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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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각성(覺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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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붉은 물감을 칠한 것처럼 빨갛다.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으… 아…….”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는 쇳덩이를 갈아 넣은 것처럼 까끌까끌하다. 그렇잖아도 보이시한 목소리가 낮아질 대로 낮아져, 듣기 싫을 정도로 거슬렸다.
“악! 지현아아앗–!”
“지현 언니이이이!”
박지현은 멍하게 풀린 눈을 껌벅였다. 사방에서 자기 이름을 연발하는데, 왜들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런 인기인이 된 건지.
‘그만들 떠들고… 물이나 줘….’
목이 바짝 말랐다. 타는 듯한 갈증이 마실 것을 갈구한다. 뭐라도 좋으니, 시원한 음료로 메마른 목구멍을 적셔주고 싶었다.
‘이왕이면 술… 맥주가 좋은데. 가진 사람은 없겠지.’
“언니! 조, 조금만 참아! 뒤에 데모나 언니가 있으니까!”
호들갑스럽게 들려온 건 신소율의 목소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지현은 몸이 위로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싸우고 있었지.’
백태가 낀 것 같았던 시야가 서서히 선명해지며, 불그스름하게 덧칠되었던 세상이 점차 제 빛을 찾는다. 꿈속을 거닐 듯 몽롱했던 의식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머릿속에서 구름처럼 떠다니던 잡생각들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의 상황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찌를 듯이 쏘아진 붉은 광선.
피할 여력은 없었다. 그래서 광선을 받아 흘리려고 했다.
나름대로 빗겨냈다고 생각했는데, 창대를 헐겁게 잡은 것인지, 아니면 이전에 입은 내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술을 실패하고 말았다.
아니, 아주 실패한 건 아니고… 절반의 실패다.
그리고는 잠시 의식을 잃었다. 도중에 복부 아래쪽이 불에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팠던 것도 기억이 났다. 지금은… 하체에 감각이 없다. 몸 전체가 칼로 포를 뜨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분비되고 있을 텐데도 이 정도라면, 정말로 죽을 것 같이 아프다는 소리겠지.’
“하, 하….”
박지현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목을 들어 확인할 순 없어도, 지금 자신이 어떤 꼬락서니를 하고 있을지 훤히 보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울음을 삼키고 있는 신소율의 저 얼굴만 봐도 뻔하지 않은가.
“야… 신소율….”
“말, 말하지 마! 피 난단 말이야!”
“내려… 놔….”
“뭘 내려놔! 못 놔! 안 놔! 으흑, 어허어엉…!”
끝내 꾹꾹 눌러 참았던 울음이 터진다. 땟국 가득한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품에 안긴 박지현의 이마로 뚝뚝 떨어져 내린다.
박지현은 살짝 혀를 냄리어 인중 위로 흐르는 눈물을 맛보았다. 역시 짜다. 그녀는 피식 입매를 터뜨렸다.
“맥주는… 없지? 물이나… 줘….”
“바보야! 말하지 말라고! 말하지 말란 말야! 정말 죽고 싶어? 좀만 참으면 살 수 있다고!”
“알았다… 알았어….”
호되게 면박을 들은 박지현은 쓰게 웃었다. 다시금 처음봤을 때처럼 반말하는 모습이 거슬리긴 했지만, 이번만은 언니의 아량으로 관대히 넘어가주기로 했다.
변함없이 바보 같은 녀석이다. 밑으로 흘러내린 창자가 뻔히 보이는데 살기는 어떻게 산단 말인지. 이건 데모나가 아니라 데모나 할머니가 와도 살 수가 없다.
‘이 멍청아. 달랑 상반신만 남은 시체를 어떻게 살리겠다고….’
이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슬슬 그것도 무리인 것 같다. 의식이 아득해지면서, 턱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하긴, 이 정도면 꽤나 질기게 숨이 붙어있던 셈이다. 그동안의 수련이 헛되지는 않은 것 같다.
어슴푸레해진 시야를 베일 같은 어둠이 뒤덮는다. 꼭 얼굴에 천을 씌우는 것 같다. 이제 그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영면을 취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버무려진 지난 과거가 느릿느릿 흘러간다. 길거리의 양아치 생활에서 헌터가 되었던 일, 이진주와 함께 드래프트를 돌파했던 일, 노구덕을 만나 아이리스에 정착하고, 애마 복순이를 만났던 일… 기가 막히게도 술친구였던 헨더슨과 눈이 맞아 결혼에 골인했던 그날의 기억까지.
