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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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시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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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읏!”
화끈한 감촉과 함께, 가느다란 핏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금만 반응이 느렸더라면 자칫 아름다운 얼굴이 반으로 쪼개질 뻔한 일격이었다.
가까스로 치명상을 면한 임유진은 그대로 빈틈이 생긴 흑기사의 품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 순간, 눈부시도록 새하얀 폭발이 일어났다.
쿠아앙!
폭발에 휘말린 흑기사의 거대한 동체가 수 미터나 뒤로 날아가 나뒹굴었다. 지글지글 타오르는 갑주 속에선 붉은색 피륙 대신 웬 진흙 덩어리 같은 것들이 꾸물거리며 기어 나왔다. 그 진흙의 정체는 아바돈에 속한 악마들을 구성하는 체내 물질, 다크매터(Dark matter)였다.
싸늘히 표정을 굳힌 임유진은 재차 손을 뻗어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다크매터를 완전히 불살랐다. 삿된 것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성화의 기운은 아등바등 발버둥치는 악마의 잔해를 잔불 하나 남기지 않고 소멸시켰다.
“후욱!”
두 수 만에 어벤저(Avenger)를 처리한 임유진은 숨 돌릴 새도 없이 불길을 일으켰다. 중천에 솟은 태양처럼 찬란하게 피어난 빛은 삽시간에 어두운 전장을 새하얀 색으로 물들였다.
태양빛 아래 드러난 전장은 삼색(三色)의 각축장이었다. 검은 마기를 풀풀 날리는 악마들과, 두 눈에 핏발을 세운 병사들, 백색 법복을 휘날리는 론다리온의 사제들이 모두 짐승이 되어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협곡을 가득 메운 아수라장 속엔 오로지 죽고 죽이는 광기와 살의만이 넘실거릴 뿐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번쩍 치솟은 불기둥에 이목이 끌린 악마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임유진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이 난전에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서로 떨어진 부대들을 규합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녀가 일으킨 불길은 이 끝없는 암흑의 물결을 비추는 등대가 되었다. 여기저기 소부대로 흩어져 싸우던 병사들은 임유진의 불꽃을 광명으로 삼아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은 명령 체계가 취약한 론다리온의 신도들이었다.
“오오오옷!”
“부사령관님을 따르라!”
“신벌이다! 이 악마들에게 신벌을 내려라!”
어느 정도 사기 고양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악마들 사이를 휩쓸며 맹위를 떨치는 임유진의 얼굴엔 굵은 땀방울이 수도 없이 맺혀 있었다.
‘체력 소모가 너무 심해.’
머리가 아픈 건 둘째 치고, 벌써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멀쩡했을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헌터의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그녀는 예전처럼 바람과 같은 몸놀림도,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기교도 부릴 수 없었다. 극상의 신기인 성화의 힘으로 놀라운 활약을 보이고 있기는 하나, 이 또한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부사령관님! 잠깐 휴식을 취하시지요!”
“아직은 더 버틸 수 있어요.”
“지금처럼 여유가 생겼을 때 힘을 비축하셔야 합니다! 이쪽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그녀가 악마들을 일소하며 부대를 결집한 덕에 잠깐의 틈이 생겼다. 부장들의 권유를 받아들인 임유진은 잠시 뒤로 물러나 숨을 골랐다.
뜨거웠던 머리가 조금 식고 나자, 맹렬히 돌아가는 전황이 새로이 눈에 들어왔다.
-크카카카카카!
-인간! 인간들을 죽여라!
-그그그그… 피의 축제다!
결코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이질적이고도 음산한 악마의 괴성이 사방에서 울려댔다. 조금 전 그녀가 쓰러뜨렸던 하급 악마 어벤저를 비롯해서, 거대한 인간의 상체에 코끼리 같은 다리가 네 개나 달린 괴수 악마 맘몬(Mammon), 강철까지 녹여버리는 유독가스를 사방으로 뿜어대는 지렁이 악마 디파일러(Defiler) 등 끔찍한 괴물들이 도처에서 난리를 치는 중이었다.
애당초 왜 이런 판국이 만들어진 것일까. 임유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이해가 안 돼.’
분명 노구덕 군단이 발을 들인 곳은 용들이 출몰하는 종말의 협곡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 포효하는 용들이 아니라, 피와 살육에 굶주린 아바돈의 악마들이었다.
단지 악마들이 나타난 게 전부였다면 이런 지경까지 이르진 않았을 것이다. 도무지 믿기지 않지만, 지금의 이 산만한 난전은 악마들의 조직적 기습에 의한 결과였다.
‘이건 군대야. 어딘가 이 악마들을 지휘하는 존재가 있는 게 분명해.’
