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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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두 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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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투대회 전야(前夜).
거리 곳곳에 환한 등불을 밝혀 놓은 산치루 시내는 무투대회를 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로 늦은 시간까지 북적였다.
인파로 복작대는 상황은 젠룽의 주점이 있는 뒷골목도 마찬가지여서, 여느 때 같았으면 한산하게 파리만 날리고 있을 거리에 모처럼 후끈한 활기가 돌았다.
“어서 옵쇼!”
“숙식 모두 제공됩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대회 특수를 맞아, 상점가의 상인들이 모처럼 한몫 단단히 잡기 위해 열심히 바가지를 씌울 먹잇감을 물색하는 가운데, 일찌감치 ‘만실(滿室)’ 팻말을 내건 채 가게 문을 닫아놓은 곳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곳은 젠룽의 주점이었다.
“밖이 시끄럽군.”
“죄, 죄송합니다. 근래 날이 날이다 보니…….”
노구덕은 미간을 찡그린 하유라 앞에서 쩔쩔 매는 젠룽을 보며 쯔쯔 혀를 찼다. 상사를 잘못 만나면 평생 고생이라더니, 젠룽이 딱 그 꼴이었다.
“엉뚱한 걸로 트집을 잡기는. 얘야, 방음막을 부탁한다.”
“예, 대부님.”
소냐의 앙증맞은 손아귀에서 희뿌연 빛무리가 일자, 밖에서 떠들썩하게 들려오던 소음들이 거짓말처럼 쏙 들어가 버렸다.
“젠룽,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
“…….”
노구덕의 말에 머뭇거리며 하유라의 눈치를 보던 젠룽은, 그녀의 미려한 턱이 바깥쪽을 향해 까딱거리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뒷걸음질을 치며 밖으로 사라졌다. 매일 구박을 받는 것밖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충성심 하나는 상당한 인물이었다.
‘희한하단 말이야. 저 더러운 성격에 아직까지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게.’
젠룽 같은 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의문점이었다. 지금까지 본 그녀의 모습은 리더로서는 최악. 솔직히 말해서 따를 건더기조차 없는 인물이다.
퀸즈가든을 운영하던 시절에는 그나마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라도 있었지, 퀸즈가든이 파괴되고, 반역도로 낙인찍힌 지금에는 그마저도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서리여왕 하유라의 추종자들은 대륙 곳곳에 그물망처럼 퍼져 있었다.
처음엔 어떤 금제를 당해 마지못해 따르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젠룽의 경우만 봐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늘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쩔쩔매긴 해도 그가 보이는 충성심은 진짜였다.
도대체 그녀의 어떤 점이 부하들로 하여금 진실된 충의를 바치게 만드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모르지.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는 말이 있으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수도.’
꽤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느긋이 등받이에 허리를 기댄 노구덕은 천천히 서두를 꺼냈다.
“벌써 내일이다.”
무투대회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미리 예정되어 있던 여위량과의 약속을 얘기하고 있었다.
여위량과는 산치루 외곽의 인적 드문 공터에서 만나기로 얘기가 되었다. 남은 건 여위량을 만난 뒤, 그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였다.
여위량이 어떤 종류의 힘을 가졌는지 확인하는 작업은 소냐가 한다. 그녀에겐 신의 조각의 힘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확인 작업은 하이드의 술식을 새기는 것과 병행한다. 얘야, 할 수 있겠지?”
“할 수 있습니다.”
역시 믿음직한 아이다. 소냐의 작은 어깨를 토닥여준 노구덕은 차분히 이야기를 이었다.
“문제는 여위량 그놈이 당첨되었을 경우인데… 네가 신호를 주면 내가 바로 제압하도록 하겠다. 하유라, 네게는 다른 녀석들을 맡기지. 그 녀석이 홀몸으로 오진 않을 테니까.”
“상관없다.”
북부의 가장 촉망받는 신성을 처리하는 계획치고는 상당히 부실해 보이지만, 일행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여위량이 아무리 날고 기는 인물이라 해도… 그가 하유라의 노예 출신인 이상, 그녀의 뜻을 거스를 방법은 없었다. 물론 본인은 까맣게 모르겠지만.
