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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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종전(終戰)
우득, 우득.
골격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형상이 변화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처럼 말아 보이던 육체가 어느새 날렵하고 건강미 넘치는 몸매가 된 것이다.
얼굴도 바뀌었다. 엔드리스의 샤카, 그믐달의 루가니와 함께 원(原) 레그나토르를 이루는 한 축이었던 크로스게이트의 여장부 일라이자. 가볍게 물결치는 눈웃음이 일품이었던 그녀의 외모는 지금 이 순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화려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목구비에 도발적으로 올라간 눈매를 가진 얼굴이다. 여기에 머리색만 빨간색으로 물들이면 노구덕이 아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 된다.
바로 퀸젤.
퀸젤 군다르 악시밀리온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다.
놀랍게도 일라이자의 정체는 신분을 숨긴 퀸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퀸젤과는 달리, 그녀를 바라보는 노구덕의 얼굴은 고요한 바다처럼 잔잔했다.
“축골공이로군. 나도 써봐서 아는데, 변장하기엔 제격인 수법이지. 그렇다 해도 몇 년 동안 골격을 축소시킨 채 살아가는 건 상당한 고역이었을 텐데… 과연 대단한 여자야.”
“…언제부터?”
퀸젤은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최대한 신분을 숨기려고 했는데, 어처구니없이 정체를 들켜버렸다. 게다가 노구덕의 행동거지를 보면 예전부터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운 좋게 알 수 있었지.”
“설마….”
“소냐가 고자질을 한 것은 아니다. 괜한 애한테 화풀이하는 일은 없도록 해라.”
“…….”
정곡을 찔린 퀸젤은 그저 말없이 숨을 씨근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퀸젤은 몇 년 동안 레그나토르의 ‘일라이자’로서 손색이 없는 연기를 펼쳐왔다. 그런 그녀가 외부에 꼬투리 잡힐 만한 일을 한 적은 딱 한 번, 골리앗게이트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 어쩔 수 없이 힘을 썼던 그때밖에 없다.
당시, 소냐에게 능력을 발휘한 걸 들켜버린 퀸젤은 그녀에게 비밀을 지켜달라 부탁했고, 소냐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 약속엔 어떤 보증도 없었다. 나중에 마음을 바꾼 소냐가 노구덕이나 임유진에게 몰래 이야기를 했어도 이상할 건 없다. 실제로 퀸젤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노구덕은 그녀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퀸젤의 정체를 알아챈 것일까?
아쉽게도, 그는 그 자세한 속사정을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퀸젤. 네가 레그나토르에 숨어든 건 아가레스트 때문이겠지. 뒤에 오라클의 힘을 업고 있었으니, 크로스게이트에 잠입하는 것도 어렵진 않았을 거야. 오라클 총수가 직접 나서서 솜씨를 부렸으니, 나나 다른 간부들이 지금껏 눈치를 채지 못한 것도 당연해. 당연하다지만… 조금 열 받는군.”
노구덕의 안면근육이 불쾌하게 꿈틀거리자, 퀸젤은 한 걸음 살짝 물러나며 말했다.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난 지금까지 레그나토르에 해가 될 짓은 하지 않았어.”
“해가 될 짓을 했다면 네 정체는 진즉에 탄로 났을 거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날 어떻게 할 생각이야?”
레그나토르의 내규에 따르면, 외부에서 숨어든 첩자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즉결처분이 가능하다. 이 시국에서 염탐꾼이라는 건 그만큼 큰 중죄였으니까. 레그나토르의 요직에 앉아 있었던 그녀가 그 내규를 모를 리 없다. 요컨대, 노구덕이 당장 그녀의 목을 쳐도 문제 될 건 없다는 소리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퀸젤의 몸은 점점 입구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차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겠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그녀에게 시선을 준 노구덕은 픽 웃으며 말했다.
“당장 어떻게 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난 널 높게 평가하고 있어. 친구 때문에 자기 신분도 버리고 내 밑에 숨어 들다니… 참 대단한 우정이야.”
“흥. 비꼬지는 말아줘. 누구 때문에 후계자 경쟁에서 완전히 뒤로 밀려버렸거든.”
“비꼬는 게 아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돌연 말을 흐리는 노구덕의 음성이 스산하게 낮아졌다. 그 낌새를 감지한 퀸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네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나보다 앞서 체스터를 만나려고 한 거겠지?”
“음, 그건….”
