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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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혈로(血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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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군 결성, 그 이틀째의 아침이 밝았다.
아직 축축한 새벽의 자취가 가시지 않은 가운데, 노구덕은 이른 아침부터 노대(露臺)에 올랐다.
높이 약 십오 미터. 마법 식물의 줄기로 이루어진 노대는 어떤 우화에 등장하는 콩나무만큼 무지막지한 크기를 자랑했다. 척 보기에도 마녀회의 냄새가 물신 풍기는 이 노대는 신왕병 소속 주술사단이 구축한 전망대로, 아래에선 보이지 않는 시온의 성벽 위를 살피기 위한 목적으로 가설된 시설이었다.
“어라? 선객이 있었군.”
평평한 노대 꼭대기엔 앞서 두 사람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옅은 안개 속에서 드러난 두 명의 얼굴은 데모나와 소냐였다.
“일찍 일어났잖아? 아직 영력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텐데?”
“잠만 잔다고 영력이 회복되는 건 아니니까. 그러는 넌 어쩐 일이냐?”
“병력을 챙기는 너희와는 달리 남아도는 게 시간이고… 일단은 나도 참전한 셈이니까. 너와 같은 목적으로 오지 않았겠어?”
웬일로 기특한 소리를 하는 데모나다. 그녀에게도 이번 전쟁의 무게는 상당히 크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소득은?”
“꼬맹이에게 물어봐. 난 건진 게 없지만, 저 영악한 꼬맹이라면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렐를 잡는다고 했건만, 데모나는 그다지 소득이 없었던 모양이다. 머리를 끄덕인 노구덕은 그 옆에서 작은 손을 다소곳이 마주 모은 소냐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 아이는 그 앞에서도 좀처럼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다.
예전엔 미처 눈치 채지 못했지만, 지금은 안다. 그것이 소냐 나름의 ‘거리 두기’라는 것을.
시릴 정도로 투명한 소냐의 눈동자는 얼음의 결정을 보는 듯했다. 그 매혹적인 영롱함에 빠진 다른 이들은 미처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진심을 보았던 노구덕은 동동 떠다니는 얼음 속 깊은 곳에 감춰진 기이한 열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식지 않은 감정의 잔열. 소냐와 선을 그어버린 그로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열기다.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거구나.’
“…이른 아침부터 고생이 많구나. 아침은 먹었니?”
“아직…. 식사는 다 같이 하는 게 좋으니까요.”
“허허, 그렇지. 이왕이면 가족이 전부 모여 먹는 게 즐겁지. 조금 있으면 다른 녀석들도 일어날 테니 그때 같이 먹자꾸나.”
“네, 대부님.”
꾸벅 공손히 머리를 숙인 소냐는 이내 앙증맞은 하얀 손을 뻗어 뿌연 안개 속에 가라앉은 시온의 정면을 가리켰다. 거리가 꽤 되는 데다, 도시 주위로 뭉게구름처럼 몰린 안개 때문에 성벽의 윤곽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불투명했지만, 노대에 오른 세 사람에게 그런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 시간 가까이 지켜봤지만, 성벽 위에 인기척이 전혀 없습니다.”
“흐음…. 시온을 둘러싸고 있다는 보호막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
“네. 송구한 말씀이지만 육안으론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건 소득이 있다는 얘기로 들리는구나.”
“…스캔을 통해 서너 군데 정도… 취약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음.”
기대했던 대로의 긍정적인 답변이다. 한데 조심스레 대꾸하는 소냐도 그렇고, 대답을 들은 노구덕도 어째 상당히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었다.
소냐가 말한 스캔이란 단순한 마력 스캔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마력이 아닌 시스템의 힘을 찾아내고 그 농도를 분석하는 고차원의 탐지 능력이다. 다시 말해, Lv6의 마법 재능을 가진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뜻이다.
노구덕이 아는 한 발레기우스는 아직까지 소냐의 존재를 모른다. 그렇다면 다가올 대전에서 소냐의 힘은 충분히 강력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때문에 노구덕은 따로 소냐를 불러 능력의 사용을 자제할 것을 권했다. 이곳 시온은 발레기우스의 앞마당. 그녀가 경솔하게 능력을 썼다가는 발레기우스의 존재를 발각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 이튿날부터 능력을 사용했다고 한다. 노구덕이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바로 성을 내지 않은 건, 속이 깊은 소냐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와선 가급적 네 힘을 쓰지 않길 바랐다만…….”
