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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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마신, 융펠
206# 마신, 융펠
겨우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세인트 오렌의 성벽 위에 백기가 내걸린 것을 본 제장들은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앞서 달려 나간 칠천 병력의 위력은 충분히 강력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전쟁교단의 무리가 너무 쉽게 굴복했기 때문이다.
대륙 제일가는 광신도들을 대체 무슨 방법으로 구슬린 것일까? 의문을 풀지 못한 제장들은 활짝 열린 세인트 오렌의 대로를 지나며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학살을 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건 확실히 다행이오. 피는 적게 흘릴수록 좋으니까. 하지만… 흠, 이렇게 쉽게 기가 꺾일 놈들이 아닌데. 도무지 폐하께서 무슨 수를 쓰셨는지 알 도리가 없군.”
“한 가지 확실한 건, 절대 얌전한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길을 지나던 모두가 박승찬의 말에 동의했다. 모든 무장이 해제된 채, 양쪽으로 널찍하게 물러선 군중들의 표정에서 극심한 두려움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신왕병(神王兵)을 특히 두려워하고 있군요.”
“확실히. 고양이 앞의 쥐를 보는 것 같군.”
이번 세인트 오렌 전투에서 압도적인 위력을 폭발시켰던 병력들을 어느새 신왕병이란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보이는 말뜻 그대로, 왕과 신을 동일시한다는 뜻이다.
도일의 말처럼, 세인트 오렌의 패잔병들은 중앙 가도를 삼엄하게 점거한 신왕병들을 극히 무서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죽하면 신왕병 하나가 창대라도 까딱 움직이면 그 뒤의 무리들이 몇 걸음이나 우르르 뒤로 물러나는 장면이 예사로 보일 지경이다. 절대 그들과 접촉해선 안 된다는 지령이라도 받은 듯했다.
동일한 의문을 품은 제장들은 어느새 노구덕이 기다리고 있는 세인트 오렌의 중앙 총본청에 도착했다. 갈색 융단이 끝없이 깔린 길을 지나니, 멀찍이서 오른손에 칼, 왼손에 방패를 든 늠름한 전사의 전신상이 보였다. 전쟁의 신 론다리온을 표현한 대리석 조각이었다.
노구덕은 그 대형 전신상 아래의 옥좌에 앉아 제장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우직한 충견처럼 선 이두식도 보였다.
“어서들 와라.”
“폐하.”
군단장급인 임유진과 유메르바인, 콜트레인과 황석문 등 선두의 간부들을 시작으로, 모든 간부들이 허리를 비스듬히 굽혔다. 전시니만큼 형식적인 예의는 짧고 간결한 군례로 대신하는 거다.
“바깥은? 조용한가?”
“예. 모두 겁에 질린 모습이더군요.”
“흐흐흐. 그렇겠지.”
“폐하. 송구합니다만, 대체 무슨 수를 쓰신 겁니까?”
“수랄 것까지야 있나.”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린 노구덕이 팔을 들어올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이런 거지.”
-끼아아아아아!
펼쳐진 손아귀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의 얼굴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영락없이 고통 받는 망령의 형상이다.
“대사교들을 죽이고 이걸 보여주니 알아서 설설 기더군.”
“허.”
“쿡쿡.”
그제야 노구덕의 수법을 알아차린 간부들의 표정이 허탈해졌다. 심지어 소피아를 비롯한 몇몇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한 트릭이었던 것이다.
노구덕이 방금 보여준 건 실재하는 망령이 아니라 일루전(Illusion), 즉 환상 주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당연했다. 사람의 영혼을 그 자리에서 바로 뽑아버리는 건 십존 수준의 마법사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이다. 괜히 비슷한 효과를 가진 소울 트랩이 정신계 최강의 주문이겠는가. 게다가 노구덕은 때리고 부수는 걸 좋아하는 무투파에 가깝지, 소울 트랩 같은 고위 주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러면 여기서 또 의문이 하나 생긴다. 노구덕처럼 주문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 수만의 광신도들을 깜박 속여 넘긴 환상 주문은 대체 언제 익힌 것일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레그나토르에서 환상 주문의 달인이라고 한다면, 한 사람… 아니, 한 마리밖에 없지 않은가.
“브리트라군요? 어쩐지 보이지 않는다 했는데… 일체화(一體化)하신 건가요?”
“그래. 여기서 팔자 좋게 자고 있지.”
노구덕은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께를 툭툭 두드렸다. 천년을 살아온 검은 뱀, 브리트라가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그에게 종속되었을 때만 해도 심장을 바치고 대부분의 힘을 잃어버렸던 브리트라지만, 그간 공들여(?) 키운 보람이 있었는지 최근에는 상당한 힘을 되찾은 상태였다.
