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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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대륙전쟁, 막이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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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출병식에 참가하기 전, 노구덕은 남겨진 가족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세희야, 다녀오마.”
“네. 다녀오세요.”
고개 숙이며 인사하는 안세희는 별다른 부언을 하지 않았다. 노구덕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시커멓게 그늘이 진 눈 밑은 간밤에 그녀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결국 울컥 치솟은 불안감을 참다못한 그녀는 옆을 지나치려는 노구덕의 옷깃을 붙잡고 말았다.
“저….”
“응?”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꾸물거리며 뭔가 말하려다, 금세 입을 닫고 마는 그녀를 빤히 바라본 노구덕은 작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괜한 걱정 마라. 날 못 믿는 거냐?”
“믿어요.”
소리죽여 답한 안세희는 자기도 모르게 볼록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하얀 법복 아래에 새 생명을 품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다가올 전쟁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서일까. 가슴 언저리가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주기적으로 연락하마. 무슨 일 있으면 너도 이쪽에 연락하도록 하고. 애들 보는 건 나타샤가 도와줄 거다.”
“…그럴게요.”
아래로 살짝 기울어진 안세희의 이마에 입을 맞춘 노구덕은 이내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막내에게 충고를 했다.
“인석아. 아빠 잠깐 멀리 다녀올 테니, 엄마 귀찮게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그 장난기 어린 모습에, 못내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안세희의 얼굴에도 흐리게나마 작은 미소가 떠오른다. 노구덕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잠시 꾹 맞잡아주었다.
막내 부인을 겨우 안심시킨 그는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토끼 무리처럼 펼쳐 선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철없는 마음에도 왠지 안세희와 노구덕의 대화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 듯했다.
“너희들, 이리 오너라.”
그가 손짓하며 부르기 무섭게, 움찔 몸을 떤 아이들은 갑자기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속닥이기 시작했다.
“형아, 아빠가 불렀어.”
“송경이 네가 앞장서.”
“왜, 왜?”
해성이의 부름에 이어 당연하다는 듯 지목하는 아란이의 목소리, 그리고 당황한 송경이의 소심한 되물음.
“장남이잖아.”
“그래, 장남이잖아.”
“맞아, 맞아.”
아란이와 하랑, 하율 남매의 합공을 받고 궁지에 몰린 노씨 가문 장남은 어쩔 줄 몰라하며 진땀을 뺐다. 장남이라고 해봐야 해성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동갑이고, 그마저도 아란이와는 차이가 없다시피하다.
송경이는 굉장히 억울했다. 평소에는 장남 대접도 해주지 않는 주제에 이럴 때만 장남이란 말인가.
“아란이 너, 꼭 이럴 때만….”
“남자가 그렇게 쫑알댈래? 아빠 기다리시는 거 안 보여?”
“아, 알았어. 가면 되잖아.”
한참을 아옹다옹하다 겨우 머뭇머뭇 앞으로 나선 송경이를 본 노구덕은 고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몇 번인가 애들 앞에서 살기를 주체하지 못한 뒤로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버렸다. 흉성을 극복한 이후 아이들과의 관계 개선에 힘써 그럭저럭 같이 밥도 먹고, 가벼운 스킨십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애들은 아직도 그를 어려워했다.
이건 조급하게 마음먹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햇빛이 눈을 녹이듯, 천천히 시간을 두고 접근해야 할 문제였다.
“송경아.”
“…예.”
“이번 외출은 좀 길어질 거다. 그동안 네가 작은 엄마 도와서 애들 잘 챙겨줬으면 좋겠구나. 맏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할 수 있어요.”
“그래, 그래야 우리 장남이지.”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노구덕은 이어서 다른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송경이를 지나쳐 다가오는 그를 보자 다시 움찔거리는 아이들이었으나, 그래도 이전처럼 심하게 무서워하지는 않는 눈치다.
“아란아.”
“네.”
몸을 굽힌 노구덕이 눈높이를 맞추자 얌전히 속눈썹을 내리까는 아란이의 얼굴은 제 엄마인 데모나와 판박이였다. 하긴, 송경이를 앞세워 숨은 대장 노릇을 하는 것만 봐도 여간 영악한 게 아니었으니… 마녀의 핏줄을 제대로 타고 났다고 할 수 있겠다.
“너도 이중엔 맏언니니까 송경이 따라서 동생들 잘 챙겨줘야 한다. 알았지? 애들 너무 괴롭히지 말고.”
“저는 얘들 괴롭힌 적 없는 걸요.”
“송경이 침대 옆에 죽은 개구리를 몰래 놔둔 게 누구였지?”
“…….”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아란이의 눈이 슬며시 아래로 늘어진다. 설마 노구덕이 거기까지 알고 있으리라곤 생각 못했는지, 통통한 양 볼이 온통 불그스름하다. 저쪽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송경이의 모습은 덤.
“거짓말은 하면 안 돼.”
“…죄송해요.”
