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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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즉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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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가 왕이 된 사례는 노구덕이 최초가 아니다. 이전에도 투르의 플랑기스가 왕을 자처한 적이 있었으며, 일례로 북부의 명왕이나 동부의 검신은 즉위식만 올리지 않았다 뿐이지 실제론 왕이나 다름없는 위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그나토르처럼 대륙 전역에 왕국을 선포하며 대대적으로 즉위식을 거행한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투르의 플랑기스라고 해봐야, 즉위식을 거행하긴 했지만 알아주는 이 하나 없었으니 당연히 논외다.
노구덕의 즉위식은 새로이 수도로 내정된 제네시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 규모는 지금껏 레그나토르에서 열린 행사 중 사상최대로, 일각에서는 실상 황제의 즉위식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즉위식은 최대한 화려하고, 성대하게 열 겁니다.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날인데, 어찌 고작 푼돈을 아낄 수 있겠어요?’
행사를 주관한 소피아는 아주 작심한 듯 돈을 들이부었다. 덕분에 재무부 수장인 루가니의 넉넉한 얼굴이 한순간에 폭삭 늙어버리고, 차장인 김진솔의 눈가가 퀭하게 들어갔지만, 즉위식에 정신이 팔린 이들은 누구 하나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의 눈물겨운 희생이 영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새 당일로 덜컥 다가온 즉위식은 사상최대규모라는 말이 걸맞게 대성황을 이루었던 것이다.
여섯 겹의 외성을 자랑하는 대도시, 제네시스의 내부는 인산인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시 교통이 완전히 마비될 지경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골목가의 펍은 물론이고 길가의 노점상들까지 손님이 바글바글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보고에 의하면 요 일주일 간 제네시스에 출입한 외지인이 수십만 명이라고 했다. 소피아의 주장대로 사전에 외성벽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가도를 정비하는 등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면, 과도하게 뜨거워진 축제 열기에 도시 전체가 먹통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네시스를 방문한 손님들은 자국민들뿐만이 아니었다. 대륙각국에서도 축하 사절단을 보내왔다. 이들이 거느린 수행원들만 해도 천 단위를 가뿐하게 넘기는 규모였다.
북부연합에서는 현 수뇌인 강옥교, 여위량 부부가, 북부동맹에서는 서열 2인자인 청룡왕 이정이, 북부의 성지 소드챈트리에선 현 당주 무검 육지백이 두 명의 사형제들을 데리고 제네시스를 방문했으며,
레그나토르의 속주인 모고르에서도 왕자 자하드가 참가했고, 중부의 이레시온에서는 성갑왕 에드가가, 동부의 리베르타에선 행정부 수반 윤희지가 대규모의 사절단을 이끌고 얼굴을 비추었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구왕조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이레시온이 사절단을 보낸 것은 꽤 의외의 일이었다. 이는 서부를 일통한 레그나토르의 현 위상이 그만큼 드높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물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리베르타와 이레시온의 긴장 상황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식자라면 양측의 사절단이 결코 순수한 호의를 품고 있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즉위식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이지만, 그 속뜻은 각자 달랐다. 리베르타의 주목적은 원군 요청이고, 이를 뻔히 알고 있는 이레시온은 결사적으로 두 세력 간의 동맹을 저지하려 할 터.
두 나라의 사절단을 낀 레그나토르가 어떤 줄다리기를 보여줄지, 그 경과를 지켜보며 노구덕의 정확한 속내를 파악하자는 게 즉위식에 참석한 각국의 의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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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지야, 정말 고마워. 이렇게 일부러 시간까지 내서 찾아와줘서.”
“아니요. 저희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데요.”
“후훗,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아, 차라도 마실래?”
“유진이 언니 차라면 언제나 환영이죠.”
“얘도 참, 괜한 소릴….”
상냥하게 미소 짓는 임유진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윤희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게 사랑받는 여자의 얼굴이란 걸까.
임유진은 평소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대담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녀의 전신을 한 겹으로 감싼 붉은 드레스는 불을 연상케하는 그녀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무척 잘 어울렸지만, 그만큼 노출도가 상당했다. 깊은 가슴골을 강조한 전면이야 그렇다 쳐도, 엉치뼈 바로 위까지 트인 바람에 설원 같은 허리를 그대로 노출한 뒤쪽은 차마 눈을 두기가 민망할 정도다.
윤희지의 빤한 시선을 의식한 임유진은 볼에 옅은 홍조를 띄우며 고갯짓을 했다.
“차림새가 조금 그렇지? 나잇값 못한다고 가희가 어찌나 놀려 대는지…. 지금도 부끄럽다니까.”
“아니에요. 너무 예쁜걸요.”
“그래도 좀… 민망해서. 공식석상에는 이 숄을 걸칠 거야.”
“그것도 어울릴 것 같네요.”