“대부님의 충고는 깊이 숙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니?”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부터 누군가 계속 절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혹시, 그놈이냐?”
“아마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낮게 혀를 찬 노구덕은 이내 끙 앓는 신음을 삼켰다. 결국 소냐의 존재를 끝까지 숨기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능력을 보이지 말거라. 이곳엔 발레기우스 말고도 조심해야 할 놈이 하나 더 있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 취약점이 어딘지 한번 들어볼 수 있겠니?”
소냐가 찾아낸 방벽의 약점은 성문과 멀리 떨어진 각 성벽의 사이사이였다. 다시 말해 소냐와 같은 감지능력이 없는 적들이 도시를 공략할 경우, 가장 공략가능성이 적은 요소에 취약점이 위치한 셈이다.
“발레기우스… 이 여우같은 놈. 그런데 왜 유독 그곳들만 힘이 약한 거지? 함정일까?”
“함정은 아닐 겁니다. 저 벽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힘을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안에서 밖으로 뻗는 힘 또한 차단하는 성질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부에서 외부로 통하는 길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수월할 테지만요.”
“…그렇군. 내부에서 약하다라…….”
한마디로 방벽 곳곳의 약점들은 발레기우스가 외부에 힘을 행사하기 위해 뚫어놓은 개구멍이란 소리. 노구덕은 소냐가 덧붙인 사족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약하다곤 하나 병사들 수준에서 뚫을 수 있는 강도는 아닙니다. 단, 저나 검신, 대부님께서 힘을 쓴다면 파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내가 된다는 건, 오리지널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거구나.”
“네. 그렇긴 합니다만…….”
“…좋아. 그렇다면 방법이 생겼군.”
소냐의 동글동글한 눈이 왼편으로 기우뚱했다. 이제 됐다는 듯 손뼉을 마주치는 노구덕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었던 탓이다.
리베르타의 김정인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노구덕 또한 김정인 앞에서 전력을 드러낼 생각은 없을 터다. 그렇다면 본인이 나서지 않는 선에서 해결을 하겠다는 건데, 아무리 궁리해 봐도 그녀가 아는 상식선에선 불가능했다.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다른 사람의 조력이라도 받을 셈인 걸까?
하지만 이번에는 허들이 너무 높았다. 노구덕의 무력이라면 저 방벽을 뚫어낼 수 있다고 말한 건 소냐 자신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노구덕’이 기준이다. Lv6의 재능자를 제외하고, 이 세상에 노구덕만큼 강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우선은 이쪽에서 연락을 취해야 할 텐데… 어쩐다?”
“구더기, 저길 봐.”
갑자기 데모나의 나직한 부름이 들렸다. 턱을 치켜든 그녀는 어느 방향을 향해 눈짓하고 있었다. 북부 주둔군, 그중에서도 청룡왕 이정이 이끄는 북부동맹이 진을 친 곳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시끄러운 함성이 울려 퍼지는 그곳에선 백여 기의 기마가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그 선두를 내달리는 건 푸른 장포를 펄럭이는 청룡왕 이정이 분명했다.
“기운차기도 하지. 바보에게는 아침도 없는 걸까?”
“때론 직접 부딪쳐봐야 불가능을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도 시기와 장소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데모나는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해선 남을 힐난하지 않는 소냐도 한심스럽다는 얼굴이다.
“흐음. 어제 회의 때부터 흥분한 기색이 보이긴 했지. 북부가 무시를 당했다나 어쨌다나. …뭐, 오히려 잘 됐군. 이걸로 안쪽에 연락을 취할 구실이 생겼으니.”
아무래도 아침부터 분주해질 것 같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노구덕은 두 여인과 함께 슬슬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한 지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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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빛을 띤 강맹한 기운이 선명한 궤적을 남기며 투명한 방벽을 연신 두들겼다.
쾅! 쾅! 쾅!
그러나 길쭉한 손톱 모양이 궤적이 허공을 그을 대마다 보이는 것은 미세한 불똥뿐,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벽은 철옹성처럼 견고하기 짝이 없었다.
“헉, 헉! 제, 제기랄…! 이럴 수가 있나!”
