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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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대륙전쟁, 막이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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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그나토르가 성갑왕이 이끄는 이레시온의 사절단을 몰살시킨 그날, 리베르타의 오천 정예가 이레시온의 변경도시 센츄라스를 침공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으론 검신이 날린 한 번의 참격에 도시 전체가 반으로 갈라졌다고 했다.
물론 그냥 들어선 도저히 믿지 못할 사실이다. 하지만 그 소문의 진위가 어떻든 간에, 변경도시 센츄라스는 리베르타의 공세를 겨우 한 시간도 버티지 못했다.
남부를 무인지경으로 휩쓸어버린 검신의 칼날은 중부에서도 그 위용이 여전했다.
이레시온은 하루 만에 다섯 개의 도시를 빼앗겼으며, 사방에 퍼져있던 주둔군을 물리며 퇴각에 퇴각을 거듭했다. 전쟁 직전, 있는 대로 거드름을 피우며 리베르타의 항의를 무시했던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어쨌든, 이레시온을 친 검신의 의중은 명약관화했다.
전쟁을 시작한 이상, 그는 남부 지구를 돌려받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럴 거였으면 이레시온 본토를 치는 게 아니라 남부 지구에 쳐들어갔을 터.
그는 아예 레그나토르와 힘을 합쳐 이레시온을 대륙에서 지워버릴 심산이었다.
동부에서 일어난 리베르타군은 이레시온의 수도인 이레브를 향해 진격을 거듭하고,
서부의 레그나토르군은 제 2도시인 시온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면 이레시온은 양쪽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적군을 막기 위해 전력을 나눌 수밖에 없게 되고, 각개격파의 위험이 커지게 된다.
이것이 김정인이 그린 그림이자, 대다수의 언론과 전문가들이 예측한 전쟁의 진행 구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전쟁 발발 둘째 날부터 허망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레그나토르의 왕 노구덕.
당연히 리베르타와 발을 맞추어 군사를 일으킬 줄 알았던 그가, 전쟁이 벌어진지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잠잠했던 것이다.
성갑왕을 죽여 대놓고 도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전쟁이 벌어지니 손가락만 쪽쪽 빨며 구경한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이레시온이 리베르타를 격퇴하고 나면 그 다음 표적은 레그나토르가 될 게 자명한 일. 레그나토르로서도 수수방관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의혹어린 수많은 시선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레그나토르.
그간 꼼짝도 않던 서부의 거인이 마침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것은, 전쟁이 시작된 지 닷새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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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안 돼.”
“뭐가?”
마지막으로 남은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고 옆으로 치워버린 노구덕은 그제야 비로소 고개를 돌려, 비뚜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은 우아하게 다리를 꼰 채였다. 살집 하나 없어 보이는 마른 몸매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물결치는 눈매에서 오묘한 색기가 느껴지는 여인이다.
얼핏 삼십 대로 보이는 요염한 여인은 레그나토르 감찰부의 수장인 일라이자였다.
레그나토르의 요직을 맡은 여인들 중 내로라하는 여장부 아닌 이가 어디 있겠냐마는, 일라이자는 그중에서도 특히나 독보적인 인물이다. 피의 숙청 당시에도 노구덕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공적을 쌓았고, 골리앗게이트를 비롯한 수많은 전장에서 눈에 띄는 전과를 올렸다. 젊은 나이에 감찰부의 수장자리에 오른 것만 봐도 그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 그걸 감안한다 해도, 노구덕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는 너무 건방졌다. 슬쩍 꼰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고 비스듬히 머리를 기울인 꼴이 마치 상전을 보는 듯하다.
그 거만한 태도를 앞에 둔 노구덕은 낮게 웃으며 탁자를 두드렸다.
“요샌 둘만 남았다하면 태도가 돌변하는군. 어차피 들켰으니 이젠 숨길 필요도 없다는 건가?”
“뭐, 비슷해. 요즘 만사가 귀찮아졌거든. 당신에게 너무 휘둘리는 것도 싫고.”
