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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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두 남녀
178# 두 남녀
“단월아.”
“예. 공주님.”
“첫눈에 반한다는 말, 혹시 너는 믿니?”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조용히 강옥교의 뒤를 따르던 소냐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걸음을 멈춘 강옥교는 어느새 몸을 굽혀 화단에 곱게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믿지 않습니다.”
“으응, 조금 아쉬운 대답이네. 단월이는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는 거야?”
곤란한 질문의 연속이다. ‘소냐’라면 무뚝뚝한 말 한마디로 끝내고 말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소냐가 ‘단월’이다. 아무리 그녀가 근래에 강옥교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한들, 시녀된 입장에서 정말로 공주의 친구처럼 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고로, 가끔은 이런 거슬리는 질문에도 장단을 맞춰줘야만 했다.
‘좋아하는 사람….’
소냐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당장 몇몇 친숙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대놓고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꽤나 많다. 그중에서도 호감도가 굉장히 높은 사람을 꼽으라면 후보군이 상당히 좁혀진다.
그녀를 끔찍하게 아끼는 소피아, 항상 다정한 임유진, 가끔 아옹다옹하지만 늘 정답게 지내는 임가희, 그리고 다른 가족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좋아하고, 지켜주고 싶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강옥교가 원한 대답은 이게 아니다. 그녀가 소냐에게 원하는 답은 잠 못 이루는 밤, 풋풋한 소녀들이 설레는 가슴으로 불러보는 상사곡(相思曲)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평소 똑 부러지기로 소문난 소냐지만, 알고 보면 열다섯의 감수성 예민한 소녀에 불과하다. 이성을 논하는 짓궂은 질문에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 단월이가 말이 없는걸?”
“…죄송합니다. 공주님. 진지하게 생각을 하느라…….”
“으응. 이해해. 바로바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지. 그래서 대답은?”
쭈그려 앉아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있는 강옥교. 그녀의 입매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본 소냐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첫인상이 이런 이미지였던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이성은 있습니다.”
“진짜? 누구, 누구?”
“비밀입니다.”
“에에… 시시해. 그러지 말고 알려주면 안 될까?”
“안됩니다.”
“왜애?”
“창피하니까요.”
“너무하네. 공주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도 알려주지 않다니. 그럼,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는지만 알려줘. 한눈에 반한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계기가 있을 거 아니니?”
정말이지 끈질기다. 그녀의 거듭되는 간청을 버티지 못한 소냐는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 감정이란 게 뭔데?”
“글쎄요… 이 감정이 사랑인 건지, 동경인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분과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소냐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심어린 대답이다. 단지 가짜 배역에 충실하기 위해 두루뭉술하게 내놓은 답변이 아니라, 나름대로 진지하게 장고한 끝에 도출한 결론이었다.
소냐가 그에게 가진 감정은 남녀 간의 애정, 혹은 사랑이란 단어로 쉽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하며 은근한 동경으로 바뀌었고, 그가 이룩한 성과를 지켜보며 존경과 경외로 변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기에 약간의 집착과, 커다란 야망이 포함되었다. 더불어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배덕감과 죄책감까지.
이 얽히고설킨 감정의 덩어리를 하나의 단어로 쉽게 정의할 수 있을까?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현자를 데리고 온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나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 감정은 분명히 호의에 가깝다는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해서, 소냐는 그를 좋아했다.
“그 분이라 말하는 걸 보니, 연상이구나? 그것도 꽤 차이가 나는 것 같아. 혹시, 어렸을 적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일까아~?”
“…비슷합니다. 제 얘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무뚝뚝해. 단월이는 재미가 없어.”
예쁘다며 꽃잎을 만지작거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떼쓰는 아이처럼 칭얼대며 꽃잎을 하나 씩 툭툭 뜯고 있다. 강옥교의 이런 색다른 모습은 이 넓은 장룡지부에서 오직 그녀의 마음을 얻은 소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이번엔 공주님 차례입니다.”
“내 차례?”
“제게 난처한 질문을 하셨으니, 당연히 공주님도 같은 질문을 받으셔야지요. 그래야 공평합니다.”
“하지만 나는 공주잖아? 굳이 공평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재미없는 단월이는 제대로 얘기도 해주지 않았고.”
“…….”
