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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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일상, 그리고…….
“이놈들!”
낯익은 목소리를 감지한 하유라의 이빨이 어중간하게 멈추었다.
그녀의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건 분명 젠룽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기다려도 오지 않던 원군이 드디어 당도한 것이다.
“하찮은 놈들이 감히!”
“저, 저 돼지는 뭐야?”
“젠장! 걸렸다! 도망쳐!”
건달패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번개같은 몸놀림으로 하유라의 앞에 나타난 젠룽의 눈이 허옇게 뒤집어졌다.
그럴 수밖에. 천하의 서리여왕이 무자비하게 얻어터지고 쓰러져 있는 꼴이라니. 그로선 평생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광경이었던 것이다.
“주, 주인님! 어찌 이런! …크음!”
두 눈에서 흉흉한 불길을 뿜어내는 것도 잠시, 젠룽은 재빨리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차마 밖으로 드러난 투실투실한 젖가슴을 마주볼 면목이 서지 않았던 탓이다. 주인의 외설스런 곳을 정면으로 바라보다니,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불충이다.
푸짐한 얼굴을 야차처럼 일그러뜨린 젠룽의 몸뚱이가 비곗살을 출렁이며 날아오르자, 혼비백산한 건달패는 놀란 토끼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지렁이가 아무리 애를 쓰며 기어간들 개구리에게서 달아날 순 없는 법. 날치처럼 튀어나간 젠룽은 어느새 바쁘게 달음박질하는 원숭이의 정면에 내려서고 있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
“자, 잠깐… 깩!”
퉁퉁한 수도(手刀)가 섬전처럼 스치고 지나가자, 놀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원숭이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불쑥 치솟았다. 멍청한 낯짝이 그대로인걸 보아하니, 죽는 그 순간까지도 목이 달아나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끼아아악!”
“사, 살려줘!”
맥없이 무너지는 원숭이를 본 나머지 연놈들은 썩은 시체 같은 낯짝이 되어 더욱 다리에 힘을 주었다. 맞서 싸울 생각 따위는 일찌감치 달아난 지 오래였다. 애초에 프리헌터만도 못한 실력을 가진 그들이 저만한 강자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흩어져! 산개해라!”
각다귀 같은 다리를 필사적으로 놀리며 도망치던 리더가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면 최소한 한둘은 살 수 있겠지. 머리를 쥐어짠 끝에 나온 고육지책이다.
그래봐야 처음부터 가망이 없는 안일한 생각이었지만.
“크악!”
정신없이 도망치던 리더의 몸뚱이가 별안간 어딘가에 부딪친 것처럼 뒤로 튕겨나갔다. 이마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는 그의 앞에는, 어느새 반투명한 장막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비척비척 일어난 리더는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한 일격이었다.
“끄아아아…!”
생각 없이 주먹을 휘두른 대가는 컸다. 리더는 엉망으로 망가진 주먹을 움켜쥔 채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마력 장벽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튼튼했다.
“이건 무슨….”
그때였다. 망연자실 주저앉은 리더의 귓전으로 누군가 대화를 나누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늙수그레한 저음과, 공손히 답하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이놈이 우두머리인 것 같은데… 이보게, 아는 놈인가?”
“예. 꺽다리 도노반이라고… 평판이 그리 좋지 않은 잡니다. 프리헌터를 그만두고 인근의 불량배들을 모으고 있다고 해서 주시하던 중이었습니다. 인신매매단과 관련이 있다는 말도 있는데, 증거가 없어서 지켜만 보고 있었지요.”
“한마디로 별 거 없는 잔챙이다, 이 말이군?”
“그렇습니다.”
놀란 눈을 치뜬 도노반은 안중에도 없이 한담을 나누는 늙은 오크와 젊은 사내. 늙은 오크는 몰라도 젊은 사내는 그가 아는 얼굴이었다.
늙은 오크에게 시종일관 정중한 자세로 일관하는 젊은 남자의 이름은 정무한. 근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여위량의 오른팔로, 현 산치루의 치안대장을 맡고 있는 실력자다.
“흠. 일이 터지긴 터졌는데, 다행히 피라미였구만. 뒷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지금 처리해도 별 상관은 없을 겁니다.”
처리한다는 말이 차가운 비수가 되어 목젖을 후벼 파는 느낌이다. 외통수에 빠졌다는 것을 직감한 도노반은 부리부리한 눈에 벌건 핏줄을 세우며 소리쳤다.
“정무한!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이러는 거냐! 여자 하나 좀 두들겨팼기로서니,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이라고? 여위량이 이 사실을 알면…!”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군. 도노반, 네가 누굴 건드렸는지 정말 모르는 거냐?”