‘아하하… 내가 그런 아저씨랑… 술이… 웬수지…….’
박지현은 손을 들었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작은 은반지가 보인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워낙 굵어진 탓에, 이제는 뺄 수도 없는 반지. 헨더슨과 식을 올릴 때 맞추었던 결혼반지다.
‘서방… 나 먼저 갈게……. 아직 젊으니까… 재혼은… 봐준다….’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쩐지 속마음은 후련하다. 언젠가 이런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살짝 벌어진 입가로, 흩날리는 꽃발처럼 따스한 미소가 내려앉는다. 그리고, 이내 감긴 눈 속이 영원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어?”
바쁘게 달려가던 신소율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박지현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늘어져 덜렁거리는 왼팔을 들어 올리려는 듯이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그 이후로 미동이 없다. 목 언저리로 느껴지던 미약한 숨결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언니?”
신소율은 떨리는 손으로 박지현의 맥을 짚었다. 역시 아무것도 뛰지 않는다. 심장도 멈추었다. 무겁게 닫힌 눈꺼풀은 한 점 떨림조차 없다.
죽은 것이다.
아이리스 소속으로 8년이 넘도록 함께 해 온 박지현이 죽었다. 신소율은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 싫어… 왜, 왜? 다 왔는데…!”
“내려놔.”
차오르는 눈물을 훔친 신소율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검은 색의 까마귀 로브. 어느새 다가온 데모나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데모나 언니….”
“어린애처럼 굴지 마. 그 녀석만… 죽은 게 아냐.”
언제나처럼 냉정한 말투다. 그러나 그 말과는 달리, 눈을 감은 박지현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데모나의 동공엔 커다란 파문이 일고 있었다.
“시체는 내가 수습하겠어. 넌 네 임무에 충실해. 벌써 두 명이 중상을 입었어.”
“알…았어요.”
신소율은 함빡 젖은 얼굴을 거칠게 훔쳤다. 그리고는 슬픔에 찌든 몸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어서 빨리 가지 않으면, 중상을 입은 환자들이 박지현 같은 꼴이 될지도 모른다.
식어가는 박지현의 몸뚱이를 내려놓은 그녀는 먹먹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이 싸움… 이길 수 있을까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만약에 잘못되면 아저씨만이라도….”
“신소율. 닥치라고 했잖아.”
험한 일갈을 듣고서야 비로소 입을 다무는 신소율이다. 그런 그녀를 못마땅하게 쳐다본 데모나는 이내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돌아가. 여긴 내가…….”
“아, 아저씨?”
“그만 하라고…!”
막 화를 내려던 데모나의 눈이 크게 치떠진다. 우두커니 서 있는 신소율의 옆얼굴로 큼지막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철갑처럼 팽창한 근육, 핏물처럼 찰랑이는 눈동자. 코뿔소처럼 거대한 덩치를 지닌 거한은 노구덕이었다. 그녀의 계산대로라면 뒤쪽에서 여전히 정신을 놓고 있어야 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미, 미안하다! 주인이 갑자기 일어나서…!”
브리트라의 쩔쩔매는 음성은 들리지도 않는다.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데모나는 모든 마력을 쥐어짜서 손끝에 모았다.
지금의 노구덕은 사람이 아니라 본능에 충실한 짐승이다. 더군다나 제압당했을 때의 그는 임유진을 죽이려고 했을 정도로 격분한 상태였다.
만일 그 감정과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후방에서 또 다른 피바람이 몰아칠지도 몰랐다.
데모나와 같은 생각을 한 신소율도 지그시 이를 악물며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는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불길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조용히 노구덕의 이름을 불렀다.
“아저씨…?”
“…….”
크게 벌어진 입으로 들락거리는 숨결이 더없이 난폭하다. 노구덕은 어떤 말도 없이 박지현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미덥지 못한 반응에, 그녀는 다시 한 번 소리내어 말했다.
“아저….”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그 손… 많이 아팠겠구나.”
불안하게 떨리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신소율은 또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괘, 괜찮아진 거예요? 정말로…?”
“아니. 그렇진 않아.”
무겁게 고개를 저은 노구덕은 눈을 돌려 아직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있는 데모나를 바라보았다.
“데모나, 미안하지만 네 피가 필요하다.”
