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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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혈로(血路)
“말미잘 같은 놈들이 사람 말도 할 줄 아는군.”
콰콰쾅! 갑자기 몰아닥친 광풍이 촉수처럼 하늘하늘 움직이던 바이올렛과 그 뒤의 엘리엇, 일대의 괴물들까지 한순간에 휩쓸었다.
지축이 뒤흔들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충격파였다. 하지만 정작 주먹을 떨쳐낸 노구덕의 이마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하하… 소용없다고 했잖아? 어지간히 머리가 나쁜 걸?”
“너희들은 전부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크흐하하하하…!”
바이올렛과 엘리엇.
밑바닥에서 흐물흐물 기어 올라온 어둠이 또다시 두 남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촉수처럼 길쭉하게 뻗은 그림자의 끄트머리에 비릿한 얼굴이 걸리고, 그 아래의 몸뚱이와 팔이 생겨나고, 마지막으로 다리가 생겨났다. 눈 깜작할 사이에 재생을 이룬 바이올렛은 솜털처럼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쿵! 묵직한 스태프를 바닥에 내려찍은 바이올렛은 조롱기 다분한 투로 말했다.
“너희들은 날 죽일 수 없어. 난 이미 주인님과 한 몸이 되었으니까. 이게 얼마나 황홀한 경험인지… 너희도 곧 알게 될 거야.”
미끈한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이는 바이올렛의 얼굴은 더없이 매력적이었지만, 노구덕의 눈에는 토사물보다 역겨운 마녀일 뿐이었다.
노구덕은 무의식중에 말아 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저 마녀를 또 날려버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래봐야 다시 되살아날 게 뻔하다. 저들은 이미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레귤러의 일부분이었다.
“어리석은 놈들. 스스로 목숨을 저버리고 레귤러의 일부가 되다니…….”
“레귤러? 오호호. 틀렸어. 지금 이 땅은 레귤러가 아니라 카름이라니까? 그 차이를 모르는 거야?”
“…….”
노구덕을 비롯한 동맹군 수뇌부의 가슴 한편에 으스스한 한기가 내려앉았다. 이죽이는 바이올렛의 말투가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카르마 에너지의 응집체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나, 레귤러와 카름은 명백히 다르게 구분된다.
레귤러는 카르마 에너지가 끊임없이 솟아나는 ‘공간’ 그 자체를 말한다. 변화하는 에너지의 성질에 따라 임의로 카름을 만들어내며, 영역 안을 멋대로 변화시킨다. 그 안에 있는 것은 지형지물이든 무생물, 유생물이든 할 것 없이 모두 레귤러의 영향을 받는다.
카름은 보통 레귤러가 만들어낸 변이생명체를 뜻하지만, 엄밀히 말해 레귤러의 하위개념은 아니다. 카름 중에는 레귤러의 영역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개체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재앙급 카름이나 떠돌이 카름이 그것이다.
무한정의 카르마 에너지로 무수한 괴물을 만들어내는 레귤러는 예측이 가능하다. 꾸준히 토벌을 하는 식으로 관리를 해 주면 일정 선에서 레귤러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안에서 나타나는 카름들의 종류와 강함도 늘 엇비슷하고, 뜻밖의 변수 같은 건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나 독립성을 띤 카름은 다르다. 레귤러처럼 끊임없이 에너지가 충당되는 건 아니지만, 대신 놈들은 계속해서 강해질 수 있다. 결정적으로, 놈들은 레귤러보다 훨씬 구체적인 살육 의지를 가진 괴물들이다.
삼류 헌터들도 아니고, 동맹군의 수장이란 자들이 그런 개념의 차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그녀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바이올렛의 발언이 기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전제에 기초했던 탓이다.
카름과 레귤러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무엇보다 유생물과 무생물이란 근본적인 상이점을 가진다. 그도 그럴 게 지금껏 알려진 카름들은 모두 ‘살아있는’ 존재지만, 레귤러는 공간 그 자체. 죽일 수 있는 존재와 죽일 수 없는 존재의 간극은 분명하다.
한데… 이 ‘땅’이 레귤러라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마녀의 잡소리에 신경 쓸 거 없소. 총사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잖소?”
“옳은 말씀이에요. 여 오라버니, 우리도 밖으로 나가죠.”
“당장 싸울 수 있는 병사들을 추려내겠소.”
북부동맹, 북부연합, 소드챈트리의 수뇌들이 광장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사이, 김정인 또한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군을 절반으로 나누겠습니다. 희지 씨, 싸울 수 있겠습니까?”
