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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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혈로(血路)
하늘이 어두워졌다.
원래도 어둡긴 했지만, 전장 전체에 더해진 거대한 그림자는 일식처럼 캄캄한 암흑을 불러왔다.
후드득 성벽에 붙어 있던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가고, 그 안에서 울뚝불뚝한 검은색의 피부가 드러난다. 잘 보니 터질 듯 맥동하는 광대한 근육과 강줄기처럼 솟아난 힘줄도 보였다. 단지, 워낙 크기가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이었기에 그것이 근육이고 힘줄이라는 걸 눈치채는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다.
북문을 기점으로 갈라져, 양 방향으로 들고 일어난 성벽은 어느새 완연한 두 팔의 형상을 갖추었다. 얼굴도 몸통도 다리도 없었지만, 그건 틀림없는 사람의 팔이었다.
쿠궁!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그것의 전체적인 모습은 둥그런 관의 모습이었다. 둥글게 이어져 시온을 감싸고 있는 건 여전하지만, 한 지점이 끊어져 두 개의 끄트머리가 생겼다. 그 두 개의 끄트머리가 근육질의 팔로 변한 것이다.
언뜻 보기엔 성벽 안에 묻혀 있던 팔뚝이 드러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동맹군이 도시 내로 진입할 때 파괴한 부위가 멀쩡해진 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결국 답은 간단하다.
저 거대한 팔은 성벽 그 자체가 변화하여 만들어졌다는 것. 그렇게 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
임유진과 윤희지, 이두식…. 외곽에서 일어나고 있는 천재지변에 가까운 변화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그때까지도 넋이 나가 있었다. 아니, 넋이 나갔다기보다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라고 봐야 옳으리라.
팔로 감싼 둘레만도 수십 킬로미터.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저게 어느 정도 크기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마 어지간한 산맥의 크기는 가뿐히 넘고도 남을 터다. 저건 시온의 성곽 그 자체였으니까.
위를 향해 활짝 펼쳐진 두 개의 손바닥이 하늘을 떠받치는 그 모습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그 무한한 힘을 지상에 과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외부에서 봐도 그럴진대, 하물며 온통 그 광활한 그림자 안에 파묻혀버린 안쪽의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야 말할 것도 없었다.
“…저것도 발레기우스의 작품일까요?”
“그렇겠지…?”
“대체…….”
‘어떻게 하죠?’ 아마 윤희지가 묻고 싶었던 말이었으리라. 그녀가 말을 다하지 못하고 삼켜버린 건, 임유진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 그 여자는 이 도시가 하나의 카름이 되었다고 했어요. 저걸 보니… 그 의미를 알 것 같네요.”
“저런 걸로 공격해 온다면… 막을 수 있을까?”
“…아뇨.”
윤희지는 크게 도리질을 했다. 저런 걸 막는다니, 어불성설이다. 설령 저널이 온전하더라도 절대 성립할 수 없는 얘기였다.
‘최대한 피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일 거야. 저만한 크기라면 움직임도 둔할 가능성이 높아. …잠깐만, 피한다고?’
맹점(盲點). 무언가를 깨달은 윤희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연해진 그녀는 황급히 임유진을 돌아봤다.
“어, 언니…!”
“깨달았어?”
허탈하게 말하는 임유진의 안색이 유달리 어둡다. 그건 절망의 색이었다.
이 전장은 온통 우글거리는 카름들로 가득해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곳이다. 당장 지금만 해도 리베르타의 병사들이 죽을힘을 다해 끝없이 몰려드는 카름들과 맞서는 중이다.
리베르타와 레그나토르가 합심하여 구축한 방벽은 더할 나위 없이 견고하지만, 그건 바꿔 말해 그 자리에 꼼짝도 할 수 없이 고립되었다는 뜻.
움직일 수 없으니 피할 수도 없다. 윤희지의 발상은 처음부터 불가능이었다.
그리고, 그 우려는 곧 끔찍한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오, 온다!”
“팔이 움직인다!”
하늘을 뒤덮은 거인의 팔은 그 덩치에 걸맞지 않게 무척이나 조용히, 은밀하게 움직였다. 틀림없이 뻣뻣할 것이라는 윤희지의 예상과는 달리 그 ‘신의 팔’은 나풀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유유히 상공을 맴돌았다.
