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78)
헌터클럽 771화
‘저게 뭐지?’
서서히 그쳐가는 눈발처럼 아스라 이 흩어지는 검은 재.
그리고 그 전에 언뜻 스쳤던 익숙한 미소.
‘저게 유진이라고?’
제어를 잃은 턱이 길게 늘어졌다. 가슴에 뭔가가 얹힌 것처럼 갑갑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목구멍에서 짐승이 울부짖듯 그르륵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들어도, 성대에 서 나는 목소리가 아니다.
검게 일변한 시야가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눈은 뜨고 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고,귀는 열려 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넓게 퍼진 감각은 그대로인데,정보를 받아들이는 뇌가 정지했다.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가길 스스로 거부한 거다.
물론,노구덕도 알고 있다.
자신이 사고를 멈춘다고 해서 시간 이 정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건 눈 가리고 아웅이다. 궁지에 몰린 어린애가 칭얼대는 것과 다를 것도 없었다.
안일한 현실 도피……. 평소의 그가 그렇게도 경멸하는 방어기제의 발로다. 실제 현실에는 터럭 하나만 큼의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병신같은 짓거리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받아들이란 말인가? 그녀가 잿더미로 변해 스러졌다는 걸?
습한 여름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악몽이 아니다. 불쾌하게 젖은 셔츠를 벗어두고, 이마에 흥건한 땀을 훔치며 한숨으로 털어내도 되는 그 런 태평한 상황이 아니었다.
윤희지를 노리고 떨어진 검은 벼락,그 앞을 막아선 임유진,그리고 수포처럼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까지도…… 불길한 가정이 아닌,틀림없이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한 일이다.
차라리 눈으로 본 것이 전부였다면 발레기우스의 질 나쁜 장난질이라 치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 실낱같은 가능성에도 기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녀가 뿌옇게 흩어지는 순간,그 영혼과 연결되어 있던 심령차력술이 뚝 끊어지는 것을 느끼고 말았으니까.
김정인에 의해 두 조각으로 갈라진 발레기우스가 아래로 추락했을 땐, 정말로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하나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놈의 절단된 육신에서 흐드러지며 비산한 핏물은, 그와 김정인을 농락하듯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영 상이다.
그의 눈앞에서 임유진의 목숨을 앗아간 그 저주받을 영상은 아직도 계속해서 변화하는 중이었다.
임유진이 산화한 뒤,홀로 남겨진 윤희지.
처형을 집행한 발레기우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망부석처럼 굳어진 윤희지의 얼굴 에 점차 커다란 균열이 일면서,그 사갈같던 여자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흘러내린다. 싸라기밖에 남지 않은 젓가루를 그득 움켜쥔 윤희지는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오열했다.
요동치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급히 달려오는 두 무리가 보였다. 제각기 수십 명의 병대를 거느린 하유라와 퀸젤…… 너무도 뒤늦은 원군이었다.
“아깝군. 이렇게 성화를 잃다니.”
우묵하게 들어간 눈이 느릿하게 아래로 돌아갔다.
갈라진 절반의 얼굴을 흉측하게 비뚤어뜨린 발록…… 아니,발레기우스의 얼굴이 보였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불분명한 놈의 낯짝은 미미 한 아쉬움을 띠고 있었다.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이야.”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죽은 둣 미동 없던 눈매가 격렬히 요동치면서, 하염없이 벌어 진 입에서 무더운 숨결이 돌아왔다. 동시에 받아들이지 못했던 현실이 압도적으로 내려앉으며 그의 마음을 억눌렀다.
임유진이 죽었다.
여기서 발광을 하며 길길이 날뛰든,나가서 윤희지의 목을 꺾어 분 풀이를 하든,그녀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임유진은 그의 반려였고,아이들의 대모였으며,그가 일군 레그나토르 의 최고 안주인이었다. 볼품없던 늙은이인 그를 성심껏 받아들여 주었고,그녀 덕분에 숱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또한 그가 가장 사랑한 여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잃었다.
