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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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시온으로
208# 시온으로
몇 번의 전조가 있었다.
최초는 미세한 정도의 진동이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감지하기조차 어려웠던 작은 지진.
그러던 것이, 나날이 진동이 강해지더니 나중에는 말이 놀랄 정도의 강진이 되어 덮쳐왔다. 덕분에 노구덕의 군대는 그날 하루를 꼬박 평지에서 지새워야만 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강한 지진이긴 했지만, 헌터들이 몸을 상할 수준은 아니었다. 부상이라고 해봐야 뒤따르는 론다리온의 사제들 중 소수가 발목을 접질리는 정도였다.
서부의 왕, 노구덕이 몸소 이끄는 군대는 그 이후로 별 탈 없이 행군을 계속했다. 레그나토르의 군세는 킹스로드를 따라 일직선으로 쭈욱 나아가며 이레시온의 크고 작은 도시 십여 개를 함락시켰다. 그것도 두 번 정도 전투를 치렀을 뿐, 나머지는 거의 다 무혈입성이었다. 중앙 정부로부터 고립된 지방 도시들은 이미 저항의 의지를 상실한지 오래였던 것이다.
파죽지세(破竹之勢). 사기충천(士氣衝天).
연이은 승전에 기세가 오른 레그나토르 군은 승리의 함성을 울리며 진격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레시온의 제 2도시 시온까지 약 하루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었을 때.
무패의 군세는 처음으로 난관에 봉착했다.
무엇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군대의 발목을 잡아챈 것은 하늘 높이 솟은 성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타오르는 적의로 무장한 대군도 아니었다.
난관의 정체는 기이한 역병(疫病)이었다.
느낄 수도 없으며, 보이지도 않고,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다. 역귀(疫鬼)의 음험한 손길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병대 깊숙이 스며들었다.
사실, 그것은 병이라고 하기엔 여러모로 모호했다. 병에 걸렸다고 죽을 듯이 앓는 것도 아니고, 검은 피를 토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건강에 딱히 이상도 없고 겉으로 보기에도 멀쩡했다.
하지만 그 병이 몰고 오는 증상은, 어찌 보면 죽음보다 더욱 가혹한 것이었다.
역병으로부터 비롯된 이상 증세.
그건 다름 아닌 힘의 소실이었다.
역병에 감염된 병사들은 ‘헌터로서의 힘’을 잃어버렸다. 마법사들은 주문을 쓸 수 없었고, 정령사들은 정령을 불러낼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거뜬히 대검을 휘두르던 전사들도 일단 병에 걸리면 애검을 들기조차 벅찼다. 평생을 고련하여 쌓아올린 힘을 한순간에 상실한 것이다.
상식 밖의 일을 접한 사람은 누구나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건 노구덕에 대한 충실한 신심으로 똘똘 뭉친 신왕병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병사 외적으로도 문제가 발생했다.
마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통신에도 이상이 생겼다. 수정 자체에 마력이 내장되어 있는 비상용 핫라인의 경우엔 사용이 가능했지만, 사용자의 마력으로 작동하는 대부분의 연락수정은 그대로 먹통이 되었다.
결국, 노구덕의 군단은 그날 하루 행군을 멈추고 재정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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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하루가 지났다.
급한대로 재정비를 마친 군단은 하얀 동녘빛을 뒤로 하며 다시 행군을 개시했다. 하나 그 속도는 이전과 비교해 확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부대의 사기도 떨어졌을 뿐더러, 아직 혼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병사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군단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진 가운데, 선두에서 말을 몰고 있는 노구덕의 시선은 저 멀리 어딘가에 시종일관 고정되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뒤로부터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부대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보냈던 임유진이 복귀하는 기척이다.
그녀의 인기척이 바로 지척까지 다가오자, 노구덕은 여전히 눈을 저 멀리 둔 채로 말했다.
“보고해.”
“어제에 비해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지만… 사기가 상당히 떨어졌어요.”
“그렇겠지. 한평생 쌓아 올린 탑이 무너진 거니까.”
“그래도 이만하길 정말 다행이에요. 만약 다른 부대였으면… 그대로 전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렸겠죠.”
임유진은 십년감수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군단의 병사들이 벌레교단의 오리지널을 익힌 신왕병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다른 부대였으면 그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뻔했다.
물론 신왕병들도 그 본질은 헌터이기에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오리지널과 동떨어진 다른 부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전력의 손실이 적은 편이었다.
“론다리온의 사제들도 신성력 자체는 별 피해가 없는 것 같아요.”
“음. 론다리온도 거의 오백 년 전부터 이 대륙에 존재했던 신이니까. 게다가 엄밀히 말해서 그 신이란 것들도 ‘신기’의 범주에 들어가지. 따지고 보면 그쪽도 오리지널이야.”
