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56)
0756 / 0777 ———————————————-
207# 윤선영
++++++++++++++++++++++++++++++
탁.
보고서를 읽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자 종잇장에 가려져 있던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크게 홉뜬 여인의 눈은 심란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유, 윤선영 오너가…….”
“…죽었을 겁니다.”
일라이자로 분한 퀸젤의 고개가 맥없이 흔들렸다. 도정섭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만에 하나 그녀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없었다.
무겁게 흘러나온 한숨이 탁자 위의 얕은 먼지들을 쓸어낸다. 도정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마음을 정리하길 기다렸다.
그녀의 메마른 입술이 달싹인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괜한 부탁을 했어….”
“강권은 없었습니다. 그녀가 원해서 한 일입니다.”
“인정에 약한 사람이었지. 난 그걸 이용했고.”
마지막 남은 두 사람의 조력자, 그 중 하나를 잃어버린 퀸젤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씁쓸했다.
체스터에게 밀려 계승권을 빼앗긴 이후, 퀸젤의 영향력은 극도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오라클의 총수란 직함이 남아 있긴 하나, 실제 그녀가 발휘할 수 있었던 힘의 대부분은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력이 급격히 쪼그라든 것은 물론이고,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 각 지역에서 손을 잡고 있던 조력자들마저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퀸젤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단 두 명, 중부의 윤선영과 북부의 도정섭만은 끝까지 남아 그녀의 곁을 지켰다. 거의 개인 호위나 다름없던 도정섭은 그렇다 쳐도, 이해타산적인 윤선영이 남은 것은 퀸젤로서도 의외의 일이었다.
“당신은 윤선영 오너를 속이지 않았습니다. 윤선영 오너가 바란 게 있었습니까?”
“…….”
“그녀는… 항상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요. 애초에 그녀는 이해에 밝은 사람입니다. 이용당하는 거라 느꼈다면 도움을 주지도 않았을 겁니다. 당신이 그녀를 이용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그녀에 대한 모욕입니다. 아니면… 저도 당신에게 이용당하는 겁니까?”
살그머니 불어온 바람이 등잔불을 스치고 지나간 탓일까. 어슴푸레한 퀸젤의 낯빛이 너울거리는 파도처럼 흔들렸다.
도정섭을 옆에 둔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평생 사람을 부려왔던 퀸젤이 어찌 이 충직한 남자의 마음을 모를 것인가.
그래서 더욱 면목이 없었다. 퀸젤은 꽃봉오리 같은 입술을 살며시 깨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미안해, 도정섭 헌터. 난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어. 하지만 동침(同寢) 정도라면….”
“매번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검으로 살 수 있으면 족합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 마십시오.”
안색을 흐린 퀸젤은 꾹 입을 다물었다. 그와의 대화는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시작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끝난다. 수십 번도 넘게 떠나가라 말했지만, 그는 늘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한없이 고맙지만, 본인이 그 무엇도 바라지 않으니 보답을 할 길이 없다. 도정섭은 늘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 빚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는 사내였다.
“멋지군. 요새 보기 드문 의리남이야.”
“흡!”
사나운 말벌처럼 찌르고 들어오는 살기를 감지한 도정섭은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의 손을 떠난 짙푸른 섬광은 그대로 한 줄기 벼락이 되어 후방으로 찾아든 그림자를 꿰뚫었다.
“…….”
눈부신 일도를 선보인 도정섭의 눈매는 깊게 침잠해 있었다. 그 이유는 물론, 앞에서 태연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중년인 때문이다.
그를 반응케 했던 강렬한 살기는 어느새 눈 녹은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도정섭은 사내를 베지 못했다. 그가 떨쳐낸 검은 사내의 굵직한 엄지와 중지 손가락 사이에 날아든 나비처럼 잡혀 있었다.
손목이 바들바들 떨리도록 힘을 줘 보지만, 녹색 손가락에 끼인 칼날은 도저히 꿈쩍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처구니없이 칼을 봉쇄당한 도정섭은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그의 등줄기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든 상태였다.
‘이럴 수가….’
검을 업으로 삼는 헌터들 중 최고의 빠르기를 자랑하는 것이 그의 발검술이다. 소드챈트리의 형제들은 물론이고, 단지 빠르기로 자웅을 결한다면 십존급의 검사들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자부심이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상대를 베기는커녕, 겨우 손가락에 칼을 잡혀버린 것이다.
“더 강해졌군. 처형자보다 한 수 정도 아래려나?”
“처형자 최훈… 말이오?”
“그래. 기교가 대단한 놈이었지. 그놈도 검신에 비하면 애송이겠지만.”
