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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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각성(覺醒)
171# 각성(覺醒)
5년 전, 그림리퍼 퇴치 이후 해체되었던 서부연합군이 재결성되었다.
안개여왕 아가레스트, 레드레인 임유진, 파멸의 현자 유메르바인, 나중에 다시 합세한 클라리스까지.
신구(新舊)를 아우르는 네 명의 십존이 힘을 합쳤다.
뿐만 아니라 콜트레인, 글라우버, 윤기호, 심준호 등 무력화되었던 포로들이 풀려나 기존의 레그나토르 헌터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이 정도면 과거의 서부연합군에 비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카름이나 레귤러 정도는 가볍게 찜 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다.
그러나 벨룸 산맥에서 부활한 레드테러는 그런 어지간한 수준이 카름이 절대 아니었다.
붉은 공포.
거대한 지네의 형상을 한 그 괴물은 그야말로 제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광물, 아다만티움으로 둘러싸인 갑각은 콜트레인과 윤기호의 검기를 맞고도 그저 약간의 흠집이 나는데 그쳤다. 놈의 갑각을 제대로 뚫으려면 임유진의 업화로 껍질을 그을리거나, 유메르바인의 권능으로 표면을 흐물흐물하게 만든 뒤라야만 했다.
설령 껍질을 부쉈다고 해도 문제였다. 속살이 워낙 두껍다보니 어디가 약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 거대한 몸통을 통째로 절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트롤을 상회하는 재생력과 벌레다운 터프함을 두루 갖춘 레드테러는 전사들의 끈질긴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뛰었다.
레드테러가 노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가레스트, 임유진, 유메르바인, 클라리스의 4인방이었다. 인간의 지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놈은, 네 사람을 제외한 다른 헌터들의 공격은 그다지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상황을 불리하게 만드는 요인은 더 있었다.
바로 민간인… 회담을 취재하러 왔던 언론인들의 존재였다.
아다만티움 광산 전체가 이레귤러로 변하면서, 광산 지역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들 역시 꼼짝없이 갇혀버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도 눈이 달린 이상, 레드테러의 미간에 박혀 있는 오정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부상으로 물러난 헌터들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그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모든 것이 오정환 맹주의 음모였다니….”
“우, 우린 이대로 다 죽는 건가?”
싸움과는 담 쌓고 지내는 평범한 민간인들이 재앙급 카름과의 전투에 도움이 될 리 만무하다. 그들이 줄 수 있는 도움이라고 한다면, 입이나 다물고 조용히 구석에 처박혀 주는 것이 전부.
다행히 이레귤러로 화한 광산 지역이 워낙 넓었기에 몸을 숨기는 데 별다른 지장은 없었다. 저 거대한 레드테러가 맘먹고 날뛴다면 그마저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부상자 후송 및 민간인들의 통제는 전력 외 판정을 받은 신소율이 도맡았다. 손목 절단으로 전투에 기여할 없게 된 신소율은, 브리트라와 함께 자기가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다른 이들을 서포트했다.
모두가 생존을 내걸고 필사적으로 싸움에 임하는 와중.
진정제를 맞고 정신을 잃어버린 노구덕은… 전장의 눈에 띄지 않는 모처에서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사실, 잠들어 있다는 표현은 잘못되었다. 실제 그의 육체는 수면에 빠져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멀쩡히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깨어난 정신은 조금 전까지 그의 육체를 지배했던 흉폭한 야성이 아니다. 인간 노구덕의로서의, 멀쩡한 본래의 정신이었다.
그는 육체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점점 영역을 넓혀가는 오크의 야성에 잠식당해, 결국엔 끝도 없는 나락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그랬던 것이 데모나가 투약한 진정제 덕분에 잠시나마 야성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행했던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야성에 잠식당한 그 이후부터 벌어졌던 모든 만행을. ‘오크’가 제멋대로 벌인 일이긴 했지만, 그 또한 엄연히 그의 일부다. 그로 인해 벌어진 모든 일이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곤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죽일 놈….’
노구덕은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자유의지를 되찾은 지금, 스스로 벌였던 일에 대해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치밀었기 때문이다.
노구덕이란 짐승이 벌인 추태를 돌이켜보면,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었다.
