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와는 별도로 임유진과 소피아에게 크게 꾸지람을 듣기는 했지만.
따라서, 지금 그녀는 엄연히 레그나토르의 간부 자격으로 회담에 동행한 것이었다.
‘어색해.’
소냐의 심유한 시선이 세 남녀를 탐색하듯 훑고 지나갔다.
즐겁게 떠드는 임유진과 소피아, 그리고 그 사이에 껴서는 간간이 맞장구를 치며 실소를 터뜨리는 노구덕. 여느 때처럼 화목한 광경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소냐의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더없이 작위적인 연극으로 보였다.
오랫동안 사적인 이유로 노구덕과 그 아내들의 관계를 관찰해 온 소냐다. 그랬던 만큼, 그녀는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먼저, 노구덕. 그는 두 여인과 얘기를 하면서도 그녀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은 분명 임유진과 소피아를 향해 있는데, 그 눈은 죽은 생선처럼 흐리멍덩하여 빛이 느껴지지 않는다. 남들이 보기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소냐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기계적인 호응이었다. 거의 소피아나 임유진이 했던 말의 끄트머리 부분을 되풀이하는 식이다. 정신이 주욱 딴 데 팔려 있다는 증거.
소냐의 눈에도 보이는 걸, 벌써 몇 년을 그와 함께 살아온 임유진과 소피아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열심히 안면 근육과 입을 움직여 즐거운 표정, 화목한 대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까닭이야 뻔하다. 레그나토르의 다른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다. 노구덕에게 문제가 생겼다거나, 그들 사이에 트러블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 내부적인 사기에 영향을 미칠 테니까.
말하자면, 보여주기식 연극. 현대로 치면 쇼윈도 부부의 모습이다.
‘이모….’
곱게 피어난 들꽃처럼, 화사한 웃음을 흘리는 소피아를 응시하는 소냐의 시선에 짙은 수심이 어린다. 아침까지만 해도 어두운 얼굴로 방을 나서던 그녀. 최근 눈에 띄게 한숨이 늘어난 그녀의 그늘진 얼굴이 저 가식적인 웃음과 겹쳐 보이며, 소냐를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역시, 그 부작용 때문이야. 내가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이모의 안타까운 모습에 덩달아 고민을 더해가던 소냐의 고개가 돌연히 한쪽으로 돌아갔다. 숲 건너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부연맹 사람들이 온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 또한 그 기척을 감지했다. 오붓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끊기고, 금세 진지한 공기가 주변을 가득 채운다.
그러자 얼마 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면의 덤불에서 스무 명 정도의 인원이 얼굴을 내비쳤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서부연맹의 수뇌들이었다.
“노구덕 의장, 오랜만이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외다.”
연륜이 묻어나는 반백의 머리에, 산악처럼 다부진 인상의 초로인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일행의 선두를 이끌고 있는 그는 서부연맹의 맹주 오정환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호탕한 풍채는 여전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구덕은 정중하게 그를 맞이했다. 서부연합군에서 서로를 상당히 괜찮게 본 두 사내는, 지금에 이르러선 어느 정도 말을 편히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별 말씀을 다 하시는군. 시간도 별로 없으니, 이만 자리에 앉으십시다.”
“그럽시다.”
공터에 설치된 길쭉한 간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수장이 마주하자, 그 옆으로 각 세력의 주요 인물들이 좌르륵 옆으로 늘어앉았다.
레그나토르 측에선 노구덕과 임유진, 소피아, 샤카, 일라이자가 자리했고,
서부연맹 측에선 맹주 오정환을 비롯해 염미정, 콜트레인, 이세미 등의 간부가 참석했다.
“얼굴들을 보아하니 무탈하게 잘 지내신 것 같군. 신수가 아주 훤해. 허, 레드레인께서는 갈수록 젊어지시는 것 같은데…….”
“호호. 빈말이라도 듣기는 좋네요. 그러는 맹주께서도 아직 한창으로 보이시는데요.”
“으하하핫! 머리털 절반이 백발인 한창도 있는 거요?”
“어머, 제가 괜한 소리를 했나요?”
“아니, 아니요. 누구 말대로 듣기는 좋군!”
한동안 인사를 겸한 덕담이 오갔다. 그렇게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슬며시 인상을 쓴 오정환은 걸걸한 목소리로 포문을 열었다.
“소식은 들었소. 파멸의 현자가 칼립스를 방문했다지? 그래, 그놈들이 무슨 미끼를 던진 거요? 힘을 합쳐서 아다만티움 광산을 갖자고 제안하던가?”
“힘을 합치잔 소리는 했었지. 하지만 아다만티움 광산은 뒷전이더군.”
“…허면?”
“도미니온이 원하는 건, 서부연맹의 멸망이오. 이 삼분 체제를 끝내겠단 속셈이지.”
