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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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잠식(蠶食)
196# 잠식(蠶食)
광장처럼 넓은 대전.
대전 중앙에는 도합 열 개의 크리스탈 기둥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늘어서 있다.
반질반질한 기둥의 표면은 칙칙한 석회질이 내려앉은 듯 어두웠다. 한때 구시대의 영화를 상징했던 기둥들은 모두 본래의 찬란했던 빛을 잃은 채, 쇠락한 유적처럼 망연히 서있을 뿐이었다.
열 개의 크리스탈 기둥 중, 동서남북에 위치한 네 개의 기둥 앞에는 각기 하나씩의 옥좌(玉座)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낀 다른 여섯 개의 기둥 앞은 아무것도 없이 쓸쓸한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네 개의 옥좌에는 하나 같이 비범한 풍모를 지닌 중년인들이 앉아 있었다. 부리부리한 호목과 갈기처럼 치솟은 수염 등, 한눈에도 오랫동안 다른 이들의 위에서 군림해 온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관상들이다. 동물에 비한다면 독수리와 호랑이, 사자 같은 지배자의 위치에 선 이들.
옥좌가 세워진 단상 아래, 각기 독특한 모양새를 한 무늬들은 이들의 신분을 일목요연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검을 들고 있는 사자의 상은 서부왕국 군다르.
산꼭대기 위에서 휘황한 빛을 발하는 태양은 중앙의 시온.
창공을 노니는 은빛 독수리의 문양은 중부왕국 이레브.
수백 년 동안 대륙을 좌지우지해 온 십인위원회. 바로 그들이다.
텅텅 비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회의장의 풍경은 잔불처럼 희미한 위원회의 입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예전이었다면 직접 얼굴을 대면하는 일 없이, 복수의 장소에 마련된 비밀회의장에서 크리스탈 기둥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철저한 비밀유지와 배타성. 그것이 원래 위원회의 방식이었으니까.
그러나 위원회의 이름이 바닥에 떨어지고, 구성원들 태반이 죽어나가면서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언제부터인가 위원회의 비밀회의장은 크리스탈 기둥 대신 옥좌에 마주앉아 직접 얼굴을 마주보고 육성으로 대화하는 형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구성인원도 마찬가지다. 종전의 위원회가 의장을 포함한 구왕조의 가주들이 참여한 열 명으로 구성되었다면, 현재는 달랑 네 명이 전부였다. 회의를 주관하는 의장과 아직 위원회에 적을 두고 있는 시온, 이레브, 군다르의 가주들이다. 그마저도 도미니온의 체스터가 떨어져나가면서, 이젠 세 명밖에 남지 않았다.
현 위원회를 구성하는 세 명의 장한들은 이레브의 게덴, 갈루아, 시온의 칼데른으로, 예전 지구총회를 개최했던 벤텀 등의 가주들과는 전부 세대교체가 된 모습이었다. 하긴, 그들 세대에서 위원회의 위치가 나락으로 추락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흘러가는 상황이 좋지 않다.”
“언제는 좋았던 적이 있었나?”
의장직을 맡고 있는 갈루아가 심각하게 입을 열자, 맞은편의 칼데른이 삐딱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자 이레브의 가주인 게덴의 눈두덩이 불쾌하게 꿈틀거린다.
“칼데른, 그런 식의 태도는 삼가줬으면 좋겠군.”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만. 게덴, 나는 상관없다.”
습관처럼 으르렁거리는 둘 사이를 중재한 갈루아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했던가. 비록 위원회는 몰락했을지언정, 그들의 핵심은 중부의 대국 이레시온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었다.
중부의 대국, 대륙최강의 단일 세력…. 말이야 좋다. 그러나 이레시온의 내부 상황은 외부에서 보는 것만큼 낙관적이지 못했다.
제 버릇 남 못준다고, 권력을 둘러싼 아귀다툼은 이레시온이란 새 간판으로 재출발한 뒤에도 어김없이 계속되었다. 반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1인자의 자리를 유지했던 시온은 이레브의 부상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군다르와 야합하여 이레브를 견제했다.
그러나 군다르의 체스터가 도미니온으로 독립하면서 세력의 균형은 깨져버렸고, 그렇잖아도 이레브에 비해 약세를 보이던 시온은 갈수록 세가 기울어지는 중이었다. 당연히 시온의 가주를 맡고 있는 칼데른이 나머지 둘을 곱게 여길 리 없었다.
