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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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다섯 번째
“읍…!”
옆에서 숨을 답답하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소냐는 요리조리 눈을 굴리며 노구덕의 눈치를 살폈다.
“…….”
팔짱을 낀 채 꺼드럭거리던 노구덕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돌덩이가 되어버린 그의 뇌리에는 온통 ‘임신’과 ‘아이’라는 두 단어만이 끝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여보, 듣고 계신가요?
임유진이 재차 묻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노구덕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머릿속으로 우겨 넣을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세희가 임신했다고? 내 아이를?’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과거의 죄악들이 무덤 속 좀비처럼 되살아났다.
흉성에 사로잡힌 그가 안세희를 어떻게 다루었던가. 노구덕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두려움에 사로잡힌 눈빛, 그의 교활한 한마디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신음하던 고통에 찬 얼굴, 가련한 몸뚱이에 새겨진 붉은 상흔들은 일평생 씻을 수 없는 죄과였다.
아다만티움 광산에서의 일이 끝나고, 가까스로 제정신을 되찾았을 때.
레그나토르로 복귀한 노구덕은 일부러 안세희를 피했다. 그녀를 마주 대할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서를 빌더라도 나중에…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와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되었을 때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당시 그는 관계를 가진 뒤 늘 안세희에게 제대로 피임할 것을 종용했다. 무책임하게 피임하라는 말만 툭 던져놓은 노구덕은 그 뒤로 안세희가 정말 피임을 했는지 안 했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이를 가지면 곤란한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니 으레 피임을 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안세희는 그렇게 하지 않은 모양이다.
-…세영이가 세희를 데리고 떠나겠다고 난리를 치는 걸 겨우 진정시켰어요.
그랬겠지. 그럴 것이다. 언니만큼은 제 새끼보다 더욱 끔찍하게 아끼는 안세영이니까. 드센 성질머리를 가진 안세영이라면 차후 레그나토르에 복귀한 이후 그를 죽이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다.
불 같이 날뛰는 안세영과, 어딘가에서 숨죽여 울고 있을 안세희를 떠올린 노구덕은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이는… 얼마나 됐지?”
-세 달 정도 됐다고 들었어요.
세 달. 깊게 한숨을 내쉰 노구덕은 잠시 멍한 시선을 들어 영상수정 뒤로 보이는 창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정은… 세희에게 들었어요. 하지만 전 당신께 직접 듣고 싶어요.
“…세희 좀 불러주겠어?”
딴 곳을 응시하는 노구덕을 바라보는 화면속의 임유진은, 조금 전 노구덕이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은근히 한숨 쉬는 모양새가 비슷하게 닮은 두 사람이다.
–세희야, 이리 좀 오겠니?
-저, 저는 괜찮아요….
-내가 괜찮지 않아. 그리고 네 잘못 하나도 없으니까 그만 이리 오렴. 이건 꼬인 매듭을 푸는 과정일 뿐이야.
역시 와 있었나 보다. 텅 비어버린 화면 바깥에서 들려오는 안세희의 목소리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범죄자와의 대면을 거리는 피해자 같다고 해야 할까. 하긴, 상황을 따지고 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니다.
잠시 후, 텀을 두고 전환된 화면은 안락해 보이는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한 여인을 비추고 있었다. 새하얗고 단아한 사제복만큼이나 고결한 기품을 흘리는 여인.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우중충하고 움츠러들어 매가리가 없어 보이는 여인. 안세희였다.
노구덕을 분명 보았을 텐데도, 내리깔린 안세희의 시선은 오로지 자기 발치에 못 박혀 있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뚱이만 보더라도 지금 그녀가 이 자리에 앉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알 수 있었다.
당연하다. 정신을 차린 노구덕이 안세희를 피했던 만큼, 안세희 또한 노구덕을 필사적으로 피해다녔다.
지난 몇 달 동안, 노구덕은 그녀를 폭력과 권위로 억누르며 철저하게 유린했다. 가랑이가 찢어지고 음부가 터질 때까지 박아대는 것은 물론이고, 아내들에겐 드러낼 수 없었던 가학적 성향을 맘껏 발휘하며 성 노리개처럼 다루었다.
정상적인 여자라면 그를 경멸하다 못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할 터다. 소심한 안세희가 아니라 안세영이었다면 임유진이나 신소율 등이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야멸찬 폭언을 퍼부었을 것이다.
심지어 겁탈을 한 당사자가 평생 가장 큰 신뢰를 주었던 사람이었으니, 그 배신감이 오죽할까. 아비처럼 여기며 따르던 남자에게 강간당한 심정이 어떠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노구덕은 그녀가 느꼈을 고통의 만 분의 일조차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안세희 입장에선 모두 치졸하고 가증스러운 변명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외면은 더더욱 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이상,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세희야.”
-의, 의장님….
노구덕이 말을 걸자, 화면 속 안세희의 손이 더욱 어쩔 줄 모르며 꼼지락거렸다. 그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안세희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나직하게 불렀다.
“세희야. 마음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니요!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쉬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안세희.
노구덕은 마음이 아팠다. 뭐가 그리 죄송하다는 걸까. 피임을 하지 않은 것? 아이를 가진 걸 들킨 것?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건 그녀가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다. 전부 내 잘못이다. 넌 아무런 잘못이 없어….”
-의장님….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가기 전에 널 한번이라도 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당연히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다녀와서 네게 용서를 구할 생각이었다….”
이어지는 노구덕의 목소리가 차차 잦아짐에 따라, 푹 숙여져 있던 안세희의 목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눈시울은 형언키 어려운 절절한 감정으로 인해 개울물이 되어 흘러넘치고 있었다.
