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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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즉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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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식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섯 명의 왕후를 발아래에 두고, 제네시스의 가장 높은 왕좌에 앉은 노구덕은 올해를 레그나토르의 개국 원년(元年)으로 선포했다.
연맹 레그나토르가 아닌, 왕국 레그나토르의 시작이었다.
제네시스의 중심에서 새로운 하늘이 열린 그 시각.
내성 후미진 곳의 어느 고급 술집에선, 장차 왕국을 이끌어갈 차세대의 신성들이 모여 소소하게 잔을 나누는 중이었다. 한승우를 필두로 한 임가희, 데미안, 소냐가 바로 그들이다.
원형 테이블을 두고 둘러앉은 네 사람의 앞에는 각기 다른 빛깔의 음료가 담겨 있었다. 한승우는 조금 냄새가 독한 술, 임가희와 데미안은 도수가 낮은 술, 술을 하지 않는 소냐는 시큼한 향이 나는 오렌지주스다.
“…지금쯤 즉위식도 끝났겠네.”
푸념하듯 말하는 임가희의 입에선 옅은 술 냄새가 났다. 뺨에 옅은 홍조가 어리긴 했지만, 취한 것 같지는 않다.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이젠 공주님이잖아.”
“공주님? 하유, 왠지 부끄럽다. 거긴 가지 않아도 괜찮아. 엄마한테도 말했고, 아빠도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 저기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엄청 부담된다구.”
“그렇기도 하겠네.”
고개를 끄덕이는 데미안의 옆에서, 오렌지주스로 입을 축인 소냐가 말했다.
“이제는 왕족이니까요. 부담을 가지는 건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맞아. 엄마도 그런 말을 했었어.”
평소라면 가르치는듯한 동생의 말투에 발끈했을 임가희가 오늘은 왠지 모르게 얌전하다. 그녀가 더 이상 예전의 천둥벌거숭이가 아니란 방증이다.
높은 지위에는 반드시 그만한 책무가 따른다. 그녀의 어머니인 임유진이 누누이 강조했던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만인의 우러름을 받는 왕족이 되었음에도 상당한 부담감이 뒤따랐다. 여느 철없는 아이들처럼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벅찰 만큼 뿌듯하기도 했다.
서부 최초의 통일 왕국. 그리고 온 대륙이 인정하는 최초의 헌터 출신 왕. 그런 위업을 이룬 이가 자신의 아버지였으니,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까. 밖에만 나가면 노구덕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지천에 가득하고, 온 술집의 음유시인들의 입만 열었다 하면 그의 업적을 노래한다.
동부의 검신과 더불어 살아있는 전설로 회자되는 유일한 존재. 그게 서부의 무신, 노구덕이다.
임가희는 슬쩍 턱을 괴었다. 잠결 같은 나른함에 몸을 맡긴 그녀는 위대한 아버지와 처음 만났을 당시를 회상했다.
어머니도 그랬고, 자신도 그렇다. 그는 어둠 속에 매몰되어 있던 모녀를 구한 구원자였다. 또래들에게 따돌림 당하던 자신을 격려하던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어린 시절 수도 없이 올라탔던 그 너른 뒷목의 든든함도….
‘고마워요, 아빠. 평생 효도할게요.’
임가희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이지러진다. 그전까지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부정(父情)을 몸소 느끼게 해 준 세상 유일한 아버지다. 무서울 때는 한없이 무섭지만, 자상할 때는 누구보다 너그러운 남자. 어릴 때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세월이 흘러 한 여자가 된 지금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어머니인 임유진뿐 아니라, 작은 어머니들이 그에게 그렇게 목을 매는 까닭을.
“…아직도 안 믿겨져. 우리 아빠가 왕이라는 게.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대단하신 분이다.”
추억으로 물든 임가희의 눈매가 살짝 붉어졌다. 그녀의 혼잣말에 맞장구 친 이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한승우였다.
“승우 오빠?”
“네 아버지는 존경받을 만한 분이야. 헌터라면, 남자라면 누구나 경외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 해드려라.”
“…또 비꼬는 거야?”
“그런 게 아냐.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나처럼… 후회를 남기지 말란 소리야.”
씁쓸하게 말을 줄이는 한승우를 일별한 임가희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일찍이 불의의 사고로 양친을 잃고,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피 튀기는 전장에 뛰어들어야만 했던 그의 처지가 떠올랐던 탓이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앵두 같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유리잔 속을 빤히 응시하던 임가희는, 돌연 뭔가 크게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승우 오빠, 우리 아빠 존경한다고 했지? 진심이야? 얼마나 존경해?”
