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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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다섯 번째
“은퇴는 안 된다.”
-…….
기탄없이 모든 것을 쏟아낸 안세희의 입술이 다시 한 번 우물거리려는 찰나, 노구덕은 다시 선수를 쳤다.
“세희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하자. 그래도 변하는 건 없다. 과정이 어떻든 간에, 내 아이를 가진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너도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하니 묻는다만, 넌 내가 내 자식을 품은 여자를 버릴 사람으로 보이는 거냐?”
-아, 아니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럼 됐다. 은퇴 얘기는 못들은 것으로 하마.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거라. 레그나토르 의장의 자식을 외딴 시골에서 키우겠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지.”
오히려 안세희가 속내를 털어놓은 덕분에 노구덕의 어깨도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수 있었다. 그녀가 생각만큼 자신을 경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덕분에 굉장히 일방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제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안세희가 그의 아이를 배고 있고, 반드시 낳아서 키울 작정이라면, 이 시점에서 노구덕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단지, 안세희 본인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 말을 꺼내기 주저했을 뿐. 물론 마누라들 눈치를 보는 것도 한몫했다.
“허험, 이렇게 통신으로 할 얘기는 아니다만… 내 다섯 번째 아내가 되어다오. 세희 너만 괜찮다면 말이다.”
스스로 말해놓고도 낯이 뜨거운지, 노구덕은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다섯 번째 아내라니. 이 세계에서야 흔하디 흔한 일이라지만 아직 한국식 사고방식이 남아있는 그로선 입에 혓바늘이 돋을 만큼 몰염치한 말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도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의, 의장님….
의자 앞에 섰던 안세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양손으로 입을 가린 그녀의 눈엔 눈물이 가득 괴어 뿌옇게 빛을 흐리고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개 첩, 정부, 노리개다. 노구덕도 줄곧 그렇게 말해왔고, 그녀도 그 이상은 욕심내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했다. 언감생심 사모(師母)의 남자를 가로챈 도둑년한테는 그 정도도 과분했다.
그마저도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스스로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흐어허어어엉…….
감정이 북받친 안세희는 꺼이꺼이 목을 놓고 울음을 터뜨렸다. 오랫동안 홀로 묵혀두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하염없이 흐르는 맑은 눈물방울에 아롱아롱 매달린 채 깨끗하게 씻겨나갔다.
-그래, 맘껏 울어.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니. 정말 고생 많았어.
임유진이 앙앙 우는 안세희의 등을 두드리며 달래는 것을 본 노구덕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서럽게 울고 있는 안세희를 보고 있자니, 그동안 그녀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고아원에서 살고 있는 그녀를 헌터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도 그고, 그녀의 성격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그다. 한 여자의 인생을 그 정도로 바꾸어 놓았으니, 합당한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했다.
‘오기 전에 언질이라도 주고 올 걸 그랬어.’
원래는 여행이 끝난 뒤에 분위기를 봐서 말을 꺼낼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나마 매듭을 지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예컨대, 화면 속에서 암고양이처럼 찌릿한 시선을 보내는 신소율과 소피아라든가.
-주인님, 너무하시네요. 저희들 의견은 이제 중요하지도 않으신 거예요?
-와, 이제는 대놓고… 그래, 잡아놓은 물고기라 이거지.
융단폭격처럼 이어지는 질타.
유구무언이 된 노구덕은 애꿎은 벽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심 아차 싶기도 했다. 나름 대범하게 결단을 내렸는데, 옆에서 보는 아내들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으니.
그래도 이왕 내친걸음, 노구덕은 좀 더 강하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기실 이것 말고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커허험! 그럼 어떡하냐?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됐는데.”
노구덕은 철면피를 뒤집어썼다. 그 딴에는 울면서 다른 여인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안세희를 위한 배려였다.
-우우! 뻔뻔하다, 뻔뻔해! 이제 아주 막 나가시네?
-그래요. 주인님은 그게 어울려요.
-어울리긴 뭐가!
-죽상보다는 낫잖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세 여인 모두 생각했던 만큼 큰 반발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두 현명한 여인들이니, 끝내 이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너희들에겐 항상 어려운 부탁만 하는구나.”
-됐어요. 어쩔 수 없잖아요. 사실 이미 우리끼린 결정 난 일이기도 하고. 세영이 녀석 설득하는 게 문제지.
-우리 소율이, 여전히 입이 싸네~? 그거 오늘은 말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뭐 어때. 이까짓 거 숨겨서 뭐 하자고. 솔직히 우리 잘못도 있잖아.
-어머, 그거랑은 별개의 문제지. 여자가 너무 순순하면 못써요. 매력 떨어진다구?
-언행일치가 안 되잖아. 맨날 주인님, 주인님 하면서 요망하게 꼬리치던 게 누구?
-요것이 언니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이보세요, 셋째 씨. 둘째는 나거든?
노구덕은 옥신각신하는 화면 속을 바라보며 모처럼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안세희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정말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는데, 그럭저럭 일이 잘 풀려서 천만다행이었다.
두 눈이 개구리처럼 퉁퉁 부은 안세희가 다시 의자에 앉기까지는 오 분 정도가 걸렸다.
붉은 눈가를 훔치며 자리에 앉은 그녀는 소심한 성격답게 여전히 임유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임유진이 안심하라는 듯 마주 웃어주자, 그제야 머뭇머뭇 눈을 돌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노구덕 쪽을 향했다.
“세희야, 대답이 듣고 싶구나.”
-네, 넷!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응…?”
뭘 열심히 하겠다는 것인지. 아내가 되어달라는 말에 대한 대답으로는 요상하기 짝이 없다. 뒤늦게 말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안세희의 낯이 능금빛으로 물들었다.
