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49)
0749 / 0777 ———————————————-
206# 마신, 융펠
++++++++++++++++++++++++++++++
선두의 김정인이 팔을 올리는 것을 본 김상목은 고삐를 잡아채며 후방에 명령을 내렸다.
“워어. 멈춰라!”
구름을 일으키며 나아가던 군세가 질서정연하게 정지했다. 잠시 후, 좌우로 퍼져 있던 지휘관들이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하나 같이 돌덩이처럼 굳은 얼굴들. 모두가 성벽 위에 세워진 인(人)의 장벽을 본 게 틀림없었다.
“부사령관님, 보셨습니까? 저들은….”
“음. 아군이 분명하다. 내가 아는 얼굴도 상당수 섞여 있어. 저 친구들이 어찌 이곳에…….”
김상목의 말끝이 그 얼굴색처럼 흐릿해졌다. 저 인의 장벽을 보고 해서는 안 될 불길한 생각을 떠올린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마르타의 성벽 위에 줄지어 매달린 이들은 남부 점령지에 주둔해 있던 병력과 간부들이었다. 엘리엇이 배신한 뒤로 솔라리스에 억류되어 포로가 되었던 그들이 느닷없이 이 마르타에서 나타난 것이다.
“엘리엇, 이 죽일 놈.”
“인면수심의 쓰레기 같으니. 어떻게 저런 짓을….”
상황을 알아차린 간부들은 일제히 엘리엇을 성토하며 이를 갈았다.
저들은 엘리엇의 개인 사병이 아니다. 오로지 김정인에게만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리베르타의 병사들이었다. 당연히 배신자가 된 엘리엇에겐 처치곤란의 골칫덩이였을 터.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잖은가. 아무리 개인의 영달을 위해 배신을 택했다지만, 어떻게 한때 부하였던 자들을 이렇게 팔아넘길 수 있단 말인가.
“…가만 보니, 남부 주둔군만 내세운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네. 솔라리스 출신의 병사들도 섞여 있네요.”
성벽 위를 훑어보면 볼수록, 제장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장대 위에는 리베르타 출신의 병사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구 솔라리스의 출신의 전향자들과 포로들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저들의 공통점이라면 남부에 있었으며, 엘리엇의 직속 부대가 아니라는 것 정도다.
그때, 묵묵히 성벽 위를 주시하던 김정인의 입이 열렸다.
“방금 전, 성벽 위에서 마녀를 보았습니다.”
“옛? 마녀라니요?”
“반군에 가담했던 세 흉인 중 하나. 마녀 우르슬라입니다. 성벽 위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더군요.”
간부들의 안색이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고대의 마신, 융펠을 떠받드는 대사제 우르슬라. 여기 있는 이들 중 그녀의 악명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악행과는 별개로, 우르슬라는 십존의 수준에 버금가는 괴물이었으니까.
“그 미친 악녀가 말입니까?”
“잠깐만요. 그렇다는 건….”
모두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위태로운 적막이 감돌았다.
우르슬라는 인간의 목숨을 벼룩처럼 여기는 마녀다. 마센에게 바칠 산 제물을 빌미로 빈번히 혈사를 일으키는 그녀의 악명은 너무도 자자했다 그런 그녀가 나타났고, 성벽 위에는 장대를 짊어진 인주(人柱)들이 늘어서 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성벽 위에 수비병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 안쪽에서 강력한 마력이 요동치고 있어요.”
“설마, 악녀가 저들을 제물로 바칠 거란 말은 아니겠지요? 평범한 시민들도 아니고 모두 수준 이상의 헌터들입니다. 저 숫자만 해도 수천이에요. 그 힘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입니까?”
“맞아. 그건 불가능하지. 우르슬라가 아니라 십존 다섯이 있어도 수용하지 못할 걸. 주문을 쓰기도 전에 몸이 터져버릴 거야. 혹시 자폭이라도 할 속셈이 아니라면 말이야.”
콧방귀를 뀐 크라벨이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마르타의 내성 안쪽에서 거대한 핏빛 기둥이 솟구쳤다. 한순간 눈이 멀어 버릴 만큼 강렬히 뻗친 붉은 광채는 마르타 상공 수백 미터 위에서 수백만의 입자로 산화하며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그 이후 일어난 참상을 목도한 리베르타의 간부들은 동시에 숨을 멈추며 눈을 부릅떴다.
“어억!”
“포, 포로들이…….”
“이, 이런 미치광이가 있나! 어떻게 저런 짓을!”
그건 인세에 다시없을 지옥도였다.
반쯤 녹아내린 얼굴이 찢어질 듯 처참한 절규를 발하며 사그라진다. 재앙처럼 떨어지는 눈발에 맞닿은 살갗이 뜨거운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물러터진 피부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 장기들이 우수수 떨어져 제멋대로 바닥을 더럽힌다.
그리고 그마저도 잠시, 주위에 널브러진 핏물과 내장은 노을처럼 드리운 붉은 광채에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모두가 넋을 잃어버렸던 일 분. 그 지옥 같았던 시간이 지났을 때.