“싸울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김상목 부사령관이 1군, 희지 씨가 2군을 맡아 주십시오. 1군은 저희 쪽의 광장을 봉쇄하고, 2군은 예비 및 지원을 하는 식으로 운용합니다. 그리고 진주는 기존에 그랬던 것처럼 별동대를 맡는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네!”
“정인 씨는… 역시 내성으로 가실 건가요?”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 윤희지의 눈빛은 왠지 모를 그늘이 져 있었다. 남편을 사지로 보내는 아내의 입장이니 딱히 이상할 건 없었지만.
“물론입니다. 가지 않는다면, 이길 수 없으니까요.”
“저도 같이 가면…… 안 되겠죠?”
“…미안합니다.”
“아뇨. 저야말로 미안해요. 괜한 말을 꺼내서.”
고개를 숙인 윤희지는 조용히 물러났다. 지금의 자신이 짐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건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았으니까.
그건 굳은 표정을 한 김상목과 이진주도 마찬가지였다. 여느 때라면 호위병이라도 대동할 것을 권했겠지만, 모두가 시시각각 기력이 떨어지고 있는 이 상황에선 누굴 데려가든 짐덩이가 될 뿐이다. 솔직히 말해 지금 내성으로 향할 수 있는 전력을 가진 사람은 동맹군 전체를 통틀어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단 둘이 전부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단 두 사람만은 거의 힘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층 더 강해진 엘리엇을 순식간에 갈아버린 검신과, 되살아난 두 사람을 무지막지한 충격파로 짓이겨버린 무신.
오직 그들만이 발레기우스와 싸울 만한 전력을 보존한 상태였다.
콰아아앙!
또다시 강맹한 충격파가 대기를 뒤흔들었다.
뿌옇게 일어난 먼지 구름 속에서 핏빛으로 일렁이는 두 개의 눈이 보였다. 두 눈에서 불덩이를 토해내는 것 같은 노구덕의 얼굴은 그의 손아귀에 목줄을 틀어잡힌 엘리엇을 향해 있었다.
카름이 되었어도 호흡기로 숨을 쉬는 건 매한가지인지, 우악스런 손길에 기도가 차단당한 엘리엇의 얼굴은 썩어문드러진 감을 보는 것 같았다.
“크르르륵…!”
“네놈과는 할 애기가 많았지. 안 그런가?”
“크, 크, 크…….”
고통스럽게 구겨진 엘리엇의 눈이 씰룩씰룩 움직이며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꼭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노구덕을 조롱하는 듯했다.
콰직!
손가락 마디가 질긴 피부를 파고들며 가공할 악력이 그의 목을 부러뜨렸다. 하얗게 눈을 뒤집으며 발광하던 엘리엇은 이내 입 밖으로 길게 혀를 늘어뜨린 채 죽어버렸다. 발레기우스의 일부가 됨으로써 나름 막강한 힘을 손에 넣은 그도 노구덕 앞에선 하룻강아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그 하룻강아지의 목숨이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크하하하핫!”
한때 시온의 시민이었을 괴물들.
이제는 이성이 없는 카름이 되어버린 그들 중 하나의 얼굴이 불룩불룩 변화를 일으키더니 전혀 다른 인상으로 변모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것처럼 여기저기 핏대를 세운 사내의 얼굴은 조금 전 노구덕에게 죽임을 당했던 엘리엇이었다.
금방 되살아난 엘리엇은 가가대소하며 소리쳤다.
“나와 할 얘기가 있다고? 아, 네 그 멍청한 부하들 말이냐? 그래, 이제야 조금 기억이 나는군. 이름이 아마… 패터슨이었지?”
“됐다. 생각이 바뀌었다. 괴물과 이야기해봤자 시간낭비일게 뻔하니까.”
쾅! 경로 내의 카름들을 모조리 터뜨리며 뻗친 투기가 엘리엇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겨우 대사 한마디 내뱉고 머리를 잃어버린 엘리엇은 힘없이 손을 흐느적거리다 뒤로 풀썩 쓰러져버렸다.
순식간에 그를 죽여버린 노구덕은 주위로 몰려드는 카름들을 비질하듯 쓸어버리며 위로 뛰어올랐다. 옆 전장에선 청룡왕 이정과 소드챈트리의 사형제들이 바이올렛과 맞서는 게 보였지만, 남부의 마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넓어진 시야로 주위를 살피니, 때마침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카름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얼굴이 뭉글거리며 변하기 시작한 개체였다.
“크하! 이놈이…… 으걱!”