산 채로 심장을 끄집어내 포를 뜬 다 해도 이만큼 괴롭지는 않을 거다. 할 수만 있다면,이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안 될 일이다. 그의 목숨뿐 아니라 수천수만의 산 제물을 바치더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수렁에 빠진 슬픔은 짧았다. 아내 의 죽음을 받아들인 노구덕은 금방 제정신을 되찾았다.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인 것처럼 뜨거워진 몸과는 별개로,그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했다.
패닉에 빠진 노구덕이 우두커니 있는 사이 나머지 하나를 끝장낼 심산 이었을까. 그동안 감쪽같이 되살아 난 발레기우스는 김정인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삽시간에 피투성이 꼴이 된 김정인의 모습은 벼랑 끝에 몰린 생쥐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구원에 나서야 할 판이었지만, 노구덕은 김정인의 생사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궁리하는 건 오로지 하나.
저 검은 악마…… 발레기우스를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죽일 방도였다.
‘왜 죽지 않았지?’
‘정인이 놈…… 저놈의 힘이 부족해서?’
‘아니,아냐……. 그보다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내가 뭘 보지 못하고 있는 거지?’
풀가동된 두뇌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맹렬히 가속한 생각의 속도는 찰나를 수백으로 쪼개며 거대한 마인드맵을 만들어냈다.
‘놈은 아직 완전체가 아니다. 무적도,불사도 아냐. 내 힘이 통했으니 까.’
‘분명히 죽일 수 있다. 시간 싸움이야. 저놈이 동맹군을 흡수하기 전에…….,
‘흡수. 그래,시온은 놈의 소화기관 이다. 놈이 소화에 성공하면,더 이 상 내 힘도 통하지 않게 돼.’
‘욘,오리지널,카르마,삼위일체. 그게 저놈이 바라는 완전체일 테지. ……잠깐만. 그렇다면 왜……
부르르!
우주 속 끝없는 별자리처럼 이어지던 생각의 질주가 마침내 멈추었다. 나락의 끝에서 간신히 손에 쥔 한 가닥 작은 실마리가 그의 온몸을 크 게 뒤흔들었다.
때마침,김정인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시종일관 열세에 처해있던 김정인 의 검이 거듭된 전투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부러진 것이다.
쨍!
반탄력에 뒤로 밀려난 창백한 김정인의 얼굴 위로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쳤다. 신검을 잃은 탓이 아니라, 갑자기 검이 부러지는 바람에 밸런스의 한 축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발레기우스가 놓칠 리 없었다. 잔악한 미소를 머금은 발레기우스는 망설이지 않고 무방비로 드러난 김정인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초록빛 거구의 오크가 끼어든 건 바로 그때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난 노구덕은 김정인의 허리를 끊어놓을 기세로 날아든 발레기우스의 손톱을 몸 으로 받아냈다.
알궂게도 임유진이 윤희지를 감쌌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차이가 있다면,임유진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노구덕은 죽지 않았다는 것. 반쯤 끊겨 버린 허리에서 울컥울컥 핏물이 터져 나왔지만,노구덕은 그 상태에서 오히려 반격을 감행했다.
안면을 파고드는 주먹을 본 발레기우스는 냉소하며 크게 일갈했다.
“같잖다!”
퍼엉!
발록의 주위를 싸고돌던 기운이 일 시에 폭발했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와류에 휩쓸린 두 사람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뒤로 튕겨졌다.
“커헉!”
“크으윽……!”
먼지 부스러기처럼 훌쩍 나가떨어 진 노구덕,김정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전신이 자잘한 상처로도 배되어 혈인이나 다름없는 김정인은 그렇다 쳐도,허리의 절반이 뭉개진 노구덕의 모습은 보기에도 메스꺼울 정도였다.
부러진 반검(半劍)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킨 김정인의 표정은 그답지 않게 참담했다. 잠깐이지만 발레기우스와 전력을 다해 겨루었던 만큼,저 괴물과의 격차를 아득할 정도로 체감한 탓이었다.
가공할 악신은 전력을 다한 검신의 참격에 머리와 심장을 베이고도 죽 지 않았다. 죽기는커녕 아무렇지도 않게 되살아나 그를 궁지로 몰아넣 었다.
발레기우스의 손톱은 그의 검보다 날카로웠고,그 힘은 노구덕의 물리력을 뛰어넘었다.