“얼마나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진 한승우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을 향해 빤한 시선을 던지는 임가희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아니,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이야.”
왠지 마지못해 답하는 기분이었지만, 그 대답엔 진심어린 속내가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그, 그럼… 우, 우리집에 들어오는 건 어때? 그러면 아빠한테 지금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테고….”
꾸물거리며 말하는 임가희의 안색이 물러터지기 직전의 홍시처럼 새빨갛다.
“…뭐라고?”
“그,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잖아!”
“아니, 그 전에.”
“어… 으, 으…!”
숨이 턱 막힌 임가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술기운을 빌려 간신히 용기를 냈는데,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단어를 듣지 못했다는 말인가.
“데미안, 우린 잠깐 나가죠.”
“응? 아… 그, 그래야겠지?”
아무리 연애경험이 없어도 그렇지, 사귀고 싶다는 말을 이런 타이밍에, 저런 식으로 하다니. 잠깐 어이없는 눈으로 언니를 쳐다본 소냐는, 어리벙벙해 있는 데미안의 소매를 잡아 끌고 밖으로 나갔다.
‘힘내요.’
‘고, 고마워.’
동생과 나직이 눈짓을 주고받은 임가희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의 말은 자기가 생각해도 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 말은… 그러니까, 나더러 데릴사위로 들어오란 거냐?”
“…….”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무슨 말을 꺼낼까 궁리하던 임가희의 낯이 하얗게 굳어졌다.
“드, 들었어?”
“들었지. 너희집에 들어오라며?”
“못 들었다고 했잖아!”
“그런 적 없다. 다시 물어봤을 뿐이지.”
“이이익!”
“너무 화내지 마라. 덕분에 둘만 남아 있을 수 있게 됐잖아.”
당장이라도 화산처럼 터질 것만 같았던 임가희의 기세가 상당히 누그러졌다. 언제 팔을 성화를 냈냐는 듯, 다시 얌전한 요조숙녀로 돌아간 임가희는 양손으로 볼을 감싸며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방금 전의 말은 늘 무뚝뚝한 한승우답지 않은 멘트였다. 일부러 둘만 남겨서 뭘 어쩌겠다는 것일까? 분홍빛으로 물든 임가희의 머릿속은 금세 뒤죽박죽 헝클어졌다.
‘뭐야? 뭐야 이거? 오, 오빠도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걸까?’
“곧 있으면 전쟁이 일어날 거다.”
“에, 엥? 전쟁?”
“그래. 너도 알고 있을 테지만, 이레시온과 리베르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그쪽은 벌써 소규모 국지전에 돌입했다는 소문도 있고… 이번 즉위식에도 두 나라의 사절단이 가장 많은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어떻게든 우릴 자기들 쪽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거겠지.”
이런저런 기대를 잔뜩하고 있던 임가희의 표정이 허탈하게 무너졌다.
이 남자. 여기서 갑자기 웬 정치얘기란 말인가. 김이 팍 새버린 임가희는 멍하니 한승우의 옆얼굴을 응시하다,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그건 왜?”
“리베르타와 싸우게 될지, 이레시온과 싸우게 될지는 몰라. 의장님… 아니 폐하의 의중에 달린 거겠지. 어찌됐든 난 그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싶다. 대륙 통일의 향방이 걸린 전쟁에서 그저 그런 조연으로 남고 싶지는 않아. 반드시 공을 세워서, 당당히 어전회의에 이름을 올릴 거다.”
“응, 그건 알겠는데….”
“그때가 되면, 나와 정식으로 사귀어 줘.”
갑자기 사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한승우의 진지한 눈과 시선을 마주한 임가희는 그대로 넋이 달아난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뇌리엔 ‘사귀어 줘.’라는 끝마디만이 끝 없는 메아리처럼 왕왕 울리는 중이었다.
문득, 굳센 손아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임가희는 참았던 숨을 크게 터뜨렸다.
“난 너와는 달라.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하지만 간부가 된다면….”
“이 바보 오빠야!”
잔잔하게 이어지던 한승우의 말이 뚝 끊겼다. 그의 말을 싹둑 잘라먹은 임가희는 버럭 역정을 냈다.
