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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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여우와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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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외로 연락이 빠르군. 보다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체스터 님도 아시다시피 질질 끌 일이 아니잖습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거지요.
화면 안의 남자, 체스터는 냉철한 눈빛으로 노구덕을 응시했다. 허나, 언제나 그렇듯이 능글맞은 오크의 낯짝은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도미니온의 군왕 체스터와 레그나토르의 의장 노구덕. 두 사람 간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긴밀한 핫라인이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과거 도미니온이 일개 가문이었던 시절, 그리고 레그나토르의 세력이 이만큼 번창하지 않았을 때의 잔재다.
이제 한 사람은 명실공히 서부의 패자로, 다른 한 사람은 서남부 지역의 맹자로 각자 공고한 세력을 구축하면서 데면데면해진 사이였지만, 아직 서로가 서로를 부르는 말투나 호칭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앞서 유메르바인에게 얘기를 들었는데… 서부연맹 놈들을 광산으로 불러내서 처치하자고?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전력낭비보다는 그편이 훨씬 더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번드르르한 말은 여전해. 그건 놈들이 순순히 협상에 응했을 때의 얘기 아닌가?
“시도라도 해 보자 이거지요.”
-꽤 자신 있어 보이는군?
커다란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댄 노구덕은 여유롭게 턱을 매만졌다.
“솔직히 장담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희 레그나토르는 최근까지 중립을 고수해 왔습니다. 저희 쪽에서 적극적으로 삼자협상을 들이 민다면 서부연맹도 관심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중립을 지켜온 레그나토르가 협상을 주최한다… 그 판을 뒤집어 피로 물들이면, 그쪽에도 꽤나 타격이 갈 텐데? 그건 알고서 하는 소린가?
“허허. 체스터 님께서 저희 사정을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영광이군요.”
-실없는 말은 하지 말도록.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뚝.
테이블 위, 노구덕이 쥐고 있던 펜대가 반으로 부러졌다. 그러나 화상으로 노구덕의 얼굴만을 접하고 있는 체스터는 그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타격이라고 해봤자 별 게 있겠습니까. 그저 온종일 잡스런 기삿거리나 쏟아내겠지요. 다만… 이쪽도 확실히 피해를 감수하고 벌이는 일이니만큼, 그만큼의 보상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게 뭐지?
“아다만티움 광산 지분의 절반은 당연한 얘기겠고… 레그나토르 국경에 인접한 서부연맹의 영토 절반, 차후 포로 처우에 있어 우선권을 원합니다.
-흠…….
잠시 동안 고민을 하던 체스터는 흔쾌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얻는 실익에 비해 큰 양보는 아니다.
-좋다. 그런 조건이라면, 이쪽도 받아들이도록 하지. 물론, 이 조건이 성립하는 건 그대가 제대로 놈들을 광산으로 끌어냈을 때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혹여 딴생각을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
노구덕을 쏘아보는 체스터의 눈빛이 칼을 품은 듯 날카롭다. 그러나 노구덕은 수더분하게 그 쐐기 같은 눈빛을 흘려보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걱정은 접어두시길.”
-내 노파심이었으면 좋겠군. 자세한 일정은 차후 통보받도록 하지. 어디 한 번 진행해 보도록.
상하 관계라야 이미 예전의 일. 레그나토르가 도미니온의 배하 세력도 아니고, 체스터와 노구덕은 이미 대등한 각 세력의 수장이다. 말인즉슨, 노구덕이 뒤통수를 치지 말란 법이 없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픽.
느긋한 미소를 띠고 있는 노구덕의 상판에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던 체스터의 얼굴이 화상에서 사라졌다. 핫라인이 끊어진 것이다. 동시에, 너그럽게 쳐져 있던 그의 눈매가 모질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새끼!”
쾅!
원목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탁자 귀퉁이가 송두리째 박살이 났다.
크게 벌어진 콧구멍으로 뜨겁게 데워진 숨결이 들락날락거린다. 초록색 얼굴을 불그스름하게 익힌 노구덕은 이미 반으로 부러진 펜대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뚜둑. 뚜두두둑. 합금으로 만들어진 전용 펜대가 휴지조각처럼 사정없이 구겨졌다. 손에서 펜대 부스러기를 굴리며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킨 노구덕은, 조금 전까지 체스터의 낯짝이 새겨진 허공을 노려보았다.
