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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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혈로(血路)
“흐흐흐. 그거야 대보면 알 일이지. 그게 네 대답이냐?”
짧은 시간, 두 사람의 눈빛이 으르렁대는 용과 호랑이처럼 치열하게 뒤엉켰다.
‘진심이다.’
노구덕의 살기는 진짜였다. 그는 수틀리면 정말로 여기서 자신과 싸울 작정이었다.
그렇기에, 김정인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그가 체감하는 노구덕의 무력은 본래 그가 예상했던 수준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으니까. 정말로 여기서 두 사람이 싸운다면 그야말로 자폭인 셈이었다.
그가 갈등을 거듭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밖에서는 끊임없이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음이 심란해진 김정인은 노구덕의 동공 깊은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난폭하게 타오르는 그의 눈은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는 조급함이 엿보였다.
실은 그도 내심으론 밖으로 달려가고 싶은 거다. 김정인은 그 속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 순간에도 부하들이, 동료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가고 있다. 그중엔 그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가족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나. 어떻게 그들의 생사를 걸고 이토록 무모한 말을 할 수 있지? 김정인은 도저히 노구덕의 머릿속을 이해할 수 없었다.
“꾸물거릴 시간 없다. 어서 대답해라.”
“…관두겠습니다.”
길게 한숨을 내쉰 김정인은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로선 익숙하지 않은 항복선언이었다.
현재는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다. 노구덕의 말대로 여기서 동반자살을 할 셈이 아니라면, 쓸데없는 시간낭비는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잘 생각했다.”
“한 시간. 말씀하신 한 시간 내로 결판을 낼 수 있겠습니까? 안쪽의 궁성까지는 거리가 꽤 됩니다.”
거리뿐 아니라, 방해물도 곳곳에 널려 있다. 치가 떨릴 정도로 우글거리는 카름들도 그렇고, 바이올렛과 엘리엇이라는 난적들도 아직 건재하다. 무엇보다 카름으로 변한 도시 자체가 큰 변수였다. 저 검은 손처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그 방해물들을 뚫고, 시온 궁성 어딘가에 숨어 있는 발레기우스를 찾아 한 시간 내로 처리한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
불가능이다.
검신 김정인은 수많은 불가능을 타파하며 이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이건 정말로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한 시간도 최대한 높게 잡은 거다. 사실 삼십 분 정도만 지나도 광장 밖의 병력이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지…….
“할 수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처럼 보입니다만.”
“물론 근거는 없다. 그런 건 상관없이 해야만 하니까. 무조건 해내야만 돼. 실패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냐?”
“그런 상황이 되었지요.”
“크크크…. 이거 좀 웃기는군. 네놈이 근거를 찾다니. 근자감의 대명사는 김정인, 네 녀석 아니었냐? 아이리스 시절에 보통 이런 상황이 오면, 으레 네가 하겠다는 쪽이고, 내가 말리는 쪽이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입장이 바뀌고 말았어.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
김정인은 언짢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노구덕의 말이 왠지 의표를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변한 건가? 아니, 그렇지는 않아.’
물론 과거의 자신이 언제나 뚜렷한 확증을 가지고 판단을 내린 건 아니다. 그러나 그때는 비록 근거는 없을지라도 확신은 있었다. 자신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라도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그것이다. 실제로 그 확신은 언제나 그에게 승리를 안겨다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여기선 그런 확신이 없었다. 그만큼 어려운 상황이란 뜻이었다. 적어도 김정인은 그렇게 믿었다.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무작정 내성으로 들어가는 건…….”
“시온의 내성 구조라면 이 머릿속에 있지. 그리고 방법이라면 있다. 마침 어느 정도 회복이 됐거든.”
툭툭 이마를 두드린 노구덕의 시선이 아스라이 보이는 시온의 내성을 향했다.
“준비해라.
“……?”
“지금 바로 저기서 기다리고 있는 놈에게 날아갈 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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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재밌게 되어가고 있었는데.”
노구덕과 김정인의 갈등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던 바이올렛의 하얀 이마가 격하게 구겨졌다. 멱살잡이까지 하며 싸울 조짐을 보이던 두 사람이 갈등이 금세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말만 앞세워 싸우기는…. 멱살까지 잡혔으면 칼이라도 날려야 할 거 아냐? 겁쟁이들 같으니라구.”
“크으, 우으으으으…….”