정문한의 반문에 도리어 말문이 막혀버린 도노반. 허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정무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그 멀뚱거리는 낯짝을 마주한 정무한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일자무식이라도 그렇지, 얼마 전까지 헌터였다는 자가 십존의 얼굴조차 모르다니…….”
“시, 십존?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헉!”
도노반의 아래턱이 가슴에 닿을 듯 힘없이 떨어졌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치떠진 그의 눈알은 그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그 여자가 서, 서리여왕…?”
“뭐,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억울할 만도 해.”
경악하다 못해 혼이 달아난 도노반의 고개가 무심결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틀어졌다. 아까부터 신경을 쓰이게 했던 늙은 오크가 기분 나쁜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서리여왕 하유라가 동네 왈패들에게 저토록 얻어터지는 걸 그 누가 생각했겠나. 제때 도착했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역사에 어처구니없는 기록이 한 줄 추가될 뻔했어.”
“나, 나는… 몰랐어. 정말로….”
“알아, 알아. 자네는 몰랐을 거야.”
당황한 손주를 다독이는 듯한 저 말투가 더욱 무섭게 느껴지는 건, 단순한 그의 착각일까?
“하지만 자네들이 어린애의 코 묻은 돈을 빼앗고, 여자를 돌아가며 강간하려고 했던 건 사실 아닌가? 여기 치안대장에게 들어보니까 그것 말고도 다른 전과가 수두룩하더만.”
“그, 그건 증거가 없는….”
“여긴 치안청이 아니라네. 증거타령하며 어물쩍 빠져나가기엔 너무 늦었어. 저기 서리여왕의 체면을 봐서라도, 자네들을 이대로 돌려보낼 순 없거든.”
“그럴 수가!”
“치안대장, 처리하게.”
스르릉, 귓속 가득히 울려 퍼지는 맑은 쇳소리가 도노반의 얼굴가죽을 새까맣게 만들었다.
장검을 빼든 정무한이 도노반을 처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노구덕은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하유라와, 그런 그녀를 부축하며 몹시도 서럽게 울고 있는 아델이 눈에 들어왔다.
‘허, 나 참. 소냐의 말이 정말이었다니.’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심장을 가진 저 하유라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무지렁이 꼬마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걸 믿으란 말인가?
하지만 실제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그러했다. 눈두덩이 심하게 부어올라 본래의 용모를 알아보긴 어려웠으나, 엉엉 울며 안겨드는 아델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는 저 여인은 틀림없이 하유라였다.
‘희한한 일도 다 있군. 저 얼음장 같은 여자한테도 모성은 있었다는 건지…….’
그녀 쪽으로 걸어가던 노구덕은 찝찝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사실, 하유라가 저토록 엉망이 된 원인에는 그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하유라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하유라도 마찬가지일 터.
농장에 은거할 당시, 노구덕은 사전에 여위량과 합의하여 산치루에 잔존한 하유라의 세력들에게 감시의 눈길을 붙여놓았다. 만일 그녀가 탈출을 꾀한다면, 십중팔구는 젠룽의 도움을 받을 테니까.
하유라의 연락을 받은 젠룽이 늦게 도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젠룽이 부랴부랴 주인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와중,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한 감시자들과 충돌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다행히 노구덕이 제때 정무한에게 연락을 넣은 덕분에, 어떻게든 유혈사태만은 면할 수 있었다.
“흐끅…! 흐끄윽… 스승님…! 저, 저 때문에… 흐극…!”
“건방진… 뭘 멋대로 스승이라고 부르는 거냐. 너 따위 꼬맹이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죄, 흐끅! 죄송합니다….”
“딸꾹질 하지 마. 거슬린다.”
“흐끕!”
얼굴이 온통 눈물콧물로 범벅이 되어 말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하유라의 말은 칼 같이 잘 듣는 아델이다. 작고 배짝 마른 몸뚱이로 어떻게든 하유라가 쓰러지지 않도록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근성만은 대단한 꼬맹이였다.
아델이 벗은 겉옷을 대충 상체에 두른 하유라는 오연한 시선으로 장내를 훑어보았다.
고운 얼굴과 몸뚱이가 심하게 망가져도 특유의 도도함과 오만함은 그대로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울퉁불퉁 부어오른 얼굴로 위엄을 차리는 모양새가 우습게 느껴졌을 테지만, 지금의 하유라에게선 전혀 그런 느낌을 찾을 수 없었다.
“서리여왕님.”
“늦었어. 굼벵이가 따로 없군. 그러니까 남자 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거다.”
