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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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당돌한 고백
185# 당돌한 고백
노구덕의 턱이 아래로 힘없이 늘어졌다. 일순간 욘이 내뱉은 말을 머릿속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탓이다.
“아이를 만들라고? 설마…….”
“그 설마다. 소니아와 노구덕, 너희 두 사람의 아이가 필요하다.”
“그게 뭔 개소리야!”
참다못한 노구덕은 크게 역정을 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냐를 임신시키라니, 헛소리라도 너무 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나 욘의 흐릿한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다. 애초에 그는 웃자고 허튼 소리나 지껄일 위인이 아니다.
“김정인, 노구덕, 소니아. 너희는 살아있는 육체를 지녔으며, 나의 힘과 가장 상성이 잘 맞는 존재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힘을 오롯이 이어받은 감시자는 오직 너희의 아이만이 가능하다.”
“이, 이봐, 욘…!”
“발레기우스처럼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인간의 육체를 잠식하는 방법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 시간도 없는데다, 그 방법은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적인 교합을 통한다면,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최고의 그릇을 얻을 수 있다. 아니면, 달리 방법이 있는가?”
“이런, 제기랄! 그게 아니라…!”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 그러나 이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이다. 너희의 관습에 따른다면, 소니아는 네 혈육도 아니지 않은가? 피가 이어지지 않은 남녀가 결합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거지?”
“당연히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 혈육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 아이는….”
“설득하려 하지 마라. 순리에 따른 출산이야말로 적합한 화신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순탄한 방법이다.”
고집불통이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욘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는 이제 나의 사도다. 그런데 내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건가? 아니면 소니아의 나이가 문제인가? 원한다면 네 기준에 맞는 성인의 육체로 바꿔줄 수 있다.”
“…….”
어이를 잃어버린 노구덕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나이도 그렇지만, 그게 가장 큰 문제는 아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 상대가 소냐라는 것이 문제였다.
‘딸처럼 여겼던’ 안세희와 진짜 ‘수양딸’인 소냐는 경우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 안세희는 어떻게 겨우겨우 넘어갔지만, 정말로 소냐를 안는 날에는… 말 그대로 족보가 개족보가 되어버린다. 한없는 관용을 보여줬던 아내들도 더는 그를 이해해주지 못할 것이다.
“아내들의 이해를 구하면 못할 건 없다는 소린가.”
“아니, 그게 아니고…!”
욘이 속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아연실색, 낯빛이 창백하게 물든 노구덕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소냐와 관계를 가진 직후를 상상했던 자신이 몰염치하게 느껴졌다.
“어, 어쨌든… 그건 안 된다. 내가 아무리 짐승 같은 인간이라도 최소한의 선이 있어.”
“그렇다면 본인을 불러보도록 하지.”
“본인?”
욘과 노구덕, 두 사람만 있는 공간에 갑자기 두 개의 시커먼 균열이 나타나며 그 안에서 두 여인이 나타났다.
“악!”
“윽!”
짧은 비명과 함께 아래로 떨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은 두 여인을 본 노구덕은 휘둥그레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마법진이 폭주하기 전 그 자리에 있었던 두 여인, 소냐와 하유라가 나타난 것이다.
“소냐!”
영문도 모르고 소환된 여인들은 기함하는 노구덕을 보고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노구덕의 얼굴은 인간으로 되돌아간 상태였으니까.
허나 그것은 잠깐이었을 뿐, 두 여인은 금세 노구덕을 알아보았다. 인종이 변했다곤 해도 전체적인 이목구비나 목소리 톤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덕분이었다.
“대부님!”
“여긴 어디… 으우웃…!”
폴짝 일어나 곧바로 그에게 달려오는 소냐와는 달리, 하유라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다시 무릎을 꿇으며 몸을 비틀거렸다. 떨어지면서 가볍게 발을 접질린 모양이었다.
‘발을 삐었다고? 저 하유라가?’
다시 생각해보니 말이 되지 않는다. 온갖 무예에 통달한 하유라가 고작 낙법 하나 제대로 못해서 발을 삐었다는 건,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져 요절했다는 것만큼이나 신빙성이 없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하유라의 저 반응은 뭐란 말인가? 그 의문을 풀어준 사람은 옆에서 부유하는 욘이었다.
