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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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폭풍전야(暴風前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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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그나토르의 근위대장직을 맡고 있는 이두식의 아침 일과는 항상 똑같다.
아내의 입맞춤을 받으며 침대에서 일어나면, 갓 지어서 따끈따끈한 밥으로 배를 채운다. 이른 아침 시간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아직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을 시간이다.
나타샤의 사랑이 듬뿍 담긴 식사를 맛있게 먹어치우고 나면, 가볍게 몸을 씻고 복장을 갖춘다. 예전에는 의장용 갑옷이 영 불편하게만 느껴졌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니 이젠 이 갑옷이 없으면 뭔가 어색할 정도다.
아내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차려입고 부츠의 끈을 동여매고 있을 즈음이면, 그때서야 부스스한 머리를 한 아이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그러면 잠 덜 깬 아이들을 한 번씩 안아 주고, 나타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선다.
이두식은 언제나 도보로 출근을 한다. 자택이 칼립스 내성 근처에 있어 굳이 마차를 이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웃들과 저자의 상인 등, 언제나 마주치는 익숙한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내성에 들어서면, 그는 곧바로 연병장으로 향한다. 명목상 그의 집무실은 성 안쪽에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가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은 연병장의 전용 막사였다. 아무래도 근위대의 훈련을 주관하고, 말단 병사들과 소통을 하려면 땀내 나는 연병장의 막사가 훨씬 접근성이 높아서다.
‘9시에 아침 점호를 하고, 10시엔 궁성으로 가서 오전 회의에 참석해야겠군. …응?’
오늘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정을 머릿속에서 체크하며 연병장에 어귀에 들어선 이두식.
한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른 느낌이다. 아침 8시면 바지런한 몇몇 병사들의 기합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시간대인데, 오늘은 드넓은 연병장이 꽉 찬 느낌이 들 정도로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게다가 입구에서부터 확 풍겨오는 후끈후끈한 열기까지.
“오오오오오오오–!”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함성을 들은 이두식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건 거의 수백 명 이상이 모여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오늘 내가 모르는 훈련이 있었나?”
“어, 근위대장님은 연락받지 못하셨습니까?”
“연락이라니?”
“오늘 일대다 대련이 있잖습니까. 근위대장님도 참가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처음 듣는 소리다. 이두식은 영문을 몰라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일대다 대련?”
“의장님과 고위 간부님들의 대련이지요. 콜트레인 님, 박승찬 님, 신소율 님, 글라우버 님, 윤기호 님… 거의 올스타급으로 참여하신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서 지금 다들 구경한다고 난리가 났지요. 여기저기서 내기판도 벌어지는 모양입니다. 크으, 하필이면 저만 근무타임이라…….”
연병장 입구에서 번을 서는 병사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정황을 파악한 이두식은 크게 입을 벌렸다. 아니, 그런 이벤트가 있는데 어떻게 자기만 쏙 빼놓는단 말인가?
“그렇군. 수고하게.”
“예에….”
병사의 힘없는 대답을 뒤로 한 이두식은 연병장 안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넓게 퍼진 연병장 안쪽으로 거의 천여 명에 가까워 보이는 무리가 둥글게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성 병력은 전부 다 몰려왔구나.’
생각할수록 섭섭했다. 말단 병사들까지 아는 일을 자기만 몰랐다니…. 이건 윗선의 의도적인 지시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표정을 굳힌 이두식은 연방 손을 흔들며 열광하는 병사들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들어갔다.
“잠깐만 실례하겠네.”
“아, 누구야? 덩치만 무식하게 커서는… 어엇? 근위대장님!”
“근위대장님이다!”
“근위대장님이 오셨어요!”
“이러면 또 해볼 만하겠는데!”
“아냐, 지금까지 보면 그래도….”
원진의 일부가 이두식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로 갈라졌다. 알아서 교통정리가 된 덕분에 수월하게 안쪽까지 도착한 이두식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보초의 말대로, 원진 안쪽에는 노구덕을 비롯한 레그나토르의 주요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문제는 콜트레인, 박승찬, 윤기호, 심준호, 신소율, 글라우버 등 레그나토르를 대표하는 무인들의 행색이 거지처럼 너덜너덜하다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행색이 멀쩡한 사람은 그 중심에 서 있는 노구덕 밖에 없었다. 그 역시 곳곳이 찢어지고 흙먼지가 덕지덕지 붙어있긴 했지만, 넝마나 다름없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아주 양호한 편이었다.
