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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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혈로(血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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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군요.”
활공하는 본드래곤의 머리 위에 탄 김정인의 첫 감상이었다. 천하의 검신이라 할지라도 무지막지한 본드래곤의 위용에는 살짝 기가 질린 것 같았다.
“영광이구나. 네 녀석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듣다니.”
피식거리며 대꾸한 노구덕은 이내 아래로 시선을 늘어뜨리며 기감을 활성화했다. 혹시라도 획획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광들 속에 발레기우스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잠시 후,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드리워진 기감을 거두어들인 노구덕은 나직이 혀를 쳤다.
“쯧 헛수고였군.”
시온 전역을 물들인 어둠의 근원 타르처럼 끈적거리는 그 불쾌한 기운이 전면의 검은 첨탑에서 똑똑히 느껴졌다. 처음 짐작대로, 발레기우스의 소굴은 검은 첨탑인 것이 분명했다.
발레기우스 또한 그와 김정인이 내 성을 가로질러 날아오는 걸 알고 있을 터. 그에 대비해 혹여 자리를 옮기거나 다른 곳으로 숨어버리지 않을까 염려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기우인 것 같았다.
“저놈… 처음부터 자금까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군. 얕은 수를 쓸 필요조차 없다는 건가?”
“얕잡아 보이면 보일수록 좋은 일이잖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노구덕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 피뢰침처럼 솟은 첨탑 끄트머리에서 검은 벼락 줄기가 뻗친 것이다.
노구덕은 급히 본드래곤의 기수를 돌리려 했지만, 예고 없이 날아든 벼락의 속도는 본드래곤의 날갯짓보다 훨씬 재빨랐다.
-쿠오오
“이런, 제기랄!”
오른쪽 날갯죽지를 강타당한 본드래곤의 균형이 무너졌다. 가까스로 본드래곤의 상세를 살핀 노구덕은 욕설을 내뱉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검은 벼락에 쪼인 본드래곤의 날개 부위가 스멀스멀 어둠에 파 먹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을 가리지 않고 먹어 치우는 저 어둠은 발레기우스의 상징과도 같은 것. 지상에 존재하는 어떤 신기보다 강대한 힘을 자랑하는 본드래곤도 상리를 벗어난 발레기우스의 블랙홀을 이겨낼 순 없었다.
게다가 놈은 겨우 날개만으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연달아 날아드는 서너 개의 벼락 줄기를 본 노구덕은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나 그가 나서기도 전에, 번개보다도 빠른 검광이 선수를 쳤다. 단숨에 벼락의 포화를 갈라버린 김정인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저건 제가 맡겠습니다! 형님은…!”
“알고 있다.”
본드래곤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단 노구덕은 그렇잖아도 바닥을 드러낸 영력을 한계까지 쥐어쨌다. 그러자 칠흑의 기운에 야금야금 파 먹히던 본드래곤의 골격이 다시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크게 일어난 화재에 고작 한 바가지 정도의 물을 쏟는 정도의 효과에 불과했다. 게다가 애당초 노구덕은 본드래곤의 소환을 오래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오래 버티진 못한다. 그 전에…….’
콰드드득!
또다시 번개에 격중당한 본드래곤의 거체가 아래로 크게 기울었다. 그 바람에 허우적거리는 본드래곤의 날개에 쓸려버린 내성의 건물들이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하마터면 머리에서 떨어질 뻔한 노구덕은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바로 잡이다. 대부분의 공세는 김정인의 요격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으나, 본 드래곤의 거대한 덩치를 상기하면 그중 몇몇이 검막의 범위를 뚫고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본드래곤의 날갯짓이 힘을 잃을수록 점점 고도가 낮아지고 있었다. 늘어진 녀석의 아랫배에 마천루의 지붕이 스치며 몸도 가누기 힘들 정도의 충격이 전해져왔다.
‘젠장! 영력만 충분했다면…!’
덧없는 후회를 털어버린 노구덕은 본드래곤의 머리를 두드리며 녀석을 독려했다.
“버텨라. 조금만 버티는 거다. 얼마 남지 않았어.”
-구오오오오오–!
우렁우렁하게 울부짖는 본드래곤의 포효성에서 드센 의지가 느껴졌다. 신기 중의 신기라고 할 수 있는 놈 또한 자존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녀석이니, 이대로 당하기만 해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본드래곤에게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아예 납작 엎드리다시피 한 노구덕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전면을 노려보았다.
검은 첨탑. 발레기우스의 소굴이 바로 코앞이었다.
안면을 세차게 때리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두 눈을 크게 부릅뜬 노구덕은 내부의 발레기우스가 들을 수 있도록 목청을 드높였다.
“들이박아라!”
쿠쿵! 쿠드드드드–!
본드래곤의 길쭉한 머리통이 첨탑의 중간 지점에 틀어박히는 것을 시작으로, 수천 톤에 이르는 덩치가 탑의 아랫부분을 강타했다.
그러나 발레기우스의 첨탑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탑이 무너지기는커녕, 가공할 위력으로 들이받았던 본드래곤의 거체가 하망하게 뒤로 튕겨나갔다. 마치 시온의 성벽 때처럼, 보이지 않는 힘이 탑 주위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무식하게 이마를 들이박았다가 튕겨져 나온 본드래곤의 반동은 고스란히 노구덕에게도 전해졌다. 가만히 있다간 발레기우스의 본거지를 앞에 두고 속절없이 아래로 추락할 판이었다.
급박한 순간, 빠르게 첨탑의 주위를 살핀 노구덕의 눈이 번찍 불을 토했다. 마침 발을 다다기에 적당해 보이는 발코니가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은 무리다! 저쪽으로 뛰자! 방어막은 네가 어떻게든 해라!”
“예?”
뒤통수에 황당해 하는 김정인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노구덕은 더 이상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숫자를 썼다.
“하나, 둘, 셋!”
아래로 미끄러지던 본드래곤의 거체가 유령처럼 사라짐과 동시에, 놈의 머리를 발판으로 삼은 두 사람은 힘껏 발코니를 향해 뛰어올랐다.
수문장처럼 앞을 가로막았던 방어막이 김정인의 예리한 칼부림에 갈라지자, 그 틈으로 몸을 들이민 두 사람은 휑하니 뚫린 발코니 입구를 통해 첨탑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후우.”
“어이쿠!”
가뿐하게 바닥에 내려선 김정인과는 달리, 비좁은 틈새에 억지로 몸을 욱여넣느라 중심을 잃어버린 노구덕은 공처럼 데굴데굴 구르고 나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수북한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어난 노구덕은 유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김정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너 이놈! 일부러 그런 거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말이다! 이왕 찢어 놓을 거 면 좀 크게 찢어 놓을 것이지……!”
“최대한 여력을 보존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끙 신음을 눌러 삼킨 노구덕은 곧 김정인과 마찬가지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십여 초 정도가 지났을까? 말없이 첨탑 내부를 서성이던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침음했다.
“으음,여긴……
“……평범한 건물이 아니군요.”
노구덕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정인 의 말에 수긍했다.
그들이 뛰어든 발코니는 첨탑의 중 간 윗부분 지점이었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보이는 건 위가 챙 뚫린 검은 하늘과,마찬가지로 검푸른 빛으로 반들거리는 땅이었다.
“아래가 비어 있는 층이 아니군. 이건 그냥 땅이야.”
발을 굴러 들리는 소리를 확인한 노구덕은 절레절레 머리를 내저었다. 건물 안에서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이 보이는 것부터가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발을 굴러보니 더더욱 확실해졌다.
여긴 아예 외부와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었다. 아마 이곳에 진입하기 전 김정인이 찢어버린 그 결계가 공간과 공간 사이를 잇는 경계선일 터.
“잘은 모르겠지만,저 발코니뿐 아 니라 어디로 들어가든 이 공간과 통하게 되어 있을 거다. 내가 보기엔 아공간 종류 같은데……
“어쨌든 발레기우스가 이 근처에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겠지. 서둘러 찾아봐야……
“후후후.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전 처음부터 당신들 앞에 있었으니까요.”
돌연히 들려온 목소리는 마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또렷했다. 낌 새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놀림을 당한 노구덕과 김정인은 흠칫하여 주위를 살폈으나,여전히 사방엔 고즈넉한 어둠뿐이었다.
아니,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게 있었다. 온통 칙칙하여 불분명하던 어둠의 무리가 서서히 명도의 차이를 띠기 시작했다는 것.
잠깐사이,열은 어둠과 진한 어둠이 서로를 배척하고 뒤엉키며 점차 둥그스름한 윤곽을 그려냈다. 옅어 지길 거듭하던 어둠은 백지처럼 하얀 피부가 되었으며,더욱 캄캄해진 어둠은 진한 눈썹과 요악스런 눈이 되었다.
비틀어진 웃음과 함께 나타난 남자의 얼굴은 이 모든 사태의 원흉,발레기우스였다.
어느새 완연한 인간의 모습을 갖춘 발레기우스는 여인의 그것처럼 희고 깨끗한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당신들과 한자리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군요. 검신과 무신…… 생각대로 잘 와주었습니다. 당신들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으리라 여겼으니까요.”
오래된 지기라도 만난 것처럼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게,오후의 한가로운 티타임이라도 즐기듯 느긋한 태도다. 물론,한시가 바쁜 처지인 두 사람은 발레기우스의 잡담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콰아앙!
대포알처럼 묵직한 투기와 어둠마저 갈라내는 섬광이 발레기우스의 면전에서 폭발했다. 어둠의 장막을 내세워 두 사람의 공세를 막아낸 발레기우스는 희끄무레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성미가 상당히 급하십니다. 조금 더 느긋하게 굴수는 없는 겁니까?”
“종알종알 시끄럽다!”