대답하는 일라이자… 아니, 퀸젤의 목소리는 상당히 자조적이었다. 어찌 들으면 허무주의에 찌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노구덕은 느릿하게 머리를 주억였다.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퀸젤의 처지가 어렴풋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남은 것이 없다. 데모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혈족들이 목숨을 잃었고, 가문이 수백 년 간 쌓아온 유산도 고스란히 뺏겨버렸다. 본래 그런 것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라지만, 나고 자랐던 가문이 한순간에 몰락해버렸는데 어떻게 감흥이 없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이웃이나 마찬가지인 위원회도 좋은 처지는 아니다. 실상 북부동맹의 그룬가르드를 빼면 각지로 흩어진 구왕조는 모조리 망해버렸으며, 중앙에서 근근이 버티던 이레시온의 수뇌들도 발레기우스에게 당했다고 한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친구인 아가레스트밖에 없다. 퀸젤이 아가레스트의 구원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도, 어쩌면 달리 마음을 쏟을 곳이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널 멋대로 휘두를 생각은 없다만. 말했잖아. 이대로만 지내주면 된다고.”
“글쎄. 곧이곧대로 믿진 못하겠네. 당신은 워낙 음흉한 인간이니까.”
“나도 강요는 안 해. 그건 그렇고…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지?”
“당신이 이번에 얻은 전리품들. 왜 망쳐놓는 거야?”
“내가 전리품들을 망친다고? 아하.”
그제야 퀸젤이 묻는 바를 알아차린 노구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에 들었어. 성갑왕이 지닌 신기를 모두 마물(魔物)로 만들어버렸다고? 출진이 늦어지고 있는 게 그걸 하느라 그런 거였어?”
“그래. 그게 왜?”
“기가 막혀.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진 퀸젤은 이마를 찌푸리며 성질을 냈다. 물론 에드가에게서 강탈한 신기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노구덕에게 있으므로 그녀가 이래라저래라 할 사안은 아니지만, 대륙적으로 이름 높은 신기가 그런 식으로 더럽혀진 것이 몹시 안타까웠던 탓이다.
성갑 스트롱홀드와 성구 브라이트빅. 성갑왕이 지니고 있던 론다리온의 신기들은 이제 각기 마갑(魔甲)과 마구(魔具)가 되었다.
마검으로 대표되는 마물들은 대개 사용자를 가리지 않고 막대한 힘을 제공한다. 대신 주인의 기력을 갉아먹으며, 차츰차츰 정신을 붕괴시켜 피에 굶주린 광인으로 만들어버리기가 일쑤였다.
평범한 마검이 그럴진대, 한 교단의 최고 신기라면 그 부작용이 얼마나 심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신기를 마물로 만들어버리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라. 당신이 쓸 거였으면 그냥 써도 됐을 텐데 왜 굳이….”
“필요하니까 그런 거다.”
“멀쩡한 신기를 마물로 만들어버린 게? 그게 중요한 출진을 며칠이나 늦출 만큼 대단한 일이야?”
“물론이다.”
“…할 말이 없네.”
그 당당함에 질려버린 퀸젤은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알기나 할까. 노구덕이 한때 처형자 최훈의 손에서 악명을 떨쳤던 뇌굉(雷轟)과 참룡(斬龍), 두 신검조차 마검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붉은 입술을 삐죽인 퀸젤은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사실 신기를 어떻게 하든 그녀가 상관할 바도 아니었던데다, 그녀가 노구덕에게 독대를 청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왕께서 그러시다면 그런 거겠지. 그보다, 아가레스트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걸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당연하잖아. 내겐 이제 그 녀석 밖에 없으니까.”
“데모나가 들으면 서운하겠는데. 넌 그 녀석 고모 아니었나?”
“농담 마. 그 애가 이런 걸로 서운할 리 없잖아. 그리고… 데모나는 충분히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니까,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지. 하지만 아가레스트는 달라.”
“흠.”
팔짱을 낀 노구덕이 뜸을 들이자, 씁쓸히 말한 퀸젤의 눈썹이 매섭게 꿈틀거렸다.
“말해줘. 원래 그런 약속이었잖아? 제네시스엔 없는 거지?”
“미안하지만 말할 수 없다.”
“뭐? 어째서!”
탕! 원목 탁자가 부러질 듯이 흔들렸다. 그러나 애꿎은 탁자를 두들기며 씩씩대는 퀸젤을 응시하는 노구덕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완고했다.
“아가레스트는 내가 가진 최고의 조커다. 어느 게임에서든 조커의 위치를 섣불리 드러내는 경우는 없지.”
“날 믿지 못하겠다는 거야? 여기까지 와서 내가 배신이라도 할까봐?”
“그런 의미는 아니야. 하지만 그만큼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난 이번 전쟁에 모든 걸 걸었어.”