시온 안쪽으로 들어온 손목이 호미처럼 구부러진다. 검지와 엄지를 집게 모양으로 구부린 놈의 팔은 아연실색한 동맹군의 머리 위를 천천히 빙글빙글 배회했다.
윤희지는 장난치듯 위를 맴도는 놈의 손을 보고서 무언가를 떠올렸다.
‘인형뽑기 기계…… 완전히 그거잖아. 우릴 가지고 놀고 있어!’
그 순간, 윤희지의 얼굴을 향해 거센 풍압이 들이닥쳤다. 하늘이 와르르 무너지듯 다가오는 검은 손을 본 윤희지는 자기도 모르게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쿠우우웅!
엄청난 압력에 찌그러진 땅이 크게 절규했다. 충돌지점으로부터 밀려온 충격파는 근처의 카름들과 병사들의 대열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뒤로 튕겨져 날아갈 뻔한 몸을 간신히 제자리에 지탱한 윤희지는 짙게 피어난 흙먼지를 들이마시곤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목이 타들어갈 정도로 아파왔지만, 당장 생각나는 건 살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콜록, 콜록…!”
“윽…! 희지야! 괜찮니?”
다행히 임유진도 무사했다. 손가락이 내려찍은 지점이 그녀들이 있던 곳을 살짝 비껴 난 덕분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콜록…! 그쪽은요?”
“내 주변은 괜찮은 것 같아. 그런데…….”
무엇을 보았는지, 가까이 다가오던 임유진의 말끝이 흐릿해졌다.
“전방 부대가… 궤멸했어…….”
“…….”
윤희지의 목울대가 꿀꺽 위아래로 움직였다. 임유진의 시선이 머문 방향, 그곳에서 서서히 다시 위로 올라가는 검은 손가락이 보였다.
임유진과 윤희지의 근방에서 일어난 충격의 근원지, 그러니까 놈의 ‘검지 손가락’이 찍어 누른 지점은… 뭉툭한 붓에 새빨간 물감을 듬뿍 묻혀 아무렇게나 칠해 놓은 수채화 같은 모습이었다.
빨간색. 정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도, 카름도, 모두 어마어마한 압력에 짓눌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졌기 때문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게 다… 사람이라고? 우리 병사들이라고?’
전방 부대라면 그 상당수가 그녀가 이끌고 온 리베르타의 병력들이다. 저 붉은 피구덩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용맹하게 전선을 사수하던 그들의 현재 모습이라니.
우두커니 선 윤희지의 입술이 하염없이 벌어졌다.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동공이 한순간 흐리멍덩하게 변했다.
무질서하게 뿌려놓은 칠리소스에서 잔인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것도 그와 같았다. 분명히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보이는 거라곤 그냥 움푹 들어가 새빨갛게 물든 땅 뿐이니,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명의 병사도 아쉬운 판국에 백 명이 넘는 병사들이 몰살을 당했다. 그중에는 오랫동안 그녀를 옆에서 보좌했던 부관도 있었다. 그런 이들이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것도 아니고, 벌레를 죽이듯 가볍게 찍어 누르는 손가락에 깔려 떼로 압사한 것이다.
말이 안 된다. 농담도 정도껏 하라지. 이건 지독한 악몽이 분명했다.
짝!
갑자기 눈앞에서 불이 번적였다. 화끈해진 볼을 감싸 쥔 윤희지는 멍한 눈을 들어 옆을 쳐다봤다.
“희지야! 정신 차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잖아!”
“으…….”
“곧 다음 공격이 들어올 거야. 지금은… 움직여야 돼.”
“움직여요…? 광장을 포기하자고요?”
“결집수비는 자살행위야. 이젠 계속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어. 대열을 유지하면서, 광장 주위를 계속 도는 거야.”
“아, 알았어요.”
겨우 정신을 추스른 윤희지가 머리를 끄덕이자, 임유진은 곧장 이두식을 바라봤다. 두터운 중갑이 너덜거리는 걸레짝처럼 보일 정도로 초라해진 그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근위대장, 힘들겠지만… 부탁해요. 후미를 맡아주세요. 앞쪽의 길은 제가 뚫겠어요.”
“맡겨주십시오. 기필코 사수하겠습니다.”