능력을 다시 되찾은 브리트라는 숙주인 노구덕과 일체화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원래부터 지상을 뒤덮는 거대한 왕뱀의 몸을 바꾸어 조그마한 인간 소녀로 둔갑했던 그녀인 만큼, 노구덕의 몸에 녹아드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더욱이 노구덕은 본체의 심장을 품고 있는 주인이 아니던가.
노구덕의 심장에 잠든 브리트라는 또 하나의 신기, 혹은 도구라 할 수 있었다. 독립적인 이성은 없고, 철저히 주인의 의지에 반응하여 권능을 행한다.
오늘 세인트 오렌에서 올린 전과는 왕뱀 브리트라의 능력이 톡톡히 작용한 결과였다. 거기에 더해, 노구덕이 세 명의 대사교를 쳐죽이며 연출한 압도적인 공포와 살벌한 분위기의 하모니가 적절히 가미된 결과이기도 했다.
“허허. 희대의 사기극이군요.”
“그러니까 새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걸리면 큰일이니까.”
“푸흐흐흐. 알겠습니다.”
“하하하.”
너스레를 떨며 웃는 것도 잠시, 옥좌에 앉은 노구덕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해졌다.
“전군을 세 군단으로 나누겠다.”
급작스러운 말이었지만 놀라거나 당황하는 이는 없었다. 군을 나누는 것은 출진 전에 미리 언질을 받았던 사안이었다.
“생각보다 이르군요.”
“전쟁이란 늘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 법이니까. 전황을 보니까 조금 앞당겨야겠어.”
“하긴 그렇습니다.”
“콜트레인, 유메르바인.”
“예.”
“네.”
노구덕에게 호명된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무릎을 꿇었다.
“콜트레인이 2군단장, 유메르바인이 3군단장이다. 각 군단의 병력은 3만으로 재편하지.”
“폐하. 그리하면 본대의 병력이 너무 적지 않을까요?”
“적진 않지. 전쟁교단의 패잔병들을 본대에 투입할 생각이니까. 어차피 내가 아니면 달리 다룰 수도 없는 병력이기도 하고.”
“아, 그렇군요.”
신왕병과 이두식의 근위대, 그리고 나머지 병사를 포함한 본대 1만에, 노구덕에게 굴복한 전쟁교단의 잔당들을 더하면 족히 2, 3만 정도의 규모가 된다. 정예만을 추스른다 해도 수천의 병력이 합류할 테니, 이 정도면 나머지 두 군단에 결코 뒤지지 않는 전력이었다.
“그 다음은 부장들이다. 먼저 2군단 부사령관에는 소피아와 박승찬. 그 다음 부장으로는 도일, 황석문, 심준호, 님로드….”
2군단에 포함될 간부들의 이름을 차례차례 호명하던 노구덕의 눈길이 간부진의 끄트머리에 머문다. 간부진 사이에서도 특히 앳되어 보이는 두 남녀는 촉망받는 신진 간부로서 참전한 한승우와 임가희였다.
노구덕과 눈을 마주친 한승우의 얼굴이 굳은 결의를 담아 작게 끄덕여졌다. 그건 그 옆의 임가희도 마찬가지.
짧게 뜸을 들인 노구덕은 이내 두 사람의 이름을 명단의 말석에 올렸다.
“…한승우, 임가희. 이것으로 2군단 편성을 확정하지. 단, 마지막 두 명은 임시직이다. 병력을 맡길지 말지, 부장으로 쓸지 말지는 군단장 재량에 맡긴다.”
“허허.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제 발로 전장에 나선 이상, 다 같은 목숨일 뿐이지. 능력이 없다면 말단 병졸로 쓰게나.”
“아무렴 본국에서 가장 돋보이는 샛별들을 병졸로 쓸까요. 아무튼, 폐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왼편에 선 임유진에게서 깊이 염려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다소 원망스런 감정도 섞인 듯하다. 아마 왜 임가희를 본대에 포함시키지 않았느냐는 무언의 항의일 터다.
하지만 노구덕은 일부러 그녀의 눈길을 무시했다. 조금 후회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이게 가희를 위하는 길이야.’
강직하기로 유명한 콜트레인은 정말 한다면 하는 사내다. 본인이 아니다 싶으면 그에게도 간언을 아끼지 않는 남자니까.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임가희를 굴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그가 제격이었다.
노구덕은 이번 전쟁을 통해 임가희와 한승우가 한 단계 더 성숙해지길 바랐다. 그러자면 우선 둥지를 벗어나 훨훨 날아가야만 했다. 언제까지나 감싸고 돌면 응석받이밖에 되지 않을 테니.