느닷없이 아픈 곳을 찔린 소냐의 표정에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살짝 아랫입술을 깨문 소냐는 미약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우선 치유를…….”
“됐다. 그보다 저 쓰레기들부터 치워버려라. 계속 보고 있자니 토악질을 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저 돼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건달패들을 가리킨 하유라는, 마지막으로 뒤편에 기절해 있는 돼지를 향해 손짓했다.
“저놈은 쉽게 죽여선 안 돼. 팔다리를 자르고, 눈을 파내라. 귀와 코도 베어버려.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만든 후에 돼지우리에 처박아라. 사람도 아닌 돼지가 분수에 맞지 않게 복을 누렸으니, 이제 대가를 치러야겠지.”
“…….”
이루 말할 수 없이 잔혹한 처사에, 소냐를 비롯한 주변 이들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냥 깔끔하게 죽이면 될 일이지, 뭣하러 그런 잔인한 짓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딱 한 명, 그 명령을 누구보다 반기는 사람이 있었다.
“암요, 마땅히 그렇게 해야지요! 속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차질 없이 시행해라. 사흘 뒤에 직접 보러가겠다.”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우렁차게 답한 젠룽은 흥겹게 어깨를 들썩이며 기절한 돼지를 둘러업었다. 주인을 욕되게 한 무도한 죄인을 단죄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신바람이 난 것 같았다.
모두가 어이없는 눈길로 젠룽을 쳐다보는 동안,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딛은 하유라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호기를 부리긴 했어도, 그녀의 몸 상태는 걷는 것조차 무리일 만큼 최악이었다.
“큭…!”
“업혀라.”
입을 악다문 채 앓는 소리를 내던 하유라의 머리가 위로 쳐들렸다. 성벽처럼 널따랗고 단단해 보이는 등판이 보였다.
태연히 등짝을 내민 인물은 당연히 노구덕이었다. 그 얼굴을 본 하유라는 표독스레 얼굴을 구겼다.
“저리… 꺼지지 못해?”
“쯧. 괜히 어린애 고생시키지 마라.”
“저, 저는 괜찮습니다!”
“별로 설득력은 없구나.”
아닌 게 아니라, 하유라를 부축하는 아델의 얼굴은 정말로 죽을상이었다. 마르고 야윈 소년이 성인여성의 무게를 계속 지탱하고 있었으니, 여태껏 버틴 것도 용한 일이었다.
“치유한다고 해서 바로 집까지 걸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괜히 고집부리지 마라. 나도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니까.”
실은 그녀가 저렇게 된 것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노구덕은 굳이 그 사실까지 말하진 않았다.
“…….”
아델의 후들후들 떨리는 두 다리를 힐끔 쳐다본 하유라는 못마땅한 잇소리를 내며 노구덕의 등에 몸을 기댔다. 옹골찬 살덩어리들이 등과 손바닥에 지그시 맞물리자, 노구덕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허험. 가자꾸나.”
“…예.”
왠지 어정쩡하게 뒤쪽으로 말려들어간 그의 허리를 묘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던 소냐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노구덕의 뒤를 따랐다. 지팡이 신세에서 해방된 아델 또한 얼른 일행의 뒤를 쫓았다.
골목길을 벗어나 멀어지는 일행의 뒤로 길게 늘어난 그림자가 꼬리를 드리웠다. 어느덧 산등성이 너머로 저무는 해가 고단한 하루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에피소드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본래는 어제 마무리가 될 예정이었지만, 제가 일이 생겨서 오늘 끝을 맺게 됐네요.
저저번화에 한편으로 끝을 냈는다고 했는데, 막상 쓰다보니깐 얘기가 길어지더군요. 명백한 분량조절 실패입니다.. ㅠㅠ 죄송합니다. 저번화 보시면 아시겠지만 건달패가 모의를 하고 아델이 습격당하는 장면은 줄글 형식의 설명으로 대체했었지요.
그런 식으로 스토리를 압축한다고 했는데, 쓰다 보니 한편에 담는 건 무리라 생각되어 두 편으로 늘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좀 일관되지 않는 측면이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이쪽 스토리도 원래는 현대물로 쓰일 예정이었던지라.. 미흡한 측면이 꽤 있는 것 같아요. 예정대로 갔다면 편수가 더 늘어났을 테고, 노구덕 위주를 바라시는 분들께는 더 지루하게 느껴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상 짧은 작가의 변이었습니다.
남겨주시는 리플들을 모두 주의깊게 읽고 있으니 의견내주실 게 있으시면 가감없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필 날이 더워지는 시점에 벌초를 했더니 유난히 피곤하네요. ㅠㅠ
독자님들 모두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됐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