크게 벌어진 입 안으로 무쇳덩어리 같은 주먹이 틀어박혔다. 입가와 턱이 완전히 으스러진 채 뒤통수가 날아간 엘리엇은 이번엔 단 한마디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절명해버렸다.
엘리엇이 그 뒤에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부활한 것은 당연한 일. 감각을 활성화한 노구덕은 엘리엇의 부활 지점을 귀신 같이 찾아냈다.
“노구…!”
퍽! 이제는 수도였다. 눈을 부릅뜬 엘리엇은 그대로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두 동강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노구덕의 노림수는 분명했다. 그는 엘리엇이 부활하는 족족 그를 죽이고 있었다. 덕분에 엘리엇은 부활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매순간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죽어나가는 중이었다.
“크…!”
머리가 수박처럼 으깨지고,
“그륵…!”
목이 졸리기도 했으며,
“이 새ㄲ… 꺼억!”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전에 고환이 터지기도 했다.
목숨이 무한한 덕분에 죽음도 무한하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을까.
겨우 1, 2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그동안 수십 번의 죽임을 당한 엘리엇은 그야말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죽음을 전부 체험하고 있었다.
아무리 불사라한들, 통증은 느낀다. 그 점을 이용해 집요하게 고문을 가하는 노구덕의 잔인함은 옆 전장에서 싸우던 바이올렛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휴우. 운이 좋았네. 저기 미친놈이 있었잖아? 만일 내가 걸렸더라면…….”
생각만으로도 오싹한 듯 움찔 어깨를 떤 바이올렛은 서늘해진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름화한 엘리엇은 그녀와 비교해 하수이긴 해도, 상당히 강한 축에 속했다. 그런 엘리엇을 저런 식으로 가지고 놀 수 있다니…. 검신 말고도 저런 괴물이 또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최훈을 죽였다고 했지? 검신과는 좀 다른 유형인 것 같긴 하지만… 장난이 아니잖아? 주인님께서 직접 보러 가신 이유가 있었어.’
“마녀! 감히 한눈을 팔다니!”
“차합!”
“흥, 여기 조무래기들과는 다르게 말이야.”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친 바이올렛이 스태프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원형의 파동이 이정과 육지백의 공세를 튕겨냈다.
청룡왕과 소드챈트리의 무인들을 상대하면서도 밀리기는커녕 힐끔힐끔 다른 전장을 곁눈질 할 정도로 여유있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 전에 같은 방식으로 맥없이 당했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상대를 죽이기보단 적당히 상대하며 시간을 끄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놈들은 모두 주인님의 소중한 영양분이야. 말단 병사들이라면 모를까, 알짜배기들을 섣불리 죽일 순 없지. 그래도……. 저것들은 좀 위험한데.’
바이올렛의 보랏빛 눈이 문득 교활한 빛을 머금었다. 계속해서 엘리엇을 쳐죽이던 노구덕이 어느덧 김정인과 함께 내성 쪽으로 향할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살짝 이른 것 같긴 하지만… 역시 안 되겠어. 만에 하나라도 변수는 용납 못 해.”
부르르르…! 갑자기 바이올렛의 스태프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흑마력의 바이올렛의 전신을 빈틈없이 에워쌌다. 이글거리는 흑마력으로 뒤덮인 그녀의 모습은 흡사 검게 타오르는 지옥의 업화였다.
그 위압에 짓눌린 청룡왕 일행은 한순간 압도되어 뒤로 물러났다. 애초에 그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바이올렛은 그대로 스태프를 들어 그 머리 부분을 지면에 내리찍었다.
파아아앗-!
충돌 지점에서부터 시작된 무형의 파장이 광장을 넘어, 시온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그 파장은 격렬하게 뒤엉켜 싸우던 동맹군과 카름들을 일순 멈칫거리게 만들었다.
숨이 턱 막히는 기운에 꽁꽁 얼어버렸던 청룡왕 일행은 황급히 정신을 수습했다.
“…뭐지?”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호호호. 잠을 깨운 것뿐이야.”
“잠을… 깨워? 헛!”
무심코 되묻던 이정은 갑자기 지면이 우르르 진동하는 것을 깨닫고 헛숨을 들이켰다.
바이올렛은 깔깔 조소를 터뜨리며 양 팔을 크게 펼쳤다. 점차 커져가는 지면의 떨림 때문인지 그녀의 늘어진 소맷자락이 마구 펄럭였다.
“자, 똑똑히 보도록 해. 지상 최대, 최악의 카름을 말이야. 오호호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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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늦은 새벽쯤에 한 편 더 올라갈 예정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