우묵하게 들어간 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데모나는 묵묵히 손칼을 꺼내 손목에 깊은 자상을 냈다. 그러자 길게 갈라진 틈새로 시뻘건 핏물이 배어나왔다. 주술의 촉매로서 최고의 효능을 지닌 마녀의 피다.
아름답기조차 한 맑은 핏물을 마주하자, 그의 숨소리가 좀 더 거칠게 변했다. 간신히 억눌러둔 흉성이 다시 발작하려는 조짐이다. 어금니를 깨물고 뻘건 눈을 깜박인 노구덕은 그녀의 가녀린 팔을 우악스럽게 끌어당겨 쭉쭉 피를 빨아마셨다.
“후읏…!”
가벼운 현기증이 밀려왔는지, 안 그래도 창백한 데모나의 안색이 밀랍처럼 말라붙었다. 게걸스럽게 그녀의 피를 빨아댄 노구덕은 힘없이 비틀거리는 데모나의 허리를 떠받쳤다.
“브리트라, 데모나를 부탁한다.”
“아, 알았다.”
브리트라에게 데모나를 맡긴 노구덕은 신소율에게 눈을 돌렸다.
“병력을 물려라. 잘못하면 휘말린다. 십존급이 아니면 다 빠지라고 전해다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다시 폭주하게 되면… 저 괴물과 함께 죽여도 상관없다.”
“그, 그럴 순 없어요! 진정제가 있잖아요!”
“흐.”
픽 웃은 노구덕은 두터운 손으로 신소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나는 부차적으로 생각해라. 어디까지나 너희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야. 만에 하나, 나로 인해서 저런 모습을 또 보게 된다면… 나는 절대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다.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냐.”
“아저씨….”
“하여튼, 할 말은 다했다. 내 말 잊지 마라. 절대로.”
머리 위가 허전해진 것을 느낀 신소율이 고개를 들었을 때, 노구덕의 모습은 이미 까마득한 점이 되어 산맥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남긴 말이 아련한 메아리가 되어 귓전에서 감돈다. 잠시 못 박힌 듯 서서, 귓가를 어루만지던 신소율은 급히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예상대로 일이 바빠진 탓에.. 오늘은 조금 업로드가 늦었습니다.
장면 전환 직전에 끊기다보니 용량이 조금 부족한데, 부족분은 다음화에서 메우도록 하겠습니다.
광산, 칼립스, 협곡.. 세 군데서 전쟁이 진행되다보니 에피소드가 상당히 길어졌는데, 거의 끝이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 에피소드는 하루이틀 내로 끝날 것 같습니다. 거기서 길어져봤자 한두 편 정도겠네요.
제 마음 같아선 리리플 전부 다 달아드리고 싶지만.. 일 마무리하고 너무 피곤해서 ㅠㅠ..
중점적으로 궁금해하실만한 부분만 서술하겠습니다.
1. 하유라
하유라가 히로인이 될지 안될지는 모릅니다. 정확히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여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캐릭터인 것은 맞습니다.
2. 박지현.
애도를 표합니다. 생사결정에 상당히 고민이 많은 캐릭터였습니다만, 여러 연동효과를 고려하면 이쪽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3. 현재 가장 큰 세력은 발레기우스의 세력이 맞습니다. 이번 에피소드가 끝나면 대강 일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4. 주인공 상태는 각성이라기 보다는.. 조금 애매한 상태입니다. 치료되려면 소냐가 있어야 해요.
5. 심령차력술로 재생력을 줄 수는 없습니다. 구더기가 눈에 천리안 기반이 없어서 천리안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다른 이들도 히드라의 핵 같은 게 없는 이상 재생력을 쓸 수는 없죠. 그걸 떠나서 심령차력술은 일방통행입니다.. ㅠ
6. 답글 달아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혹시 이번화에도 댓글 달아주시면 제가 낮에 업로드할때 리리플 달도록 하겠습니다~!
+@. 혹시 로그라이크 장르 게임에 대해서 잘 아시는분 계신지 궁금하네요.
무명a / 군대..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작품 연재하면서 군대가시는 분들 열 분 정도 보는 것 같네요 ㅠㅠ
그니 / 쿠폰 감사합니다! 예전처럼 시간이 널널하면 3연참도 시도해보겠는데.. 지금은 2연참 페이스 유지하는 것도 꽤 힘들어서.. 노력하겠습니다 ㅠㅠ
너무 피곤합니다.. 작가는 이만 퇴근하고 씻고 자야겠습니다… 형제더비 보고 싶었는데 하이라이트로만 봐야겠네요..
굿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