재차 이어진 노구덕의 연타가 뭉글 거리는 어둠 장막을 크게 뒤흔들었다. 그사이,뒤로 돌아가는 김정인의 기척을 읽어낸 발레기우스의 눈꼬리 가 샐쭉하게 찢어졌다.
“아무래도 조금 대화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겠군요.”
미려한 손가락이 요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허공을 한 바퀴 휘젓자, 발레기우스의 좌우에서 반짝거리는 화면이 나타났다. 그것을 본 노구덕과 김정인은 일순 공세를 멈추고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두 화면은 치열 한 전장의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건,끝없이 몰려드는 카름에게 맞서 정신없이 혈로를 뚫고 나아가는 어느 부대 의 모습이었다.
그 선두에 서서 부대를 지탱하는 건,지옥의 나찰처럼 피를 뒤집어쓴 두 여인이었다.
“임유진과 윤희지. 힘의 태반을 잃었는데도 굉장히 용맹하군요. 과연 동서를 대표하는 여걸들이라 할 만 해요. 제 손길을 피하기 위해 아등 바등 노력하는 모습이 참으로 가상합니다. 후후후.”
“이 정도면 어떨까요? 잠깐 시간을 내주기엔 적합한 거래 물품 아닙니까? 아니면,지금 여기서 사랑스러 아내들이 개미처럼 깔려죽는 걸 지켜 보시겠습니까?”
“이 망할 새끼가……!”
“아내들로 성에 차지 않는다면 다른 물품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만.”
이죽거리는 발레기우스의 낯짝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격노한 노구덕은 당장이라도 발레기우스의 얼굴을 후려치려는 듯 주먹을 들어올렸지만,이내 힘없이 팔을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설령 발레기우스를 처치한다 하더라도 임유진이 죽는다면 얘기가 되지 않는다.
“검신,당신은 어떻습니까?”
그때까지도 발레기우스의 미간에 검을 겨누고 있던 김정인의 칼끝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을 굴복시킨 발레기우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여전히 두 여인을 비춘 화면을 유지시킨 채 말을 이었다.
“잘 생각했습니다. 평화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평화? 어떻게 네 주둥이로 평화라는 말을 지껄일 수 있지?”
“하하하. 뭔가 큰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오해라고?”
“애당초 우리는 이렇게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제겐 당신들의 소망을 들어줄 힘이 있어요.”
노구덕은 거칠게 숨을 씨근덕거렸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놈의 웃음이 더없이 선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으나,그가 보기에 발레기우스의 미소는 사람을 잡아먹는 구렁이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슨 말을 나불거리나 했다. 기껏하자는 얘기가 포섭이냐?”
“흐음……. 왜 그렇게 무작정 화만 내는지 모르겠군요.”
노구덕의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나며,그렇잖아도 날카롭게 뻗은 송곳니가 더욱 길쭉하게 자라 났다.
“이 새끼,왜 화를 내는지 몰라? 지금껏 네가 저지른 일들을……!”
“노구덕. 당신이 원하는 건 가족들과 함께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닙니까? 평생 지금과 같은 부귀를 누리면서 말입니다.”
버력 역정을 내던 노구덕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좋을대로 떠든다고 생각했던 발레기우스가 정확히 그의 속내를 짚어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이어진 그의 제안은 더욱 놀랄 만한 것이었다.
“당신에게 이 땅을 주겠습니다. 왕이 되어 폭정을 펼치든,치세를 이어가든…… 뭐든지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영생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리따운 부인들과 함께 말이지요. 어떻습니까?”
“뭐…… 라고……?”
설탕처럼 달콤한 유혹에 노구덕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인듯 크게 흔들렸다. 물론 믿지 못할 말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귀가 솔깃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저 교활하게 움직이는 혓바닥엔 마음의 벽을 스르르 녹이는 독물이 발린 것 같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악마에게 넘어가는 거군.’
“형님,새겨 들을 것이 못됩니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끙,잘난 척하기는. 나도 안다.”
“호오.”
살짝 흔들릴 기미를 보였던 노구덕이 평정심을 찾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어둠에 묻힌 구렁이의 눈이 이번엔 김정인에게 향했다.
“검신,확실히 당신은 남다른 면모가 있습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무신과는 꽤 차이가 있죠. 욘은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어요. 하긴,그러니 욘의 사도가 되길 거부했던 거겠죠.”
“……큼.”
발레기우스의 말이 꼭 욘의 사도가 된 자신을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 건 착각일까? 노골적으로 비교를 당한 노구덕의 콧잔등이 크게 씰룩였다. 사람이 좀 속물적으로 사는 게 어떻단 말인가?
“그만. 제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이건 어떻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이상을…… 이 비좁은 땅덩이가 아 니라,대해 너머의 세계에 실현시키는 겁니다. 그 차이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요? 비루한 이곳을 우물에 비한다면,저 바깥의 광활함은 강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드넓은 강물에 당신의 이상을 세울 수 있다면,그 위업은 당신이 죽고 나서도 천년만년 빛을 발하겠지요.”
“이렇게 하지요. 이 땅은 무신에게 주고,저 너머는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전 지상의 땅덩이엔 관심이 없으니까요. 제가 바라는 건 이 답답한 구속에서 벗어나 오롯이 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웅장한 열변의 끝에 다다른 연사처럼 넓게 팔을 펼친 발레기우스의 얼굴은 꼭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처럼 가벼워보였다.
‘저놈 저거…… 설마 넘어간 건 아니겠지.’
말없이 굳어 있는 김정인의 얼굴을 힐끔 곁눈질한 노구덕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더러 숙이고 네놈 밑으로 들어와라?”
“나쁜 제안은 아닐 텐데요.”
나르시시즘의 극에 달하면 저런 얼굴이 될까? 능글거리며 말하는 발레기우스는 한 대 후려치고 싶을 만큼 열 받는 낯짝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은 네 부하들과 같은 꼴이 되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부하? 아아, 바이올렛 말이군요.”
“그래. 그 사람인지 좀비인지 알 수 없는 것들 말이다.”
“말씀이 심하시군요. 그들은 틀림없는 사람입니다.”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그 괴물들이 사람이라고?”
“불사에 가까운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 좀 낯설게 느껴지는군요.”
그런 식으로 받아치니,또 할 말이 없어진다. 노구덕의 말문을 막아버린 발레기우스는 미역이 흐느적거리듯 팔을 들어 두 사람의 얼굴을 가 리 켰다.
헌 터 클럽 767화
“물론 당신들도 그렇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죽음이 아닙니다. 당신 들이 욘이 남긴 ‘저널’을 받아 세계 의 일원이 되었듯이,이번엔 제 안 에서 제 세계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죠. 당신들뿐 아니라 이 대륙,그리고 나아가 이 행성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태어날 겁니다.”
“결국은 그 흐물거리는 꼬락서니가 되어야 한다,이 말이로군.”
“흐음,말투가 상당히 거슬리는군요. 거절입니까?”
예리하게 뻗어오는 발레기우스의 눈길이 만년설처럼 차갑다. 노구덕은 벳골까지 시린 한기가 차오르는 와중에도 사납게 입매를 비틀었다.
“나야 괴물이 되든 말든 상관없지만,우리 이쁜이들이 그렇게 되는 건 참을 수 없지. 그냥 이 땅을 내 게 준다면 모를까.”
“하하. 제게도 입장이란 게 있잖습니까? 당신들을 아무 조건도 없이 풀어놓을 순 없어요. 그건 심령차력 술로 부하들을 옭아맨 노구덕,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미안하지만,나는 원래 내가 하면 괜찮다는 주의거든!”
할 수 있는 전력을 끌어올린 노구덕은 이미 발레기우스의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가공할 거력으로 휘둘러진 그의 주먹은 임유진을 쪽을 비추던 화면을 깨지듯이 꺼트림과 동시에,능청을 떨던 발레기우스의 허여멀건 낯짝을 사정없이 짓이겨 놓았다.
당연한 말이지만,발레기우스는 그 정도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검은 연기를 빨아들여 다시금 얼굴을 재구성한 발레기우스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내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겁니까?”
“아니! 네놈을 믿지 못하는 거다!”
재차 들이닥친 커다란 주먹이 애써 복원된 발레기우스의 낯짝을 또다시 으깨 버렸다.
물론 터져 버린 얼굴에서 핏물이 나오거나 살점이 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터져버린 얼굴에서 새어 나온 검은 연기는 다시 뭉치려는 듯,순식간에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며 모여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공간에 새겨진 하얀 실금이 덩어리진 형체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 검신!
번쩍이는 쾌검으로 발레기우스의 면상을 두 동강낸 김정인의 칼이 다시 한 번 날렵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공간이라는 도화지 위에 하얀 색 선이 새겨지고,그 위에 또 다른 선이 새겨진다. 그렇게 연이어 중첩된 수만 개의 선은 굽이치는 거대한 급류가 되어 공간 자체를 일소해 버렸다. 발레기우스가 존재하던 그 자리를 깨끗하게 씻어낸 것이다.
상리를 벗어난 검. 신마저 벨 수 있는 검기. 예전에 마신 융펠을 잡아냈던 바로 그 아우터 블레이드였다.
“하하하. 저도 신뢰를 많이 잃은 모양이군요.”
얼굴은 사라졌지만,뻔들뻔들한 목소리는 여전히 귓전을 울리고 있다. 발레기우스의 종적을 놓쳐버린 노구덕은 자욱한 어둠속을 살피며 계속 염두를 굴렸다.
‘본체는 어디 있지? 본체를 찾아야 되는데……
그의 예상대로라면 아직 발레기우스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알비 온을 흡수함으로써 욘의 능력을 얻는 것까진 성공했으나,발레기우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온 내부로 진입한 동맹군의 힘까지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명왕을 처치할 때도 그랬고,마지막으로 만났던 욘이 알려준 방법도 그와 같았다.