“오빠는 왜 맨날 그런 말만 해? 아직도 내가 그런 여자로 보여? 난 그런 거 신경 안 쓴단 말이야! 우리 아빠 존경한다며! 그럼 알 거 아냐! 아빠도 엄마도 그런 건 아무 상관 안 한다고! 그걸 아직도 몰라? 이 바보 멍청이!”
한승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가 울고 있는 여자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게다가 딱히 생각나는 말도 없었다.
임가희의 말이 맞다. 언제부턴가, 그는 보이지 않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패터슨의 추천으로 레그나토르에 들어오고, 비슷한 연배의 임가희와 데미안, 소냐와 한 조로 엮이면서 그 팀의 리더를 맡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실전경험을 쌓은 그와는 달리, 나머지 세 사람은 전장이라곤 나가본 적 없는 햇병아리였다. 그 때문에 은연중 얕보는 마음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 사람은 레그나토르가 엄선한 인재라는 것을 증명하듯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그 중에서도 ‘괴물’ 소냐의 성장세는 나름대로 동년배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한승우의 자존심을 산산조각 냈을 정도였다.
규격 외의 괴물인 소냐는 논외로 치더라도, 임가희의 잠재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신기 샤프슈터의 계승자로 인정받은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상승했다. 처음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았던 그녀가 얼마 되지 않아 한승우 자신과 거의 호각으로 붙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질투심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자수성가한 한승우가 보기에, 그들은 운 좋게 좋은 환경을 만나 뿌리내릴 수 있었던 난초였다.
예전에 임가희에게 역정을 냈던 것도, 은연중 가지고 있었던 시기심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녀와 한 조를 이루어 함께 전쟁을 치렀던 한승우는 임가희가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에겐 그런 노력을 ‘운 좋다.’라는 한마디로 폄하할 자격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의도로 한 건 아니었지만, 이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임가희에겐 상처가 된 모양이다.
무엇보다 물기 젖은 그녀의 얼굴을 보니, 어째서인지 가슴 한편이 아려오며 반드시 사과를 해야할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나도 미안해. 갑자기 화내서.”
젖은 눈가를 훔친 임가희는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오빠가 그런 의도로 말하지 않았다는 거, 알아. 그리고… 고마워.”
“대답은?”
“당연히 오케이지. 하지만 혼자서는 안 돼. 전쟁에 나가더라도 같이 나가야지. 우린 한 팀이니까. 안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피식 입매를 터뜨린 한승우는 장난스럽게 잔을 흔드는 임가희와 술잔을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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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에서 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던 두 사람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됐나 보네.”
“그런 것 같습니다.”
데미안은 조심스럽게 소냐의 눈치를 살폈다. 언니의 사랑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기 때문일까? 드물게 훈기(薰氣)가 감도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꿈에서 나오는 요정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혹시, 지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취기를 쫓아내듯, 조용히 심호흡을 한 데미안은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며 입을 열었다.
“저기, 소냐…. 할 말이 있어.”
“죄송합니다.”
데미안은 눈을 깜박였다. 뭔가 시작도 하기 전에 철벽이 둘러쳐진 느낌이다.
“응? 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데미안의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어… 그, 그래?”
멍멍하게 서 있던 데미안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소냐의 눈썰미라면 진작 눈치챘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언제부터… 알았어?”
“일 년 전부터 알았습니다.”
“거의 처음부터 알았구나….”
어색하게 이어지는 침묵.
“역시 난… 안 되는 거야?”
소냐는 데미안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맞은 편의 벽을 보고 있던 그녀는 이내 깊은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저는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늘 사무적인 말투가 보다 부드럽게 바뀌었다. 최대한 데미안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나름의 배려다.
“그래…. 그렇구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부럽다.”
그걸 모를 데미안이 아니지만, 목소리에 쓴맛이 배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데미안은 자상한 사람이에요. 분명 저보다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하하. 말만이라도 고마워.”
웃음기 어린 말과는 달리, 실연의 고배를 들이켠 남자의 표정은 씁쓸하기만 하다.
고개 숙인 데미안을 지켜보던 소냐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지금 그에겐 어떤 말이라도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랑이 핀 자리에, 한 사랑이 저문다. 정말이지 얄궂은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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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어제는 교정본 수정에 집중했습니다. 데드라인이 일요일까지라 발등에 불이 떨어졌네요. 이번주 교정본 수정을 끝내고 나면 연재에 다시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북 6권까지 교정본이 나왔는데요, 예전에 쓴 걸 다시 읽다보니 감회가 참 새롭네요.. 뭔가 오그라들기도 하고요.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