“그녀는 헌터로서의 힘을 잃었다.”
“뭣?”
“마법진 자체의 힘만으로는 나의 현신을 구현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증폭마법진을 통해 들어오는 그녀의 마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는 건….”
“자연적으로 마력이 회복되는 일은 없을 거다.”
그 힘을 갈취한 원흉 주제에, 사형이나 다름없는 선고를 무척이나 무미건조하게 지껄이는 욘이다. 그 당당한 태도에 말을 잃어버린 노구덕의 어깨너머로, 두 여인의 동공이 큼지막하게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대부님… 이분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넌 누구냐?”
그 와중에 예를 잃지 않는 소냐의 정중한 목소리는 뒤이어 터져 나온 앙칼진 음성에 묻혀버렸다. 독기가 뚝뚝 묻어나는 하유라의 눈초리를 마주한 노구덕은 말없이 욘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이 초월적인 존재에 대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이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시간은 별로 없다만, 설명을 원한다면 해주도록 하겠다.”
노구덕으로부터 바톤을 넘겨받은 욘은 특유의 메마른 어조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 내용은 노구덕에게 말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 이름은 욘. 너희들이 관리자라고 부르는 존재다.”
그는 자신이 최초에 이 세계를 격리시켰으며, 카르마를 통제하기 위해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과, 일부 의식이 오염되어 발레기우스란 존재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물 흐르듯이 이야기했다.
처음엔 믿지 못하던 그녀들도 족집게처럼 속마음을 읽어대는 욘의 능력을 대하자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욘은 그녀들 본인이 아니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사적인 비밀들까지 낱낱이 알고 있었으니.
욘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유라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격한 반응을 보였다.
“관리자… 네가 관리자라고? 그러면…!”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꿰고 있던 욘은 단박에 하유라의 말을 잘라냈다.
“불가능하다. 난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막 무언가를 말하려던 하유라의 입이 공허하게 달싹였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욘의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나름대로 몇 달 동안 그녀를 봐왔던 노구덕과 소냐조차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멍청한 표정이었다.
저런 표정이 나타날 만한 상황을 굳이 상정한다면, 하늘이 무너져내렸을 때나 가능하지 않을까.
“불가능…? 왜? 어째서…? 너는 신이라고 했잖아….”
“사람을 되살리는 것은 내 영역이 아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일찍이 재앙이 세상을 덮쳤을 때, 죽었던 이들을 내 힘으로 되살렸겠지.”
“하지만, 레귤러는….”
“레귤러에서 되살아난 인간들이 정말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들은 변이된 카름에 지나지 않는다. 생전의 기억을 억지로 우겨넣은 불행한 피조물이지. 언데드와 크게 다르지도 않다.”
“…….”
“나는 네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네가 바라는 건 불가능하다. 죽은 사람을 온전히 되살릴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그 어디에도 없다.”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말문을 잊어버린 하유라는 비실비실 일어서는 듯하더니 다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평소라면 마력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분노하며 따지거나 길길이 날뛰었을 테지만, 지금 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발레기우스를 도와 반란을 획책하고, 노구덕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살려내려고 했던 단 한 사람.
그 생환의 가능성이 신에게 부정당한 순간, 그녀의 삶의 의미는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살리려고 했던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노구덕은 씁쓸해진 입맛을 다셨다. 하유라를 좋게 보고 있었던 건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뻣뻣함을 유지하던 철의 여인이 말 한마디에 허물어지는 것을 보니 왠지 모르게 입맛이 썼다. 그저 하유라의 좌절하는 모습만을 보고 느끼는 감정만은 아니었다.
‘혹시나 했는데… 실렌을 살릴 순 없는 건가.’
하유라가 바라는 대로 사람을 되살릴 수 있다면, 노구덕에게도 가장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위해 가장 먼저 희생한 사람, 바로 실렌이다.
어차피 노구덕은 하유라의 소원을 이뤄줄 생각 따위는 개미발톱만큼도 없었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가장 먼저 실렌을 살렸을 테고, 그 다음엔 박지현과 패터슨처럼 그와 가까운 이들이 선순위가 되었을 거다.
당연한 처사다. 하유라와는 서로서로 이용하는 관계일 뿐, 뭐가 예쁘다고 그 부탁을 들어준단 말인가.