발레기우스가 한창 식사에 열중하는 지금. 지금이야말로 놈을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더욱이 지금 발레기우스가 빨아들이는 것은 원래대로라면 흡수가 불가능할 터인 신기와 오리지널의 힘이다. 이치를 벗어난 만큼 스스로도 상당한 리스크를 감내하고 있다는 의미. 온통 검은 안개로 채색된 이 괴상한 공간이나,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느니 하며 시간을 끄는 것도 분명 그와 관계가 있을 터였다.
즉,이 순간이 지나가면 놈을 처치 할 때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놈을 이 자리에서 끝장내야만 하는 이유였다.
그때,어둠의 저편에서 붉은 빛의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그것을 본 노구덕과 김정인은 동시에 눈을 번뜩였다.
“이놈!”
동시다발적으로 날아간 투기와 검 기가 여명처럼 어둠을 몰아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발레기우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헛다리를 짚은 노구덕은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발레기우스를 도발했다.
“신을 자처하는 놈이 평생 도망만 다닐 셈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심……!”
등 언저리에 들러붙는 싸한 살기를 느낀 노구덕의 몸은 김정인의 경고성이 들려오기도 전에 이미 빠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레기우스의 공격은 그의 반응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노구덕이 뒤에서 하얗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는 벌써 늦은 뒤였다.
“크아악!”
어둠의 채찍에 갈가리 등을 찢긴 노구덕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자,엿가락처럼 쭉 늘어난 김정인의 검이 발레기우스의 미간 정면으로 쇄도했다. 사람이라면,헌터라면 절대로 이 기습을 피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상대는 신. 발레기우스에겐 이 찰나의 공격조차 통용되지 않았다.
김정인의 아우터 블레이드를 막아 낸 것은 반듯하게 펼쳐진 창백한 손바닥이었다.
텅!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김정인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부릅떠졌다.
마신조차 베어버린 아우터 블레이드가 고작 저 부드럽다 못해 연약해 보이는 손바닥에 가로막혀 튕겨나간 것이다. 게다가 신검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의 검은 그 끄트머리가 뭉개진 것처럼 망가진 채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김정인의 칼끝을 튕겨낸 발레기우스는 경악하는 김정인을 놀리듯이 입꼬리를 씰룩였다.
“융펠 따위와 저를 동급으로 보면 곤란하지요.”
“……큭!”
좌우에서 득달같이 몰려드는 어둠 의 압력을 느낀 김정인은 서둘러 뒤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나 발레기우스는 김정인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 검기가 당신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이번엔 뒤쪽이다.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돌린 김정인은 뒤에서 속삭이는 발레기우스의 몸뚱이를 사선으로 갈라버렸다. 집채만 한 높이로 일어난 검기의 파도는 당장이라도 발레기우스의 숨통을 끊어놓을 것처럼 무시무시했다.
하나 일대를 휩쓸어 버릴 듯 뻗어 나간 김정인의 공세는 전면에서 날아든 칠흑의 검기에 막혀 산산이 부 서지고 말았다.
대 발레기우스 전용으로 준비한 아 우터 블레이드가 연달아 막혀 버린 게 벌써 두 번째다. 둘 모두 틀림없이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약간의 힘든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강적. 그 어마 어마한 존재감은 김정인의 표정을 무섭게 굳어지도록 만들었다.
“당신의 힘은 결국 제 힘을 검기라는 방식으로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본이 그런 조잡한 기술에 뒤질 리가 없지요. 하물며 그 힘을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해서 무너지는 인간에게는요.”
“조잡…… 하다고……?”
“하하. 말이 너무 심했습니까?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습니까. 인간들 중 특출하다고 해봤자, 제가 보기엔 그저 하찮은……. 컥!”
김정인을 조롱하던 발레기우스의 형체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검은 형체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노구덕은 다시금 주먹을 휘둘러 발레기우스의 잔재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제기랄 놈,촉새처럼 나불대기는. 괜찮냐?”
“괜…… 찮습니다.”
살짝 멍한 얼굴의 김정인을 본 노구덕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대단한 공격을 당한 건 아니었지만, 방금 전 발레기우스의 말이 상당한 앙금이 되어 남은 것 같았다.
“신경 쓰지 마라. 저놈,생각보다 훨씬 강하긴 하다만…… 그럭저럭 실마리를 찾은 것 같으니까. 이제 이 귀신놀음 같은 장난질은 못할 거다.”
“실마리라니요?”
“본체를 찾았다는 말이다. 마침 저 기 오시는군.”
“노구덕……!”
안개 속에서 다시 나타난 발레기우스의 하얀 얼굴은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 가장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흐흐흐. 꼴같잖은 가식은 집어던진 모양이군.”
노구덕은 더욱 히죽거리며 발레기우스의 성질머리를 돋웠다. 열세인 상황은 변함없었지만,저 발레기우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발레기우스가 저토록 동요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방금 전,노구덕의 주먹에 맞은 발레기우스는 ‘비명’을 질렀다. 말인즉 노구덕의 주먹이 발레기우스의 진체(眞體)에 닿았으며,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느꼈다는 소리다.
신경다발이 올올이 곤두서는 듯한 통증. 근 수년 간,그런 감각을 겪어본 적 없는 발레기우스에겐 무척이나 생소한 느낌이었을 터.
노구덕은 벌레 씹은 얼굴을 한 발레기우스를 향해 한껏 으스대는 얼굴로 가운데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네 말 그대로 돌려주자면,내가 쓰는 오리지널은 네놈보다 한참이나 윗줄이거든. 네가 과거 교단의 교황이었다면,나는 살아 있는 신쯤 될 거다.”
“육왕각인……. 확실히 내가 다루지 못했던 힘이로군.”
노구덕의 팔뚝에서 번들거리는 여섯 개의 반점을 발견한 발레기우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출신이 출신인 만큼,벌레교단의 비전이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 바로 그다. 충왕각인과 심령차력 술은 그 누가 뭐라 해도 최고 수위를 다투는 오리지널. 그런데 노구덕이 다루는 힘은 충왕각인의 극한을 넘어 아예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듯 보였다.
비로소 사태를 이해한 발레기우스는 쿡쿡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런가. 썩은 가지도 날카롭게 깎 아내면 그럭저럭 이쑤시개 수준은 되는 모양이야.”
물론,그래봐야 거기까지다.
돌은 아무리 갈고 닦아봐야 결국 돌일 뿐이다. 공을 들여 세공한들 결코 다이아몬드가 되진 못한다.
그가 교황각인을 헌신짝처럼 이정한에게 떠넘긴 것도 스스로 불필요 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전 세계,나 아가 행성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신의 힘에 비하면,벌레교단의 비전은 개미 오줌만도 못한 쓰레기에 불과했다.
“하찮은 오리지널 따위로……
“이봐,지금 잘나간다고 해서 출신을 부정하면 안 되지.”
“출신? 바보 같은 얘기군. 이 ‘숙주’라면 모르겠다만, 나는 처음부터 신이었고,현재도 신으로서 존재한다.”
“거창하기는. 길게 구시렁대지만 결국 숙주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단 소리잖아. 신이란 건 기생충을 뜻하는 단어였나?”
납빛처럼 굳은 발레기우스의 뒤로 두 갈래의 어둠이 길게 뻗쳐 나왔다. 악마의 날개처럼 크게 펼쳐진 어둠은 화선지에 떨어진 먹물방울처럼 그 영역을 빠르게 넓혀갔다.
“……노구덕. 네놈의 주특기는 그 값싼 혀로 주절대는 도발이었지. 알 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화가 나는 군.”
“호오. 나중에 안주 삼을 일이 하 나 더 늘었군. 신을 열받게 한 주둥이로 말이야.”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그 대가로 너는 가장 고통스럽게 죽을 테니까.”
발레기우스의 형체가 점점 더 커지 고 있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얼굴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줄기 줄기 새어 나온 심연이 온몸을 고치처럼 휘감으며 덩치를 키워나갔다. 양쪽으로 펄럭이는 커다란 날개 또 한 그 덩치에 맞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갑작스런 변화는 단지 크기에 국한 되지 않았다.
검게 삼켜진 머리에서는 좌우로 네 개의 뿔이 왕관처럼 돋아났고, 검은 안개가 똘똘 뭉친 자리엔 당 장 힘차게 용트림할 것처럼 꿈틀거리는 근육이 생겨났다.
그리고 쇠기둥처럼 무지막지한 다리 사이로는 드래곤의 그것처럼 두터운 꼬리가 늘어졌다.
짙게 뒤덮인 안개가 걷혀나간 뒤 드러난 발레기우스의 형상은,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완연한 악마의 생김새였다.
대략 육 미터에 달하는 거체와 그 배는 될 듯한 거대한 날개. 검은 악마로 변한 발레기우스는 노릿한 눈을 굴리며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길과 마주한 노구덕은 반사적 으로 한 걸음 물러나는 자신을 발견하곤 으득 이를 악물었다. 뒤로 물러난 건 그렇다 치고 이 심장을 옥 죄는 것 같은 중압감은 뭐란 말인 가. 꼭 주변의 중력이 백배는 증가 한 듯한 느낌이었다.
자세가 낮아진 건 김정인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발레기우스를 마주하는 그의 눈가엔 어렴풋한 당혹감마저 엿보였다.
“발록 (Balrog).”
그 나직한 혼잣말을 들은 노구덕은 귀를 의심했다. 급히 김정인을 돌아보는 그의 눈은 치미는 경악으로 인해 크게 찢어져 있었다.
“발록? 발록이라고? 그 마신 발록 말이냐?”