성벽에 살아 숨 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은 건 사라진 이들의 묘비인 듯 을씨년스럽게 늘어선 장대들 뿐.
바쁘게 떠들던 리베르타의 진영이 조용해졌다. 그저 모두가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도시를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의 말을 앗아간 것은 도시 상공에 수도 없이 빗발치는 핏빛 눈발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천인공노할 만행을 목격한 것에 대한 분노도, 오열하는 대기의 진동도 아니었다.
그 정체를 말하자면, 수수께끼의 핏빛 안개가 넘실거리는 도시 마르타.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 무엇이다.
오장육부를 짓누르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숨을 쉬기도 버거웠다. 마치 고룡(古龍)이 웅크리고 있는 둥지를 지척에 둔 듯한 전율이 살을 떨리게 한다.
상식을 파괴하는 압박감에 기가 질려버린 사람들은 도저히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피로 물든 저 도시 안에 있는 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이건….”
“으으으….”
늘 침착하던 김상목이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 행군 내내 신경질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크라벨의 낯이 거무죽죽해졌다. 그나마 그들이라서 이 정도지, 그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다른 간부들은 입술조차 벙긋하지 못하는 상태다.
이 자리에서 운신이 자유로운 사람은 오직 검신 김정인밖에 없었다.
“모두 여기서 대기하십시오. 명령입니다.”
“주, 주군!”
“저 성에는 저 혼자 들어갑니다.”
아연한 무리 속에서 단기를 끌고 나온 김정인은 굳은 얼굴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명령합니다. 절대로, 안으로 들어오지 마십시오. 그리고 심상찮은 일이 생기면… 제 생사와 상관없이 무조건 후퇴하십시오.”
검신의 지시는 절대적. 따라 나서려던 이들이 감히 나서지 못하고 주춤거린다. 재차 명령을 상기시킨 김정인은 그대로 말을 몰아 마르타로 내달렸다.
++++++++++++++++++++++++++++++
개방된 성문을 통과하여 대로를 나아가는 김정인의 표정은 무섭도록 경직된 채였다.
이미 마르타는 산 자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죽음의 도시였다. 성벽 위에 늘어선 포로들뿐 아니라, 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일반 시민들까지 모조리 심연으로 빨려들어간 것이다.
주인을 잃은 노점,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인형, 그리고 피에 젖은 옷가지들. 두서없이 흐트러져 있는 거리의 정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저 흔적들만 봐도 시민들이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김정인은 이를 악물었다. 항시 냉정침착한 두 눈이 도깨비 같은 안광을 발하며 차갑게 타올랐다.
2만? 3만?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도시를 둘러싼 핏빛 광채는 어느덧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 뒤다. 김정인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무시무시한 얼굴이 되어 중앙대로를 내달렸다. 조금 전, 거대한 핏빛 기둥이 하늘을 꿰뚫었던 그 방향이었다.
우르슬라를 찾는 건 쉬웠다.
“어서 와. 검신.”
꽃장식이 달려있는 분홍색 보닛에 치렁치렁한 두 겹의 레이스가 둘러진 법복. 나들이라도 가는 것처럼 화사한 옷차림을 한 그녀는 아무도 없는 광장 한복판에 홀로 앉아 있었다.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수만이나 되는 인간의 고혈을 빨아먹은 흉물스런 거머리다. 홍옥처럼 반짝이는 저 아름다운 눈은 사람이 아니라 불구덩이에서 기어 나온 악마의 그것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러게 좀 더 서두르지 그랬어. 호호호호….”
키득거리며 어깨를 떠는 우르슬라를 응시하는 김정인의 얼굴에 스산한 격노의 빛이 어린다.
“우르슬라….”
“왜, 이제 와서 뭘 하겠…….”
보닛 아래에서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납판처럼 굳어진다. 이내 설원처럼 새하얀 목덜미에서 핏물이 뿜어지며 우르슬라의 머리가 돌바닥 위로 굴러 떨어졌다. 채 감지도 못하고 멍하니 뜨인 눈동자는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머리만 베인 것이 아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우르슬라의 가슴께에선 선홍색 핏물이 울컥울컥 치솟고 있었다. 단 한 번의 발검으로 그녀의 목과 심장을 동시에 베어버린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대륙 최강… 아니, 역사상 전무후무한 경지에 올라선 검사에게 겁 없이 간격을 내준 대가다.
그러나 일섬(一閃)에 우르슬라의 머리를 베어버린 김정인의 눈은 여전히 깊게 침잠한 채였다.
바닥에서 맥없이 나뒹구는 우르슬라의 눈매가 새초롬하게 휘어지는 것을 본 때문이다.
“…아프잖아. 그래도 뭐, 용서해 줄게. 나는 너그러우니까.”
몇 번의 섬광이 명멸하자, 우르슬라의 머리와 몸에 무수한 혈선이 새겨졌다. 좋을 대로 떠들던 머리도 순식간에 수십 조각이 나버리자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탁한 뇌수와 창자 쪼가리들이 뒤섞인 핏물에 잠겨버린 우르슬라의 모습은 갈가리 갈라져 더 이상 뭐가 몸이고 뭐가 옷인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우르슬라의 육신이 잠긴 피웅덩이에서 부글부글 끓는 기포가 올라오며 흐느적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히히히히히히….
