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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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Terminator
198# Terminator
쪼르륵.
맑은 연못처럼 투명한 찻잔 위로 잔잔한 파문이 번진다. 적당히 넘치지 않도록 찻물을 따라낸 임유진은 어쩐지 살짝 멍해 보이는 유메르바인에게 잔을 건넸다.
“유메, 아직도 마음이 심란해 보여요.”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요.”
시들시들한 유메르바인의 눈길은 멀리 수 킬로미터 밖에 보이는 대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한때 서부의 주도로 통했던 제네시스. 만리장성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성벽으로 사방을 둘러친 대도시의 이름이다. 또한, 그녀가 평생을 보필했던 군왕이 최후의 보루로 삼은 장소이기도 했다.
유메르바인은 흑요석 같은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짙은 한숨을 지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총명하신 그분이 왜 갑자기 저희를 저버리셨는지….”
“오정환 맹주도 그랬죠. 지금 제네시스에서 항전하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모시던 군주가 아니에요.”
“…역시 그럴까요?”
제네시스의 앞에 진을 치기까지 이미 수없이 반복되었던 문답이다. 임유진도, 유메르바인도 이 문답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꺼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체스터에 대한 그녀의 충의가 깊다는 얘기일 터.
체스터는 확실히 변했다. 예전에는 비록 야심가적인 면모가 있을지언정, 곁에서 함께한 수하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인물이었다면 애초에 유메르바인이 따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말없이 찻잔을 입에 대는 유메르바인을 바라보던 임유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메, 그를 사랑했나요?”
실례되는 질문이다. 그러나 결전을 앞에 둔 지금으로선, 그녀의 마음을 미리 확인해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마음가짐이라면, 차라리 전력에서 제외하는 게 나을 테니까.
사적인 질문을 받은 유메르바인의 얼굴이 가냘프게 흔들렸다. 얼핏 보면 당황하는 것 같기도 했고, 깊게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짧은 고요가 지나갔다. 망설이던 유메르바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네요. 얼버무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모르겠어요. 그를 사랑했던 건지, 아닌지….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해요. 저는 분명… 체스터 님을 좋아했어요. 제 생애 처음으로 인간적인 대우를 해준 사람이니까요.”
임유진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유메르바인의 과거사를 떠올린 그녀의 표정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마법 재능을 보였던 유메르바인은 유수의 명문 클럽 판데모니엄의 유망주로서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도왕 티렐의 직계제자로서 대우를 받았으니까.
그러나 티렐은 그녀를 제자가 아닌 도구로서 취급했다. 유메르바인의 재능을 그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지옥같이 반복되는 훈련과 교육 속에서, 그녀가 바랐던 사제 간의 온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 유메르바인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은 티렐은 후에 소냐를 제자로 들였을 때 극적인 태도변화를 보이지만… 그건 정말 나중의 일이다. 어린 유메르바인에게 있어, 티렐은 감히 정을 붙이기 힘든 어려운 스승이었다.
냉담한 스승에게 실망하고, 시기와 질투에 휩싸인 다른 무리에도 끼지 못하고 외톨이처럼 겉돌던 그때. 바로 그때 만난 사람이 군다르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체스터였다.
“체스터 님은 저더러 첩실이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죠. 저는 곧바로 거절했지만, 그분은 무슨 생각인지 절 위해 거액의 위약금을 내주셨어요. 덕분에 전 판데모니엄과 계약 해지를 하고 나올 수 있었죠.”
“유메.”
“그랬던 그분이 어떻게….”
“진정해요.”
“언제부터… 그자의 마수가 뻗친 걸까요? 대체 언제부터….”
지난 일을 이야기하는 유메르바인의 목소리는 깊은 자책으로 얼룩져 있었다. 왕을 모시는 재상으로서, 왕의 신변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는 것이다.
임유진은 스스로를 책망하는 유메르바인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천재지변이었어요. 발레기우스는… 유메가 막으려 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잖아요. 세상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유진 씨….”
“결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마음 단단히 먹어요.”
유메르바인의 숨소리가 미약하게 잦아들었다.
레그나토르 군의 총사령관인 임유진이 직접 승부를 결정 짓겠다고 말했다.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 지지부진한 싸움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겠다는 말이었으니.