“……아마도 맞을 겁니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노구덕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어찐지 그 기세만으로도 상당한 괴 물이라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발록 이라니. 그 전설적인 괴물을 하필이면 여기,이 장소에서 마주치다니. 발레기우스가 고르고 골라서 뒤집어 쓴 탈은 그 이름값만으로도 노구덕과 김정인을 위축시키는 괴물이었다.
대도시 오키도에 등장했던 아트로포스.
대륙에 씻을 수 없는 대재앙을 일으켰던 오대 카름.
아다만티움 광산에서 등장했던 레드테러.
그리고 바깥에서 동맹군을 위협하는 검은 손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최강,혹은 최악으로 회자 되는 카름들은 여럿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그 강함과 해악의 정도를 면밀히 따져 순위를 매긴다면, 발록은 반드시 그 첫 번째로 거론될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게,발록은 단순한 카름이 아니라 신(神)이었으니까.
발록 교단. 사서(史書)에 그 이름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건,이백 년도 더 된 아득한 과거의 산물이다.
투신 발록을 떠받드는 발록 교단은 전쟁에서의 투쟁과 열정을 높이 사는 론다리온 교단과는 달리, 학살과 살육 그 자체에 가치를 매기는 광인들의 집단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그들의 광기는 ‘살인 교단’,학살 교단’이라는 이명으로 불릴 만큼 그 정도가 심각했다.
결국 무차별적인 살인 행위가 도를 넘어서자,위원회는 발록 교단을 대륙의 적으로 선포했다. 공공의 적으로 선포된 발록 교단은 곳곳에서 좁혀드는 추격을 피해 지하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고,그렇게 사람들의 기 억 속에서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누가 알았으랴. 음지로 숨어든 살인자들이 복수를 꿈꾸며 마신의 강림을 준비하고 있을 줄은.
대륙 각지에서 준비한 수많은 노예들과 제물들. 그리고 일천에 달하는 열성 신도들.
그 모든 것을 발아래 둔 교단의 대사제가 간절한 염원을 담아 강림 의 종지부를 찍으려 할 때. 이레귤러라는 재앙이 성지(聖地)를 뒤덮었다.
……그 뒤로 발록 교단의 잔당들이 역사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다. 근근이 이어져 오던 광기의 맥이 완전히 끊겨버린 것이다.
그러나 멸망을 노래하는 광신도들 의 염원은 고스란히 남았다. 그것도 가장 최악의 형태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칠흑의 악마 발록은 북부의 대도시 뮬헨에서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신의 방문을 받은 뮬헨은 고작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지도상에서 지워 졌다.
뮬헨을 멸망시킨 발록은 저승사자처럼 차례차례 근방의 도시들을 방문했다.
놈의 활동기는 고작 열흘이었다. 열흘 만에 사르골 호수 일대와 현재 의 칸다무어 인근,에덴 위쪽의 지역이 전부 황폐화되었으며,토벌을 위해 파견되었던 네 명의 십존들 중 세 명이 즉사,한 명이 반신불수가 되어 은퇴 수순을 밟았다.
그 짧은 기간 놈이 앗아간 목숨의 수는 무려 백만을 훌쩍 넘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열흘째,중도시 하나를 몰살시킨 발록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끔찍한 대학살 이후,위원회는 연합군이 발록을 퇴치했다며 대대적 인 선전을 벌였지만…… 그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이었다. 워 낙 대대적인 규모의 연합군이 결성 되었던 만큼,모두의 입을 막기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발록이란 이름은 확고부동의 권력으로 군림하던 위원회에 처절한 실패를 안긴 첫 사례이자, 자력으로 퇴치에 실패한 유일한 사 례로 남게 되었다.
헌 터 클럽 768화
발록에 관한 정보를 떠올린 노구덕은 후욱후욱 심호흡을 했다. 발록, 발록 하지만 그것도 이백 년 전의 일. 이제 와서 벌벌 떠는 것도 우스 운 일이다. 게다가 정작 그들이 상대하는 발레기우스는 지금껏 등장한 그 어느 괴물들보다 더 무시무시한 마물이 아니던가.
“그때 발톡이 사라진 것도…… 저 자와 무관한 일이 아닐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저놈은 전에도 웬 드래곤을 조종했었지. 그래서 이번에 들고 나온 건 발록이냐. 음흉한 자식,어지간히 인형놀이를 좋아 하는군. 아니면 본체로 싸우는 건 자신이 없는 거냐?”
발록으로 변한 발레기우스의 눈이 같잖다는 듯 씰룩였다.
“너희들을 짓밟기에 이만한 장난감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신의 힘을 보여주기 에도 적당한 물건이지.”
“새로운 신의 힘? ……헙!”
얼떨결에 되묻던 노구덕의 얼굴이 위에서 내리누르는 풍압으로 인해 찌그러지듯 펄럭였다. 한순간 발록 의 종적을 놓친 노구덕은 위에서 갑작스레 덮쳐온 발록의 거검(巨劍)을 막기 위해 뒤늦게 팔을 들었다.
피할 타이밍을 놓쳐버렸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힘에서는 밀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기 에 내린 판단이었다.
하나,발록의 거검에 실린 괴력은 노구덕의 상상을 초월했다.
“으아악!”
쿠직! 발판으로 삼았던 지면이 움푹 꺼지며 노구덕의 동체가 온통 땅 속에 파묻혀 버렸다. 교차한 팔뚝만 남겨두고 매몰된 노구덕의 모습은 망치에 맞은 두더지가 따로 없었다.
그도 모자라,발록은 안에서 벌떡 뛰쳐나오려는 노구덕을 육중한 발로 짓밟아 버렸다.
꾹꾹 땅을 다지듯 발에 힘을 주며 노구덕을 묻어버린 발록의 눈아 힐끔 옆으로 향했다. 마침 김정인의 찌를 듯한 검기가 그의 목줄을 향해 날아드는 중이었다.
중장갑 같은 근육으로 둘러싸인 목덜미와 검신의 검 사이의 거리는 불과 수 센티미터. 물리적으로 피하기 엔 이미 늦은 상황이다.
그 순간 발록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짙은 낭패감이 아니라 배릿한 비웃음이었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군.”
“크으으읍–!”
평소의 정적인 표정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부릅떠서 혈안이 된 눈으로 안간힘을 다하는 김정인의 모습은 실로 처절할 정도였다.
손가락 몇 마디만큼의 거리가 아득 하도록 멀게 느껴진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발록의 목을 벨 수 있는 데,언제나 수족처럼 움직이던 검이 그 이상 나아가질 않았다.
검만 그런 게 아니다. 검을 든 팔 이,허공으로 펄쩍 뛰어오른 다리가, 솟구치는 검기마저도 그의 의지를 배반했다. 흡사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이대로 허공에 박제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옴짝달싹못하는 김정인을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바라보던 발록은 입매를 피식거리며 가벼운 한마디를 내던졌다.
“꺼져라.”
“커헉!”
손가락 하나 미동하지 않았다. 그 저 비웃음과 함께 말 한마디를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와 동시에 억지로 허공에 붙들려 있던 김정인의 코가 둔기에 얻어맞은 듯 움푹 함몰되었다. 노도와 같은 압력에 휩쓸린 김정인은 그대로 피화살을 내뿜으며 뒤로 까마득한 거리를 날아갔다.
쿵!
수백 미터가 넘게 날아간 김정인이 힘없이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알겠느냐? 이것이 신의 힘,이것이 나의 힘이다.”
일시에 두 사람을 제압한 발록은 승리를 선언하는 것처럼 두 날개를 활짝 펼쳤다. 심연을 품은 암흑의 날개는 지평선 위에 맞닿은 검은 초승달처럼 보였다.
“관리자는 나약한 겁쟁이였다. 너희들이 오리지널이라 말하는 지상의 문명,그리고 카름…… 얼마든지 품을 수 있었음에도 그러질 않았다. 이질적인 힘들을 두려워하고 없애야 할 것으로 간주했으며,적대하기 바빴지. 하나 나는 다르다.”
악마의 흉측한 입이 길게 찢어지며 짙은 미소가 내걸렸다.
“나는 모든 것을 포용한다. 카르마를 내 것으로 만들었고,욘의 힘을 흡수했다. 이제는 너희들 차례다. 발할라,마녀회,벌레교단, 그리고 수많은 신기들과 오리지널…… 조만간 모두 내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고맙게도 제 발로 시온으로 들어와 준 너희들 덕분이지.”
시온으로 동맹군을 맞아들임으로써 마지막 퍼즐 조각이 완성되었다. 남은 건 화수분처럼 밀려들어오는 힘을 모조리 흡수하고,소화시키는 것 뿐이다.
길어야 수십 분.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벅찬 고양감을 억누르지 못한 발레기우스는 크게 홍소를 터뜨렸다.
“끝이다. 이제 내겐…… 약점 같은것은 없다.”
놈이 들썩들썩 웃는게 울리는 땅을 통해 전해졌다. 땅속에 속절없이 갇혀버린 노구덕은 연신 입 안으로 들어오는 흙을 퍼먹으며 몸을 허우적거렸다.
단지 발록이 위에서 짓누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노구덕의 무식한 힘이라면 발록이 위에서 누르고 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뛰쳐나올 수 있어야 했다. 단단한 땅 밑을 물속처럼 헤엄치며 노닐 수 있는 것이 그의 근력 아니던가.
당연히 노구덕은 발록을 피해 다른 곳으로 몸을 내뻘 작정이었다. 그런 그가 하나 계산에 넣지 않은게 있다면,이 공간,이 땅과 하늘이 전 부 발레기우스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러다 정말 죽겠구만……!’