아마 지금쯤 다른 지휘관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 문제는 악마군대를 지휘하는 괴물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경험이 풍부한 임유진으로서도 악마들이 조직적으로 군대를 이뤘다는 얘기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 서열에 따라 한 무리를 이룰 수는 있어도, 이처럼 수많은 개체가 동시에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전례는 없었다.
말인즉, 그만큼 군기가 엄정하다는 거다. 힘의 논리에 굴종하는 악마들의 습성을 미루어 볼 때, 이 악마들의 지휘자는 상상하기 어려운 괴물임이 분명했다.
‘여기서 그런 괴물과 마주친다면….’
마음이 급해진 임유진은 서둘러 사방을 살폈다. 사전에 연대할 다른 지휘관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밀집 대형을 유지해라!”
“달라붙는 것들은 모두 죽엿! 앞으로 길을 뚫으란 말이야!”
이두식, 신소율로 짐작되는 목소리가 간간이 들리긴 했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헌터로서의 감각이 유지되고 있다면 모를까, 사실 만이 넘는 수가 정신없이 뒤엉킨 상황에서 육안만으로 특정 부대를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단, 어디에나 정론을 뒤집는 예외는 있다.
지금 임유진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이 진창을 뚫고 나갈 유일한 활로가.
기실 힘들여 찾을 것도 없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이 전장에서 유일하게 일방적인 도살이 이루어지는 곳. 흩어진 신왕병들이 한 줄기로 뭉쳐 나아가는 곳. 타르처럼 시꺼먼 악마들의 내장쪼가리가 사방팔방으로 비산하는 곳은 오직 저 한 지점밖에 없었으니까.
뿌연 피안개가 피어나는 중심엔, 악마들의 검은 피로 흠뻑 피칠갑을 한 거구의 오크가 있었다.
“크아아아아!”
사위를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성에 사람을 먹어치우는 악마들이 주춤거린다. 숨을 그르렁거리는 오크의 눈알이 희번덕거릴 때마다, 어김없이 악마들의 처절한 비명이 잇따랐다
-하등한 오크 주제에 감히!
그 한심한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던지, 칠 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악마가 앞으로 나섰다. 머리에 황소처럼 위를 향해 치솟은 두 개의 뿔을 매단 털북숭이 악마는 바포메트(Baphomet)라 불리는 카름이었다.
상급 악마 바포메트의 가죽은 투기를 두르지 아니한 도검은 아예 통하질 않고, 헬파이어의 열기조차 무시할 정도로 항마력이 뛰어나다. 또한 그 산악 같은 덩치에서 발휘되는 힘은 전설속의 거인인 타이탄과 비견되는 괴물이었다.
하지만 황소머리 악마를 올려다보는 노구덕의 눈은 백지처럼 아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단지, 입으로 스며든 검은 피를 퉤 하고 내뱉으며 한마디를 중얼거렸을 뿐이다.
“진흙 덩어리에, 지렁이에, 이번엔 황소로군. 근수가 꽤 나가겠는데.”
-파리 같은 놈! 그대로 터뜨려주마!
격노한 외침이 들리는가 싶더니, 정면에서 눈이 뜯겨나갈 것 같은 풍압이 일었다. 어느새 휘둘러진 바포메트의 거대한 손아귀가 주변의 악마들까지 찢어발기며 그를 덮친 것이다.
퍼엉!
바포메트의 양 손바닥이 마주치며 발생한 충격파는 병사들과 악마들을 가리지 않고 멀리 날려버렸다. 충격파 가까이 있던 자들은 그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풍선처럼 몸이 터져버렸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 낀 노구덕은 멀쩡했다. 쇠기둥처럼 두터운 팔로 바포메트의 손바닥을 밀어낸 노구덕은 펄쩍 뛰어올라 바포메트의 복부를 강타했다. 그러자 바포메트의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며 그 거대한 몸뚱이가 펄떡이며 위로 튀어 올랐다.
-억! 어억! 어어어억–!
목숨의 위협을 느낀 바포메트는 급히 노구덕을 떨어뜨리려고 했다. 놈은 암석마저 녹여버리는 흑염을 몸에 두르고, 꽁지에 불이 붙은 토끼처럼 껑충껑충 날뛰었다. 그 바람에 멋모르고 놈의 주위에 있던 악마들까지 그 불이 옮겨 붙어 죄다 타버리고 말았다.
그 사이, 바포메트의 질긴 가죽을 찢어버리고 뒷등으로 빠져나온 노구덕은 허우적거리는 놈의 손길을 힘으로 밀쳐내며 척추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놈의 가죽에서 일어난 검은 불길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살갗을 태웠지만, 그의 항마력과 재생력을 뚫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금방 놈의 머리에 도달한 노구덕은 곧장 멋들어지게 솟아 있는 뿔 하나를 붙잡았다.
-뭐, 뭘 하려는… 음, 음머어어어어–!