가슴을 탕탕 두드린 이두식은 남은 근위대 수하들을 이끌고 후방으로 달려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임유진은 이내 찬란한 백색의 불꽃을 일으켰다.
“후훗. 같이 등을 맞대고 싸우는 건 오랜만이지? 소율이까지 합류하면 아이리스 재결성이네.”
“하하…. 정말이지…….”
스태프를 곧추세운 윤희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어 보일 수 있는 임유진의 배짱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갈까?”
“네!”
눈빛을 교환한 두 여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시에 들끓는 카름의 무리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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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장이 된 바깥의 상황은 광장 안쪽에도 똑똑히 전해졌다. 아니, 상공에 그토록 거대한 손이 나타난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특히, 안쪽으로 파고든 검은 손이 광장의 북문 부근을 강하게 내리찍었을 때에는 동맹군 수뇌 모두가 기겁을 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소리만으로도 어떤 참상이 펼쳐졌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 있는 수뇌들이 나선다 해도 저건 막을 수 없다. 저 검은 손은 마력이나 투기, 시스템 같은 무형의 힘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물리력의 행사일 뿐이었으니까.
단, 그 위력이 수천수만 톤에 달한다는 게 문제였다.
“가면 안 된다.”
노구덕의 음울한 목소리가 밖으로 향하던 김정인의 걸음을 잡아챘다.
고개를 돌려 노구덕과 눈을 맞춘 김정인은 형형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군엔 저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대로 두면 수십 분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을 당할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가야만 합니다. 저걸 막을 수 있는 건 폐하나 저밖에 없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좋아. 네가 가서 저걸 막았다 치자. 그 다음에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김정인의 눈이 깊게 침잠했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그의 동공 속에서, 무섭도록 경직된 노구덕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팔이 나왔다. 그 다음엔 다리가 나올지도 모르지. 어쩌면 머리통이 나올지도 몰라. 그때마다 계속 막기만 할 셈이냐?”
“폐하께선… 아군이 전멸을 당해도 좋다는 말씀입니까?”
순간, 김정인의 몸이 위로 휙 떠올랐다. 수라처럼 흉한 얼굴이 된 노구덕이 우악스레 그의 멱살을 잡아챈 것이다.
“작작해라. 이 자식아.”
타오르는 용암처럼 무시무시한 눈길이 쏟아졌지만, 그와 정면으로 눈을 맞춘 김정인의 표정엔 한 점의 변화도 일지 않았다.
“…이것 놓으십시오.”
“전멸을 당한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네 예상과는 다르게 한 시간이 넘도록 버틸 수도 있지. 적어도 내 사람들은 어떻게든 버텨줄 거라 믿고 있다. 그런데 너는 뭐냐? 넌 네가 가진 사람들조차 믿지 못하는 거냐? 뭐든지 네가 직접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면, 저들은 대체 왜 끌고 온 거지?”
“수하들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하자는 겁니까?”
“잘난 척 하지 마라. 이 전쟁은 처음부터 도박이었다. 설마 너, 백퍼센트 이길 거라 생각한 거냐?”
“…….”
“그래도 가겠다면, 괜히 시간 아깝게 아웅다웅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나와 네놈이 협력하지 못한다면 발레기우스에겐 이길 수 없을 테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들어 올려진 김정인의 아래턱에 가칠가칠하고 단단한 피부가 와 닿았다. 어른의 머리보다 큰 그것은 피비린내의 잔향이 진하게 남아 있는 노구덕의 주먹이었다.
“…그냥 여기서 네 녀석을 없애버리겠다.”
돌연한 노구덕의 협박은 남은 잔당들과 맞서 싸우던 동맹군 수뇌부를 크게 당황시켰다.
“폐, 폐하!”
“그만두시오! 여기서 자중지란을 일으킬 셈이오!”
육지백과 이정 등, 여러 사람이 만류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노구덕은 그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오직 김정인만을 쏘아보았다.
“나와 함께 내성으로 들어가든지, 이 자리에서 같이 죽든지. 선택해라. 어쩔 테냐?”
“…같이 죽다니. 어폐로군요. 형님께서 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담백하던 김정인의 눈가에 삭막한 한기가 스미자, 노구덕의 입가에도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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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흠흠.. 마누라들은 의기투합해서 싸우는데.. 바깥양반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