사방을 빈틈없이 조여 오는 압력이 마치 압착기에 갇힌 듯하다. 그를 꾹 쥐어짜고 있는 흙은 그가 상정했던 무른 흙이 아니었다. 노구덕을 중심으로,정확히 말하면 그의 위에 버티고 선 발록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질량의 소용돌이가 그를 통째로 갈아버리기 위해 끝없이 몰려들 고 있었다.
발레기우스는 그를 이 흙더미 속에 서 완전히 짜부라뜨릴 작정이었다. 아무리 절륜한 재생능력을 가진 그 라도 입자단위로 낱낱이 분해된다면 살 방도가 없어지고 말 테니까.
까드드드드득–
갑주와 살갗이 긁혀 깎여나가는 기음이 요란하게 귓전을 긁어댄다.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처럼 아릿한 게,수백 개의 그라인더가 동 시에 날을 돌려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노구덕은 참았다. 미세한 모래 알갱이들이 살갗 속에 들어박히고,혈관을 후벼파는 고통을 감내 하며 두뇌를 활성화했다.
지금 여기서 뛰쳐나간다? 못할 건 없다. 전력을 다하면 어떻게든 가능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그에게 필요한 것은 발레기우스를 한 대라도 더 때리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 궁리할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가면 그럴 틈도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놈을 이길 수 있지?’
약점이 없다. 놈은 그렇게 선언했 지만 그건 바꿔 말해,아직까지는 약점이 있다는 소리다.
아직 발레기우스는 진정한 의미로 신이 되지 못했다. 밖에는 아직까지 동맹군이 살아남아 싸우고 있으며, 그와 김정인도 흡수당하지 않았다.
실낱같은 가능성은 남아 있다……. 문제는 이 가능성이란 게 말 그대로 산술적인 수치에 불과한,그야말로 ‘가망성’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티끌만도 못한 가능성…… 그래도 확신은 얻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여기에 건다. 달리 수는 없어.’
노구덕에게 있어 이 승부는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올인원 도박이다. 그 런 대승부를 앞두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왔을 리 만무했다.
발레기우스와 공수를 주고받은 순 간은 무척 짧았다. 결국 김정인은 그 드높던 코뼈가 함몰되고, 노구덕 자신은 두더지처럼 땅속에 틀어박혀 전신이 갈리는 신세가 되었지만,그 렇다고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난 저놈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완전한 별개야.’
노구덕이 확신한 사실. 그건 동맹 군 헌터들의 저널을 모조리 흡수한 발레기우스의 힘이 그에겐 거의 닿지 않는다는 것.
물론 저널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활화산처럼 들끓는 투기가,버젓이 사용되는 주술의 힘이 분명히 증명 하고 있었다. 그가 헌터로서의 힘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다른 이들과 다르게 욘의 ‘창고’로 서 살아 있는 카멜롯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아직 미미하게 남아 있는 욘의 의지로 보호되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도저도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헌터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발레기우스의 힘이 그 에겐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놈은 그 사실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가자.’
단 한 번의 수. 노구덕은 거기에 모든 걸 걸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순간,말라 비틀어진 더덕처럼 움츠러든 그의 팔이 거세게 양 옆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참룡과 뇌굉,두 개의 마검이 들린 채였다.
노구덕은 번쩍 치뜬 눈에서 형형한 안광을 발하며 소리쳤다.
“밀쳐내라!”
푸른 전하와 핏빛 전하로 똘똘 뭉 친 두 개의 용권풍이 땅거죽을 온통 헤집으며 위로 솟구쳤다. 워낙 주변 의 압력이 막강했기에 큰 틈을 만드는 건 무리였으나,노구덕에겐 그 정도의 틈새면 충분했다.
노구덕이 매몰된 일 분여,하늘이 떠나가도록 웃어젖히던 발록의 눈에서 노르스름한 살기가 감돌았다.
“벌레 놈이 죽을 자리를 찾아서 기어나왔구나!”
“기생충 자식이 뭐라고 하는 거냐!”
발레기우스의 지척에서 튀어나온 노구덕은 그대로 적의 품 안으로 안기듯이 뛰어들었다.
“네놈……!”
그 순간 발레기우스의 검은 얼굴이 당혹감으로 이지러졌다. 노구덕이 걸친 고철,그러니까 다 찌그러진 넝마 꼴이었던 성갑이 갑자기 용광로에서 갓 튀어나온 쇳덩이처럼 극 렬히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변색한 성갑은 금세 붉은색을 넘어 눈부신 흰색으로 백열되었다. 노구덕의 고함이 터져나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터져라!”
극한까지 달아오른 성갑 스트롱홀드에서 푸른색의 광채가 뿜어졌다. 론다리온 교단 최강의 신기가 고하는 최후의 단말마였다.
과아아아앙–!
번쩍! 경악한 발레기우스와 그에게 달려드는 노구덕 사이로 하얀 섬광 이 스치며 엄청난 대폭발이 일어났다. 엄청난 양의 신성력이 일거에 응축,해방되며 일어난 폭발의 반경은 반경 수백 미터를 모조리 휩쓸어 버리며 공간을 헤집어 놓았다.
그러나 스트롱홀드의 자폭이 싸움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대하게 피어오른 버섯구름이 대미를 장식하듯 상공에 떠올랐을 때, 매캐한 회색의 구름 속에서 두 개의 거대한 그림자가 빠르게 뛰쳐나왔다.
높이 약 육 미터,검게 윤기 나는 가죽이 온통 칙칙하게 번진 그을음으로 가득한 거대 마수는 악마 발록 이다.
그리고 사악한 노란 눈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린 발레기우스를 끈덕지게 따라붙는 작은 그림자는 마찬가지로 검댕을 치덕치덕 묻힌 노구덕이었다
“못 도망친다!”
“이놈!”
날개를 크게 벌리며 몸을 뒤집은 발레기우스는 크게 포효하며 팔을 내리눌렀다. 그러자 뒤꽁무니를 따라붙던 노구덕의 신형이 급격히 정 지하며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김정인을 옭아댔던 예의 그 무형의 압력이 사슬처럼 몸을 붙들어버린 것 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거미줄 에 걸린 나비처럼 꿈쩍도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된 노구덕은 망설이지 않고 오른손을 폭발시켰다. 정확히는 오른손이 아니라,그 손에 들려 있던 마검,뇌굉을 터뜨린 것이었다.
퍼엉! 파츠츠츠–!
노구덕 주변의 공간이 찢겨나간 것처럼 일그러지더니,그 틈새에서 가공할 벼락폭풍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확산에 확산을 거듭한 벼락 폭풍은 대기를 타고 뻗치며 발레기우스의 살가죽을 강타했다.
드세게 달려드는 벼락줄기에 호되 게 당한 발레기우스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손을 뒤로 내뺐다.
“쿠오오오오오!”
기실 큰 타격은 아니다. 빗대자면 생각 없이 맨발로 걷다가 부지불식간에 밤송이를 밟았을 때의 고통이 랄까. 그러나 고통에 대한 면역이 그다지 없는 발레기우스에게 있어, 이 정도의 통증은 화가 치밀다 못해 상대를 찢어 죽여도 모자랄 격통이 었다.
무엇보다 이 고통을 안긴 뇌굉은 발레기우스 본인이 부하인 최훈에게 하사한 신검이 아니었던가. 때문에 분노는 두 배로 가중되었다.
“이 벌레 노오옴–!”
진노한 발레기우스가 고래고래 노성을 지르고 있을 즈음,뇌굉의 희 생으로 속박을 벗어난 노구덕은 곧 바로 그의 면전까지 짓쳐들었다.
깜짝 놀란 발레기우스가 미처 대응 하기도 전,노구덕은 이어서 왼손에 들린 참룡을 터뜨렸다.
쿠아아앙!
“크아아아!”
코앞에서 터져 나온 혈우(血雨)의 폭격은 뇌굉의 번개폭풍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 면적이면 면적,위력이면 위력,뇌굉에 뒤지는 점이 하나도 없는데다, 거리가 너무 나도 가까웠다. 크레모아를 바로 앞에서 직격당한 격이었으니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비틀거린 틈을 노린 노구덕은 마침내 줄곧 거리를 허용하지 않던 발레기우스를 따라잡는데 성공했다.
“……잡았다.”
거친 털로 뒤덮인 발레기우스의 심장부와 노구덕의 손바닥이 맞닿았다. 광부처럼 까맣게 물든 노구덕의 입가에 비로소 희미한 미소가 내걸렸다.
스트롱홀드와 뇌굉,참룡 둥 수중에 가진 가장 강력한 신기들을 모조리 희생한 끝에 간신히 얻어낸 기회. 절대 허투루 낭비할 수 없었다.
‘끔찍하게 싫어하는 놈이지만…… 믿는다. 그래도 해줄 땐 반드시 해주는 놈이었으니까!’
발레기우스의 왼편 가슴에 닿은 손등 위에서 시퍼런 힘줄이 돋아났다. 그러자 발레기우스의 거대한 몸뚱이가 제세동기에 닿은 것처럼 크게 펄떡였다.
벌떡벌떡 경련을 일으키는 와중에도,노랗게 홉뜬 발레기우스의 시선은 흐릿하게 웃는 노구덕을 죽일 둣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 능구렁이 같은 놈,역시 네놈은……!”
“흐흐흐,
예상이 적중했다. 당장이라도 감겨 버릴 듯한 눈꺼풀을 억지로 추켜올린 노구덕은 실실 웃으며 발레기우스의 신경을 자극했다.
꼼짝도 할 수 없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지만,드디어 이 괴물딱지를 궁지에 몰아넣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발레기우스 자신 이 벼려놓은 검으로 놈의 심장에 말 뚝을 박아 넣었다.
발레기우스와 노구덕.
두 존재가 올무에 걸린 듯 꼼짝도 하지 못하는 건,두 사람의 심신이 어느 수단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연 결되어 거대한 에너지의 이동이 이루어지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 연결 수단이란 바로 흡정마공. 발레기우스가 창안하여 신의 조각들을 흡수하는 용도로 사용한 바로 그 마공이었다.