“그래, 알았으면 된 거다. 우리 아란이는 착한 아이니까.”
풀 죽은 아란이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누나 옆에서 알짱거리던 해성이가 얼른 아란이 뒤로 숨는 게 보였다. 네 살배기 해성이는 애들 중에서도 그를 무서워하는 정도가 제일 심했다.
노구덕은 해성이에게 무리해서 다가가지 않았다. 지금은 이 정도가 좋았다.
“해성이도 형, 누나들 말 잘 들어라. 알았지?”
“…….”
“돌아오면 멋진 선물을 주마. 아마 왕뱀 누나가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멋있을 거야.”
그 호언장담에, 말없이 머리만 끄덕끄덕 움직이던 해성이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진, 진짜…요?”
“그럼.”
“우아아!”
역시 어린애들 환심을 사기엔 선물만한 것이 없다. 금세 신나서 즐거워하는 해성이를 두고 흡족하게 미소 짓던 노구덕은, 이내 주변에서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것을 깨닫곤 작게 헛기침을 했다.
“어흠, 물론 해성이 선물만 있는 건 아니지. 얌전히만 지내면 다들 멋진 선물을 받을 거다.”
“만세!”
“와!”
저리도 좋을까. 조금 전의 심각한 분위기는 어디가고, 선물 준다는 한마디에 활짝 핀 얼굴로 좋아하는 걸 보면 확실히 어린애들은 어린애들인 모양이다.
‘끙, 아무리 사탕발림해봤자 장난감 하나만도 못하구만.’
왠지 모를 패배감에 혀를 찬 노구덕은 마지막으로 쌍둥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마침 자기들 차례라는 걸 알고 있던 쌍둥이들도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얼핏 봐서는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똑같이 생긴 미동(美童)들이지만, 옷차림을 자세히 보면 한쪽은 여자애고 한쪽은 남자애란 걸 알 수 있다. 여자애가 누나인 하율이, 남자애가 동생인 하랑이다.
동부의 팔콘 왕국, 트랑키아 왕가의 특징인 순수한 금발금안을 지닌 이 아이들은 특이하게도 노구덕을 거의 무서워하지 않았다. 살기에 질겁한 다른 아이들이 그를 피할 때에도 자연스럽게 품에 안겨올 정도였으니까.
하나 노구덕은 쌍둥이의 그런 행동을 순수하게 반길 수 없었다. 아이들이 왜 그런 행동을 보이는지, 나중에 가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두렵지 않은 게 아니다. 무서운 걸 억지로 참고 있을 뿐이었다.
천재인 아가레스트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일까. 이 아이들은 무섭도록 똑똑했다. 어린 나이에 친모의 부재(不在)를 알아차릴 정도로. 또, 그것을 어른들 앞에서 티내지 않을 정도로 생각이 깊었다. 심지어 쌍둥이는 아가레스트가 친모라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한 듯했다.
기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순수한 금발금안이란 건 보통 흔한 게 아니고, 제삼자가 봐도 아가레스트와 쌍둥이의 용모는 닮은 부분이 많았다. 게다가 아가레스트가 레그나토르 소속이란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 아무리 내부 입단속을 한다 해도 사용인들의 소소한 대화까지 통제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어디선가 흘러든 소문이 아이들의 귀까지 들어간 것일 터. 노구덕이 줄곧 아가레스트에게 아이들을 만나라 보챈 것도 이 때문이었다. 더 이상 사실을 숨기기가 어려워졌으니까.
친모의 생존을 알게 된 아이들은 자신들이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양친 중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노구덕에게 의지했던 것이다.
이건 다른 여인들이 아무리 정을 쏟는다한들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우리 엄마’와 ‘너희 엄마’의 차이가 빚어내는 문제였으니까. 이럴 땐 애들이 나이답지 않게 똑똑한 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녀석들.”
“아빠.”
“아빠아.”
노구덕은 가만히 손을 잡고 선 쌍둥이를 꼭 껴안아주었다. 새근거리는 천사들의 숨소리가 더욱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가 짊어진 책임감의 무게다.
“너희들에겐,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약속하마.”
“정말요?”
“정말?”
“대신, 이건 비밀이다. 다른 형제들한테는 말하지 말고. 알았지?”
긴밀하게 속삭이는 아버지의 약속에 신이 난 쌍둥이는 동시에 힘차게 소리쳤다.
“응! 알았어요!”
“어이쿠,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노구덕은 들떠있는 쌍둥이를 다시 한 번 안아준 다음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뒤쪽에서 힘찬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출병식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신호다.
눈을 돌리자, 내성 밖으로 줄지어 늘어선 채 펄럭이고 있는 수많은 깃발이 보였다.
이제는 정말 가야 할 때다. 준비를 갖춘 수만의 병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오마.”
짧은 한마디를 남긴 노구덕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바람에 나부낀 붉은색 망토가 한순간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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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화는 조금 짧습니다. 대신 12시 전에 한 편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