잠시 미묘한 침묵이 두 여인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웃차!’하며 화단 앞에서 일어난 강옥교는 방울처럼 짤랑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미안, 미안. 알았어. 얘기해 줄게. 그러니까 그런 뚱한 표정 짓지 마. 무섭잖니? 단월이 너, 내 시녀인 건 자각하고 있는 거지?”
“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각하고 있습니다.”
“맞아. 그러니까, 오늘 하루는 이걸 달고 있도록 해. 명령이야.”
흐르듯이 매끄러운 까만색 머리카락 위에 살포시 꽃 한 송이가 얹어졌다. 소냐의 머리 위에 꽃을 꽂아 장식한 강옥교는 자기 작품이 제법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주 예뻐. 달리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오늘은 조신하게 걷도록 해.”
“예….”
왠지 모르게 기운이 다 빠진 소냐의 대답에 킥킥 소리 내어 웃은 강옥교는 다시 천천히 화단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산들바람처럼 사뿐한 걸음걸이로 걷던 강옥교는 문득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울처럼 투명한 눈동자에 담긴 하늘은 알 수 없는 수심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있지, 단월아. 그런 생각 안 해봤니?”
“무슨 생각 말씀이십니까?”
“세상 어딘가에는 반드시 내 운명의 상대가 있다는 거… 그리고 그 상대와 만나서 행복하게 산다는 거. 다들 한 번쯤 꿈꾸는 얘기잖아?”
“그렇지요.”
“하지만 운명이란 건, 반드시 이 세상에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는 거야. 지금 어딘가 내 운명의 상대가 세상에 있다고 해도… 만나서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 적어도 이번 생애에선 말이야.”
“…….”
“…그러니까, 난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운명의 상대와 만나서 함께 있을 수 있었으니까.”
강옥교는 몸을 돌렸다. 소냐의 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말로 행복해. 단월이 너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길 바라.”
“공주님….”
왜일까.
밝게 웃는 강옥교의 앞에 선 소냐는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미려하게 휘어진 그녀의 눈꼬리에 아른거리는 작은 이슬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건 행복에 겨운 눈물이었을까? …알 길은 없었다. 왜냐하면 다시 눈을 깜박였을 때, 그녀의 눈에 희미하게 맺혀 있던 물방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으니까.
“가자. 너무 지체했네. 이러다 늦겠다.”
“예.”
고민은 거기까지였다. 머리 위에 얹힌 작은 꽃송이를 무심결에 매만진 소냐는, 앞서가는 강옥교를 천천히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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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관통상일 뿐입니다. 폐가 조금 다치긴 한 것 같은데… 생명에 위협이 있는 건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다행이군. 약은 필요 없는 건가?”
“따로 약을 쓸 필요는 없고, 재생물약만 두어 병 정도 쓰면 금방 나을 겁니다. 워낙에 몸이 강골이라… 빠르면 하루 이틀이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겝니다.”
“고맙다.”
“별 말씀을.”
의무관을 방에서 내보낸 여위량은 환부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노구덕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 그러나 그런 그를 바라보는 여위량의 눈빛은 한겨울의 눈보라처럼 차갑기만 했다.
“이제 연기는 그만하지. 나와 독대를 원한 게 아니었나?”
“…….”
“계속 자고 있을 생각이라면….”
“아, 일어나면 될 거 아닌가?”
능청을 떠는 목소리와 함께,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줄로만 알았던 노구덕의 눈이 번쩍 떠졌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노구덕은 가슴팍을 감고 있는 붕대가 상당히 갑갑했던지, 찰싹 달라붙어 있는 붕대를 통째로 뜯어내다시피 하여 벗겨냈다. 약 십 분 간 끙끙대며 그의 몸에 붕대를 감았던 의무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뜯겨나간 붕대 위로 드러난 그의 피부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것을 본 여위량은 더더욱 표정을 굳혔다.
“역시 속임수였군. 무슨 수법을 쓴 거지?”
“흐음, 속임수라고 하기엔 약간 어폐가 있네. 적어도 그 피와 상처는 진짜였거든.”
“…진짜였다고?”
“세상엔 이런저런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는 법이지. 자네의 좁은 식견으로 판단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야.”
빈정대는 투로 말하긴 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노구덕이 사용한 트릭은 여위량이 상상할 수도 없는 기상천외한 것이었으니까.
노구덕은 체내에 감춰진 미세한 갑각 촉수를 움직여, 육체의 미세한 불수의근마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자다. 피부에 맞닿아 있는 창을 육체로 스며들게 하고, 창에 꿰뚫린 것처럼 보이도록 상처를 조작하는 일은 그에게 있어 매우 손쉬운 일이었다.