칼을 붙잡은 사내의 힘이 느슨해지자, 도정섭은 천천히 칼을 거두었다. 중년인의 정체를 안 이상, 더 이상의 칼부림은 무의미했다.
도정섭이 옆으로 물러나자, 그 뒤로 퀸젤의 불퉁한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공사다망한 왕께서 이 시간엔 어쩐 일이시지?”
“내 영지에 수상한 자가 숨어들었다고 들어서. 직접 확인해 볼 겸 해서 나왔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주인이 자기 집을 돌아다니는데 문제가 있을 리가 있나. 할 말이 없어진 퀸젤은 하릴없이 혀를 찼다.
“…칫.”
“뭐, 그건 그렇고… 듣자하니 이레시온에서 뭔 일이 일어난 것 같던데. 괜찮다면 내게도 좀 들려주지 그래?”
퀸젤과 도정섭은 또다시 침음할 수밖에 없었다. 도정섭의 기척을 읽어내고 정확히 찾아온 것만 해도 놀라운데, 사방에 둘러친 방음막조차 무소용이라니. 그나마 그의 신위와 무용을 가까이서 목도한 퀸젤은 비교적 빠르게 납득하는 눈치였지만, 내심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을 불태우고 있던 도정섭은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서부의 무신. 믿지 않았었는데……. 당신은 정말로 강해졌군. 사형제들이 당신과 손을 잡은 이유를 알겠소.”
“금칠하지 마라. 아직 한참 부족하니까. 그보다… 어서 얘기나 해 봐. 오래 자리를 비우면 유진이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후.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오라클에 속해 있던 수많은 부하들, 그리고 윤선영의 목숨과 맞바꿔 손에 넣은 귀중한 정보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것을 저토록 뻔뻔하게 요구할 수 있을까.
더는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 공언한 게 바로 얼마 전의 일인데, 그새 그 말이 무색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퀸젤은 조곤조곤한 투로 알고 있는 정보를 이야기해 주었다. 노구덕 또한 지금까지의 유들유들한 낯짝을 치우고 진중한 얼굴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건 별로 새로운 게 없지만… 그렇군. 발레기우스가 각성한 건가. 그럼 욘은 어떻게 된 거지?’
시스템의 최후 보루인 알비온이 무너졌다. 아직 그의 몸속에 저장된 신의 힘과 세상 곳곳에 흩어진 희미한 잔재들이 남아 있긴 하나, 실상 칠팔 할에 달하는 힘이 발레기우스에게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의식체인 욘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을 터. 어쩌면 의식마저 희미해졌거나 가사 상태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
“이레시온의 간부들이 모두 발레기우스에게 넘어갔어. 정말로 발레기우스가 카멜롯에 이어 알비온까지 손에 넣었다면… 그 힘은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상대가 아냐.”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 전쟁… 이길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는 거야.”
노구덕은 가만히 팔짱을 꼈다.
이길 수 있는 전쟁인가?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질문을 던져봤지만, 언제나 대답은 같았다.
“모른다.”
“몰…라? 수십, 수백만의 목숨이 당신의 손에 달려 있는데?”
“결과를 아는 도박이란 없는 법이지. 하지만 싸우지 않을 수는 없다.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건… 순수한 헌터라면 절대로 놈을 이길 수 없다는 것 정도다.”
“순수한 헌터? 그건 무슨 말이오?”
무뚝뚝하게 물음을 던진 이는 도정섭이었다. 노구덕은 조금 설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재능, 특성, 시스템으로 대변되는 헌터의 힘은 관리자란 신이 부여한 거다. 그리고 발레기우스는 관리자의 어두운 이면이지. 사실상 또 다른 자아나 마찬가지란 소리다. 그런 놈에게 헌터의 능력이 통할 것 같나? 십존이 백만 명 있어도 불가능할 거다. 바다에 물 수십 바가지를 퍼붓는 꼴이지. 전혀 의미 없는 짓이야. 퀸젤, 너라면 알고 있을 텐데?”
“막연히 짐작만 한 정도야. 설마 아예 통하지 않으리라곤…….”
“너희 위원회가 사용했던 무력화 스크롤이 좋은 예가 되겠지. 놈의 힘은 그것과 다르지 않아. 그 힘 앞에선 명백히 하위에 속하는 헌터의 능력은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퀸젤과 도정섭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상대가 그런 괴물이라면, 이쪽에 희망은 아예 없다는 소리 아닌가.
하지만 노구덕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단, 오리지널은 예외지.”
“오리…지널…?”