“미리 말해두겠는데, 거짓말은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맞아.”
퀸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노구덕의 말을 인정했다.
그의 말대로, 퀸젤은 노구덕이 대전에 도착하기 전에 체스터와 만나 투항을 권유할 생각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체스터는 얼마 남지 않은 가문의 직계. 이젠 가문과의 연이 거의 끊겼다고는 하나, 가만히 앉아서 일가의 맥이 단절되는 것을 지켜볼 정도로 그녀는 모질지 못했다.
그러나 노구덕이 관문을 돌파하는 속도는 비밀통로를 통해 달려온 퀸젤보다 훨씬 더 빨랐다. 퀸젤의 예상보다 앞서 대전에 들이닥친 그는 끝내 체스터를 죽여버렸고, 뒤늦게 도착한 퀸젤의 정체마저 알아차렸다.
그녀로선 과감한 결단을 내린 보람도 없이 이래저래 손해만 본 셈이었다.
“체스터에겐… 항복을 권하려고 했어. 그리고 당신과 협상을 해서 가문의 맥을 보존하라고 조언할 생각이었지.”
“너무 늦었군.”
“그래… 너무 늦어버렸네.”
고소를 삼킨 퀸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처량한 눈길로 볼품없이 나동그라진 체스터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제치고 가주가 된 체스터가 이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에 대해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자책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살려둘 생각은 없었으니까.”
“…읏!”
노구덕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오는 것을 본 퀸젤은 그가 걸어온 만큼 뒤로 물러났다.
“퀸젤. 아까도 말했지만 당장 널 해코지할 생각은 없다. 네 정체도 나만 아는 것으로 해두지. 원한다면 네 선에서 알 수 없었던 아가레스트의 동향도 주기적으로 알려줄 수 있어.”
“대단한 호의네. 물론 조건이 있겠지?”
“제네시스에 잠들어 있는 군다르의 유산 전부다.”
“…휴우우우.”
퀸젤의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숨을 뽑아내는 그녀의 얼굴은 노구덕의 대답을 익히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남들 앞에서 맨얼굴을 보일 게 아니라면 빨리 답하는 게 좋을 거다. 별동대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어차피 노구덕에게 가문의 보물을 바치는 것 외엔 달리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쉰 퀸젤은 맥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하아. 선조님들을 뵐 면목이 없네.”
“그런 걸 신경 쓰는 타입이었나?”
“당연하지. 아무리 나라도 죄책감 정도는 있단 말이야. 오백 년을 이어온 왕가의 유산을 내 손으로 거덜 내다니…….”
“비약하지 마라. 단지 주인이 바뀌는 것뿐이야. 그리 따지면 이쪽에도 권리가 있어. 왕통을 가진 건 데모나도 마찬가지니까.”
“칫, 이럴 때만…. 좋아. 내가 달리 어쩌겠어? 당신 말대로 따를 수밖에.”
말이 협상이지, 실상은 일방적으로 질질 끌려 다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형국이다. 그 탓인지 머리를 끄덕이는 퀸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구왕조가 하나로 합쳐지고, 연맹과 위원회가 창설되기 전, 서부의 주도인 제네시스는 군다르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군다르의 악시밀리온 왕가는 위원회의 축이 된 이후에도 제네시스의 왕궁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철저하게 관리해 왔다. 덕분에 군다르 왕가는 제네시스와 서부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고대로부터 전해진 유산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대응은 다른 지역의 왕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체스터가 도미니온을 개국하여 독립할 수 있었던 것도 군다르의 영향력이 서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덕분이지 않던가?
더욱이 군다르는 중부의 시온, 이레브와 더불어 구왕조 중 가장 막강한 세력을 떨쳤던 삼 왕국 중 하나. 당연히 그 유산이라 하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상상을 뛰어넘는 규모일 게 분명했다.
군다르 왕국이 수백 년 동안 쌓아온 억만금의 재화.
그리고 신기에 준하는 수많은 아티팩트들.
그중에서도, 노구덕이 가장 원하는 물건은 따로 있었다.
“검은 제대로 보관하고 있겠지?”
“으, 응? 검이라니…?”
“갈드루헨의 무자비(Cruelty of the Galdruhen) 말이다.”
“그건 또 어떻게…?”
노구덕을 쳐다보는 퀸젤의 얼굴은 그야말로 귀신을 보듯 아연해져 있었다.