임유진의 가리킨 진갈색의 숄을 본 윤희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직 영화배우인 자신의 눈으로 봐도, 저 숄과 드레스는 처음부터 한 세트로 만들어진 것처럼 색감이 잘 어우러졌다.
물론 임유진이란 모델 자체가 별다른 꾸밈없이도 워낙 옷을 잘 살리는 스타일이긴 하다. 솔직히 말해서, 임유진에게 뭘 입혀놓은들 그녀에게 혹하지 않을 남자가 있을까? 그녀 정도라면, 설령 거적때기를 둘렀더라도 그 자체를 패션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레벨이다.
“흥.”
윤희지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맞은편의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는 다른 여인들이 보였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콧바람 소리를 낸 데모나다. 그녀는 윤기 나는 검은 깃털로 어깨 부근을 장식한 드레스를 입었다. 실핏줄까지 도드라져 비쳐 보이는 투명한 피부와, 퇴폐적인 흑발흑안의 매력을 간직한 그녀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드레스다.
그 옆에는 뚱한 표정의 신소율이 앉아 있다. 그녀가 걸친 연갈색의 드레스는 임유진, 데모나와는 달리 별다른 장식 없이 동그란 어깨만을 드러낸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그 간소한 면이 그녀의 발랄한 매력을 더욱 살려주는 듯했다.
마지막, 가장 끄트머리 쪽에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연신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는 안세희가 보였다. 그녀의 드레스는 사제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눈부신 순백이었는데, 디자인보다는 활동성과 편의성에 중점을 둔 듯했다. 아무래도 임산부라는 점을 고려한 것일 터.
행사를 주관하느라 바쁜 소피아의 차림은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임유진을 비롯한 네 여인은 모두 옷차림에 신경을 쓴 티가 역력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오늘 즉위식이 끝나면 그녀들의 위치는 왕후(王后)가 된다. 어찌 보면 오늘 행사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했으니, 대외적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위치였다.
그 왕국의 안주인들 중 둘. 데모나와 신소율이 노골적으로 불편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데모나야 그러려니 하지만 신소율의 저런 눈빛은 그녀에게도 조금 충격이었다.
윤희지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유지한 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데모나 님,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쓸데없는 가식은 집어치워. 네 용건이야 뻔하니까.”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데모나답게, 처음부터 돌직구다. 하기야 그녀들이 바보도 아니고, 일부러 윤희지가 사전에 미리 찾아오기까지 한 속내를 모를 리가 없다.
현재, 이레시온과 리베르타는 언제 전쟁이 발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긴장시국에 직면해 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가장 큰 변수는 당연히 서쪽의 강대국 레그나토르의 참전 여부다.
리베르타는 어떻게든 레그나토르에게 원군을 보내달라 설득할 것이고, 이레시온은 둘 사이를 최대한 방해하려 애쓸 것이다.
특히 사절로 방문한 윤희지의 심정은 굉장히 절박했다. 노구덕의 꾐에 넘어가 나라의 절반을 적국에게 가져다 바친 꼴이 되었으니, 그 실수를 만회하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군을 얻어내야만 했다.
식전에 비공식적으로 이곳을 방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임유진, 신소율과의 사적인 친분을 빌미를 이용해 조금이라도 노구덕에게 입김을 넣어보려는 같잖은 수작이다.
물론 노구덕이 이런 것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란 건 그녀도 안다. 그러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시도해야 하는 게 윤희지의 입장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자책감에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막상 대면한 옛 지인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더 무미건조했다.
“저희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그 관계가 뭔데? 애들이 태어났을 때 꽃 한 다발 보내지도 않은 관계 말이야?”
“…….”
윤희지의 입술이 그대로 붙어버린 것처럼 다물렸다. 데모나는 노골적인 경멸의 빛을 드러내며 매도에 박차를 가했다.
“원병을 청할 셈이라면 공식 절차를 밟아. 여기서 친한 척 하며 알랑대지 말고. 물렁한 임유진은 널 어떻게 여기는지 모르겠지만, 난 네 얼굴만 봐도 구역질이 나.”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원천봉쇄를 당했다. 궁지에 몰린 윤희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주변을 살피다, 이내 곧 체념해버렸다. 주변의 어느 누구도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탓이었다.
임유진은 씁쓸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피했고, 신소율은 오히려 적의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 우물거리는 안세희야 애초에 발언권이 있어 보이는 것 같지도 않았고.
“…실례했습니다.”
참담한 기분이 된 윤희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더 있어봐야 그녀만 추해질 뿐이었다.
그때였다.
“무슨 일이야?”
“아저씨!”
내내 탐탁찮은 표정이던 신소율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스프링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냅다 달려가 문을 열고 들어온 남성에게 알렸다. 당연히, 그 남성은 노구덕이었다.
“인석아, 화장 번진다.”
“어차피 별로 하지도 않았는데요, 뭘. 우리 데리러 왔어요?”
“그래. 슬슬 나가야지.”