“사백여 년 전, 관리자가 이 대륙에 시스템을 구축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힘 말이다. 이 대륙의 원(原) 문명이라고 해야겠지. 지금에야 위원회의 탄압과 이차원에서 건너온 주문과 무예 때문에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지만.”
오리지널. 본래 이 스퀘어 대륙에 존재했던, 순수하게 인간들이 일궈 낸 강력한 비전들의 총칭. 하지만 익히기가 난해하고 까다로운데다, 오랜 억압으로 인해 제대로 전해지는 게 없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과거의 유산이다.
대부분이 소실된 오리지널 중에서도 그나마 희미하게 이름이 남아 있는 것들을 꼽는다면, 역시 시스템 성립과 동시에 부각된 구왕조에 밀려 멸망당한 벌레교단, 발할라, 마녀회, 어비스쉬라인의 비전들을 들 수 있다.
“그러면 역사에 기록된 그 탄압이…….”
“단언하진 않겠지만 가능성이 높은 건 사실이다. 관리자도 시스템 체계를 따르지 않는 독자적인 힘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을 테지. 마침 그들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구왕조의 지배자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한 것도 있을 테고.”
“읏…!”
얼이 빠진 퀸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낯빛이 익은 과실처럼 새빨간 게, 선조들의 추악한 과거에 큰 수치심을 느낀 모양이었다.
“어쨌든… 오리지널이란 게 꼭 그 네 단체만 있는 건 아니지. 일례로 이 대륙에서 신기, 성물이라 불리는 것들의 절반 정도는 위원회 이전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들이니까.”
천년 이전부터 존재했던 브리트라의 권능. 그리고 브리트라와 동시대에 존재했으며, 지금은 임유진의 몸속에 자리잡은 성화(聖火)의 힘.
그리고 마찬가지로 신소율의 육체에 스며든 악마 위리놈의 힘과 데모나가 명맥을 이은 마녀회의 일맥. 또 벌레교단의 비전을 이은 육천의 신왕병들.
마지막으로 발할라의 영령을 부리는 아가레스트와 노구덕의 손에서 마물로 거듭난 성갑과 성구, 각종 신검들.
이들이 지닌 힘 모두가 시스템의 상리(常理)에서 벗어난 능력이었다.
“위원회와 발레기우스의 반군이 그토록 집요하게 신기들을 수집했던 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그의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갈수록 드러나는 위원회의 실체보다는, 이 전쟁의 양상을 미리 예측하여 거대한 힘을 축적해 온 노구덕의 주도면밀함에 기가 질린 탓이었다.
노구덕의 말이 정말이라면, 그의 군대야말로 발레기우스를 무찌르기에 최적화된 검인 셈이다.
‘대체 이 남자는…….’
문득, 퀸젤은 앞에서 미미한 웃음을 띠고 있는 이 남자가 두려워졌다. 나름대로 노구덕의 속내를 잴 수 있다 생각했는데, 이젠 그럴 자신이 없어졌다.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그녀가 처음 쟀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사내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정말로… 운이 좋았을 뿐이니까. 이 모두를 내가 설계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정확히는 운이 아니라 발레기우스를 저지하려는 욘의 안배가 작용한 결과다.
‘하긴, 행운 재능도 운이라면 운인가.’
“그러면 당신의 힘으로 그자를 처치할 수 있는 거요?”
“말했을 텐데. 모른다고. 오리지널의 힘은 어디까지나 발레기우스에게 조금 통용된다 뿐이지, 놈을 이길 수 있을 정도는 아냐. 솔직히 그마저도 얼마나 통할지 확신조차 어렵지. 피륙에 살짝 까진 상처나 낼 수 있으면 다행일 거다.”
“…암울한 이야기군.”
“그래, 암울하지. 놈이 그 정도의 괴물이란 소리고, 그만큼 승산은 낮다. 여기서 내가 기대를 거는 거라고 한다면…… 아니, 그만두도록 하지.”
두 사람의 얼굴에 얼핏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군의 최고 기밀을 감히 따져 물을 수는 없는 노릇. 그들로선 여기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그에게 감사해야만 했다.
그때, 갑갑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노구덕이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해 준 건 퀸젤, 네게 따로 부여할 단독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단독 임무?”
“그래, 아가레스트와 관련된 일이다. 거부권은 없다. 무조건 지시에 따라라.”
“아, 알았어.”
아가레스트의 일이라면 어차피 따를 테지만, 어쩐지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노구덕의 박력에 놀란 퀸젤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이번화 내용 보시면 앞으로 싸움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대충 유추하실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럼 다음화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