갈드루헨의 무자비, 혹은 간단하게 혈검(血劍)이라 불리기도 하는 검은 과거 군다르 왕국이 벌레교단의 총단에서 탈취한 신물이다.
그 검은 본래 군다르의 정복자 갈드루헨에게 복수를 다짐하기 위해 벌레교단에서 만들어낸 마검으로, 그 칼날을 군다르의 병사 일천 명의 피로 벼리어 낸 끔찍한 내력을 가진 검이기도 했다.
마검을 만들어낸 벌레교단은 혈검의 레플리카 스무 자루를 만들어 대륙 곳곳의 지부에 보냈으며, 산 제물의 심장을 가르는 용도로 사용하게 했다. 아주 예전의 일이지만, 김정인 또한 우연찮은 기회에 혈검의 여섯 번째 레플리카를 얻어 애검으로 사용한 전력이 있었다.
원래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마검인 만큼, ‘갈드루헨의 무자비’와 벌레교단의 상성은 최고였다. 레플리카들이야 그저 절삭력이 뛰어난 명검에 지나지 않지만, 오리지널 혈검은 주술적 능력을 크게 증폭시켜줄 뿐 아니라 베어버린 상대의 정기를 흡수하고 영혼에 직접 타격을 주는 능력이 있었다.
즉, 한마디로 존재 자체가 노구덕의, 노구덕을 위한 검이었다.
“검이라면 다른 좋은 게 많아. 당신이 벌레교단 출신이라는 건 알지만, 굳이 그 저주받은 마물을 택할 필요는 없을 텐데….”
“그 검이면 돼. 물론 다른 검들도 모두 가질 생각이고.”
“…그러시겠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찬 것도 잠시, 퀸젤은 왕궁 내부에 숨겨진 보고들의 위치를 조목조목 노구덕에게 알려주었다. 황금을 보관하는 창고에서부터, 병장기와 갑옷, 각지에서 탈취한 오리지널들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 등.
“…비밀통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보면 아마 거의 변하지 않았을 거야. 어차피 나나 체스터 정도는 제외하면 아는 사람도 없으니 바꿀 이유도 없었을 테고.”
“시스템과 관련한 창고는 없나? 네가 가지고 있던 스크롤 같은 게 보관된 창고도 있을 것 같은데.”
“무력화 스크롤 말이야? 그건…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게 아냐. 아무리 왕가라도 그런 게 무더기로 보관된 창고 같은 건 없어. 작은 방이라면 몰라도. 하지만…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우득우득 울리는 뼛소리와 함께 퀸젤의 체형이 다시 변화했다. 감쪽같이 일라이자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퀸젤은 황급히 처음 나타났던 기둥 주변으로 이동했다.
“…약속은 지키리라 믿을게.”
“네가 배신하지 않는다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승전(勝戰)… 축하해.”
씁쓸한 축사를 남긴 퀸젤의 모습은 이내 스르르 어둠에 묻혀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당탕거리는 소음이 울리며 다수의 사람들이 대전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물론 임유진과 콜트레인, 이두식, 심준호 등 별동대의 선두 무리였다.
“의장님!”
“…엇!”
당장이라도 노구덕의 앞으로 달려올 듯했던 무리는 그의 발치에 엎어져 있는 체스터의 시체를 보더니 반사적으로 주춤거렸다.
“아아….”
목이 기형적으로 돌아간 체스터의 시신을 본 유메르바인은 힘없이 그의 앞에 허물어졌다.
한때 열과 성을 다해 모셨던 주군이다. 왜 자신들을 버렸는지,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구차한 변명이라도 육성으로 듣고 싶었건만, 이제는 그럴 기회조차 사라져버렸다.
허탈하게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유메르바인은 늘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마저 내팽개친 채, 싸늘하게 식어버린 얼굴을 하염없이 더듬었다.
“저항이 심해서 어쩔 수 없었다.”
“…….”
노구덕의 무심한 말을 들은 유메르바인의 속눈썹이 세찬 떨림을 보였다. 옆을 지나친 그의 뒷모습을 따라 원망스레 고개를 돌린 그녀는, 이내 다시 목을 늘어뜨린 채 소리죽여 흐느꼈다. 이 상황에서 노구덕을 원망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고생하셨어요.”
“그래….”
다가오는 임유진에게 고개를 끄덕인 노구덕은 어색하게 서 있는 다른 이들을 향해 엄숙히 선언했다.
“우리가 이겼다. 종전(終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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