“…….”
자기가 했던 그대로 놀림을 당한 여위량의 눈두덩이 크게 꿈틀거렸다.
여위량이 화가 나든지 말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노구덕은 옆에 개어져 있는 후드를 몸에 걸쳤다.
‘괜찮은 임기응변이었어.’
노구덕은 몇 시간 전의 자신에게 가벼운 자찬을 보냈다. 그때, 뚱보를 두들겨 패는 임기응변을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 이처럼 여위량과 독대하는 기회를 만들 수는 없었으리라.
“자네가 생각보다 똑똑해서 다행이야. 내가 벌인 일이 트릭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바보였거나, 사람부터 부르고 보는 겁쟁이였다면 일이 복잡해질 뻔했어.”
“그건 당신 생각이다. 난 현명하지도 않고, 그렇게 용기 있는 인간도 아냐.”
“호오, 여차하면 사람을 부르겠다는 말인가?”
“한 시간 뒤에 중요한 약속이 있다. 내겐 그다지 시간이 많지 않아.”
“어이쿠, 그러면 시간 낭비할 틈이 없겠군.”
말과는 달리, 노구덕의 행동거지에는 초조한 빛이 전혀 없었다. 그는 제집 안방이라도 되는 양, 탁자에 놓인 물잔을 제멋대로 집어 목을 축였다.
“여위량. 나이는 스물여섯. 흠, 젊은 나이에 이만한 실력이라… 대외적으로는 북부 산치루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어린 시절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보다 너는 누구냐? 따로 배후가 있는 건가?”
“이왕이면 하던대로 계속 당신이라고 불러주게.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너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별로야.”
“말장난을…!”
“섬전창 여위량. 본래 이름은 자레토 듀폰. 북부 듀폰 왕가의 숨겨진 사생아. 사생아이기에 가문의 이름은 받지 못했지. 친모는 천식을 앓다 일찍 세상을 떠났고, 세 살 때부터 고아원에서 길러졌다. 열 살 때는 고아원을 나와 뒷골목을 전전하다, 몇 년 뒤에는 프리헌터로 정착….”
챙!
노구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목젖에 맞닿아 있는 창날을 툭툭 건드렸다.
“…이보게, 아직 사람이 말을 하고 있잖나.”
“너는… 대체 누구냐? 어떻게 그걸 알고 있지? 즉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창을 겨누고 있는 여위량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노구덕이 말한 정보는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비밀이다. 여위량 본인과 다른 한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거기가지 생각이 미친 여위량의 눈매에 스산한 살기가 깃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있었다. 최근에 서부의 어느 전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고 했던가? 이 정체불명의 사내가 그 여자의 앞잡이라고 가정하면, 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도 모두 설명이 되었다.
“…그 여자냐? 그 여자가 보낸 거냐?”
“머리회전이 빠르군. 아, 아. 그만두게. 날 아무리 위협해봤자 아무 소용없어. 자네도 그녀를 알지 않나?”
“…큭.”
당장이라도 목젖을 뚫어버릴 것 같았던 창날이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확실히, 서리여왕 하유라라면 부하 하나쯤 죽는다고 마음 아파할 인물이 아니다. 게다가 어쩌면 서리여왕 본인이 이 근처에 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여위량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은 노구덕을 통해 자초지종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창을 거둔 여위량은 지금까지보다 더욱 험악한 얼굴이 되었다. 아마 서리여왕 하유라와 사이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노예와 노예상이 사이가 좋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었지만.
“…그 여자도 와 있는 거냐?”
“그렇다네.”
“제길…. 왜지? 이제 와서 자유를 박탈하기라도 하겠단 건가? 난 더 이상 그 여자의 노예가 아니다.”
여위량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더 격했다. 노구덕은 그의 반응을 하나하나 살피며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알고 있어. 하지만, 나나 그녀나 자네에게 결코 해를 끼치려고 온 것은 아니야.”
“그걸 믿으란 말이냐?”
물론 믿지 못할 거다. 노구덕 자신이라도 서리여왕 하유라가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다면, 당연히 의심부터 하고 볼 테니까.
허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지금은 어떻게든 여위량을 설득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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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새벽이 아침이 되었군요. 어째 점점 양치기소년이 되어가는 기분입니다 ㅠㅠ
부디.. 제가 연참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