“아직까지 미련이 남았다면, 직접 그 사람 앞에서 털어내요.”
“…알겠어요. 그런데… 의장님께 지시가 내려왔나요?”
유메르바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껏 노구덕의 지시에 따라 전선을 유지하던 임유진이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면, 그건 곧 노구덕의 입김이 착용했다는 뜻일 테니까.
짐작이 맞았는지, 임유진은 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조만간 그이가….”
웅성웅성.
차분히 이어지던 임유진의 말이 중간에 끊어졌다. 막사 밖에서부터 급격히 술렁이는 기척이 느껴진 탓이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수가 환호하는 목소리와 목청 높여 외치는 소리가 뒤섞인 큰 소란이었다.
어리둥절해진 두 여인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뭔 일이 일어난 걸까요?”
“글쎄요…. 긴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한번 나가 봐야….”
순간,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막사 문이 크게 젖혀졌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그림자가 기별도 없이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총사령관의 막사에 출입하면서도 자기 안방에 출입하듯 거침없는 걸음걸이였다.
그러나 정작 그 불경에 화를 내야 할 임유진은 제자리에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입이 얼어서 말을 하지 못한 것이다. 깜짝 놀란 토끼처럼 눈을 치뜬 그녀의 시선은 깜짝 등장한 한 사내의 얼굴에 바짝 꽂혀 있었다.
“유진아.”
사내의 능글맞은 손길이 감히 총사령관의 팽팽한 엉덩이를 두어 번이나 퉁퉁 두드린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임유진은 바르르 속눈썹을 떨며 사내의 품에 안겨들었다.
“여보!”
“그래, 그래.”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나비처럼 날아든 그녀를 가슴에 품은 사내는 녹색 피부의 민대머리 오크, 노구덕이었다. 레그나토르의 전 군을 통솔하는 통수권자가 마침내 전선에 복귀한 것이다.
북부로 여정을 떠난 뒤, 거의 반년만의 귀환이었다.
볼륨감 넘치는 임유진의 육체를 끌어안은 노구덕은 임유진과 깊게 입을 맞췄다. 생각지도 못한 격한 스킨십에 살짝 몸을 떤 임유진은 이내 그의 두꺼운 목에 팔을 두르며 그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아, 아응…. 여보, 자, 잠시만요…!”
“가만히 있어.”
노구덕은 입맞춤한 자세 그대로 그녀의 작은 몸을 뒤로 밀어붙였다. 도중에 임유진이 난처한 듯이 작게 몸부림을 쳤지만, 노구덕은 개의치 않고 그녀의 몸을 지휘테이블 위에 걸치게 했다. 이대로 두고 보다가는 아예 여기서 만리장성을 쌓을 기세였다.
스멀스멀 아래로 내려간 노구덕의 손이 두 개의 달덩이가 숨어있는 가죽 바지 속으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탄력 넘치는 엉덩이 한쪽을 그득하게 손에 넣은 노구덕은 육질을 잡아챈 손에 약하게 힘을 주었다.
“흑!”
엉덩이를 파고든 우악스런 감촉에 얼떨결에 높은 콧소리를 낸 임유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제삼자가 있지 않던가?
황급히 오른편으로 돌아간 임유진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구석에 찌그러져 얼굴을 감싸 쥔 유메르바인과 시선이 마주쳐버린 것이다. 나름대로 손으로 얼굴을 가리긴 가렸는데, 어째 손가락 사이가 동공 너비만큼 벌어져 있다. 물론 눈은 감긴 채였지만.
“이, 이이가 정말! 그만해요!”
“어이쿠!”
마누라 엉덩이를 정신없이 더듬다 정강이를 걷어챈 노구덕은 과장스럽게 몸을 허우적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오랜만에 임유진의 향기를 음미한 그의 얼굴엔 더없이 흡족한 미소가 만연했다.
“흐흐. 부끄러워하기는. 여전히 귀엽단 말이야.”
“나, 남사스러운 줄도 모르고 정말…!”
“오, 재상도 있었군.”
노구덕이 뒤늦게 아는 체를 하자, 돌연한 두 남녀의 애정행각에 눈치만 살피던 유메르바인도 어색하게 목례를 했다.