칼데른은 이레브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유명무실한 의장직을 없애자며 연일 주장했으나, 주도권을 쥔 이레브가 이권을 내놓을 리 만무했다. 방금 전의 사소한 언쟁도 두 세력 간의 오랜 암투에서 비롯된 일각이었다.
게덴과 칼데른의 신경전을 가라앉힌 갈루아는 황량하게 비어있는 나머지 자리들을 훑어보며 씁쓸히 입맛을 다셨다.
체스터, 그룬가르드, 이그니스, 아가레스트…. 당연히 그들과 함께 했어야 할 각 가문의 후계자들. 그런 그들이 따로따로 찢겨나간 현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의 대에.
‘우린 정말 운이 없군.’
북부의 그룬가르드와 함께 나가, 남부 왕국 솔라리스를 건국한 이그니스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검왕에게 굴복했고, 퀸젤 대신 군다르의 가주가 된 체스터는 발레기우스의 숨겨진 몸종이었음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리고 죽었다 살아난 아가레스트는 선머슴처럼 밖에서 나뒹굴고 있었으니…….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결코 틀린 게 아니었다.
“반역자들이 공멸하길 기대했지만,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
반역자들. 그들은 위원회로부터 독립한 세력들을 전부 통틀어 반역자로 호칭했다.
“이그니스… 멍청한 놈. 고작 한 개 부대를 당하지 못하고 나라를 내줬다지? 본인은 내궁에 유폐당했다고 했던가? 그런 굴욕을 당할 거였으면 대체 뭐하러 나간거지?”
“쯧. 능력에 비해 야망이 지나치게 컸던 거지.”
다른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갈루아는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와중에도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저 고고한 자존심, 위원회는 저게 문제였다. 실패를 했으면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데, 당한 자가 문제라며 단순히 치부해버리니 발전이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저들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위원회는 저런 방식으로도 수백 년 간 문제없이 대륙을 지배해왔다. 저 근거 없는 거만함은 그 대가로 얻은 지독한 병폐였다.
“…무력하게 당한 이그니스도 문제지만, 검왕이 예상보다 훨씬 강했던 것도 한 원인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럴 지도. 들어보니까 이제는 검신이라 불린다더군. 하찮은 역도 주제에 감히 신이라니… 오만한 놈.”
누가 누구에게 오만하다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쓴웃음을 지은 갈루아는 좌우로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들리는 무용이 사실이라면 그 정도의 오만함은 당연하다.”
“글쎄… 그놈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무릴로보다 윗줄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데.”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싸움은 직접 붙어봐야 아는 거니까.”
“하긴…. 그러고 보니 무릴로, 그놈은 문제없는 건가? 나쁜 전례가 있다 보니 꽤 불안하군.”
폭군 무릴로와 흡혈왕 발레기우스는 초대 위원회가 영입한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욘에게서 시스템을 관리하는 과업을 위임받은 위원회는 대륙의 힘을 위원회의 이름 아래 결집시키기 위해 걸리적거리는 세력들을 제거하는 한편, 달콤한 미끼를 던져 당대의 초인들을 회유했다. 말하자면 은퇴한 십존들을 유혹하여 휘하로 거두는 제도의 초창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벌레교단의 교황 발레기우스와 어비스쉬라인의 우두머리 무릴로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들은 멸망한 세력들의 입장에서는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배신자들이지만, 위원회에게는 누구보다 든든한 사냥개로서 암중의 집행자가 되었다.
위원회의 천년대계를 말아먹은 유일한 실책이라면, 욘의 사념체가 그 사냥개 중 하나인 발레기우스를 오염시켰으리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리라.
발레기우스가 주도한 반란만 아니었다면 위원회의 지배는 여전히 공고했을 테니.
“…무릴로라면 걱정 마라. 놈의 통제권은 알비온(Albion)에 속해 있으니까.”
알비온은 카멜롯에 이은 두 번째 보관소다. 말하자면 위원회가 붙들고 있는 마지막 생명줄이자, 위원회가 전력을 함부로 밖에 내돌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익히 알다시피, 위원회의 가장 강력한 전력은 무릴로를 비롯한 은퇴한 십존들이다. 그들 중 전장에서 얼굴을 내비친 이들은 많아야 십여 명이 전부.
나머지 인원들은 전부 모처에서 알비온을 지키는 중이었다.
설령 이레브와 시온이 멸망하더라도 알비온만은 사수해야한다는 것이 위원회의 방침이다. 알비온마저 무너진다는 것은 곧 세계의 근간인 시스템이 사라진다는 것이고, 그건 곧 세계의 멸망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물론 위원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욘이 ‘세 번째’ 보관소로서 노구덕이란 대안을 만들어두긴 했지만,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위원회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어쨌든,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돼.”