발레기우스와 욘은 광의적으로 같은 존재이지만,두 존재의 성질은 엄밀히 말해 다르다. 발레기우스는 욘의 일부가 카르마 에너지에 의해 타락하여 생겨난 존재였으니,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다. 실제로 발레기우스는 욘과 다르게 카름과 카르마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었다.
반대로 발레기우스 또한 성질이 다른 욘의 힘을 흡수하는데 길게는 수십 년,작게는 몇 년이란 세월을 소 모해야만 했다. 그래서 발레기우스는 그 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시키기 위해 홉정마공을 창안했다. 그 목적은 신의 조각에게 흡정마공을 익히게 하여 그들에게 깃든 욘의 힘을 자신에게 알맞게 가공하고,때가 무르익으면 꿀꺽 집어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낸 흡정마공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예전의 명왕이 그랬던 것처럼,에 너지가 오가는 순간에는 철저한 무 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
노구덕은 그 유일한 맹점을 파고들 었다. 홉정마공을 일으켜 그가 지니 고 있던 시스템의 기운을 억지로 발레기우스에게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기묘한 대치 상태는 바로 그 결과였다.
다수의 신의 조각을 흡수하며 쌓아 올렸던 힘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애초에 마음껏 다룰 수 있는 힘은 아니었지만,그래도 충만했던 힘이 사라지자 이루말할 수 없는 공허함 이 밀려온다.
그 커다란 탈력감에도 불구하고, 노구덕은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그가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낸 이 기회를 그 남자가 놓칠리가 없었으 니까.
쇄애애액!
그의 자문에 화답하듯,기분 좋게 들려오는 파공음.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유성처럼 어 둠을 가로지르는 궤적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아마도 평생 그가 본 것 중 최고의 장관이 아닐까.
이전과는 다르게 막아서는 것이 없으니,거칠 것도 없다. 어김없이 나타난 김정인의 검은 세상에서 가장 깔끔한 직선을 그려냈다.
일도양단(一刀兩斷). 정지한 시공 간 속에서 찰나가 흐르고,이내 반듯하게 두 쪽으로 갈라진 육신에서 짙은 피안개가 피어났다.
헌 터 클럽 769화
214 악몽(惡夢)
“카아아아아아아
비틀비틀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는 바이올렛의 몰골은 메스껍기 짝이 없었다.
찢어진 입과 벌어진 상처에서 쏟아 진 거무죽죽한 체액은 그녀의 보랏빛 화사한 드레스를 진창에 담갔다 뺀 양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토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몸뚱이에서 풍기는 역한 악취는 후각이 마비될 정도였다.
반면 하유라,퀸젤,이정과 육지백 등 동맹군 요인들은 여기저기 옷이 찢어지고 얼굴이 피로에 잠기긴 했어도 그럭저럭 멀쩡한 행색이었다.
두 진영의 대비되는 모습만 봐도, 그간의 전투양상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명확했다.
“오물범벅인 네 몰골을 봐라,쓰레기. 발레기우스의 신부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로군.”
“이,이 망할 년이……!”
겨울의 검 아발란체를 길게 늘어뜨린 하유라의 도발에,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한 바이올렛의 눈자위에 섬뜩한 한기가 서린다. 참 대단하다면 대단한 충정이었다.
쿠옹!
그때,어딘가 가까이에서 산이 무너지듯 육중한 소음이 들려왔다. 성곽보다 더 비대한 크기로 성장한 엘리엇이 바닥에 코를 박고 엎어지는 소리였다.
“저쪽도 결판이 났네.”
힐끔 그쪽으로 눈을 홀긴 퀸젤의 말이었다. 한참 부패한 사체처럼 변 색된 엘리엇의 머리 위에는 금빛 머리를 사자 갈기처럼 도도하게 휘날리는 아가레스트가 우뚝하니 서 있었다.
다른 이들이 바이올렛 하나를 맞아 힘겨운 전투를 벌이는 사이,홀로 엘리엇을 도맡아 상대한 아가레스트는 미세한 숨결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안개여왕…… 마치 검신과 무신을 보는 듯하군.”
이정의 힘 빠진 중얼거림을 들은 하유라는 마뜩찮은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동맹군 수뇌부는 은연중 아가레스트를 노구덕과 김정인에 이은 장(長)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녀가 내부에서 호응하지 않았다면 시온에 진입하기 힘들었을 거라는 건 둘째 치고,애초에 강자존(强者尊)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헌터의 제일 규칙이다.
특히,아가레스트가 전투 도중 보여준 ‘틀을 깬 자’ 특유의 상식을 파괴하는 무위는,하나같이 까다롭고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강자들의 목을 절로 수그러들게 만들었다.
물론 아가레스트도 그런 분위기를 모르진 않았다.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틀어쥔 그녀는 미동 없는 엘리엇의 머리 위에서 내려와,바이올렛과 나머지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안쪽은 대충 정리된 것 같군요.”
“이제 광장 바깥의 아군을 지원해야 할 때요.”
“그리고 저 거대한 손도 말이지.”
옳은 말이다. 지금도 바깥에서는 수천의 동맹군과 카름대군이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다,칠흑의 손길 또한 여전히 상공을 활보하고 있었으니까.
“이 전장은 저희가 맡죠. 북부 쪽은……”
“흐…… 뭘 멋대로 다 끝난 것처럼 구는 거야?”
“……광장 바깥의 지원에 힘써 주 세요. 저 죽다 만 괴물은 이쪽에서 충분히 잡아둘 수 있으니까.”
아가레스트가 자신은 안중에도 두 지 않고 지시를 끝마치자,울긋불긋 하게 부어터진 바이올렛의 입술이 구질구질하게 맞물리며 피시식거리는 소리를 냈다.
“키히히히! 살아날 수 있을 것 같 아? 헛된 희망은 집어치우는 게 나을 걸.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 아무 것도……!”
“송장만도 못한 마녀가 끝까지 입을 나불거리는구나!”
“히히히…… 너희들 전부……다…… 죽을 거야……!”
망발을 일삼던 바이올렛의 눈알이 툭! 방울 꺼지듯 터지며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 모습에 말을 잃어버린 이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사악한 저주를 남긴 바이올렛의 가날픈 몸뚱이가 질척질척 형체를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눈 녹듯이 녹아버린 바이올렛의 육 신은 끈적이는 액상이 되어 땅거죽 아래로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벌어 진 일에 아연해진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벌린 채 그녀가 바닥에 남긴 검은 자국을 바라보았다.
“자,자해인가? 그래서 다시 부활 하려고……
“아니오. 그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에요.”
단호히 말을 잘라내는 아가레스트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심각한 정도가 아니야. 이건…… 최악이군.”
불온한 기류의 종지부를 찍은 건 하유라였다.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이마에 미세한 주름을 만든 하유라는 기름한 턱을 앞으로 세웠다. 그러자 무심결에 그녀에게 머물렀던 시선들이 자연히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저,저건!”
“으으음!”
“아아! 시,신이시여!”
마지막,두려음으로 떨리는 강옥교의 목소리는 현재 모든 이들이 느끼고 있는 절망적인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해 주는 말이었다.
땅에 이마를 박고 쓰러진 엘리엇의 사체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건 약과다.
광장을 둘러싼 울타리도,그 너머로 보이는 수많은 마천루와 유서 깊은 건물들이 땡볕 아래의 초콜릿처럼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채 마르지 않은 수채화를 큼지막한 붓으로 마구 문대면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까 싶다. 건물,대로,시체, 가로수와 동상에 이르기까지…….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요소가 모두 융해되어 뭉그러지는 광경은 꿈에 들어온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살점과 핏물, 돌과 나무,석회질이 뒤섞여 기괴한 죽처럼 변해 버린 그 것들은 바닥에 오래 머물지 않고 지 하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용해질을 흡수한 바닥은 본래의 흙 바닥이 아닌,생물체의 그것처럼 검 붉은 색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래서는 마치……
“……그래,소화하는 거다. 놈이 본 격적으로 만찬을 즐기고 있어.”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군요. 시 간이 없어요.”
아가레스트의 말 대로였다. 도시외곽에서부터 시작된 붉은 바닥은 외성을 가득 채운 카름들을 꾸역꾸역 먹어치우며 점차 중심부의 동맹군을 향해 그 범위를 좁혀오고 있었다.
이래서야 외부로의 탈출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죽으나 사나 노구덕과 김정인이 향한 내성을 향해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 자체 가 함정이라 할지라도…….
“난 동쪽을 맡지.”
“노부는 북쪽으로 가겠소.”
한시가 촉박하다는 것을 깨달은 동맹군 수뇌는 저마다 한마디를 남기며 급히 몸을 날렸다. 서둘러 퇴로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수천의 동맹군이 몰살을 당할게 자명했기 때문 이다.
이제 남은 방위는 두 개. 자리에 남은 이들은 하유라와 퀸젤,아가레스트였다.
힐끔 두 사람을 일별한 하유라는 먼저 선수를 쳤다.
“……난 남쪽으로 가겠다.”
“나는……
퀸젤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녀의 복잡한 속내를 읽은 아가레스트는 빙긋 미소 지으며 그 녀의 손을 맞잡았다.
“서쪽을 맡아주세요,퀸젤. 당신도 실은 그들을 돕고 싶잖아요?”
“……그럼 같이 가자.”
“아뇨. 전 내성으로 가야만 해요.”
“너,아직도……!”
“합리적으로 최선의 판단을 내린 거죠. 사적인 복수심 때문만은 아니 에요. 지금 여기서 그 싸움의 향방 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저 말고 누가 있죠?”