샐쭉하게 찢어진 그녀의 눈이 옆에서 뭉그적거리는 엘리엇에게 머물렀다. 노구덕에게 호되게 당한 엘리엇은 제대로 된 신체 복원조차 못하고 끙끙거리는 중이었다. 아마도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손과 발, 머리가 기괴하게 뒤섞인 젤라틴 덩어리 같은 엘리엇에게서 시선을 돌린 바이올렛은 쓰라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고… 어떡한담? 솔직히 저것들을 막을 자신은 없는데…….”
동맹군의 다른 강자들이라면 모를까, 발레기우스의 역장에 영향을 받지 않는 무신과 검신은 감히 그녀가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바이올렛 본인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깥의 병력들을 인질로 삼아 그들을 붙잡아두려고 했던 것이지만… 보아하니 그것도 틀린 것 같았다.
“뭐, 이미 끝난 싸움이긴 하지만… 적당히 시간벌이나 해볼까.”
내성으로 통하는 입구를 막아선 바이올렛의 주위로 구름떼 같은 흑마력이 일어났다. 노골적으로 김정인과 노구덕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장판파의 장비처럼 길목을 점한 바이올렛은 교활한 미소를 띤 채 손가락을 까딱였다. 어차피 그녀는 불사의 존재.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 막힌 이상, 두려운 게 있을 리 없었다.
“싸워보자고. 날 저기 뭉그적거리는 멍청이와 똑같다고 보면 오산이야.”
“마녀! 얼마든지 상대해주겠다!”
“…하아. 네깟 것들에게 한 말이 아니거든?”
바이올렛의 아름다운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나름대로 몇 번이나 죽을 각오를 굳히고 나섰는데, 막상 싸우겠다고 덤비는 자들이 느긋느긋하게 상대했던 이정, 육지백, 여위량 같은 이들이라니. 김이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배수의 진을 친 것은 동맹군 수뇌들도 마찬가지. 바이올렛과 싸우기 위해 나선 이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뼈를 묻을 결심이었다.
바이올렛이 자신들을 설렁설렁 상대했다는 건 누구보다 그들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애당초 십존급에 달했던 본연의 능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바이올렛과, 힘의 태반을 잃어버린 그들이 제대로 된 승부를 벌일 수 있을 리 만무하잖은가.
“조무래기들. 내가 진심으로 상대했으면 너희들은 진즉에 다 죽었어. 그 하찮은 목숨, 되도록 오래 부지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물러나시지? 응? 그러면 최대한 나중에 죽여줄 테니까.”
섬뜩한 살기를 피워 올리는 바이올렛의 모습은 지옥나찰이 따로 없었다. 강맹하게 일어난 보랏빛 마력의 위세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데도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본색을 드러낸 바이올렛. 한데, 이전보다 더욱 강해진 그녀와 맞서는 이들의 얼굴은 조금도 주눅든 모양새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존심 강한 청룡왕 이정은 대놓고 굴욕을 주는 바이올렛의 힐난에도 박수를 치며 대소를 터뜨리기까지 했다.
“으하하하! 조무래기라… 내 생전 이런 취급을 당할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군!”
“진심을 말하자면… 허허, 손속에 사정을 두는 걸 알고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소. 이 나이가 되어서도 목숨은 아깝더구려. 하지만 이젠 그렇게 몸을 사릴 여유가 없잖소?”
“조무래기라도 훼방 정도는 놓을 수 있겠지.”
허허롭게 이야기하는 육지백과, 첨예한 창끝을 면전으로 겨누는 여위량. 결국, 세 사람 모두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싸울 모양이었다.
물론, 그건 불꽃처럼 타오르던 바이올렛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오냐, 다 죽고 싶단 얘기렷다!”
그간의 여유롭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마치 마귀와 같은 형상을 한 바이올렛의 기세는 일대의 공기를 벌벌 떨리게 만들었다.
“이젠 필요 없어! 너희들 모두 여기서 전부 죽여버리겠……!”
흉흉한 엄포를 늘어놓던 바이올렛의 머리가 돌연 펑! 터져나갔다.
두터운 흑마력의 역장을 찢고 그녀의 머리를 날린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의 쐐기였다. 바이올렛을 관통하고 그 뒤에 있던 내성의 성문까지 박살내버린 쐐기는 이내 황금색 입자로 변하여 흩어져버렸다.
“바이올렛. 당신이야말로 호가호위하는 주제에 말이 많군요.”
“아, 안개여왕!”
바이올렛과 맞서던 동맹군 수뇌부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느닷없이 등장하여 바이올렛에게 일격을 가한 이는 바로 안개여왕 아가레스트였던 것이다.
“크으으으, 아가레스트! 이 걸레 같은 계집이! 아악!”