더욱이, 하유라는 자기 입으로 패터슨 앞에서 마리안을 윤간했다며 그를 도발했던 여자다. 그로선 곱게 보일 턱이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죽일 년이지. 그나저나… 조금 곤란한데. 하필이면 지금 힘을 잃다니…….’
결과적으로 욘을 소환하는 마법진에 마력이 모조리 빨려버린 하유라다. 망연자실해 주저앉아 있는 그녀를 보니 왠지 모르게 빚을 진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신의 조각을 모으는 여정을 계속하기 위해선 하유라의 안내가 필수였으니….
“나머지 조각들의 위치라면 내가 알려줄 수 있다.”
“욘…? 네가 말이냐?”
“그렇다. 너희들이 찾아가려는 조각들 중 몇몇은 이미 발레기우스의 수중에 떨어진 상태다.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보다는 내 조언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나을 거다.”
“확실히 그렇겠지. 고맙다곤 하지 않으마.”
노구덕은 냉큼 욘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니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으리라.
그러나 욘의 용건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소니아.”
실 끊어진 인형처럼 넋이 나간 하유라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소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불투명한 그림자가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눈은 없었지만 분명한 시선이 느껴졌다.
욘. 호리호리한 그림자처럼 생긴 이 존재는 스퀘어의 근간을 이룬 신적 존재라고 한다.
처음 본 순간부터, 소냐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피로 이어진 부모를 알아본 자식의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항상 논리에 입각해 판단하는 그녀였지만, 이번만은 스스로의 직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만큼 욘에게서 전해지는 그 무언가가 강렬했던 탓이다.
“노구덕은 나의 사도가 되어 무너진 시스템을 재건하기로 약속했다. 너 또한 유년시절부터 내가 지켜봤던 존재였지만, 나는 노구덕이 보다 사도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주된 요소는 그 안에 네가 속해있기 때문이다.”
“…….”
“자, 잠깐!”
욘이 소냐와 하유라를 불러들이기 전에 내뱉었던 말을 겨우 기억해낸 노구덕이 급히 끼어들었지만, 무력한 그가 욘의 입을 막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너희 둘의 결합을 원한다. 그리고 너희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다음 세계의 수호자로 만들고자 한다. 이에 대해, 너의 의사를 묻고자 한다.”
“얘야! 억지로 들을 필요 없다! 욘! 지금 애한테 무슨…!”
“불필요한 질문입니다. 당신이 신이라면, 이미 제 대답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작은 망설임조차 없는 또렷한 어조.
그 의미심장한 말에, 억지로 둘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소냐의 귀를 막으려하던 노구덕의 얼굴이 굳었다. 살짝 뒷걸음질을 치며 노구덕의 품에서 벗어난 소냐는 멈춰버린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대부님도요. 지금껏 몰랐다고 말씀하진 말아주십시오.”
“소냐, 너….”
말문이 막힌 나머지 떠듬떠듬 이어지는 목소리를, 소녀의 청량한 목소리가 잘라냈다.
“저는, 대부님의 여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 한마디가 맹렬한 번갯불이 되어 노구덕의 정수리에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머릿속이 텅텅 비어버린 노구덕의 눈앞이 한순간 끝없이 아득해졌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오늘 부로 드디어 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원래는 어제까지 일을 같이 봐주기로 했는데, 금요일이 가장 바쁜 날이라 초보 혼자 두기에는 여러모로 불안한 점이 많더군요.. 그래서 지금도 카운터를 보고 있습니다.
업종을 물어보셨는데 가게는 그냥 작은 호프집입니다. 4~5시쯤에 열고 새벽에 닫지요. 아시다시피 불금이 제일 바쁩니다 ㅠㅠ
오늘 화는 687화의 수정판입니다. 수정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다시 썼네요.
제 작은 욕심으로 소냐와 하유라가 버무려진 현대 에피소드를 쓰려고 했지만, 그냥 현대 에피소드는 없는 걸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냐의 폭탄발언 시기도 좀 앞당겼네요. 빠른 진행을 위해서요.
소냐와 이어질지 안이어질지는 차후 보시면 아시게 될 듯.
하유라가 버려질지 안버려질지도요.
오늘 이후로 연재 페이스에 좀 더 박차를 가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려주서서 감사합니다.
아임 프리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