-흑… 으흐흑…… 아아앙…….
마침내 터져버린 감정의 둑. 끝내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마는 안세희를 말없이 지켜보던 노구덕은, 그 옆의 임유진과 신소율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화면에 보이진 않지만, 소피아도 근처에 있을 터.
“너희들에게도 면목이 없구나. 전부… 말해주마.”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노구덕은 최대한 담담한 투로 안세희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더하거나 뺄 것도 없는 간단한 이야기였다. 흉성에 잠식당한 노구덕은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버렸고, 가장 가까이 있고 쉽게 손댈 수 있는 안세희를 농락했다. 그 자신의 위치와 권력을 이용해서.
그게 전부다.
앞서 안세희에게서도 사정을 들었던 여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들도 알기 때문이다. 이 사안이 무작정 노구덕을 탓할 수만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따지고 보면,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시를 소홀히 한 그녀들도 책임을 피해갈 수 없었다.
-휴우….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어요.
-…응. 맞아. 차라리 그때 내가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특히, 바빴던 임유진과 소피아 등을 대신해 전담으로 노구덕을 상대하다시피 했던 신소율의 자책감이 컸다. 당시 노구덕의 들끓는 성욕은 단련된 그녀의 육체로도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달리던 신소율은 잠시 그를 피해 도피성 출장을 갔었다.
노구덕이 안세희에게 손을 댄 것은 바로 그 공백기.
-세희에게 들었던 내용과 별 차이는 없네요….
“유진아.”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적어도 이 건에 대해선, 당신뿐 아니라 저희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저희 과실이 더 커요.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무책임하게 방치했으니까요. 아무리 일이 바빴다곤 해도… 그게 변명이 될 순 없죠.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그 병으로 인해 사고를 쳤다고 치자. 그러면 그 환자의 보호자와 간병인도 책임을 피해갈 순 없다. 임유진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있는 안세희의 작은 어깨를 감싸며, 씁쓸히 말을 이었다.
-…너무 몰아붙이듯이 말한 건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감정이 너무 실렸나 봐요. 사실 가장 힘든 건 세희일 텐데…….
-아니에요…. 그, 그렇지 않아요.
안세희는 다시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훔쳤다.
데모나에 의해 임신 사실이 발각된 이후, 안세희는 벌써 몇 번이나 임유진과 신소율, 소피아에게 사과를 받았다. 서부연맹과의 전쟁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의장 대리인 임유진의 엄명으로 자택에 머물며 절대안정을 취하는 특혜를 누렸다.
그 외에도 불편한 것은 없는지 매시마다 꼬박꼬박 찾아오며 편의를 봐 주는 그녀들이었지만… 정작 안세희는 그 호의를 마냥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에게도 켕기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도 마찬가지다. 안세희는 그녀들이 눈치를 보며 미안해할 때마다 더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내, 차곡차곡 쌓여만 가는 마음속 응어리를 더는 감당할 길이 없었던 안세희는 속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저, 저야말로 나쁜년이에요. 전 사과를 받을 자격도 없어요.
-응?
-세희야, 괜히 그럴 필요 없어.
-아니에요. 사, 사실 전… 의장님을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어요.
느닷없는 안세희의 토로는 그녀를 종일 다독이던 여인들을 비롯해, 화면 밖에서 죄인처럼 수그리고 있던 노구덕까지 진한 당혹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허나 한 번 터진 안세희의 말문은 거침이 없었다.
-줄곧 좋아했어요. 예전엔 저도 제 감정을 잘 몰랐지만… 확실히 이, 이성으로 느끼게 된 건 서부연합군 이후였던 것 같아요. 네, 의장님께서 절 구해주셨을 때요. 연합군이 해체되고 복귀했을 땐, 몇 번이나 의장님을 생각하면서 자, 자위를 하기도 했어요.
-저도 알아요…. 그런 마음을 가져선 안 된다는 걸요. 그래서… 너무 괴로웠어요. 계속해서 잊으려고 했죠. 수년 간… 그렇게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봐요. 저, 전 의장님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어요. 오히려… 일부러 유혹한 적도 있었어요.
-과, 관계를 가질 땐 아프고 무서웠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좋았어요. 좋아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뭐가 뭔지 뒤죽박죽이 되어서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어요…. 도움을 구하려면 구할 수 있었는데도…….
-저도 이런 제가 너무 혐오스러워요…. 아이도, 주문 한번만 외우면 간단한 일이었어요…. 처음부터 수정할 일도 없었죠. 그런데 그러지 않았어요. 아, 아이를 가지면 혹시 의장님께서 받아들여주지 않을까 하고…….
-전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예요…. 저 정말 나쁜년이죠…. 저야말로 의장님과 대모님께 사죄해야할 죄인이에요.
자책을 끝으로 말을 마친 안세희의 표정은 한결 시원해져 있었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충격적인 고백에 넋이 나가 있는 좌중을 일별한 뒤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게 많은 기대를 해주셨는데… 실망만 안겨드렸어요.
-몇 년 간, 너무 힘들었어요. 괜찮으시다면, 이대로 은퇴해서 고향에 내려가려고 합니다. 더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민폐덩어리가 되고 싶지 않아요….
서부연합군 해체 이후, 심적으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반복해 왔던 안세희.
모든 것을 털어내고 끝내 무너져버린 그녀의 얼굴은 지난날의 고된 기억을 반영하듯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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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윽.. 늦어서 죄송합니다! 알람을 맞춰놓고 잤는데 눈을 뜨니 해가 중천이네요..
분발하도록 하겠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