어느새 재생하여 험한 독설을 토해낸 바이올렛은 또다시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현란하게 휘어져 들어오는 붉은 채찍과 시퍼렇게 빛나는 얼음의 결정. 좌우에서 기습적으로 파고든 두 기운이 그녀의 양 팔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탓이었다.
“마녀. 당신의 목숨은 여기야.”
“쓰레기. 네겐 갚아야 할 빚이 있었지.”
홍염의 채찍과 서리빛의 검을 든 두 여인, 퀸젤과 하유라를 일별한 바이올렛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이, 이것들이…!”
분위기가 반전했다. 안개여왕 아가레스트와 서리여왕 하유라, 퀸젤, 그리고 소드챈트리의 광검 도정섭까지 합류한 전력은 한층 더 강해진 바이올렛으로서도 쉬이 어찌 해 볼 상대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둘째치고서라도, 조금 전 그녀의 머리를 날려버렸던 아가레스트의 마력은 결코 얕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발레기우스의 역장 안에 들어와서도 그다지 힘이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이, 이렇게 되면……!’
뭔가를 작심한 듯, 표독스럽게 눈을 빛낸 바이올렛은 재빨리 스태프를 들어 어딘가를 겨누었다.
“이 도움도 안 되는 머저리! 일어나서 성벽이라도 사수해!”
바이올렛의 스태프가 겨누어진 경로의 끝에는, 고깃덩어리 상태로 흐느적거리는 엘리엇이 있었다.
“끄르르르–!”
바이올렛의 흑마력을 흡수한 엘리엇의 눈알이 희게 뒤집어졌다. 그와 동시에, 온전한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뭉글거리던 엘리엇의 육신이 급속도로 거대화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은 온전하게 기능하지 못하는 엘리엇의 지성을 아예 없애버리고, 대신 그 육체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말하자면, 이건 폭주에 가까웠다.
-쿠워어어어어!
거대화한 엘리엇은 순식간에 내성 일대를 가로막는 육벽(肉壁)으로 자라났다. 그 모습은 마치 고깃덩이로 이루어진 뚱보 거인을 보는 듯했다.
아득한 높이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엘리엇의 머리를 본 사람들은 허탈한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일초가 촉박한 상황에 또다시 이런 난적이라니. 이제는 놀랄 기력도 생기지 않았다.
“제길…!”
“호호호호! 뚫을 테면 뚫어보라지! 안으로 들어가봤자 더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말이야!”
“고작 생각해 낸 게 저 멍청한 미트골렘이라니, 네 수준도 알 만하군.”
“…뭐어? 이년이…! 어?”
비아냥거리는 하유라의 말에 발끈하여 되받아치려던 바이올렛의 얼굴이 갑자기 멍청해졌다. 내성 전방의 하늘이 갑자기 두 갈래로 쫙 찢어지면서, 그 안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 한순간 뇌리에 스친 것은, 백색의 거대한 요새였다.
창백하도록 푸른빛을 띤 거대한 골격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미세한 뼈마디를 출렁이는 육중한 날개가 상공을 뒤덮었다. 시커멓게 뚫린 눈구멍에서 솟구친 흉광과 눈을 마주쳤을 때에는, 오금이 저린 나머지 그만 제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본드래곤.
레그나토르의 최종병기가 그 웅장한 자태를 다시 드러낸 것이다. 발레기우스에게 따로 언질을 받지 못한 바이올렛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넋 빠진 얼굴로 본드래곤을 쳐다보는 건 동맹군 수뇌부도 똑같았지만.
“저, 저런 게 있었다고…?”
“허허허…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군.”
“…동감이오.”
-그오오오오오–!
천지가 진동하도록 힘찬 포효성을 발한 놈의 날개가 천천히 푸드덕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정인과 함께 그 머리 위에 올라탄 노구덕은 징그러운 육벽 너머로 보이는 검은 첨탑을 가리켰다.
“저곳이다. 저곳까지 곧장 날아가라. 거치적거리는 건 다 부숴버려.”
-쿠우우우우–!
알아들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 본드래곤의 동체가 위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미트골렘으로 화한 엘리엇이 그 발목을 잡아채려는 듯 길게 팔을 내뻗었다.
하지만.
퍼석!
본드래곤의 목구멍에서 방출된 죽음의 냉기는 엘리엇의 무른 살덩이를 통째로 짓뭉개버렸다. 브레스에 직격당해 머리와 팔을 잃어버린 엘리엇이 무력하게 허우적거리는 사이, 두 명의 신을 태운 본드래곤은 내성의 성벽을 훌쩍 넘어 중앙의 궁성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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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드디어 vs 발레기우스 전이네요. 최종보스일지, 페이크보스일지..
항상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