눈에 불을 켜며 따져 물었던 퀸젤의 기세가 주춤했다. 스스로도 아가 레스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탓이었다.
노구덕과 김정인이 발레기우스에게 패한다면 이곳의 승부와는 상관없이 모두가 목숨을 잃게 된다. 상황이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일 수 있는 아가레스트가 가는 편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안돼. 네 역할은 여기까지야. 그 사람도 분명 그렇게 말했다고.”
“퀸젤.”
“갈 필요 없어. 네가 가봤자 뭘 얼마나 할 수 있다고 그래? 그 사람은 네가 죽길 원치 않아. 그래서 날 보낸 거야. 널 설득하라고. 어떻게든 여기 잡아두라고. 그러니까……
“알고 있어요.”
아가레스트의 투박한 손길이 빵에 닿았다. 두서없이 말을 잇던 퀸젤은 망연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명경지수처럼 맑은 웃음이다. 지금껏 숱한 피를 묻히며,복수만을 위 해 살아가던 복수귀가 아닌,아직 때묻지 않은 소녀 시절과 꼭 빼닮은 미소였다.
“난 죽지 않아요. 이젠,죽기 싫어졌어요.”
“아……
“그래도 가야 해요. 날 위해서가 아니라,내 아이들을 위해서예요. 후 후후. 엄마 자격도 없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그래도 할 수 있는게 있잖아요?”
“아가레스트.”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테니까…… 뒷일을 부탁할게요.”
퀸젤은 더 이상 아가레스트를 막아 서지 못했다.
시위에서 튕겨나간 금빛 화살처럼 날아가는 아가레스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던 퀸젤은,이내 어깨를 잡아끄는 도정섭의 손에 힘없이 이끌리며 발길을 돌렸다.
최악.
도시 전체가 거대한 소화기관으로 변해 버린 모습을 보며 하유라가 입에 담았던 단어.
그러나 끝이 없는 카름의 물결과 맞서 싸우는 광장 바깥의 상황은 최악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절박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학, 학……!”
피로가 극에 달한 임유진은 한번 팔을 휘두르는 것조차 힘겨운 모습 이었다. 숨이 턱까지 걸린 입에선 연신 단내가 나고,늘 한결 같이 말갛던 얼굴은 황달에 걸린 것처럼 누렇게 뜬 채다.
그건 임유진과 함께 쌍두마차가 되어 부대를 이끌던 윤희지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안쓰러운 몰골은 윤희지 쪽이 더했다. 당장 ‘대지의 분노’를 쥐고 있는 손이 칠순 노파의 그것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광장 주위를 끊임없이 돌며 유기적으로 움직인다는 임유진의 발상 자체는 굉장히 좋았다. 실제로 검은 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 압사했던 초기와는 달리,각 부대가 연대하여 유동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게 된 뒤에는 그 피해를 기하급수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전은 그만큼 많은 활동량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부대 원들의 체력 소모도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낙오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이 탈진하여 대열에서 이탈한 병사들은 굶주린 카름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카름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혔다.
“으아아아아아악!”
초기에 비해 확연히 힘을 잃은 불길로 카름을 태워 버린 임유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또다.
또다시 열댓 명의 병사가 기운이 다해 쓰러졌다. 앞서 가던 한 명이 발이 엉켜 넘어지는 바람에,그 뒤에 있던 줄이 도미노처럼 줄줄이 고꾸라진 것이다. 문제는 그들에게 다시 일어날 힘이 한 줌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구름처럼 몰려든 카름 들로 가려져 금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애써 고개를 돌린 임유진의 얼굴빛은 종전의 노란색을 넘어 시체처럼 파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그 무거운 기색을 바로 옆에 있는 윤희지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헉,헉……! 언니…… 때문이 아 니에요!”
“알고…… 있어.”
“그럼…… 다행이고요……!”
광! 지면에서 솟구친 암석이 옆에 서 몰려들던 카름 예닐곱 마리를 한 꺼번에 날려버렸다.
기력을 쥐어짠 윤희지가 숨을 고르는 사이,임유진이 떨쳐낸 불꽃이 반대쪽에서 몰려드는 카름들을 까맣 게 불살랐다. 탈진 직전에 이르렀다 고는 믿을 수 없이 건재한 위력이었다.
“……후욱! 이쯤이 좋겠어요. 언니는요?”
“내가 보기에도 적당한 것 같아.”
그나마 교차로의 형태를 유지중인 로터리 중앙에 윤희지의 스태프,대 지의 분노가 깃발처럼 세워졌다. 후 퇴를 위한 기점이었다.
이어서 임유진의 사력을 다한 외침 이 터져 나왔다.
“퇴각! 안쪽으로 퇴각하세요!”
지금까지 선봉장을 맡았다면,이젠 지휘관으로서 최후미에 남아 전 병력을 가능한 무사히 퇴각시켜야 할 때다.
소수의 정예병들을 포함하여 로터리 주변에 둥그스름한 원진을 형성 한 두 사람은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등을 맞댔다. 광장으로 통하는 후방을 제외한 세 방향에서 까마득한 카 름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우,많기도 해라……
“얼마나 버틸 수 있니?”
“길어야 십 분 정도가 한계일 것 같아요. 정신없이 싸운다면,또 모르 죠. 더 버틸 수 있을지도.”
십 분. 부대 전부를 퇴각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그래도 후방을 맡고 있는 두식 씨 가 있잖아요? 그리고 중간 대열의 진주도 곧 도착할 테니,힘을 합치 면……
어딜 보았는지,바짝 마른 입술로 중얼거리던 윤희지의 음성이 도중에 뚝 끊어졌다.
“……왜 그러니?”
“아,안 보여요.”
“안 보인다니……?”
“진주가…… 당한 것 같아요.”
맥빠진 목소리로 말하는 윤희지의 눈길은 면목 없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이진주의 부대에 머무른 채 였다.
헌 터 클럽 770화
사실,이진주는 지휘관급 헌터들 중 가장 일선 지휘관에 부적합한 인 물이었다.
그 때문에 리베르타에서도 부대 단 위로 활약하기보다는 주로 별동대의 일원으로 활동하거나 단독 임무를 수행하며 전과를 쌓았다.
‘신기 사용자’만이 제대로 싸울 수 있다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지휘관으로 발탁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휘관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기엔,그녀는 너무 여리고 무른 성격이었으니까.
쓰러진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대열 에서 이탈했다고 했다. 그러다 중간 에 카름들이 끼어들며 부하들과 함 께 고립되었고,이윽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그게 병사들이 목격한 이진주의 최후였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윤희지는 기계적으로 끄덕끄덕 머리를 움직였다. 너무 진이 빠져서 머리가 비어버린 건지,아니면 충격에 혼이 달아난건지…… 초점이 사라진 윤희지의 동공은 텅 빈 깡통을 보는 듯했다.
“……괜찮니?”
“괜…… 찮아요. 이런 일,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잠깐,5초면 돼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한 손으로 가벼이 손사래를 치는 윤희지의 옆얼굴은 젖은 모래성처럼 위태로워,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다.
크라벨에 이어 이진주까지.
한 남자를 두고 다투었던 세 여인 중 이제 그녀 혼자만이 남았다. 홀로 남은 그녀의 머릿속에 무슨 영상이 떠오르고 있을 지는…… 오직 윤 희지만이 알 일이었다.
“걱정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 었네요. 제게 이런 말할 자격은 없 지만요.”
“……”
“역시 눈물은 나오지 않네요. 확실 히 전 나쁜 년인가 봐요. 호호,어 떻게 지휘관이 그딴 판단을 할 수 있죠? 진짜 바보 같아. 앞에 있다면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을 텐데.”
“희지야.”
“그래도…… 진주다운 선택이었어 요. 뭐,어리광은 여기까지 부릴게요. 곧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잔뜩 젖어 깊게 잠긴 목소리다. 무어라 위로를 하려고 했던 임유진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윤희지가 말한 것처럼,지금은 형편 좋게 슬픔을 곱씹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오 분 정도가 지나자 후미의 이두식이 합류했다. 그러나 이두식의 몰골을 본 임유진은 그를 그대로 광장 으로 보내 버렸다. 본인은 강경하게 남고 싶어했지만,임유진은 군령을 발동해 가차 없이 퇴각을 명했다.
오른팔을 잃어버리고,왼팔에 고철이나 다름없는 방패를 칭칭 둘러 감은 사람을 어떻게 최후방에 남긴단 말인가.
개전 초기부터 별다른 강력한 신기도 없이 오로지 육체 능력과 무투술 에 의지하며 싸워 온 이두식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발군의 전투력을 유지하며 활약한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나 그것도 이젠 한계. 실상 전투 불능에 이른 그를 후미에 남겨 놓는 건 이진주의 전철을 밟겠다는 것이 나 진배없었다.
이두식을 그렇게 보내 버리고,몇 몇 의기 높은 헌터들과 병력들이 로터리 길목에 합류했다.
그리고,그 뒤.
그 뒤……?
임유진은 그 다음의 기억이 없었다.
기절하거나 정신을 잃어버린 게 아니다. 이성적인 생각,판단을 내릴 찰나조차 허용되지 않는 처절한 싸움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마지노선을 구축한 임유진과 윤희지는 최후의 최후까지 여력을 끌어 모아 분전역투했다.
뒤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죽이고,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생각하고 고민할 힘조차 아껴가 며 카름들을 말살했다. 붉은 경갑이 검붉은 체액으로 물들고,구깃구깃 해진 로브가 피에 절어 질척해졌다. 카름들과 숫제 한 덩어리가 된 두 여인은 악귀가 되어 날뛰었다.
