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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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얼음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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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와 아델은 인근 농가에 살고 있는 모자지간이었다. 아비가 병으로 일찍 죽어 모자 둘이서 작은 농지를 일구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때마침 근처를 시찰하던 여위량의 눈에 들어 그의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그 덕분에 극심한 빈곤에서 구제받은 모자는 여위량을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다지 막중한 게 아니라, 평소처럼 생활하면서 산치루 인근의 민심을 살피고, 그 동향을 정기적으로 여위량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제니 모자는 노구덕 일행이 떠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른다고 했다. 원래부터가 시골 무지렁이인 그들은 일행이 여위량이 중요하게 여기는 귀빈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노구덕 일행의 면면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 모자는 노구덕이라는 이름 석 자도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정치나 바깥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늙은 여자와 어린아이라는 인원 구성도 적당했다. 아무래도 젊거나 장년의 남자가 끼어 있으면 소냐나 하유라와 같이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역시 강옥교의 배려심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제니는 시골 여인답게 천성이 후덕했고 농장 일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았다. 아델도 그런 모친의 영향을 받았는지 그 나이 또래답지 않게 점잖은 아이였다.
두 사람이 합류한 이후로 혼자서 가사를 도맡다시피 했던 소냐의 생활에도 크게 여유가 생겼다.
원래부터 가사에 신경 쓰지 않던 노구덕과 하유라의 생활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었다. 하유라는 가르쳤고, 노구덕은 배웠다. 예전과 다름없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이틀 뒤 하유라가 다시 한 번 일행을 떠나겠다고 말을 꺼냈지만, 노구덕은 생각해보겠다는 두루뭉술한 말로 대답을 회피했다. 그 불분명한 태도에 마음이 상한 것인지, 하유라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축사 뒤편의 공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배울 건 거의 다 배웠으니 별로 아쉬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공터에 홀로 남겨진 노구덕은 그녀에게 배운 기술들을 복습하며 매일 구슬땀을 흘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욘과 약속한 기간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오늘도 고맙구나.”
아직 햇볕이 쨍쨍한 오후 세 시. 훈련을 마친 노구덕은 때맞춰 소냐가 가져다 준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갈증을 달랬다.
빈 잔을 옆에 내려놓은 뒤, 푹신한 건초더미에 몸을 누인 노구덕은 낮게 휘파람 소리를 냈다. 노곤히 풀어진 몸에 나른한 햇살을 쬐며 삐져나온 지푸라기 하나를 살랑살랑 흔드니 천국이 따로 없다.
“한적한 교외 생활도 나쁘진 않은걸. 앞으로 미리내에 자주 가야겠다. 애들도 좋아할 거야.”
“원하신다면 더 머무르셔도 됩니다.”
소냐가 부추기듯이 말했지만, 노구덕은 고소를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순 없지. 여기 생활도 나쁘진 않다만, 난 하루라도 빨리 레그나토르로 돌아가고 싶다. 애들도 보고 싶고, 마누라들 궁둥이도 두드리고 싶… 크흠!”
실수다. 너무 풀어진 나머지 평소의 말버릇이 그대로 나와 버렸다. 황급히 말문을 닫은 노구덕은 어색한 얼굴로 소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이후 이어진 소냐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엉덩이라면 제 걸 두드리셔도 됩니다.”
“어, 어허!”
“살집이 대모님만 못하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래도 형태에는 자신이…….”
“너 이 녀석! 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거듭되는 망발에 질겁한 노구덕은 벌떡 일어나서 호통을 쳤다. 허나 소냐는 도리어 뭐가 잘못되었느냐는 듯 당당한 얼굴이었다.
“대부님, 이제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절 안아 주십시오.”
본색을 드러낸 소냐의 언행은 도무지 거리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한창 사춘기에 돌입한 질풍노도의 십대는 이처럼 무서운 존재다. 굳은 결심을 한 그녀의 눈엔 이미 사회적인 통념과 지탄 같은 건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범하게 다가오는 소냐의 기세가 당장이라도 그를 덮칠 것처럼 심상치 않다. 늙은 수사자를 잡아먹을 것 같은 암사자를 보는 듯하다.
