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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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폭주
167# 폭주
“허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탄식이 메아리친다. 거친 턱수염을 한번 쓰다듬은 오정환의 손이 자꾸만 반복해서 오르락내리락한다. 그 의미 없는 손짓이 오정환의 허탈한 심정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허어, 이럴 수가….”
열심히 뛰어가서 앞에 있는 상대를 앞질렀는데, 미처 기뻐하기도 전에 그 상대가 훌쩍 날아올라 사라져버린 기분이 이럴 것 같다.
계획은 의심할 여지없이 완벽했다.
레그나토르에게 양다리를 걸치라 제안한 서부연맹은 실은 암중에서 도미니온과 손을 잡았다. 레그나토르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부연맹과 도미니온 또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레그나토르의 파멸. 이것이야말로 두 세력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임유진이 있고, 십존에 근접한 강자들이 즐비한 레그나토르라 할지라도, 예기치 못한 기습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다 익었다 싶어 뚜껑을 열어 본 내용물은 기가 막힐 정도로 참담했다.
소매로 눈가를 비빈 오정환은 흐릿해진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그러나 역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장 중앙에 소환된 뾰족한 첨탑. 태양을 떠받치는 오벨리스크처럼 우뚝 선 첨탑에서 금빛의 광선이 뿜어질 때마다 속절없는 비명이 잇따른다. 풍성한 금발을 휘날리며 첨탑 앞에 버티고 선 여인은, 이미 이 전장을 한손에 거머쥐고 있었다.
다른 한쪽은 또 어떤가. 잿빛의 그림자에서 쏘아진 검은 뇌전이 선명한 궤적을 그리면, 그 경로 안에 포함된 헌터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쓰러진다. 느닷없이 출현한 회색의 사수는 작살을 쥔 어부처럼 능숙하게 헌터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이제 주위에 남은 호위병력은 없다. 홀로 남은 오정환은 치매 걸린 노인네처럼 넋두리를 해댔다.
“으허헛! 신궁 클라리스에… 안개여왕 아가레스트…? 그간 어디 숨어있나 했더니, 서부 촌구석에 처박혀 있었단 말인가? 기사로군….”
“쥐새끼, 더 남은 잔꾀는 없나?”
지그시 고개를 돌린 오정환은 비루해진 입매를 뒤틀며 툴툴거렸다.
“허허, 노구덕 의장, 이건 반칙 아닌가? 애들 싸움에 어른을 불러온 격 아니냔 말이야. 레드레인 말고도 십존 둘이 더 있다니. 레그나토르의 힘이 이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는데…….”
기운 빠진 항의를 들은 노구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놈들 사정이야 어떻든 내 알 바 아니지. 자, 더 이상 준비해 온 게 없다면 이만 뒈져야지?”
지척까지 다가온 노구덕에게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러나왔으나, 정작 사신을 앞에 둔 오정환의 표정은 차분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삶에 초연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이만한 전력에 더 여유가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데… 전력을 동원한 걸 보면, 처음부터 우리가 배신할 걸 알고 있었단 건가?”
“알 게 뭐냐. 어차피 저년이나 네놈이나, 처음부터 개미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쓸어버릴 작정이었다.”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대답. 잠시 멍한 표정이 된 오정환은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정말 웃겨서 웃는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어 터져 나온 헛웃음이었다.
“우하하핫! 그러니까, 이쪽 계획을 눈치 챈 게 아니라 처음부터 우릴 몰살할 생각이었다고? 이런 망나니 같으니! 자네 정말, 그 철혈의 군주가 맞긴 맞는 건가? 어떻게 이런 대책 없는 짓을 벌일 수가…!”
“유언은 끝난 게로군.”
“하긴, 그따위 막무가내 계획에 당한 이쪽도 멍청하기는 마찬가지…!”
쓰라린 자조. 그것이 오정환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퍼억!
목을 잃은 육체가 허물어진다.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오정환을 뒤로 하고 몸을 돌린 노구덕은 바로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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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진과 유메르바인의 일전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전장의 흐름이 반전되었다는 것을 피부로 똑똑히 느꼈던 탓이다.
“…유메, 서부연맹과 도미니온의 음모는 실패로 끝났어요.”
“…그런 것 같군요.”