어린 소녀였을 때부터 봐왔던 안세희를 반강제적으로 겁탈하고, 이후로도 쭉 성노리개로 삼아왔다.
방금 전에는 어땠지?
임유진을… 누구보다 헌신적인 아내를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팼다. 여린 몸에 주먹질을 하고, 고운 얼굴에 발길질을 했다. 인격적으로 참을 수 없는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미친놈! 이 쓰레기! 개 같은 자식!’
‘어떻게 그런 짓을! 어떻게 그따위 짓을 할 수가 있어!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우아아아아악!’
의식체로 남은 노구덕은 미친놈처럼 목청을 터뜨리며 발광을 했다.
육신이 없는 게 한이다. 하다못해 손이라도 있었으면 이 추악한 낯짝을 잡아 뜯어버렸을 것이다. 그 더러운 눈과 혀를 뽑아서 육편이 되도록 으깨버렸을 터다.
‘크으… 끄으으으으…… 우어어어어….’
노구덕은 넋 나간 좀비처럼 흐느꼈다.
우려했던 일이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오크로 변해버린 자신은 사리분별이라곤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짐승이었다. 갑작스러운 야성의 발현은 그가 미처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육체의 통제권을 앗아가 버렸다.
영영 지워버리고 싶은 끔찍한 기억들이 밀려든다. 딸아이들을 향해 음충맞은 눈초리를 보내던 자신, 붉은 낙인을 새긴 안세희의 육체를 탐하며 헐떡이던 자신, 임유진을 모질게 대하던 자신…. 모두가 그다. 평생이 지나도 결코 떨쳐낼 수 없는 원죄였다.
할 수만 있다면 두개골을 열어, 커다란 대패로 뇌를 밀어버리고 싶었다. 대뇌 전부를 잘게 썰어버리면 이 어둠을 걷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젠 어떻게 하지? 나는… 나 같은 놈이…….’
노구덕은 자신을 잃어버렸다.
식구들을 마주 대할 면목이 없었다. 임유진이나 안세희는 말할 것도 없고, 이대로라면 다른 가족들에게까지 해를 끼칠 것 같았다. 아니, 틀림없이 그리 될 것이다.
지금의 그로선 도저히… 이 짐승을 통제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치료방법은 있다. 티렐은 저널을 담당하는 신의 조각을 찾으라 했고, 그를 찾기만 한다면 소냐에게 전수한 해주술(解呪術)로 이 빌어먹을 저주를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세월에?’
단서가 아무것도 없다. 이 넓은 스퀘어 대륙에서 어떻게 그 조각을 찾는단 말인가? 더욱이 지금은 사방이 전쟁 중이다. 만약 그 신의 조각이란 놈이 전쟁에 휘말려 죽기라도 했다면? 해주에 걸리는 시간은 늦어질 테고, 가망성은 더더욱 낮아진다.
그때까지 다른 사고를 치지 말란 법이 있나? 만에 하나, 그의 육체를 지배하는 괴물이 이전보다 더한 짓을 벌이기라도 한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그때는 살아갈 의미조차 상실하고 말 것이다.
‘제기랄… 차라리 이대로 영영 죽어버렸으면…….’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안타깝게도 온갖 외도(外道)의 정화라 할 수 있는 그의 육체는 이대로 돌연사하기엔 지나치게 튼튼했다. 노구덕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좋다. 어떻게 하면 이놈의 의식을 눌러버릴 수 있지? 간신히 잡은 기회다. 여기서 뭔가 하지 않으면…….’
‘아아악!’
‘……!’
돌연히 들려온 비명성.
빛 한 점 없이 깜깜하던 의식세계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한쪽의 공간이 큼지막하게 열리며, 그 사이로 선명한 바깥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거대한 지네와 수십 명의 인간이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 대다수는 눈에 익은 얼굴들이다.
피칠갑을 한 몸으로 지네의 한쪽 다리에 달라붙은 이두식, 반질반질한 에테르를 넓게 펼쳐내어 핏빛 광선을 막아내는 박승찬, 내상을 입었는지 왈칵 피를 토하며 비틀거리는 박지현….
마력 역류라도 일으킨 것일까? 코피를 줄줄 흘리며 크게 부르짖는 유메르바인의 얼굴에선 평소의 단아함은 찾아볼 수 없다. 언제나 차분함을 잃지 않는 아가레스트 역시, 필생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핏발 가득한 눈을 부릅뜬 채 마구잡이로 주문을 난사하고 있었다.