평소라면 단정하게 늘어져있을 생머리가 오늘따라 말총머리 형태로 묶여 있다. 요리할 때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틈으로 시원하게 드러난 뽀얗고 가는 목덜미에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긴 노구덕은 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안 된다.”
그 단호한 거절에 사뿐사뿐 눈을 밟듯이 다가오던 걸음이 멈추고 만다.
이윽고 티 없는 옥처럼 매끄러운 피부, 그 반듯한 얼굴 위에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번져나간다. 장미 꽃송이처럼 붉은 입술이 달달 떨리며 원망의 감정을 토로했다.
“어째서… 입니까? 제가 싫으신가요? 제가 못났기 때문인가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자칫 소냐의 페이스에 휘말릴 뻔했던 노구덕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러 여인들을 거느리며 나름대로 관록을 쌓은 그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에게 휘둘려서는 체면이 살지 않았다.
기실 이건 체면을 따질 일이 아니긴 했지만.
“넌 내 수양딸이다. 난 널 여자로 생각한 적도 없고, 여자로 받아들일 마음도 없다.”
“대부님께선 거짓말을 하고 계십니다.”
“거짓말이라고?”
“제게 있어서 대부님은 대부님일 뿐, 아버지는 아닙니다. 대부님께서 절 안지 않으시는 건 이모의 조카딸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건….”
“정말로 마음에 없으셨다면, 욘과 만났던 그 자리에서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대부님께선 그러지 않으셨지요.”
“…그만하자.”
이래서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오늘의 소냐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이야기를 꺼낸 시점도 갑작스럽고, 다그치듯 요구하는 태도도 평소의 조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답은 정해져 있다. 노구덕은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몇 번을 얘기해도 내 대답은 같다. 난 널 받아들일 수 없구나.”
“…저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겠다면, 대부님의 본래 몸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염두에 두고 계시는지요?”
지금껏 평온한 일자를 유지했던 노구덕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뱀처럼 휘어졌다. 소냐가 가장 민감한 주제를 콕 찌른 탓이다.
허나 노구덕도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머리를 굴렸고, 어찌어찌 대응책도 세웠다. 그게 먹힐지, 먹히지 않을지는 그때 가서 두고 봐야 할 일이겠지만.
“…욘에 관한 일이라면 나도 생각해 둔 것이 있다. 그건 그렇고, 마지막 말은 꼭 나를 협박하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내 착각이겠지?”
노구덕의 표정과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자, 따지듯이 언성을 높였던 소냐의 얼굴이 금세 어둡게 변했다. 더불어 빳빳하게 치솟았던 귀끝도 시무룩하게 아래로 늘어졌다.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 네 마음은 알겠다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예….”
터덜터덜 힘없이 방으로 향하는 소냐의 뒷모습이 다 저문 노을처럼 쓸쓸하게 느껴진다. 모처럼 용기를 내서 대시했는데, 칼로 끊어내듯이 거절을 당했으니 그 심정이 어련할까.
딸처럼 아끼던 아이가 저토록 서운해 하는 내색을 보이니, 노구덕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혹시 이번 일로 소냐의 마음이 그나 레그나토르를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나 좋자고 고생하고 있는 마누라들을 배신할 순 없지.’
바로 어제, 연락수정을 통해 가족들과 연락을 취하던 중 전해들은 소식.
노구덕이 어떻게 보면 매몰차다 느껴질 정도로 강경하게 소냐의 요구를 거절한 데에는 어제 들은 그 소식의 영향이 컸다.
지금 그는 한가롭게 지푸라기나 만지작거리며 신선놀음을 하고 있지만, 바깥 대륙의 상황은 그야말로 몰아치는 태풍의 연속이었다.
우선, 서부 삼대 세력으로 꼽히던 서부연맹이 레그나토르에 의해 멸망당했다.
서부연맹과의 전쟁을 마무리 짓고, 서북부 일대를 완전히 점령한 레그나토르는 그 칼끝을 도미니온으로 돌렸다. 서부를 양분하는 두 국가는 따로 선전포고도 없이 즉시 전면전으로 돌입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이전까지 서부의 패자를 자처했던 도미니온은 서부연맹만큼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서부연맹이 지리멸렬하는 동안 착실하게 다가올 전쟁을 준비한 도미니온은 한껏 기세가 오른 레그나토르의 군세를 맞아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일방적으로 흘러갈 줄 알았던 전황을 팽팽하게 만든 건, 칼립스 침공 당시에 나타났던 괴인들의 재등장이었다. 서부연맹이 멸망할 당시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괴인들이 도미니온 소속의 군세가 되어 다시 출현한 것이다.