익히 알려져 있듯, 서리여왕 하유라는 무섭도록 철저한 인물이다. 당연히 그녀가 아무런 조치도 없이 노예들을 해방시켰을 리 없다. 각 신의 조각마다 감시자들을 배치한 것은 약과에 불과하다. 그 조치의 일환으로, 그녀가 대륙에 풀어 놓은 신의 조각들은 모두 강력한 노예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정작 신의 조각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들은 정말로 ‘해방’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여기서 하유라의 치밀함이 드러난다.
그녀는 처음 잡아둔 그릇들에게 노예각인을 새길 때, 그들 모르게 2개의 각인을 새겨두었다. 하나는 일반적인 노예각인이고, 다른 하나는 마도왕 티렐의 솜씨가 들어간 특수한 각인이다. 최소한 시술자인 마도왕의 수준에 근접한 강자가 아닌 한, 그 존재조차 눈치 챌 수 없는 은밀한 각인.
즉, 그녀가 노예들을 해방시킬 때 해제한 것은 전자의 각인이고, 마도왕이 새겨둔 각인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신의 조각들은 처음부터 미끼였던 각인이 해제된 것만으로 자유를 얻었다며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나름대로 의구심을 가진 자들도 있겠지만, 체내에 자리한 각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상 그건 헛수고일 뿐이었다.
따라서 여위량이 어떤 식으로 발버둥을 치든, 그건 결국 대야에 잠긴 물고기의 첨벙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목줄은 이미 예전부터 하유라가 쥐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여위량 건에 대한 논의가 끝나자, 아까부터 엉덩이가 근질근질한 낌새를 보였던 하유라가 몸을 일으킬 듯이 테이블을 짚었다.
“더 이상 할 얘기는 없겠지?”
“아니, 잠깐만 기다려라.”
“뭐냐? 더 논의할 일은 없을 텐데?”
“늦게 온 너는 모르겠지만, 아까 소냐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다. 어쩌면 이번 일에 중대한 돌발 변수가 될 수도 있어.”
“…변수?”
변수란 단어는 누구에게나 달갑지 않은 법. 그렇잖아도 높은 불쾌지수를 뽐내던 하유라의 얼굴이 더욱 짜증스럽게 변했다.
이후 이어진 노구덕의 말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던 그녀의 짜증 게이지를 여지없이 그득하게 채워주었다.
“명왕과 강옥교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양이다.”
“…뭐?”
일순, 하유라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는 빛이 스쳤다. 그도 그럴 게, 누구라도 방금 전 말을 들었다면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북부연합의 맹주 명왕 강문식과, 그의 딸 강옥교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사람 여럿 죽어나갈 추문이었다.
“정말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믿기 어려운 건 나도 똑같다. 아직 확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소냐의 추측인 만큼 신빙성은 있다고 본다. 일단 얘기부터 듣고, 네 생각을 말해줬으면 좋겠다.”
추측도 추측 나름. 머리가 잘 돌아가기로는 하유라조차 인정하는 소냐가 그랬다면 일단 들어볼 가치는 있었다. 게다가 소냐는 지금 강옥교의 시녀로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지 않던가.
노구덕의 눈짓을 받은 소냐는 얌전히 다물린 입술을 우물거렸다. 어째 얘기를 하는 동안 거의 말이 없다 싶었는데, 그녀의 낯빛은 끔찍한 악몽이라도 꾸고 온 것처럼 어둡고 칙칙하게 변해 있었다.
“…확증은 없습니다. 직접 그 현장을 목격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간 공주를 옆에서 지켜보았던 제 좁은 사견으로는, 아마도 명왕과 그 딸이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게…….”
또박또박 이야기하던 소냐는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머뭇거렸다. 문득, 그 당시 보았던 강옥교의 초췌한 몰골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명왕과의 면담을 끝내고, 어둑어둑한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밖으로 나온 강옥교의 행색은 처음 명왕을 만나기 전과 비교해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아니, 사실 다른 사람들은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찰력이 뛰어난 소냐는 그녀의 변화를 단박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윤기를 잃고 시들어버린 입술.
해골처럼 움푹 들어간 눈동자.
애써 웃고는 있지만,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산들바람과 같은 발랄함이 아닌 무력감에 겨운 고된 목소리였다.