“건방진 놈. 군왕이랍시고 거들먹거리기는… 누구 덕분에 그 자리까지 올랐는데!”
누굴 탓하랴. 안하무인인 체스터의 기질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퀸젤 대신 체스터를 밀어준 것이 노구덕이다. 늑대왕 가리발디의 수급 등, 노구덕의 지원으로 두각을 나타낸 체스터는 그 여세를 몰아 군다르의 가주가 되고, 그것을 발판으로 도미니온의 왕이 되었다. 당시엔 영악한 퀸젤보다는 체스터가 다루기 쉽다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수평한 관계가 된 지금에도 대화할 때마다 상전처럼 구니, 비위를 맞춰주는 입장에선 천불이 날 수밖에 없다.
“거들먹거릴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예 이참에 서부연맹, 도미니온 가리지 않고 죄다 쓸어주마.”
실처럼 가늘게 뜬 눈에서 붉은 빛이 섬뜩하게 넘실거렸다.
정신 오염이다.
지금의 노구덕은 평소의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평소에도 잔인하고 냉정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갈수록 영역을 넓혀가는 오크의 본성에 절반 이상 잠식당한 상태였다. 노구덕 본인의 기억이나 이성은 남아 있지만, 그의 행동원리를 지배하는 것은 인성(人性)이 아니라 오크의 야성(野性)이었다.
“아다만티움 광산에서 도미니온과 서부연맹의 대가리들을 모조리 쳐내고 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지.”
오정환이 밑밥을 깔아두고 제안을 했듯, 노구덕 또한 아무생각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원래 계획은 서부연맹과 힘을 합쳐 도미니온의 수뇌들을 척살하는 것이지만, 그는 아예 도미니온의 수뇌뿐 아니라 오정환을 비롯한 서부연맹의 상층부까지 끝장낼 심산이었다.
“서부연맹 놈들의 장단에 적당히 맞춰주다가… 때가 무르익으면 대청소를 하는 거지.”
레그나토르의 정예 전력은 도미니온과 견주어도 그리 꿀리지 않는다. 오히려 세간에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전력까지 더하면 도미니온을 상회하고도 남았다.
“…아가레스트를 불러들여야겠군.”
미지수의 전력인 노구덕 본인을 포함해, 최근 라키오라의 목숨을 제물 삼아 제대로 각성을 이룬 클라리스, 어지간한 십존급의 무력을 훨씬 웃도는 아가레스트를 더한 레그나토르의 전력은 도미니온과 서부연맹의 수뇌들을 쳐부수고도 남을 정도.
노구덕은 승리를 자신했다. 이번 기회에 어쭙잖은 수작으로 레그나토르를 이용하려고 하는 오정환이나, 거만한 체스터의 목줄을 끊어버린다. 그 이후엔 레그나토르가 서부의 유일한 패자로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원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노구덕은 문득 못마땅한 듯이 작게 혀를 찼다.
“…소피아 녀석, 행정부에 오래 박아뒀더니 그새 한물 가 버린 건가?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마다하다니.”
‘주인님, 다시 한 번 생각해주세요!’
복귀 길에 간곡히 청하던 소피아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소피아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구덕은 콧방귀를 뀌며 그녀의 말을 흘려버렸다.
“쓸데없는 소리야. 오정환과 체스터를 죽여버리고 나면 다 끝나는 일이야. 이레시온이야 동부의 일 때문에 간섭할 겨를이 없을 테고. 감히 반발하는 놈들이 나오거든 다 짓눌러버리면 돼. 몇 번 본보기를 보이면 잠잠해 지겠지.”
문제는 소피아뿐 아니라 임유진까지 그녀의 의견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거기서 감정이 상한 노구덕은 기분전환을 할 겸, 크래들타운에 방문하자는 아내들의 말을 뿌리치고 곧장 칼립스에 복귀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핑계다. 그의 실제 속셈은 최근 맛을 들인 안세희를 몰래 불러들이려는 것이었다.
그녀의 싱싱하고 젊은 육체를 떠올린 노구덕은 입맛을 다시며 기지개를 켰다.
“일도 끝냈으니, 슬슬 불러야겠군.”