육중한 팔을 마구 휘저으며 용조(龍爪)를 긁어대던 청룡왕 이정은 험상궂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면 무엇이든 여지없이 갈라버렸던 용인의 힘이 손톱만큼도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제 회의에서 김정인에게 말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내심 코웃음을 쳤던 그였다. 이정에겐 김정인의 그 엄포가 공을 가로채려는 수작질처럼 보였다.
이정은 열등감과 소외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북부군의 위치는 리베르타와 레그나토르에 가려진 하잘 것 없는 조역에 지나지 않았다. 세간의 주목은 어디까지나 무신과 검신이 있는 양대 세력에 몰려 있고, 북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제 회의만 해도 그랬다. 주도권은 김정인과 노구덕이 쥐고 있었고, 강옥교는 대놓고 노구덕의 편을 들었다. 육지백 또한 아무래도 좋다는 듯 유유자적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정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신과 검신의 세력이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왕 전쟁을 시작한 이상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곁다리로 남고 싶진 않았다. 하물며 이 싸움은 대륙의 운명을 결정 짓는 한판의 승부가 아니던가.
독단이긴 하지만, 초전을 열어 성과를 낸다면 확실한 전공이 된다. 느닷없이 기마 백 기를 몰고 나선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역사에 이름을 남겨보고자 의기양양하게 내친걸음이었는데… 이건 완전히 광대놀음이 되어버렸다. 허공에 팔을 허우적거리며 쩔쩔매는 자신의 모습이 멀리서 지켜보는 다른 부대들에게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생각만 해도 천불이 났다.
제 분을 참지 못한 이정은 온몸의 비늘을 곤두세우며 포효성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아악!”
펑! 펑! 펑! 더욱 길쭉하게 자라난 그의 손톱에서 칼바람이 뻗어 나오며 대기를 찢어 갈랐다. 물론, 그런다고 변하는 건 없었다. 잔뜩 성질을 부린다고 깨졌을 방벽이었으면 예전에 깨졌을 터다.
“사, 사령관님!”
“뭐냐!”
“각 부대가… 전면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뭐라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이정의 고개가 급히 돌아갔다. 과연, 수하의 보고대로 각 진영의 주력군이 사방에서 밀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오늘 하루는 천천히 지켜보면서 방책을 강구하겠단 노구덕의 말이 아침나절부터 깨져버린 것이다.
대관절 어찌된 것인지 경위를 파악하지 못한 이정이 얼이 빠져 있는 사이, 그의 앞으로 수십 기의 기마가 당도했다. 그 선두는 거대한 군마를 올라탄 노구덕이었다.
“이보게. 아침 운동이 너무 격렬한 거 아닌가?”
“…총사령!”
켕기는 게 있으니 만큼, 머뭇거리며 예를 취하는 이정은 꽤 곤혹스런 얼굴이었다.
“내 분명 오늘은 두고 보겠단 말했을 터인데. 자네 행동은 무슨 의미인가? 항명인가?”
“…총사령에게 항명할 뜻은 전혀 없소. 하나 우리군은 총사령에게 귀속된 것이 아닌 바. 내게도 백 기 정도의 군마를 움직일 직권 정도는 있다는 점을 알아주시오.”
“흐음, 따지자면 그렇긴 하지. 각 군 지휘관들에게도 독자적인 작전권은 있으니까.”
“기분이 상했다면 사죄하겠소. 결코 분란을 일으킬 속셈은 아니었으니…. 군을 웃음거리로 만든 책임을 묻겠다면 달게 받겠소.”
청룡왕 이정은 깔끔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거듭 머리를 숙였다. 스스로에 대한 과신이 좀 심하다 뿐이지, 그는 맺고 끊음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사죄는 됐네. 마침 작전이 변경된 참이니, 자네는 내가 지정한 구역을 공격해 줬으면 좋겠군.”
“작전변경…? 그럼 이 전면 공세는 총사령이 지시한 거요?”
“내가 아니면 달리 누구겠나? 본의 아니게 말을 뒤집는 셈이 됐지만, 어쩔 수 없지. 길이 보였으니 나아갈 수밖에.”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이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설마, 아군의 화력으로 이 방벽을 깨부순다는…?”
“아니, 답은 안에서 나올 걸세. 아마도…… 말이야.”
담담히 대꾸하는 노구덕의 눈길은 엄숙하게 솟아있는 시온의 성벽 저 너머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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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오늘은 연참입니다.
생각대로 날이 엄청 추워졌습니다. 옷 꽁꽁 여미고 다니시는 게 좋을듯…
어서 12월이 왔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