대체 명왕을 만나는 시간 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순간적으로 그녀의 차림새를 살핀 소냐는 그녀의 옷매무새의 몇몇 군데가 살짝 흐트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냐 자신이 직접 입는 것을 거든 옷이었기에 그 차이는 더더욱 명확했다. 상식적으로, 아비와 딸이 만나는데 옷차림이 흐트러질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가빠진 숨결, 거슬릴 정도로 흐트러진 옷차림, 그리고… 향기로운 방향에 희미하게 뒤섞인 낯선 이의 체향.
이상의 사실들이 짜 맞춘 것처럼 절묘하게 조립되며 하나의 추악한 광경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머릿속에서 하나의 가설을 세운 소냐는 자기도 모르게 나란히 걷고 있는 강옥교의 눈을 바라보았다.
텅 비어버린 공허한 눈동자는 모든 것을 활활 불태운 잿가루와도 같았다.
빛을 잃은 그 눈빛에 쓸쓸히 머물러 있던 한 조각 감정의 잔재. 그것은 정인을 향한 죄책감이었을까? 아니면, 스스로의 기구한 처지를 비관하는 애통함이었을까?
잠시 그때 그 상황을 회상한 소냐는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두 사람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게 확실해 보입니다.”
소냐는 강옥교와 명왕이 만남을 가졌던 일부터 시작해서, 이후 강옥교의 이상했던 상태와 그녀가 수상하게 여겼던 의문점 등을 조리 있게 일러주었다.
“하유라. 어떻게 생각하지?”
“…발정난 짐승들이 어떻게 몸을 섞건, 그건 내 알바 아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신의 조각이라면 얘기가 달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저 뛰어난 재능만을 보고 들인 양딸과, 오랫동안 정을 통한 정부의 차이는 크다. 일반적으로는 후자를 더 중히 여기기 마련. 명왕과 강옥교가 그토록 각별한 사이라면, 이후 강옥교의 주변에 접근하는데 큰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만약 두 사람이 그런 관계라고 한다면… 어째서 여위량에게 딸을 주겠다고 한 거지?”
“그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비슷한 일?”
“예. 강옥교는 예전에도 명왕이 점찍은 상대와 혼인이 성사되기 직전까지 간 일이 있습니다. 상대가 식을 치르기도 전에 급사하는 바람에 식이 무산되긴 했습니다만…. 일단은 그때까지 남아있던 명왕의 정적들이 손을 쓴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동네도 어지간히 복잡한 동네구먼.”
만일 강옥교가 정말로 명왕의 숨겨진 정부라고 한다면, 그녀를 두 번이나 다른 사내에게 준 명왕의 행동은 확실히 정상이라 보기 어려웠다.
“명왕 그놈, 이상한 페티시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이상한 페티시라 하시면…?”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졸지에 속으로 생각하던 내용을 내뱉어버린 노구덕은 황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리 알 거 다 아는 아이라고 해도, 딸아이 같은 소냐 앞에서 ‘구멍동서’ 같은 말을 어떻게 지껄이겠는가. 그를 바라보는 저 순백의 도화지 같은 눈망울에 경멸이 담기게 할 수는 없었다.
“…분명 일반적인 애정 관계는 아닌 것 같다. 그 상대가 여위량이라는 것도 그렇고… 어쩌면 일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겠어.”
“신의 조각이 지닌 본연의 힘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후로도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명왕과 강옥교, 여위량을 둘러싼 삼각관계를 명확히 단정 지을 수 있을 만한 가설은 세워지지 않았다. 아직은 그들의 관계를 뒷받침할 만한 정황들이 그저 추측에 불과한 탓이었다.
“명왕의 첫 번째 사위가 될 뻔한 놈, 그놈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봐야겠군. 이쪽에도 별다른 정보가 없으니…. 그놈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뭔가를 알 수도 있을 것 같아.”
“젠룽에게 말해두도록 하겠다.”
“고맙군. 그럼, 일 얘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내일은 무척 바쁠 테니, 일찍들 자 두는 게 좋을 거다.”
노구덕의 손이 나무 탁자를 가볍게 팡팡 두드렸다.
무투대회 전야, 어느 낡은 주점 지하에서의 기밀 모의가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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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비.. 제발 오늘은 비가 왔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