“후훗. 부대를 세 부대로 나누셨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되면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겠는 걸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예상하신 건가요?”
“어느 정도는. 설마 이 정도 규모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말이야.”
실마리를 얻은 것은 최초에 등장했던 무력화 스크롤이었다. 그처럼 시스템의 힘으로 헌터의 힘을 소실시킬 수 있다면, 시스템을 장악한 발레기우스가 그 수단을 동원하지 않을 리가 없을 터. 그가 발레기우스와 직접적으로 부딪칠 공산이 큰 중앙군을 거의 전부 오리지널에 특화된 병단으로 구성한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다.
그러나 그것도 기껏해야 대규모의 무력화 주문 정도를 상정한 거였지, 이처럼 도시에 접근하기도 전에 헌터들의 힘을 빼앗아버릴 줄은 몰랐다.
‘발레기우스 놈, 역시 스케일이 다르구만.’
너무도 속 뻔한 의도에, 노구덕은 피식 입매를 터뜨렸다. 이건 내가 여기 있으니, 올 테면 어디 한번 와 보라는 도발이다.
“대놓고 시온에 있다고 광고를 하고 있군. 아마 이 기괴한 힘은 시온 주변에만 작용하고 있을 거야.”
“네. 아마 그럴 거예요. 다른 군단에선 따로 보고가 없었던 데다… 이레브는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고 하니까요. 지금쯤 시온에 최후의 진을 치고 있겠죠.”
얼마 전, 동맹 세력인 리베르타가 이레시온의 수도인 이레브를 점령했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하지만 이어진 연락에 따르면, 도시 내부엔 공포에 질린 시민들이 전부였고, 이레시온의 수뇌와 병사들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라진 그들이 있을 곳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수년 전, 반란군의 준동으로 불타버렸던 대도시 시온. 위원회의 옛 영광과 함께 저물었던 그곳에 있을 게 뻔하잖은가.
“그놈도 척척 장단에 맞춰 움직여주지만은 않는군. 설마 견고한 방비시설을 갖춘 이레시온을 버리고 굳이 시온을 전장으로 택할 줄은 몰랐는데……. 하긴, 그놈에겐 방비시설이니 뭐니 다 의미 없는 말이겠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죠. 무엇보다 시온은 수백 년 동안 위원회의 심장부로 자리매김했던 곳이니, 저희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말투가 어째 묘하다. 임유진의 그린 듯 미려한 눈썹이 살짝 가운데로 쏠렸다. 앞만 보고 얘기하는 노구덕의 얼굴이 어쩐지 딱딱해 보였다.
“여보, 왜 그러세요? 아까부터 계속 앞만 보시고… 뭐가 있나요?”
“저기 말이야. 이상하지 않아?”
노구덕의 뭉툭한 손끝이 정면을 향했다. 임유진의 눈길이 그 끝을 따라 저 너머로 이동했지만, 별로 특별해 보이는 건 없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자세히 봐. 지도에 저런 협곡이 있었던가?”
“아….”
찬찬히 눈을 뜬 임유진의 턱이 살짝 미끄러졌다.
정말이었다. 군단으로부터 수 킬로미터 앞 지점, 하늘과 맞닿은 험준한 산맥은 일찍이 지도에서 보지 못한 지형이었다. 다시 한번 지형도를 꺼내 전면의 풍경과 대조해 본 임유진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지도엔 분명 평지로 나와 있는데…….”
“지도까지 볼 것도 없어. 내가 알기로 시온 근방에는 저토록 험한 산지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럼 저건 대체…?”
“얼마 전 그 지진의 영향이 아닐까요?”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이두식의 의견이었다.
“급격한 지진의 영향이라면 저렇게 자연스러운 산등성이가 만들어질 수 없지. 산맥 전체가 수풀로 뒤덮여 있는 것도 부자연스러워. 적어도 깎아지른 지층이나 흙투성이 암반이라도 드러나 있어야 정상인데……. 가만.”
“…여보, 저건….”
“그래. 어쩐지 익숙하다 했는데……. 허허허.”
점점 가까워지는 협곡지대의 모습을 재차 확인한 노구덕은 허허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뭔가를 알아차린 듯한 임유진의 낯은 그와 대조적으로 심각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한동안 둑이 터진 것처럼 웃어젖히던 노구덕은 별안간 꾹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발레기우스의 낯짝이 이죽거리기라도 하는 양,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정면을 쏘아보던 그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퉁명스런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런, 미친놈 같으니.”
“형님?”
“두식아, 이제 보니까 네 말이 맞다. 이것 때문에 그 지진이 일어난 거였어.”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이두식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예? 방금은 너무 자연스럽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말이다, 저 산 좋고 물 좋은 풍경…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냐?”