무겁게 말하는 노구덕의 얼굴을 말없이 쏘아보던 퀸젤의 눈이 돌연 표독스러운 세모꼴로 변했다. 뒤를 이은 그녀의 목소리는 짙은 의혹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당신… 대체 아가레스트를 어떻게 쓰려는 거야?”
“말했을 텐데. 내가 가진 최고의 패라고. 최고의 패를 허투루 쓰겠나?”
“말장난하지 마.”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노구덕의 막을 잘라낸 퀸젤은 잔뜩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의 머릿속엔 복수심밖에 없어. 당신이 말했잖아. 그 녀석, 속에 품은 증오가 무뎌질까봐 주기적으로 사람을 죽이며 피를 본다고. 그 피비린내 자자한 한밤의 악몽이 그 녀석이라며.”
“…….”
“아가레스트가 아이들을 보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천만에. 어설픈 기억으로 남느니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거야. 애초에 오래 살 생각이 없으니까 그런 거라고.”
노구덕을 윽박지르듯 으르렁거리는 퀸젤의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지켜보겠어. 만약 그 녀석의 증오심을 이용해서 버림패로 이용할 생각이라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살벌한 엄포가 끝났다.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던 노구덕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턱을 긁적였다.
“…이거 참,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
“충분히 그럴 사람으로 보여. 당신은 무척 교활하니까. 능글맞게 웃으면서 등 뒤에 칼을 꽂을 남자지. 실제로 내가 그렇게 당했으니까.”
“망상이 심하군. 적어도 웃으면서 배신한 적은 없는데 말이야. 내가 체스터에게 붙었을 때도 우리 관계는 깨끗하게 끝난 거 아니었나? 게다가 네 쪽이 먼저 결별 선언을 했었고. 그래도 뭐… 교활하다는 말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만.”
“…흥. 알고는 있군.”
냉랭히 코웃음 치는 얼굴엔 여전히 불신의 빛이 가득하다. 어차피 시간을 들여 그녀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지만, 괜스레 입맛이 씁쓸해 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봐, 내가 아무리 몹쓸 놈이라지만 애들 엄마한테 그런 짓은 안 해.”
“나도 그렇게 믿고 싶네. 유일하게 희망을 거는 부분이야. 당신이란 인간은 그래도… 가족들한테는 자상하니까.”
“억울하면 내 품에 안기든지?”
“꿈 깨셔. 오크 늙은이.”
시답잖은 농을 건네는 노구덕을 찌릿하게 쳐다본 퀸젤은 문득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가레스트는 말할 것도 없고, 나도 당신이 바라는 걸 모두 들어줬어. 군다르의 유산을 모두 넘겨줬고….”
“아, 잠깐.”
퀸젤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손을 들어 올린 노구덕의 한쪽 눈이 깜박깜박 바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뭐하는 거야? 윙크? 작업이라도 거는 거야?”
“요새 좀 피곤해서. 눈이 좀 떨릴 때가 있거든. 별 거 아니니 계속해봐.”
갑자기 넉살을 떠는 낯짝이 왠지 수상쩍게 느껴졌지만, 따져 물을 힘도 없었던 퀸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내가 알고 있는 시스템의 비밀도 모두 알려줬지. 당신이 해달라는 대로 은퇴한 하이 스카우터를 소개시켜주기도 했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음. 전부 큰 도움이었지. 감사하게 생각한다.”
넌지시 속내를 떠보는 질문을 유들유들하게 받아넘기는 노구덕의 얼굴이 무척이나 얄밉다. 살짝 입술을 깨문 퀸젤은 재차 그에게 당부했다. 사실 당부라기보다는 부탁에 가까웠지만.
“…그러니까 그 공로를 생각해서라도, 허튼 수작은 부리지 말아달란 거야.”
“아까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더니.”
“…홧김에 한 소리야. 나로선 이제 당신에게 맞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최대한 노력하마.”
미덥지 못한 대답이 성에 차지 않는 듯,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노구덕을 바라보던 퀸젤은 이내 길게 숨을 내리쉬며 일어섰다.
“이만 갈게. 출진 준비로 바쁠 텐데 시간 뺏어서 미안해.”
“아니. 할 얘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와라.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
“말이라도 고맙네.”
터덜터덜 방을 나서는 퀸젤의 뒷모습이 어딘가 나사 빠진 인형처럼 힘겹게 보인다. 노구덕은 말없이 손을 들어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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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젤 분량도 뽑아냈으니 이제 싸우러 나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