“오, 두식이 왔구나. 왜 이렇게 빨리 온 거냐?”
“형님, 이게 무슨…?”
“보면 알잖냐. 대련이다. 새로운 장비에도 익숙해질 겸, 전투 경험치도 쌓을 겸해서 말이야.”
그러고 보니 여기 모인 이들은 전쟁이 끝나고 전리품을 지급받은 이들이다. 하나 같이 신기에 준하는 장비들을 지급받았으니 손에 익도록 연습하는 건 당연했다. 이두식도 근력과 지구력을 보정해주는 타이런트(Tyrant)라는 벨트를 받았으니까.
“그런데 왜 저는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허, 이놈 보게. 너, 어제 결혼기념일이었잖아. 어제 회의 때 내가 전한 말은 그새 흘려버린 거냐?”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던 이두식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어제 회의 때 좀 늦게 출근해도 되니 푹 쉬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제가 결혼기념일이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런데 노구덕이 그것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쯔쯔, 이런 둔한 놈을 남편으로 두고 있는 제수씨가 불쌍하구만. 이봐, 이두식이, 너. 기념일 제대로 챙긴 건 맞겠지?”
“제, 제대로 챙겼습니다. 애들이랑 외식도 하고… 꽃도 선물했고요.”
“휘이익! 멋지다!”
“으하하! 이제 보니 근위대장이 아주 로맨티스트였군?”
“부럽다, 부러워!”
얼결에 대답했다가 뜻하지 않은 호응을 얻은 이두식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그 곰 같던 인물에게 이런 면모도 생기고, 확실히 시간이 많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었다.
“뭐, 이왕 왔으니 괜찮겠지. 어떠냐? 너도 한번 놀아볼테냐?”
“이보게, 근위대장. 대답 잘 해야 할 거야. 우리 모습을 보라고.”
“두식 오빠. 저 아저씨 완전 괴물이거든요? 괜히 후회할 짓 말아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는 거라고요.”
반쯤 박살난 방패를 든 콜트레인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말을 건네고, 그 옆의 신소율도 웃음기 띤 얼굴로 거들고 나섰지만, 이두식의 대답은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하겠습니다.”
“좋다. 그렇게 나와야지. 다들 일어서라. 새로운 멤버가 들어왔으니, 새롭게 한 번 더 해보자고.”
“에구구….”
“끄응….”
여기저기 폐품처럼 널브러져 있던 간부들이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원진을 이룬 병사들이 저마다 고함을 지르며 크게 환호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구경이라는데, 하물며 이런 고수들의 대련이라면 백만금을 줘도 보지 못할 진풍경이었다.
“와아아아아—!”
“무신! 무신! 무신!”
그 자리에서 의장용 갑옷을 벗고, 연습용 갑옷으로 갈아입으며 대련 준비를 하던 이두식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동부의 검신, 서부의 무신. 이 대립구도는 그도 익히 들어온 바지만, 정작 레그나토르 안에서 무신이란 칭호는 그다지 많이 쓰이지 않는 편이었다. 육관돌파의 활약상을 직접 눈으로 본 이들이 적고, 아직 검신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의 이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사기충천한 병사들이 목청껏 무신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절대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별 생각 없이 투지를 불태우던 이두식의 표정에 그제야 미미한 경각심이 새겨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 변화는 틀림없이 그가 오기 전에 벌어졌던 전투의 영향이었다. 생각을 이어가던 이두식은 앞서 병사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해냈다.
그러고 보니, 일대다의 대련이라고 했던가?
그 말은 곧 이 쟁쟁한 멤버들이 노구덕 하나를 당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자, 시작하자. 룰은 평소대로의 대련 룰이다.”
나직하게 깔리는 노구덕의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솟아오르는 세 개의 검.
푸른 전하를 머금은 뇌굉(雷轟).
핏빛 기류를 휘감은 참룡(斬龍).
먹물에 담근 듯 칙칙한 묵빛을 흩뿌리는 혈검(血劍).