요사스럽게 웃어대는 우르슬라의 목소리와 함께, 끈적끈적한 피 무더기가 급격히 팽창했다.
일 미터, 이 미터, 삼 미터….
어느새 김정인의 키보다 훨씬 커져버린 핏덩이는 흡사 핏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슬라임처럼 보였다. 우르슬라의 작은 몸뚱이를 생각해 본다면, 저 거대한 크기와 질량은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사였다.
불가사의한 핏덩이에겐 이어진 김정인의 참격도 소용없었다. 표면이 잘리고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상처를 재생했을 뿐더러, 핵이 있을 거라 짐작되는 가운데 부위는 그의 칼로도 베어낼 수 없을 만큼 단단했다.
통상적인 공격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김정인은 즉시 태세를 전환했다. 그러자 맑은 검신에 심해처럼 검푸른 기운이 연기처럼 감돌았다. 그의 간판기술인 네더블레이드, 발할라의 최고 비기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공간마저 일그러뜨리는 가공할 검기가 핏덩이의 중심부를 사선으로 절단했다. 북왕 아이벤이 감탄하고, 성갑왕 에드가가 패퇴한 바로 그 검기였다.
사선으로 시커멓게 갈라진 공간이 핏덩이로 변한 우르슬라를 청소기처럼 빨아들이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뭉실뭉실한 핏더미 속에서 길쭉한 팔이 불쑥 나타났다.
-꺄하하하하하!
어지간한 일로는 미동조차 않는 부동심의 소유자, 김정인의 동공에서 심한 잔떨림이 일었다. 그의 눈앞에서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잘라낸 공간의 틈새가 강제로 닫히고 있었다. 불에 달궈진 듯 새빨간 가죽으로 뒤덮인 팔이 상식적으로 닿을 리 없는 무형의 공간을 덥석 붙잡더니, 짐승의 입을 다물게 하듯 억지로 닫아버린 거다.
-바보야? 내가 에드가랑 동급으로 보여? 내가 잡아먹은 제물들을 욕보여도 유분수지, 이깟 공격으로 뭘 하겠다는 거야? 아앙?
꿈틀꿈틀 맥동하던 붉은 덩어리가 부화하는 알 껍질처럼 쩍쩍 갈라진다.
그 잔해를 깨부수고 나온 것은… 지금껏 본 적 없는 괴이한 생명체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가로로 째진 검은 산양의 머리였다. 한 바퀴 휘어진 두 개의 뿔을 관자놀이에 달고 있는 산양의 머리 아래로는 벌거벗은 여인의 몸뚱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미려하다기보다는 역동적인 근육들과 검고 붉은 수북한 장모(長毛)로 뒤덮인 몸통에서 그나마 여인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건, 단단하게 부푼 젖가슴과 밋밋한 사타구니 정도다.
역시 근육질로 이루어진 괴생명체의 팔다리는 앞서 보았던 것처럼 새빨간 색이었다. 손은 사람과 흡사했지만, 다리와 발은 조류의 그것처럼 길쭉하게 뻗어 비늘로 뒤덮인 모습이었다.
-쿠으으으….
핏덩이 속에서 부화한 괴생명체는 갑자기 긴 소성을 발하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푸확-!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등가죽이 찢겨나가며 거대한 피막의 날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 갈래로 펼쳐진 길이만도 거의 십 미터에 가까워 보이는 초대형 날개였다.
-키킥. 크키키킥….
“…….”
-뭘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야? 뭘 그렇게 고민하지?
김정인의 칼날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그의 내면에선 직감이라는 이름의 경종이 미친 듯이 울리는 중이었다.
이 괴물은 어중간한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그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괴물의 정체는 우르슬라가 받드는 악신, 그 자체였으니까.
“마신 융펠….”
-알고 있잖아? 잘 됐네. 소개는 필요 없겠어.
물기 젖은 피막의 날개가 힘껏 펼쳐진다. 하늘을 가리고 드리운 어둠은 이내 도시 전체를 칠흑으로 물들였다.
-검신, 밑바닥을 보여 봐.
삭막한 여운을 남기는 웃음과 함께, 죽음의 도시 한복판에 검은 날개의 마신이 강림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죄송합니다. 업로드가 늦었습니다.
오전 혹은 이른 오후에 한편 올리고, 저녁에서 열두시즈음에 또 한편이 올라갈 예정입니다.
못 믿으시겠다고요?
믿어주세요.. ㅠㅠ
이쪽 에피소드는 김정인 쪽 얘기가 될 겁니다. 좋아하시지 않는 건 알지만 중요한 떡밥을 풀려면 통과의례이기에..
다음화와 다다음화에서 아주 중요한 떡밥들이 풀리고 던져질 예정입니다. 당연히 엔딩에 큰 영향을 끼치겠죠.
그럼 다음화에서 찾아 뵙겠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