이레시온은 서부의 삼국전쟁과 리베르타, 솔라리스 간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고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해왔다. 각지의 반역자들이 서로 반목하여 자멸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이레시온의 바람과는 달리 이상하게 흘러갔다. 열세인 병력으로 터무니없는 전쟁을 시작했던 리베르타는 오히려 솔라리스를 정복했고, 레그나토르는 서부연맹을 함락시킨 뒤 도미니온과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쪽은 그나마 전황이 팽팽하긴 하지만… 전선에 보이지 않는 아가레스트와 하유라가 복귀한다면 단번에 기울어버리겠지.”
“끄응, 그렇다고 체스터 놈을 지원해줄 수도 없고….”
“빌어먹을. 예전이었다면 그놈들을 모조리 카름으로 만들어버리는 건데….”
게덴의 입에서 섬뜩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항간에서 소문으로만 떠도는 ‘이레귤러 조작 의혹’의 실체가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위원회가 인위적으로 이레귤러를 조작하여 정치에 이용해 왔다는 것…. 신분이 후계자였을 때는 그들도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그 기밀을 아는 것은 오직 가주나 그에 준하는 주요 관계자 뿐.
그러나 그런 짓이 가능했던 것도 카멜롯이 멀쩡할 때의 얘기였고, 현재의 퇴락한 위원회는 제대로 시스템을 움직일 힘조차 거의 없었다.
“해서 생각을 해봤는데….”
게덴과 칼데른, 두 사람의 시선이 갈루아에게 향했다.
“레그나토르의 노구덕. 그자에게 동맹 제안을 하려고 한다.”
“레그나토르?”
“흠, 그자라면 말이 통할 수도 있겠군. 서부연합군 시절에도 무릴로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적도 있고….”
“그렇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지. 이용해먹기엔 그보다 적합한 자가 없다고 보는데.”
노구덕이 들었으면 혀를 찰 소리를 잘만 늘어놓는 갈루아다. 게덴과 칼데른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그였지만, 실상은 그 본인 또한 어쩔 수 없는 위원회의 구태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었다.
“그자의 주위엔 주목할 만한 강자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지. 레그나토르를 이용해 리베르타를 견제한다면…….”
돌연, 차분히 이어지던 갈루아의 목소리가 도중에 멈추었다.
‘뭐지?’
갈루아의 낯빛이 살짝 일변했다. 무언가, 형언키 어려운 기이함이 등골이 오싹하도록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턱을 받치고 귀를 기울이는 게덴과, 비스듬히 다리를 꼰 칼데른의 모습은 변한 게 없다. 눈을 깜박이며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갈루아는 이내 딱딱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헉!”
전시된 밀랍인형처럼 움직임을 멈춘 동료들.
그들에게선 생기가 없었다. 살아있는 존재라면 응당 들려야 할 숨소리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죽은 것이다.
위원회의 최고 심처에서, 어떤 낌새도 없이 순식간에.
우당탕탕!
기겁한 갈루아의 몸이 형편없이 뒤로 나뒹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서다 발이 꼬여버린 탓이다. 뒤로 쓰러진 갈루아는 땅을 박박 긁으며 일어나려 애썼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근위! 근위는 어디 있나!”
“부르셨습니까?”
바닥을 기던 갈루아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졌다. 어느새, 칠흑 속에서 꾸물거리며 기어 나온 하얀 얼굴이 그의 코앞에서 기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몸체도, 형태도 없다. 어둠 속에서 떠오른 하얀 얼굴은 벌벌 떨고 있는 갈루아를 내려다보며 새빨간 입술을 적셨다.
“오랜만입니다.”
“너, 너, 너느으으은……!”
숨넘어갈 듯한 목소리는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갈루아를 집어삼킨 어둠은 이내 방 안을 새카만 먹빛으로 물들였다.
잠시 후, 어둠이 떠나간 그 자리에 세 사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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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제랑 오늘 오전까지 밀린 일을 좀 했습니다.
100화 넘게 밀린;; 소제목도 나누고, 제가 써놓은 것 정독하면서 설정오류도 찾고.. 다행히 눈에 띄는 오류는 없더군요!
원래 소제목은 스포일러가 될까봐 나중에 붙이는 식으로 달았었는데, 이게 제 게으름과 합쳐지면서 밀리고 밀리다보니.. 하루를 할애하게 되었네요.
아무튼, 이렇게 위원회의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차후 잔당들이 있을지 없을지는 지켜보시면 아시게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