마지막 힘을 불사르는 지휘관들의 분투는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듯하던 병사들의 힘을 극한까지 이끌어냈 다.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드는 적들을 막아선 병사들은 레그나토르와 리베르타라는 소속까지 잊어버리고 혼연 일체가 되어 투혼을 발휘했다.
윤희지가 말했던 십 분은 금방 지나갔다.
십오 분,이십 분이 가까워져도 마지노선은 건재했다.
내성을 등진 중앙 광장으로 통하는 길 중 가장 큰 대로와 연결되어 있는 남서쪽 로터리. 그 드넓은 길을 그득하게 채운 카름들을 상대로 이 십 분 가까이 방어에 성공한 백여 명의 결사대.
다른 목격자도 없고,그들 스스로 의 기억에도 없는 시간이지만…… 그들이 벌어다 준 십여 분의 시간은 마지막 후미의 아군까지 확실히 안전하게 퇴각시켰다.
하지만.
다시금 그늘이 드리운 하늘은, 그 이상의 기적을 허락하지 않았다.
과아앙!
수라가 되어 칼을 휘두르던 임유진 의 어깨가 덜컥 흔들렸다. 그와 함께 깊이 침잠해 있던 정신이 화들짝 깨어났다. 갑작스런 거센 풍압에 멀 리 날아갈 뻔한 것을,주변의 시체 더미에 몸을 묻어 간신히 버텨낸 그 녀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
피칠갑을 한 임유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쇳가루를 들이켠 듯 먹먹한 목구멍에선 작은 신음성 하나 흘러나오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백태가 낀 것처럼 흐릿하던 시야가 온통 까만색으로 채워졌다. 거친 털가죽의 질감과 징그러운 주름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다.
검은 손.
그녀의 망막을 그득한 어둠으로 채 워 넣은 그것은 상공에서 하이에나처럼 배회하던 바로 그 거대한 손이었다.
바닥을 덮친 검은 손 아래에서 선홍색 액체가 스멀스멀 스며 나오는 게 보인다. 카름과 인간이 여물죽처럼 고루 뒤섞인 핏물이다.
“흐으으으..!”
그제야 사태를 자각한 임유진은 짐승같은 흐느낌을 발하며 으스러져 라 이를 악물었다.
날파리를 잡듯 무심히 휘둘러진 손바닥이,정신없이 엉겨 싸우던 결사 대 진영 중앙을 정확히 후려친 것이다. 그녀 또한 운 좋게 외곽 쪽으로 튕겨 나오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결사대원들과 같은 꼴이 되었으리라.
상황 인식,그다음은 지독하게 몰려드는 고통이다. 한순간 긴장이 풀리면서,무아지경 내내 억지로 붙들고 있던 몸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는 이미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연골이 전부 닮아 없어지고, 근세포가 전부 괴사한 듯했다.
임유진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한 걸음,한 걸음 내딛으며 비실비실 움직였다. 충격파에 멀찍이 튕겨나갔던 카름들이 슬슬 다시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지만,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움직이는 건 오직 생존자를 구하겠다는 일념 뿐이었다.
“……부,분명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 간절한 염원이 신에게 닿았던 것일까? 거짓말처럼,낮게 잦아드는 목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허윽…… 우으으으……
삐거덕삐거덕 움직이던 임유진의 눈가에 옅은 광채가 돌았다.
켜켜이 쌓인 피무더기 속에서 힘겹게 몸을 빼내는 여인. 온통 피에 절 어 알아보기 어려웠지만,신음하는 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희지야!”
“유,유진 언니……?”
끈적이는 핏물 때문에 눈을 뜨기가 힘든지,윤희지는 수차례 눈가를 훔치고서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흐리멍덩한 시야로 간신히 멀리 멀어져 있는 임유진의 얼굴을 발견한 그녀는 간신히 손을 들고 웃어 보였다.
“괜찮……”
상태를 묻던 임유진의 얼굴에 갑자 기 살얼음이 끼었다. 혼들리는 윤희지의 오른 손목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덜렁거렸기 때문이다.
손목이 망가졌다면 스태프를 들지도 못한다. 다시 말해,그녀의 신기 인 ‘대지의 분노’를 쓸 수 없다는 의미다.
임유진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손을 확인한 윤희지는 ‘아,부러졌네……’ 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자기 손이 부러졌다는 것조차 몰랐을 정도로,감각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방증이다.
“……난 틀린 것 같아요.”
“너……
임유진이 한 발을 내딛자,시체 더 미에 기대앉은 윤희지의 낯빛이 엄하게 굳는다.
“여기 살아 있는 사람 없어요. 괜 히 오지 말고,언니라도 도망쳐요.”
“그게 무슨……
“도망치라니까! 진주 꼴 나고 싶어 서 그래?”
임유진은 대답 대신,또 한 걸음을 내딛었다. 순간 비틀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지만,그녀는 간신히 중심축을 잡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점차 임유진의 모습이 가까워지자,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던 윤희지의 표정이 멍해졌다. 사력을 다해 그녀를 구하려하는 임유진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왜……?”
멀거니 중얼거린 윤희지는 빨간 얼룩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언성을 높였다.
“뭐하는 거야! 당신 바보야? 말귀못 알아들어? 저리 가라고!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치란 말이야!”
“그 꼴로 날 업어갈 수나 있을 것 같아? 그냥 내버려 둬! 나 좀 내버려 두라고! 어차피 난……!”
“이…… 멍청한 언니가……!”
독설을 퍼붓던 목소리에 점차 축축 한 물기가 서리고,끝내 진한 흐느낌으로 변해 잠겨 들었다.
절뚝절뚝,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가 까워지고 있는 임유진.
가까워질수록 그 아름다운 얼굴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다가온다. 눈물로 차오른 윤희지의 망막은 옅은 달빛처럼 은근한 임유진의 미소를 똑똑히 비추었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입술이 전하는 작은 소리도.
“혼자 두면,쓸쓸하잖아……. 적어도,같이……
“무슨……
무심결에 되묻던 윤희지는 그만 말을 잊고 말았다. 격하게 떨리는 그 녀의 시선은 피칠갑을 한 임유진의 아랫배에 쏠려 있었다.
깊은 상처. 그것도 아마…… 치명 적인 관통상이다.
임유진의 복부엔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곳에서 새어나온 선혈이,애처로이 떨리는 허벅지와 그 밑의 종아리를 타고 끊임없이 흐르는 중이었다. 상처 부위를 틀어막은 그녀의 왼손은 뱃속에서 뛰쳐나오려는 내장들과 힘겨운 씨름을 벌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언니……
‘혼자 두면 쓸쓸하니까.’
비로소 그 의미를 알아차린 윤희지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신은 물론이고,임유진조차 이미 살아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도,임유진도…… 곧 밀물처럼 들이닥친 카름의 해일에 휩쓸려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 터. 망연자실한 윤희지는 갑자기 킥킥 웃는 소리를 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허탈한 속내에서 참을 수 없는 실소가 올라왔다.
한 남자의 사랑을 얻고자 아등바등 했던 세월들, 그리고 먼저 간 크라벨과 이진주의 얼굴이 언뜻언뜻 파 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미를 장식한 건,그토록 사랑했던 김정인이 아니 라 그녀의 딸아이,김소연의 앙증맞은 얼굴이었다.
‘덧없네. 전부……
그때였다. 윤희지는 갑자기 주변이 이상하도록 고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언의 마도사.”
“..어?”
느닷없는 부름에 선뜻 고개를 든 윤희지는 멍한 눈을 깜박였다.
득달같이 달려들던 카름들이 모두 그 자리에 정지해있다. 그녀와 임유 진이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마치 금줄이라도 쳐진 것처럼 접근하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윤희지와 임유진 사이엔…… 검은 그림자 같은 형체가 나 타나 새하얀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 하얀 가면에 뚫린 눈구멍 같은 동공과 마주한 윤희지는 사고가 정지한 것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왜냐하면,그건 절대로 이곳에 나타나서는 안되는 존재였으니까.
“바,발레기우스……?”
“운이 좋았던 게 아니다. 너희 둘은 일부러 살려둔 거다.”
입가의 미소가 무색하도록 딱딱하게 말하는 발레기우스의 눈매는 어쩐지 사납게 얼룩져 있었다.
“성화는 흡수한다. 하지만 진언의 마도사,너는 그럴 가치도 없지. 저 스태프의 힘이라면 모를까.”
“뭐……?”
“그런데도 굳이 널 살려둔 건,네 처형식을 꼭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올라가는 발레기우스의 손 에 검은 광채가 서리기 시작한다. 무시무시한 살의가 자신을 향한다는것을 직감한 윤희지는 뻣뻣이 굳은 채로 마른 침을 삼켰다.
“나,나는……
“죽어라.”
번쩍!
곧게 뻗은 손끝에서 뿜어진 검은 벼락이 삽시간에 공간을 격하여 날아온다. 최후의 순간, 죽음을 예견한 윤희지는 도리어 눈을 부릅뜨며 검은 벼락을 노려보았다.
덕분에 그녀는 하나도 빠짐없이 볼 수 있었다.
면전에 들이닥친 검은 벼락이 그녀를 집어삼키기 직전,아슬아슬하게 끼어든 붉은빛 섬광이 벼락의 기운을 받아내는 것을.
짧은 순간,윤희지와 마주친 임유 진의 얼굴은 여전히 고요히 웃는 낯 이었다.
“유진……!”
“……”
동그랗게 말린 입술에선 아무런 소 리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윤희지의 귀에는 임유진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속삭인 것처럼 똑똑히 전해졌다.
다행이야. 분명 그렇게 말했다.
물결치듯 크게 일렁인 윤희지의 눈 이 또다시 한 번 깜박였을 때.
앞을 가로막았던 임유진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쓸쓸하게 날아든 검은 잔재만이 윤희지의 넋 나간 얼굴을 쉼 없이 때 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