노구덕의 어조가 꽤나 덤덤했던 탓일까? 생각보다 큰 여파는 없었다. 그의 말을 들은 서부연맹 인물들은 하나 같이 올 게 왔다는 표정들이었다. 유메르바인이 방문하기 앞서 도미니온의 야욕을 경고했던 만큼, 아마 이 또한 그들의 예상범주 내였을 것이다.
“음… 그놈들이 기어코….”
작게 혀를 찬 오정환은 문득 노구덕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곤 그의 속내를 떠보려는 듯 넌지시 한마디를 건넸다.
“우리에게 그런 얘기를 한다는 건, 도미니온과 등을 돌렸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요?”
여기까지 왔으니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노구덕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줄 필요는 없으니까.”
“흐흠. 과연. 현명한 판단이군. 정말 잘 생각하셨소.”
오정환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노구덕의 판단을 칭찬했지만, 그를 제외한 서부연맹의 나머지 요인들은 크게 반색한 얼굴들이었다. 혹여 레그나토르가 도미니온과 손을 잡지 않을까 내심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동맹의 뜻을 피력하여 서부연맹의 수뇌들을 안심시킨 노구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공치사는 도미니온의 야욕을 막아낸 뒤에 해도 늦지 않소.”
“생각해 둔 계획이라도 있는 거요?”
“도미니온도 눈 뜬 장님은 아니니, 조만간 우리의 동맹을 알게 될 거요. 답신을 미루면서 시간을 끌어보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으니.”
“그렇다면….”
“벨룸 산맥의 고지대를 선점해서 미리 진지를 구축하려고 하는데, 서부연맹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군.”
“오호라, 그러니까 레그나토르에서 시간벌이를 하는 틈에 이쪽에서 먼저 선수를 치자, 이 말인가….”
귀를 기울이면서 목을 앞뒤로 까딱이던 오정환은 굵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딱딱 두드렸다.
“확실히 천연장벽을 이용해서 수성을 하면 큰 이점이 있겠지. 부담 없는 정공법이오. 그 계책 말인데… 혹시 그쪽 총사의 머리에서 나온 거요?”
그의 시선이 노구덕의 왼쪽에 자리한 소피아의 얼굴 한복판에 머물렀다. 그에 반응하여, 루비색의 동공을 자신만만하게 빛낸 소피아는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를 가리켰다.
“네. 만약 도미니온이 군을 일으킨다면, 반드시 벨룸 산맥을 넘어야만 하죠. 그 경로는 세 곳. 이 세 관문들을 중심으로 병력을 배치하면, 수성전에서 큰 우위를 가져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소피아의 답변은 오정환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희끗희끗한 귀밑머리 근처를 문지른 그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아니, 아니. 내 말은 그 뜻이 아니라… 허 참,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건가? 아니면 정말 생각하지 못한 건가? 레그나토르의 총사 정도 되는 인물이 말이야. 후자라면 조금 실망이로군.”
이번엔 레그나토르 측 요인들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특히, 대놓고 저격을 당한 소피아는 놀란 토끼처럼 치뜬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내 말은, 쉬운 길을 놔두고 왜 굳이 어려운 길을 가느냐는 거지.”
노구덕은 빙글빙글 웃고 있는 오정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서부연맹도 따로 생각해둔 방안이 있으신 모양이군.”
“흠, 이걸 방안이라 해야 할지….”
“말씀해보시오.”
“적을 명확히 하자는 거요. 괜히 도미니온 전체와 싸울 필요가 뭐가 있소? 되도 않는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건 도미니온의 윗대가리 놈들인데.”
노구덕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왠지 오정환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그 말은….”
“감을 잡으셨군. 으하하.”
크게 대소를 터뜨린 오정환은 의기양양하게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내가 보기엔, 우리가 싸울 곳은 바로 여기요. 여기 일만 잘 마무리하면, 구태여 전쟁을 일으킬 필요도 없지.”
그의 손가락이 머문 곳은 삼국의 국경이 마주하는 벨룸 산맥의 정중앙 지점… 이번에 새로이 발견된 아다만티움 광산이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새벽에 올리려다가 잠깐 눈 좀 붙이고 아침에 올립니다.. 다시 자러 가야겠어요.
오늘은 금요일이라 올릴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하지 못할 것 같네요. ㅠㅠ
저번화 후기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뜻하지 않게 스포로 느껴지셨다면 죄송한 마음입니다.
경고문이라도 붙여 놓을 걸 그랬어요..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그래도 어떤 분들에게는 그 후기가 마음의 보험(?)이 되었을거라 생각합니다.
배드엔딩은 배제했습니다만, 어쨌든 엔딩의 형태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니까요.
폭은 줄었어도 그걸 상상하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겠죠.
비도 추적추적 내리는데.. 빗소리 그치리 전에 얼른 다시 잠자리에 들어야겠습니다. 전 자면서 빗소리 듣는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독자님들 모두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