-아…. 그, 그게 아니라….
-우후후! 아무렴, 열심히 해야지! 안 그러니? 출산하고 나면 행정부에서 퇴근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걸?
-맞아, 애도 열심히 낳고, 살림도 열심히 하고…. 할 일이 산더미네. 이제 합법적으로 부려먹을 수 있겠어. 우리 해성이도 잘 챙기도록 해. 알았지?
-얘들도 참, 너무 놀리지 마렴. 세희가 부끄러워하잖니.
느닷없이 터져버린 안세희의 일은 일단 그렇게 봉합되었다. 잔뜩 뿔이 나 있는 안세영의 설득이나, 북쪽 전선에 나가 있다는 데모나의 태도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는 등의 소소한 문제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건 차차 시간을 들여 풀어나가야 할 숙제였다.
“세희는 산달까지 안정을 취하도록 해라. 자세한 얘기는 복귀한 이후에 하도록 하자.”
-네….
-좋아 죽네, 죽어. 아줌마 되는 건데 그렇게 좋아?
-어휴우, 얘는 꼭 그렇게 초를 쳐야….
-너희들, 조용히 하지 못하겠니? 여보, 그쪽 일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신의 조각은 찾았나요?
“음. 그게 말이야.”
많은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이쪽 사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노구덕은 곁눈으로 벽걸이 시계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신의 조각은 찾았는데, 내가 찾던 건 아니야. 슬슬 북부동맹으로 넘어갈까 해. 북부동맹엔 한 명이 있다는데… 솔직히 별 기대는 하고 있지 않아. 북부를 한 바퀴 돌고 나면, 그 다음은 동부로 갈 것 같고….”
-어쩔 수 없지요. 처음부터 오래 걸릴 거라 예상했잖아요. 여긴 신경 쓰지 마시고, 여정에 전념해 주세요. 모두가 당신이 멀쩡히 돌아와주길 바라고 있으니까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 고마워.”
-저도 고마워요.
“애들은 어때?”
노구덕은 그 뒤로도 아내들과 오랫동안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활동량을 자랑하는 맏이 송경이는 완전히 사고뭉치가 다 되었고, 나이답지 않게 조신하고 차분한 아란이는 돌보기가 쉽다는 이유로 자택 사용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중이라 했다.
쌍둥이 남매와 해성이는 요즘 소꿉놀이에 재미를 붙였다는데, 틈만 나면 소꿉놀이 장난감을 만들어달라고 조르는 통에, 요새는 아주 목수로 전업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신소율의 푸념도 있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아가레스트는 레그나토르에 남은 이후로도 따로 쌍둥이를 찾아가거나 한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일부러 임유진이 자리를 만들려고 해도 본인이 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아저씨, 그 사람은 언제까지 그렇게 둘 거예요? 원래대로라면 그 사람이 다섯 번째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 쉽게 말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원하지 않아.”
-원하지 않는다고요? 아니, 그런데 애는 어떻게 만들었대?
“…그러게 말이다.”
정곡을 찔린 노구덕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아가레스트에 관한 일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서, 그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면 한두 시간 가지곤 어림도 없었다.
원래 계획은 아가레스트를 산하로 들이는 동시에 팔콘의 후계권을 손에 넣을 의도였지만, 팔콘 쪽에 문제가 생기면서 예기치 않게 일이 꼬여버린 케이스였다.
-소냐도 여행하는데 불편한 건 없니?
“예. 대모님.”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응?
“네, 이모.”
노구덕이 달갑지 않은 화제로 침묵하는 동안, 의도치 않게 뒷전으로 밀려 있던 소냐는 가족들과 정다운 환담을 나누었다. 대화 내용은 하유라가 해코지를 하지 않았는지, 혹은 삐딱한 그녀로 인해 일정에 어떤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하는 염려가 대부분이었다. 당초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서리여왕 하유라가 낀 여정이었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계단을 올라오는 익숙한 기척을 느낀 노구덕은 조잘조잘 이야기하고 있는 화면 속 여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아쉽다아아….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나중에 다시 연락하마.”
-네. 오랜만에 연락해서 정말 좋았어요. 소냐도 또 보도록 하자.
끼익.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노구덕과 소냐가 통신을 종료하자, 기다렸다는 듯 방문이 열렸다. 노구덕의 부탁을 받고 여위량과 강옥교에게 다녀온 하유라였다.
“신파는 끝났나?”
“그래. 그쪽은 어떻게 하고 있지?”
“명왕의 실종이 수면 위로 떠오르진 않았다. 강옥교가 잘 해주고 있어. 하지만 길어야 며칠 가지 못할 거다.”
그녀의 말을 이해한 노구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유라는 며칠이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사흘이다. 사흘 뒤엔 무투대회가 막을 내릴 예정이니까.
“그렇겠지. 무투대회가 끝나고 직접 시상하기로 한 명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여길 테니까.”
“그 건에 대해서 강옥교가 도움을 청해왔다.”
“명왕의 실종을 무마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거군.”
“…그래.”
노구덕 주제에 잘난 척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하유라의 표정이 굉장히 떨떠름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웬일인지 이번만큼은 특유의 빈정거리는 사족을 달지 않았다.
이번 여정의 최종 목표.
노구덕에게도, 그녀에게도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나중에 차차 듣도록 하지. 지금은 훨씬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마력은 충분합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소냐의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노구덕은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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쪄죽는 더위입니다. 노트북 열기가 평소보다 훨씬 더 악랄하게 느껴지는군요..
차라리 추운 게 낫지 더위는 못 참겠습니다.
밤에 한편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