허공을 유영하는 세 개의 마검이 가시처럼 곤두선 순간, 검은 짐승으로 변한 이두식의 입에서 거친 포효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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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을 끝낸 노구덕이 진한 땀내음을 풍기며 막사로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소피아가 쪼르르 달려오며 해진 갑옷을 벗겨주었다.
“수고하셨어요, 주인님. 새로운 장비들은 어때요?”
“음. 그럭저럭 잘 맞는 것 같아.”
“주인님께 그런 검술 실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 꼭 유진이 언니를 보는 줄 알았다니까요?”
“유진이 스타일을 어느 정도 참고하기는 했지. 이 정도로 쓸 만할 줄은 몰랐지만.”
“그러게 말이에요. 아무리 대련이라도 저 멤버들을 이길 줄은….”
소피아는 앵무새처럼 재잘거리면서도 노구덕의 몸 구석구석을 놓치지 않고 정성껏 닦아냈다. 노구덕은 느긋하게 앉은 채로 그녀의 열성어린 봉사를 만끽했다.
“대련 룰이 일방적으로 내게 유리했거든. 솔직히 말해서 마력과 투기 제한이 걸린 룰에서 충왕각인은 반칙이나 다름없지. 실전이라면 어떻게 될지 몰라.”
“글쎄요… 그렇기는 하지만, 실전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는 이 느낌은 뭘까요오? 이래봬도 제 감은 꽤 날카로운 편이라구요?”
노구덕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미소로 소피아의 말을 받아넘겼다.
“주인님,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얼마든지.”
“주인님께선 이레시온이 발레기우스에게 떨어졌다고 하셨죠.”
“그랬지.”
“저는 주인님의 말을 믿어요. 발레기우스가 그 정도의 힘을 지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지금 이레시온은 잠잠하고, 대륙에 그 속사정을 아는 사람은 없잖아요? 퀸즈가든으로 복귀한 유라… 언니도 별다른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고 하고요.”
“그렇지.”
속편한 노구덕의 대답이 못마땅했는지, 소피아의 매끄러운 이마에 몇 겹의 주름이 생겨났다.
“…주인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이레시온을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발레기우스에게 시간을 줘선 안 되니까요. 리베르타와의 동맹 추진도 틀림없이 그걸 염두에 두신 거겠죠.”
“잘 알고 있구나. 역시 소피아야. 아주 똑똑해.”
칭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소피아의 얼굴은 살짝 찡그린 그대로였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죠? 막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무턱대고 병사를 일으켰다간 공감을 얻지 못할 텐데요.”
“걱정 마라.”
“네?”
“전쟁은 리베르타가 일으킬 거다. 우린 그쪽에 얹혀 가면 되는 거야.”
소피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서부동맹과 도미니온의 영토를 손에 넣은 레그나토르가 대대적인 재정비에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로, 리베르타 또한 내부정리로 정신이 없는 상황이다.
그런 형편에 중앙의 대국 이레시온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니? 노구덕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보는 그녀지만, 이번만큼은 현실성이 없었다.
“…주인님, 죄송하지만 이해가 되질 않아요. 리베르타가 왜….”
“궁지에 몰린 쥐새끼가 택할 길이 하나밖에 없거든.”
“……?”
“윤희지가 생각보다 일을 잘 해줬어.”
가만히 귀 기울이던 소피아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윤…희지요? 아! 설마 리베르타에서 벌어진 일이…!”
“그래. 본국에서 스캔들이 크게 터졌으니 당연히 소환령이 떨어지겠지. 적당한 증거물도 던져놨으니까, 못해도 직위해제까지는 따 놓은 당상이겠고. 그걸 뻔히 아는 쥐새끼가 순순히 소환에 응할까?”
“아아….”
“레그나토르는 이의를 제기한 당사자고, 본국에 가면 끝장이니 당연히 남부의 쥐새끼가 기댈 곳은 하나야.”
소피아는 짝!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이레시온!”
“정답이다. 슬슬 소식이 올 때가 됐군.”
“어마!”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댄 노구덕은 소피아의 보드라운 몸뚱이를 위로 잡아끌었다. 잠시 놀라는 듯하던 소피아는 곧 배시시 웃으며 그의 배 위에 몸을 겹쳤다. 잠시 후, 막사 내부가 자지러지는 여인의 교성으로 가득 찬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리베르타의 남부총독 엘리엇이 본국을 배반하고 중부의 이레시온에 합병을 요청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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