지팡이로 허공을 짚고 선 유메르바인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임유진의 날카로운 눈썰미는 그녀의 지팡이 끝이 잔잔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휴우우….’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삼켰다. 거북하게 속내를 긁던 체증이 이제야 겨우 가라앉은 듯했다.
서부연맹의 배신은 그녀에게도 상정을 벗어난 돌발 사태였다. 시먼에 의해 신소율의 손목이 날아간 걸 봤을 때에는 어찌나 놀랐던지, 펄쩍 뛰어올랐던 심장이 아직도 벌렁거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때 노출된 빈틈을 파고든 유메르바인의 공격으로 큰 부상을 입을 뻔하기도 했다.
신소율뿐이 아니다. 이두식도, 박지현도, 박승찬도, 도일도… 모두가 불의의 기습을 예견치 못하고 큰 위험에 빠졌다. 도미니온과 서부연맹이 합작한 함정은 삽시간에 레그나토르의 전열을 무너뜨렸을 정도로 무서웠다..
그러나 불현듯 나타난 두 여인의 가세로 인해 판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유령여왕 클라리스는 임유진도 알고 있었던 히든카드였다. 맨 처음, 이 싸움의 발단을 제공했던 작은 볼트. 유메르바인의 암살을 연출했던 그 흉기야말로 클라리스의 솜씨였으니까.
하지만 저 금빛 머릿결의 여인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이 아수라장을 자기 안마당인 양 휘젓는 솜씨라니. 그 무력은 결코 그녀의 아래가 아니었다.
레그나토르의 요인들을 차례차례 구해내는 아가레스트를 본 임유진은 그녀가 노구덕과 내연 관계에 있는 여인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단순한 육감으로 도출한 결론이 아니라, 아가레스트의 반개한 금안과 금발을 보자마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랑이, 하율이와 똑같아. 그럼 저 사람이 바로…?’
임유진은 일단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유메르바인과의 일을 매듭짓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유메, 처음부터 서부연맹과 손을 잡고 있었던 건가요?”
“보시다시피… 그래요.”
임유진의 눈가가 꿈틀했다. 솔직히 자신이 이런 말할 입장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레그나토르를 첫 표적으로 삼은 두 세력의 속내가 못내 궁금했다.
그 기색을 읽은 유메르바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생각할 건 없다고 보는데요. 우리 입장에서 보면, 장차 위협이 될 세력은 명확하잖아요? 레그나토르의 포텐셜은 서부연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니까요. 지금만 봐도 그렇죠. 설마하니, 저런 비밀병기들을 숨겨두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서부연합군 해체 이후, 서부에서 레그나토르… 즉 아이리스를 보는 눈은 확실히 달라졌다. 그림리퍼 전에서 큰 활약을 보인 것이나, 피에스타와의 알력 싸움에서 압승을 거둔 것이나… 여러모로 크게 인지도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인지도가 올라간 만큼, 경계심도 상승할 수밖에.
“…도미니온이 보기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니요. 우리뿐만이 아니에요. 먼저 접근해 온 건, 서부연맹의 오정환 맹주였으니까요.”
“…….”
“언젠가 어떻게든 결말을 냈어야 할 일이었어요. 벨룸 산맥 너머로 떨어져있는 우리와는 달리, 레그나토르와 서부연맹은 국경을 맞대고 있잖아요? 말은 2중이라지만… 사실 전력면이나 결속적인 측면을 따져보면 1중 1약에 가깝죠. 언제 흡수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어요.”
“그렇군요.”
임유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서부연맹의 체제를 일원화하고 결속을 다지는데 성공한 오정환. 어쩐지 그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그 야망이 더욱 커다란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설마 이 모든 음모의 숨은 주재자였을 줄이야.
그래도 이제는 별 상관없었다. 비록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지언정 그 음모는 분쇄되었고, 레그나토르는 이번에도 승자로 자리매김했다.
“유메, 이만 항복….”
“그 오정환이란 놈은 죽었다. 이제 네년 차례지.”
임유진은 급히 고개를 틀었다. 언제 이곳까지 왔는지, 불그스름한 두 눈을 흉하게 찢어놓은 노구덕이 보였다.
“여보?”
“노구덕 의장님….”
삐죽한 송곳니를 매단 노구덕은 검붉은 피가 뚝뚝 묻어 흐르는 주먹을 들어보였다. 콧속으로 밀려드는 비릿한 혈향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야성을 한층 더 무르익게 만들었다.