호출석을 통해 안세희를 부르려던 노구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몰래 즐기려니 감질이 난단 말이야. 아예 애를 배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음?”
큰일날 소리를 아무렇게나 지껄이던 노구덕은 불현듯 시선을 문에 고정시켰다. 문밖으로, 자박자박하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구더기, 나야.”
“아아, 데모나냐? 들어와라.”
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데모나였다. 물에 젖은 해초처럼 찰랑거리는 검은 머릿결을 허리어림까지 늘어뜨린 그녀는 예의 그 핏기 없는 하얀 얼굴을 도도하게 치켜들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쩐 일이냐?”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테이블과 그 위에 널브러져 있는 펜대의 잔해를 스치듯 곁눈질한 데모나는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클라리스가 깨어났어.”
“호오, 의식이 완료된 건가?”
“그래. 생전만은 조금 못해도, 그럭저럭 괜찮게 써먹을 수 있을 거야. 이전보다 성능도 훨씬 향상 되었고.”
“그래야지. 투자한 게 얼만데. 네가 보기엔 어느 정도냐?”
“글쎄… 박지현이나 이두식은 무난하게 이길 것 같고, 박승찬과 도일에게는 상당히 애를 먹겠지. 그래도 이기긴 할 거야. 임유진에겐 어림도 없고.”
어림잡아 기존의 십존급보다는 한 수 정도 아래라는 뜻. 노구덕은 마뜩찮은 듯 입술을 질겅였다.
“조금 아쉽군. 역시 샤프슈터가 없기 때문인가?”
“그 부분이 크겠지. 애초에 신궁 클라리스는 샤프슈터가 없으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반쪽짜리니까.”
“그렇잖아도 문석현, 그 녀석에게 샤프슈터의 모조품을 의뢰했다. 그러니 조만간 소식이 있을 거다. 질이나 위력은 훨씬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위조(S) 재능을 지닌 문석현은 과거에도 이두식이 사용하는 슬로터의 레플리카를 제작한 전력이 있다. 그는 요 몇 년 간 나름대로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그 재능을 ‘신기’의 사본까지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언제 받을 수 있는데?”
“발주를 넣은 게 네 달 전이다. 너무 보채지 마라. 신기의 레플리카가 그리 쉽게 만들어지는 건 아니니. 그간 나온 실패작만 해도 열 개가 넘어간다.”
고개를 주억인 데모나는 느닷없이 품을 뒤적여 투명한 유리병을 하나 꺼내놓았다. 완두콩만 한 하얀 알약이 다섯 개 들어있는 약병이었다.
그녀가 내놓은 약병을 들어 올린 노구덕은 이게 뭐냐는 듯 뚱한 시선을 던졌다.
“이건?”
“정제된 카르믹스톤의 개량판이야. 앞으로는 이걸 복용하도록 해.”
“개량판? 뭐가 달라진 거지?”
“뻔한 걸 뭘 묻고 있어? 먹어보면 알잖아.”
여전히 불친절한 설명이다. 그래도 데모나가 개량판이라는 이름까지 붙였을 정도면, 틀림없이 기존의 것보다는 훨씬 나을 터. 노구덕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며 약병을 챙겼다. 그렇잖아도 큰 판을 앞두고 있던 차에 아주 시기적절한 지원이었다.
“고맙다. 요긴하게 쓰마.”
“임유진은? 같이 갔던 거 아니었어?”
“크흠….”
느슨하던 노구덕의 표정에 금세 불편한 기색이 감돈다. 그는 데모나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약병을 건넨 데모나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은근히 말을 건넸다.
“그보다… 어떠냐? 모처럼 일도 끝난 모양인데, 여기서 한번…….”
“됐어. 아란이에게 갈 거야. 쌍둥이도 봐야 하고.”
치근덕거리는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친 데모나는, 인상을 쓰고 있는 노구덕에게 들으라는 듯 차가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거 알아? 넌 정말 어쩔 수 없는 구더기야.”
“뭐라고?”
뒤늦게 말을 알아들은 노구덕은 언성을 높이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데모나의 검은 로브자락은 벌써 작게 열린 문 틈으로 멀리 달아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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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새벽에 올린다고 올렸는데, 술약속 때문에 많이 늦었네요.
내일도 연참을 향해 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주말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