“이제 재상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의장님께서도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이네요….”
“허허, 나야 늘 건강하지. 저번엔 미안했어.”
“아니에요. 다 잊었습니다.”
고소를 짓는 유메르바인의 표정이 천근만근 무겁다.
은근히 달아올랐던 열기가 가라앉고, 비로소 노구덕과 정상적인 해후를 나눈 임유진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위엄 넘치는 총사령관이 하마터면 군 주둔지 한복판에서 포르노를 찍을 뻔했으니, 민망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상기된 볼을 두드리며 안색을 회복한 임유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한 노구덕을 찌릿하게 노려보았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복귀하셨다는 말은 들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빨리….”
“어쩐 일이긴? 우리 예쁜이 보려고 왔지.”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한데 전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
거듭되는 애정표현이 한 노처녀의 기분을 매우 불편하게 만든 모양이다. 어쩐지 굉장히 뾰로통해 보이는 유메르바인에게 미안하다는 듯 손을 내저은 임유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 진지하게 임해주세요.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닌가요? 여긴 좀 더 쉬다 오셔도 괜찮아요.”
임유진의 고운 낯엔 염려의 빛이 가득했다. 노구덕의 지병이 성공적으로 치료되었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그의 상태가 어떤지는 모른다. 노구덕을 떠나보내기 전, 그 몸서리쳐지는 광증의 무서움을 직접 체험한 그녀였으니, 혹시나 하며 걱정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노구덕이 아내의 비취색 눈동자에 담긴 마음씀씀이를 모를 리 없다. 그는 임유진의 가지런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부작용은 확실히 치료했으니까.”
“하지만 여독도 풀지 못하셨는데….”
“어허. 나, 체력이라면 둘째가는 게 서러운 사람이야. 내자라는 사람이 아직도 그걸 몰라?”
“아, 알아요.”
“그래, 알았으면 됐어.”
마지못한 임유진의 대답에 시원한 웃음을 터뜨린 노구덕은 이내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유진아, 바로 회의를 소집해줘. 주둔지에 흩어져 있는 수뇌부들 있지? 당장 전부 모이라고 해.”
노구덕이 뜬금없이 운을 떼자, 임유진뿐 아니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내팽개쳐져 있던 유메르바인의 얼굴에도 의아한 기색이 인다.
“네? 갑자기 왜….”
“말했잖아. 이 지루한 전쟁의 종지부를 찍어야지. 출진 일자를 내일로 앞당긴다. 그리고 정식으로 내게 사령관직을 넘기도록 해.”
“사, 사령관직을요?”
“의장님,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사령관직을 바로 인계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임유진이 곤혹스럽다는 듯 말을 더듬고, 유메르바인이 손을 들며 앞으로 나선다. 두 사람 다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눈치였다.
임유진이 사령관 감투에 욕심이 나서 인계를 꺼린다는 건 당연히 말이 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난처한 얼굴을 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노구덕의 오랜 공백이 문제였다. 지금 레그나토르 수뇌부에는 노구덕의 귀환을 마냥 환영하기만은 어려운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여보, 잠시만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지금 상황이….”
“나도 안다. 내가 자리를 비운 틈에 이놈저놈 많이들 섞였을 테니 군말이 나오겠지.”
“아, 알고 계셨어요?”
“모를 리가 있나. 그러니 걱정 말고 회의나 소집해 줘.”
깜짝 놀란 임유진의 얼굴이 천천히 제 색을 되찾는다. 노구덕의 당당한 모습에서 만에 하나 있을 불안감을 모조리 떨쳐버린 듯했다. 그녀가 아는 노구덕은 절대 의미 없는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알았어요.”
모처럼, 시원함이 가득 느껴지는 고갯짓이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노구덕 복귀 기념.
도미니온 쓸어버리기 전에 가볍게 내실부터 다지고 시작합시다.
소제목을 종결자, terminator에서 고민하다가 종결자는 왠지 유행이 지난 것 같아서.. 오랜만에 영문으로 정했네요.
내일도 시간이 되면 두 편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 _
+++ 유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는 묘사가 한부분 있었는데,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눈길을 준다던가, 시선을 마주쳤다는 부분은 당연히 눈이 감긴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