서부연맹과의 일전에서 크게 심력을 소모한 데모나가 휴식기에 들어가고, 부상에서 복귀한 신소율과 이전 전쟁에서 맹활약한 콜트레인, 심준호 등이 선봉장이 되어 도미니온의 세력을 몰아쳤지만, 도미니온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일선에서 싸우는 지휘관들은 물론이고, 최고 수뇌부들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
아내들은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 싸우고 있는데, 정작 남편이란 인간은 그 틈에 여자를 끼며 노닥거린다? 그것도 딸처럼 길러온 아이를?
아무리 성욕에 미친 오크라지만, 그건 정말 못할 짓이다. 노구덕의 가드가 평소에 비할 데 없이 단단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그가 욘에게 들은 정보대로라면 이번 도미니온과의 전쟁은 서부연맹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갈 공산이 컸다.
‘왜 이레시온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가 했더니…. 위원회 놈들, 아주 썩을 대로 썩은 놈들이었어. 욘이 아예 새 대리자를 구할 만도 해.’
위원회의 후신이자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인 이레시온. 세계의 중재자를 자처했던 그들은 평소 말해왔던 바와는 달리, 사방에서 난잡한 전쟁이 벌어지는데도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토록 평화와 중재를 부르짖더니, 막상 하는 짓은 교활한 구렁이가 따로 없다. 그들이 원하는 건 공멸(共滅). 놈들은 다시 세계의 패권을 쥐기 위해 각지의 강국들이 서로 부딪쳐 자멸하길 바라고 있었다.
‘김정인, 그놈만 없었다면 이레시온의 구상대로 흘러갔겠지.’
짜증나는 숙적의 얼굴을 떠올린 노구덕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신.
현재, 대륙에서 김정인을 일컫는 칭호였다.
그가 이끄는 리베르타의 정예군은 순식간에 팔콘을 박살냈다. 전쟁개시 겨우 나흘만에 솔라리스가 점거하고 있던 팔콘 남부를 함락시킨 것이다.
압도적인 신위를 선보인 김정인의 행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해안 도시인 네뷸라, 오키도의 어선들과 전선들을 모조리 징발한 그는 그대로 바다를 건너 카잘 군도를 수중에 넣었고, 이어서 남부 지구 본토에 상륙했다.
남부를 일통한 솔라리스가 건국된 이래 사상 초유의 침공이었다.
물론 솔라리스의 수뇌부들도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았다. 팔콘이 함락당하고, 카잘 군도를 지나친 리베르타의 병력들이 상륙을 개시할 즈음, 이미 해안가에는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솔라리스의 대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병력의 질은 비슷하고, 숫자는 훨씬 우위. 더욱이 뱃멀미와 거듭된 행군으로 지친 리베르타의 병력과는 달리 솔라리스의 병력들은 사막의 기후와 환경에 익숙한 정예병들이다.
두 군대 간의 전투는, 예상대로 어느 한쪽의 압승으로 끝났다.
결과는 리베르타의 승리였다.
병사의 질을 제외한 모든 여건에서 우위를 점한 솔라리스의 군대였지만, 리베르타와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바로 검왕의 존재유무다.
‘정말 미친놈이야. 설마 그 적은 병력으로 솔라리스의 대병을 격파하고 수도까지 점령해버리다니…….’
김정인이 이뤄낸 전설적인 성과를 상기한 노구덕은 힘없이 고갯짓을 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솔라리스의 최고 강자들이 포진한 이그니스의 호위대를 김정인 혼자서 베어버렸다던가. 개처럼 엎드린 이그니스가 항복 협정에 조인하는 광경을 떠올리니 마냥 웃을 수만도 없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미래의 자기 모습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일주일… 빨리 지났으면 좋겠군.’
김정인의 도약을 우두커니 구경만 하고 있자니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다. 벌떡 일어난 노구덕은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놓은 칼자루를 들고 다시 맹렬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역시, 평화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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