노구덕은 말끔한 정장차림이었다. 감청색의 외투를 바깥에 걸치고, 안쪽에 진회색의 옷감을 덧대서 묵직하고 중후한 분위기를 살린 코디였는데, 그의 덩치가 워낙 큰데다 근육들까지 불퉁불퉁 불거져 나오니 어째 본래의 의도는 사라지고 타이트한 군복을 걸친 장교 같은 느낌이었다.
“무슨 왕이 이렇게 입어요? 어디 훈장 받으러 가는 군인도 아니고.”
“뭐 어떠냐. 나만 편하면 됐지. 다른 건 영 답답하단 말이다. 차라리 갑옷을 입을까?”
“에이, 됐어요. 그러면 껴안을 때 재미없잖아.”
“앙큼하기는.”
“히히힛.”
노구덕이 시시덕거리는 신소율과 이야기하는 사이, 나갈 채비를 마친 다른 여인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여보.”
뒤를 돌아본 노구덕은 갑작스레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양팔을 과장되게 펼치며 요란을 떨었다.
“오, 우리 마님들! 이야… 이 미모들 좀 봐. 눈이 부셔서 뜨지도 못하겠다.”
“호호호, 당신도 참.”
“그런 아부를 하려면 눈이라도 감는 시늉을 하는 게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하긴, 그게 네 한계겠지.”
“가, 감사합니다….”
몸에 두른 드레스처럼 십인십색의 반응을 보이는 여인들. 노구덕은 가장 가까이 있는 신소율을 시작으로, 안세희, 데모나, 임유진과 가볍게 입맞춤을… 하려 했지만은, 데모나만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중에 소피아에게도 잊지 말고 해주셔야 해요?”
“벌써 하고 왔어. 그 녀석, 너희들 오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고. 그보다 오늘밤은… 알지?”
“…모, 몰라요.”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는 말에, 능금처럼 얼굴을 붉힌 임유진은 작게 앙탈하며 방을 빠져나갔다. 임유진의 부끄러워하는 태도로 보나, 그 뒤태를 바라보는 노구덕의 음충맞은 웃음을 보나, 두 사람이 약속한 게 무엇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아저씨, 여기서 꼭 그런 말을 해야 돼요? 남사스럽게시리…”
“남사스럽긴. 이런 건 금슬이 좋다고 하는 거다.”
“하여튼 무슨 말을 못해요. 세희야, 가자.”
“아… 네!”
늙은이처럼 혀를 찬 신소율이 안세희와 함께 방을 나가고, 이어서 데모나의 마뜩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여튼… 짐승 같은 인간.”
“허험. 짐승이 아니면 어떻게 너희들을 다 상대하겠냐? 데모나, 너도 잊지 마라. 오늘 아란이 꼭 동생을 만들어 줄 테니까.”
“꺼져.”
“새침하기는.”
찬바람을 쌩쌩 날리는 데모나까지 방을 나서자, 실내엔 한 사람 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노구덕이 나타난 이후로 줄곧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 윤희지였다.
노구덕은 그때서야 비로소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우두커니 선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나간 것처럼 혼미해 보였다.
“윤희지, 너도 늦지 마라.”
“…네? 아, 네….”
퍼뜩 정신을 차린 윤희지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대꾸했다. 힘이라곤 전혀 실려 있지 않은 풀 죽은 목소리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노구덕은 말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그는 그녀가 여기 왜 왔는지, 뭘 원하는지 한마디도 묻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하나, 윤희지의 정신은 이미 노구덕에게 있지 않았다. 어두운 방 안에 홀로 남겨진 그녀의 머릿속은 방금 전에 보았던 그 장면들을 끊임없이 반복 재생하는 중이었다.
행복한 미소. 맑은 웃음. 사랑스런 입맞춤….
그 모두가 평생토록 그녀가 바라던 것이었는데.
“하아아….”
부러움과 질시, 원망으로 점철된 한숨이 터져 나온다. 깊게 고인 숨을 털어낸 윤희지는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여전히, 그녀의 초점이 닿는 곳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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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블루트리님의 코멘을 보고 나니까 확실히 승정원 같은 비서실이 없더군요..
비서.. 비서라.. 음, 비서는 소냐로 하면 되겠네요! 비서실 이름은 뭐라고 지어야 하려나…
인터넷 연재본은 당연히 이북 발간 뒤에도 유지됩니다. 내용은 변화 없고요.. 별개입니다.
분량상 즉위식 장면은 생략하고, 바로 본 게임(?)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마지막 전쟁에 앞서, 히로인 별로 그간의 소회를 짧게 나누는 장면을 넣는다고 말씀드렸는데요.
히로인 한 명 당 한 회가 아니라 한편 당 둘 정도로 채워 넣을 생각입니다. 분량 문제도 있고, 너무 늘어지는 것 같기도 하니까요.
이번주는 이북 교정 병행으로 인해 연참이 힘든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ㅠㅠ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