그렇다고 아주 맨몸으로 내돌리는 건 아니다.
‘소피아라면 믿고 맡겨도 되겠지.’
노구덕은 부사령관으로 임명한 소피아를 믿었다. 그녀라면 적정선에서 임가희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을 터.
상념을 끝낸 노구덕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어서 제 3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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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전선의 중도시, 마르타.
이곳에서는 지금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려는 중이었다.
“대장님. 저, 정말 괜찮겠습니까? 암만 그래도 이건 너무….”
“…너무 뭐? 그럼 자네가 저 마녀를 말릴 수 있겠나? 그것도 좋겠지. 저 장대들 사이에 사이좋게 묶여 매달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더듬거리며 물었던 최길재는 금방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할 말이 없기도 했지만, 무겁게 답하는 엘리엇의 얼굴에서 자포자기한 기색을 읽은 탓이다.
“방법이 없어. 돌이킬 수 없단 말이다. 우린 이미 역사에 길이 남을 쓰레기가 되어버렸어.”
“…….”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빌어먹을 전쟁에서 승리하는 거다.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돼. 무조건, 무조건! 그게 마지막 남은 살 길이야. 흐흐흐흐흐….”
부관 최길재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광소를 터뜨리는 엘리엇의 낯빛이 도저히 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준수한 중년 사내의 얼굴은 비쩍 마른 해골바가지로 변해 있었다.
‘전부 저 여자 때문이다.’
힘 빠진 그의 시선이 성벽 위를 거슬러 올라, 그 중앙에서 깔깔 웃고 있는 소녀를 향했다. 어림잡아 열 서너 살 정도 되었을까. 채 빠지지 않은 젖살이 무척이나 귀엽게 느껴지는 소녀다.
“오호호호호!”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깃털처럼 가벼운 발을 방방 구르며 즐거워하는 소녀의 주위에는 무수한 목책이 둘러쳐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비단 소녀 주위만 그런 게 아니다. 마르타의 성벽 위는 장대하게 솟은 나무장대로 온통 숲을 이루고 있었다.
문제는, 그 장대 위에 살아있는 사람이 매달려 있다는 거다.
사지가 결박되어 장대에 매달린 이들은 모두 똑같은 군복 차림이었다. 리베르타를 상징하는 금빛 사자의 문양이 들어간 군복.
즉, 이들은 모두 리베르타의 병사들이었다.
“만세! 드디어, 드디어 이때가 오고 말았구나!”
배를 잡고 웃어대던 소녀의 눈빛이 요악스런 빛을 발했다. 만세를 외치며 양팔을 펼친 소녀의 얼굴은 벅찬 감동에 젖어 있었다.
“그분께서는 기다리면 반드시 때가 온다고 하셨지. 그 말씀이 맞았어. 이 얼마나 숭고한 경치란 말이냐!”
덩실덩실 춤을 추는 소녀의 시선은 아득한 지평선을 향하고 있었다.
붉게 노을이 진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에선 거무스름한 그림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지평선을 완전히 뒤덮을 듯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져만 갔다.
그건 수많은 깃발을 앞세운 군대였다. 물결처럼 휘날리는 황금 사자의 깃발을 앞세운 대군은 동부전선을 파죽지세로 지나는 리베르타의 군세가 틀림없었다.
그 군세의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마녀, 우르슬라는 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람 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들이었기에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시시각각 변하는 상대의 표정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검신! 때맞춰 도착했구나. 으흐히히힛! 박제해 두고 싶을 만큼 좋은 얼굴이야. 부하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광경을 본 감상이 어떤지 궁금한 걸? …아앗! 안 되지, 그런 건 안 돼! 반칙이잖아?”
멀리 달려오는 김정인의 칼날이 높이 쳐들리자, 우르슬라는 장대숲 안으로 잽싸게 도망쳤다.
“흐응, 부하를 베어버릴 담량은 없나 보네?”
당장이라도 참격을 날릴 듯했던 김정인의 팔이 무력하게 내려가는 것을 본 우르슬라는 더욱 기고만장하여 키득거렸다.
“어서 오라구. 최고의 쇼를 보여줄 테니까. 히히히히히!”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왼손의 흑염룡이 된 브리트라…
날이 많이 추워졌습니다. 내일은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고 하네요.
독자님들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참, 이전에 노구덕이 아란이를 장녀라 했던 대사가 있었는데, 수정했습니다. 장녀는 가희지 아란이가 아니지요. 친딸로 한정하면 아란이가 맞긴 합니다만..
오늘도 행복 가득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