뿌드드득! 구슬픈 소울음 소리와 함께 바포메트의 커다란 눈알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황소악마 바포메트의 자랑인 거대한 뿔이 무참하게 부러진 것이다.
굵은 혈관에 의지해 대롱대롱 매달린 뿔조각을 일별한 노구덕은 나머지 멀쩡한 다른 쪽 뿔도 사정없이 부러뜨렸다.
-음머! 음머어어어!
질퍽거리는 핏물을 뒤집어 쓴 노구덕은 깨진 뿔 속에서 구리선처럼 드러난 신경줄을 고삐 쥐듯 붙잡았다. 그러자 바포메트는 더욱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아무리 강한 악마라지만 뼛골에 숨어 있던 예민한 신경줄을 잡아 뜯는 고문에는 견딜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바포메트에겐 불행하게도, 놈의 두개골 위에 올라탄 오크는 잔혹하기로 따지자면 백정보다 더한 인물이었다.
“앞으로 돌진해라. 다 날려버려. 따르지 않으면 이 신경줄을 다 뜯어버리겠다.”
스산한 경고성을 날린 노구덕은 양손에 붙잡힌 혈관을 뒤로 홱 잡아당겼다.
-꾸워어어어어어어–!
절규와도 같은 포효성을 내지른 바포메트는 거대한 눈시울에서 피눈물을 흩뿌리며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뇌를 인두로 지지는 듯한 이 격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동족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었다.
상급 악마 바포메트의 광란은 협곡을 가로막고 있던 악마 무리를 일거에 초토화시켰다. 입과 전신에서 끊임없이 검은 불길을 토해내며 필사적으로 몸을 들이받는 바포메트의 모습은 흡사 어둠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화륜(火輪)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불꽃의 수레바퀴가 지나간 길은 진퇴양난에 빠져 있던 노구덕 군단의 숨통을 터 주는 활로가 되었다.
“전군! 폐하의 뒤를 쫓으세요!”
“좌군(左軍)! 저 황소 머리를 쫓아가! 절대 뒤처지면 안 돼!”
“근위대! 후방을 보호한다!”
병사들의 반응은 기민했다. 심령차력술을 통해 노구덕과 연결된 병사들은 지휘관들이 따로 외치기도 전에 이미 돌파구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임유진이 결집한 중앙군과 우군, 신소율의 좌군, 이두식의 근위대가 한 데 뭉쳐 혈로를 뚫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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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너무 많이 죽었다.’
바포메트의 머리에 매달려 있는 동안, 대강의 사망자를 헤아린 노구덕은 거칠게 이를 갈아붙였다.
생각지도 못한 악마들의 기습과 그로 인한 난전 때문에 천여 명에 달하는 전사자가 발생했다. 아마 전투불능의 중상자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터. 이곳이 프라임리그 급의 레귤러라는 걸 감안해도 너무 큰 손해였다.
‘내 실수다. 외형만 보고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어. 여기가 정말로 ’종말의 협곡‘일 것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는데…….’
겉보기에만 종말의 협곡과 비슷하게 보일 뿐, 이 지역은 실상 강력한 카름들이 난잡하게 뒤섞여 있는 무법지대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게다가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벌써 상당한 거리를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협곡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시온까지 이르는 길이 전부 이렇게 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
“헛!”
잠시 불길한 상상에 혀를 차던 노구덕은 불현듯 날아든 강렬한 마기에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덕분에 된서리를 맞은 것은 그를 태우고 폭주하던 바포메트였다.
-꿰에엑!
뿔을 잃은 바포메트의 머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머리와 몸이 깔끔하게 분리된 황소악마의 사체는 이내 검은 마기에 휩싸여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바닥에 내려선 노구덕의 눈엔 이미 바포메트의 최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왜 안 나타나나 싶었는데, 여기서 보게 되는군. 이 악마군단은 네 작품인가?”
“…….”
입을 비죽이는 노구덕과 마주 선 이는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건장한 팔뚝에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이는 칠흑의 마기가 휘감긴 것으로 보아, 방금 바포메트의 명줄을 끊어버린 장본인이 분명했다.
“리베르타에겐 마신 융펠을 보내고, 이쪽에는 대악마 마스테마라…. 구도는 나쁘지 않군. 이미 제정신은 아닌 것 같지만.”
“…….”
독안의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노구덕은 개의치 않았다.
“처량한 사냥개 신세라고는 하지만, 널 상대로 적당히 할 순 없겠지. 그랬다간 이쪽이 당할 테니까.”
“…노구덕.”
“드디어 무거운 주둥이를 나불대는군. 덤벼라, 무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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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 무릴로.
날씨가 너무너무 많이 춥습니다. 이제 눈만 내리면 될 거 같네요.
다가오는 연말을 향해 오늘도 힘차게 나아가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