클라리스의 상태는 더욱 끔찍했다. 그녀는 안면의 삼분의 일 이상이 함몰되어 허연 두개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묵묵히 활시위를 메기는 광경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일들은 한 사람의 시야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노구덕은 얼마 안 가, 이 화면이 임유진의 시야임을 깨달았다.
‘심령차력술인가….’
팟! 팟! 그의 중얼거림에 반응하듯, 덩달아 몇 개의 화면이 더 나타났다. 신소율, 이두식, 박지현, 박승찬 등 그에게 세례를 받은 레그나토르의 헌터들의 시야였다.
‘…미치겠군. 갑자기 왜…?’
짐작가는 게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육신은 잠에 빠져들었으나, 그의 몸에 깃든 주술과 의식은 멀쩡하다. 이 영상들이 나타난 것은, 아마도 단절된 감각을 대체하기 위한 심령차력술의 작용일 터. 말하자면 자가보호 같은 본능이다.
‘어쩌란 거지?’
노구덕은 더욱 괴로워졌다.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는 그들의 시야를 볼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무력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특히, 전후방을 바삐 오가는 신소율의 시야를 통해 그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에는 갑갑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데모나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모두가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데, 무리의 수장이란 놈은 여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속편하게 자빠져 자고 있다니.
얄밉다. 암만 자신의 얼굴이라지만, 그래서 더 꼴도 보기 싫었다.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
‘제, 제길!’
전투상황을 지켜보던 노구덕은 몹시 초조해졌다. 갈수록 전황이 일방적으로 기울고 있었던 탓이다.
레드테러의 주둥이에서 뿜어지는 산성 브레스와, 놈의 주위를 둘러싼 핏빛 안개에서 무차별적으로 발사되는 핏빛 광선은 여지없이 헌터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위력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사제들의 지원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제가 없기에 전선에서 이탈한 병력의 복귀를 기대할 수 없다. 능력을 끌어올리는 축복도, 강력한 보호막도 없다. 치유가 되지 않으니, 전위를 담당하며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해야 할 전사들도 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네 사람의 십존이 있음에도 이 전투가 일방적으로 기울어지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삼국을 합쳐 백오십이 넘었던 헌터들의 숫자는 어느새 두 자릿수로 줄어들었다. 구석에 숨죽이고 숨어있던 민간인들도 수십이 넘게 죽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조그맣던 희망의 싹이 사그라든다. 이미 살 수 있다는 바람은 버린지 오래. 레드테러와 싸우는 헌터들의 얼굴엔 이제 악밖에 남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악!’
‘지, 지현아!’
애간장을 태우며 전황을 주시하던 노구덕은 벌컥 소리를 질렀다.
박지현.
가뜩이나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있었던 그녀가 끝내 살을 피해가지 못한 것이다.
‘제발!’
노구덕은 땅에 쓰러진 박지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핏빛 광선에 휘말린 그녀의 하반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상반신이 사라졌던 바르트라와는 정반대다.
의식이 흐릿해진다. 사방에서 명멸하는 화면들이 모조리 한통속이 되어, 의식세계 전체가 빙빙 돌고 만다.
그러나 노구덕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오로지 그 충격적인 장면을 얼이 빠진 채 바라보고 있던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움직여라.’
여전히 육체는 요지부동. 빙빙 돌고 있는 의식세계는 그의 감정을 반영하듯 파도처럼 출렁이기 시작했다.
‘움직여라, 좀!’
‘이 개새끼야! 다 죽어나가는데도 잠만 자고 있을 셈이냐! 이 빌어먹을 새끼!’
‘움직이란 말이다아아아아–!’
뚜두둑… 콰아앙!
그 내부에 응축되어 있던 무언가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극한에 이른 분노가 자글자글한 뇌혈관을 한꺼번에 터뜨린 것이다. 동시에 그의 의식을 둘러싼 세계가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안에서 무엇인가가 일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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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는 12시 이후에 올리겠습니다. 제 사정에 따라 조금 늦어질수도 있으니 양해부탁드립니다. (_ _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코멘 남겨주세요! 다음화 올릴때 질문 내용 선별해서 리리플로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