“이 쪽발이 년. 아까는 내게 실망했다느니, 어쨌다느니 개소리를 잘도 지껄이더니, 뒤로는 아주 맹랑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군. 응? 역시 천성이 어디 가지는 않는 모양이야.”
“여보, 무, 무슨 말을 그렇게….”
“왜 그래? 반은 일본 년이니 맞는 말이잖아. 그러면 이 자리에서 나긋하게 재상님~ 하고 불러줄까? 유진아, 미안하지만 난 그 정도로 호인은 아니다.”
도리어 임유진에게 면박을 준 노구덕은 말문이 막힌 채 서 있는 유메르바인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혹시라도 살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이 싸움에 포로는 필요 없거든.”
“…하아.”
그의 엄포에 지그시 탄식을 한 유메르바인은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황은 이미 많이 기울어 있었다. 가장 강력한 전력인 자신이 여기 묶여 있는데 비해, 저쪽은 자신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존재들이 마음껏 활개를 치고 있는 중이다. 심준호는 이미 전투불능의 중상으로 제압당한 처지였고, 콜트레인, 바르트라, 윤기호, 글라우버 등이 남은 자들을 규합해 발악을 하고 있으나 오래 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이건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그런데… 정말로 이 많은 사람들을 전부 죽이실 건가요?”
“물론. 왜, 이제 와서 목숨이 아까워졌나? 발악이라도 해 보려고?”
“그럴 리가요.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녀는 십존의 일인, 파멸의 현자 유메르바인이다. 스스로가 선택한 싸움이니, 목이 떨어지는 것에 후회는 없다.
“군을 이끄는 수장으로서는 끝까지 전의를 불태우는 게 도리이겠지만, 그래봐야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까요. 대신, 저 하나로 끝내주세요.”
“뭐라고?”
“저를 이 자리에서 참수하셔도 좋습니다. 반항하지 않고 고이 죽어드리죠. 그 대신 도미니온의 다른 이들은 정당한 포로로서 대우해달라는 제안… 아니, 부탁입니다.”
풀어헤쳐진 머리를 늘어뜨린 채 무릎을 꿇은 유메르바인의 얼굴에선, 결의를 다진 장수의 비장함이 엿보였다.
그러나 노구덕은 어떠한 감흥도 없이 입매를 터뜨렸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만… 거절하지. 내 생각엔 변함이 없어. 너흰 여기서 다 죽어줘야겠다.”
“의장님….”
“내가 왜 후환거리들을 살려둬야만 하는 거지? 마음 편하게 싹 청소해버리면 될 일인데. 크로스게이트 놈들을 쓸어버린 그때처럼 말이야.”
말을 마친 다음 순간, 두 눈을 번뜩인 노구덕의 주먹이 유메르바인의 안면부로 날아들었다. 오정환 때와 마찬가지로 단번에 머리통을 날려버릴 심산이었다.
하지만 유메르바인은 오정환처럼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낯빛을 굳힌 유메르바인은 군청색의 마력을 일으키며 노구덕의 공격을 받아칠 준비를 했다.
쿵!
세찬 굉음이 귀를 먹먹하게 만든다. 공성추나 다름없는 주먹을 앞으로 내지른 노구덕은 순간 짧게 혀를 찼다.
그의 주먹을 막아선 것은 유메르바인의 군청색 마력이 아니라, 저무는 노을처럼 선연한 붉은빛의 마력이었다.
“유진아, 지금 뭐하자는 거냐?”
“이 이상은 안돼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는 임유진의 눈빛이 전에 없이 사납다. 노구덕은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크게 실소를 터뜨렸다.
“후흐흐! 친분이 있다고 감싸고 도는 거냐? 기가 막히는군. 네가 이럴 줄은 정말 몰랐는데….”
“여보, 제발 제 말 좀….”
“됐다. 그때도 그렇고, 이렇게 사사건건 방해하고 나선다면 나도 더 이상은 참지 않아.”
노구덕은 임유진의 간절한 목소리를 단호히 끊어냈다. 번들거리는 두 눈에서 용암처럼 시뻘건 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비켜라. 정 고집을 부린다면,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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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진 vs 노구덕
12시 즈음에 한편 더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