힌트를 얻은 이두식은 다시 눈앞의 협곡을 자세히 살폈다. 얼마 뒤, 어리벙벙하던 그의 퉁방울 눈이 커다란 경악에 휩싸였다.
“저, 저건… 종말의 협곡이 아닙니까!”
“정답이다.”
이두식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그의 인지범위를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보고, 두 번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저 웅대하게 뻗은 산줄기 하며, 마주보는 두 절벽을 두고 정교한 V자 모양을 그리는 협곡의 모습은 최근 몇 년 동안 질리도록 드나들었던 ‘종말의 협곡’의 입구가 틀림없었다.
“서부의 레귤러가 어떻게 이곳에…….”
“거 참, 내가 그놈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보다. 신이 되면 이런 짓도 할 수 있는 건가?”
농담기가 다분한 말투였지만 정작 태연히 말하는 노구덕의 표정은 대적을 앞둔 것처럼 진중했다.
관리자. 신. 욘. 발레기우스.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의 모습을 지녔다. 또 어느 정도 말도 통했다. 발레기우스는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관리자 욘은 그렇게 대하기 어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노구덕은 내심 그들이 이 스퀘어 대륙을 재창조한 신적 존재라는 것을 좀처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그가 상대하려는 발레기우스가 어떤 존재인지. 그는 이미 자연의 법칙마저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초월자였다.
노구덕은 고삐 쥔 손을 힘껏 말아 쥐었다. 전신을 걸레처럼 옥죄는 긴장으로 인해 손바닥 전체가 흥건했다.
“유진아, 좌우로 정찰을 보내. 이대로 종말의 협곡을 돌파하면 큰 피해가 생길 테니까. 우회로를 찾아봐야지.”
“알겠어요.”
후욱, 노구덕은 세차게 숨을 들이켰다. 폐부의 모세혈관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기운이 갑갑해진 마음속을 서늘하게 식혀주는 듯했다.
“신. 정말 신이로군.”
말 위에 앉은 노구덕은 한동안 조용히 눈앞의 광경을 응시했다. 아마 기분 탓이겠지만, 문득 끝도 없이 뻗은 저 산자락이 발레기우스가 이 세상에 드리운 거대한 그늘처럼 느껴졌다.
‘그놈… 어쩌면 욘을 넘어섰을지도 모르겠어.’
노구덕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욘은 카르마를 마음대로 다루지 못한다. 그가 구축한 시스템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불거진 카르마 에너지를 특정 지역으로 ‘유도’하여 인위적으로 이레귤러를 일으키는 것 정도가 전부다.
이처럼 그냥 레귤러도 아니고, 프라임 등급의 레귤러를 통째로 옮겨버리는 짓은 하지 못한다. 욘에게 확언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럴 터였다.
‘발레기우스는 욘의 일부가 카르마에 오염되어 생겨난 존재다. 카르마까지 다룰 수 있는 건 그래서인가? 태생부터가 그런 놈이라서? 끙…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군.’
“여보!”
노구덕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임유진이 다급하게 그를 찾는 걸 보니, 앞서 보낸 정찰대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정찰 결과는?”
“…틀렸어요. 어느 쪽으로든 레귤러로 보이는 지형이 가로막고 있다고 해요.”
“모두 프라임리그에 속했던 마굴들이겠지?”
“네. 추측이지만 좌측엔 아바돈(Abaddon)이, 우측엔 혼돈의 늪이 보인다고…….”
임유진은 말끝을 흐렸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대륙에 악명 높은 열여섯 개의 마굴이 한 지역에 빈틈없이 걸쳐져 있다는 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하나 어렴풋이 그럴 거라 예상했던 노구덕은 상대적으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 발레기우스가 기껏 만든 함정을 우회할 수 있는 틈을 남겨 놓을 리 없을 테니까.
“그렇단 말이지. 그럼 다른 쪽은 확인해 보나마나 뻔하겠어.”
“네….”
“시온 주위를 열여섯 개의 마굴로 꽁꽁 에워싼 거야. 이거야 원…. 완전히 마왕성이 따로 없군.”
“어떻게 하실 건가요?”
“별 수 없잖아? 저 협곡으로 가야지. 그나마 익숙한 지형이니까.”
히히힝! 투레질하는 군마의 고삐를 붙들어 맨 노구덕은 이내 뒤를 돌아보며 천둥 같은 호령을 내렸다.
“전군! 출진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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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한편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침 11~12시 사이쯤 예상합니다. 그보다 더 빠를 수도 있고요.
날이 너무 많이 춥습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제 마음도 추워지네요..
독자님들은 항상 따뜻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두껍게 입고 다니세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