“이길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돌린 노구덕의 눈에 이채가 서리며,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너…… 새치가 이렇게 많았던가?
갑자기 폭삭 늙어 보인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김정인은 무심코 머리를 매만졌다. 전력의 아우터 블레이드를 장시간 전개한 부작용이 드디어 외관까지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어쩐지 어색한 김정인의 얼굴에 잠 시 눈길을 준 노구덕은 재차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무서운 거냐?”
“…….”
김정인은 입을 다물었다. 무심하게 다가온 노구덕의 물음이 가슴 한편을 바늘처럼 짓쑤셨다.
문득,그는 검을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환자처럼 덜덜 떨리고 있는 손.
남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언정,자 신까지 속일 수는 없다. 요란한 손의 떨림은 명백히 부작용 탓이 아니었다.
공포. 김정인은 자신이 난생 처음 으로 공포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꾸득! 손잡이를 쥔 손에 억센 힘이 실린다. 김정인은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하는 대신,거칠게 반문했다.
“형님은 두렵지 않습니까?”
“당연히 무섭지. 다리가 떨릴 만큼 무섭다. 죽음 앞에 초연한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진심이라기엔 너무 무신경한 대답 이다. 실제로 한심하게 손을 떨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무표정 일색인 노구덕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으니 까.
“그런데 어떻게 그리 태연히……
“열 받거든.”
“예?”
“죽는 것보다도,유진이를 죽인 놈이 저렇게 버젓이 으스대는 게 훨씬 열 받아. 창자가 꼬이고 복장이 뒤 집어질 정도로 화가 난단 말이다.”
살얼음 같은 말투에서 그 처절한 분노가 느껴졌다. 붉은 아지랑이처럼 유형화된 살기를 본 김정인은 이내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 분노의 대상이 턱없는 상대란 거다.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육박전 (肉薄戰) 이다.”
김정인의 말문이 살짝 닫혔다가, 잠깐 뜸을 들인 뒤에야 다시 열렸다. 노구덕의 말이 선뜻 이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박전이라니요? 발레기우스 와 치고받겠단 말입니까?”
“너보고 싸우란 말은 안 할 테니 걱정 마라. 주공과 조공을 바꾼다. 원래는 네 검에 기대를 걸었다만, 네 힘은 저놈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까……. 내가 놈과 맞붙 겠다.”
“그렇다면 저도……
“넌 조력에 전념해라. 지금처럼 한 방에 휙휙 날아가면 제대로 맞붙을 수도 없으니까. 네가 지지대가 되어 줘야겠다.”
말인즉,노구덕이 나가떨어질 때마다 그 뒤를 받치는 벽이 되란 소리 가 아닌가. 최강의 공격력을 보유한 검신이 맡기엔 너무 터무니없는 역할이었다.
“대체 무슨 계획이신 겁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진 김정인은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렇잖아도 시간이 없는 판국에,제대로 된 전략도 없이 막무가내식 싸움을 벌이자니.
당연히 노구덕도 나름대로의 생각 이 있어서 하는 말이겠지만,무턱대고 따르기엔 너무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심해라. 요점은 저놈과 내가 최대한 자주 맞부딪치는 거다.”
두루뭉술한 말만으론 부족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용된 작전 타임은 딱 거기까지였다.
“흐하하하핫! 네까짓 놈이 나와 육박전을 벌이겠다고?”
일그러진 허공에서 튀어나온 검은 팔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땅거죽을 무참히 길게 찢어놓은 암흑의 기류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며 두 사람에게 밀려들었다.
헌 터 클럽 772화
215 건곤일척
천장단애처럼 시야를 가득 메운 어둠의 장벽. 그러나 노구덕의 눈은 그 너머의 발레기우스에게 닿아 있었다.
‘가깝다.’
놈이 제 발로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곧장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기회였다.
노구덕은 주저하지 않고 암흑의 파도에 몸을 내던졌다. 굉장히 무모한 행동이었지만,그에겐 다른 선택지 가 없었다. 다음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언제나처럼 저돌적으로,육체가 지닌 힘을 믿고 나아간다. 그에게 가장 익숙한 전법이자,지금까지 수많은 승리를 쟁취해 온 제일공식이다.
우렁찬 함성을 발하며 중전차처럼 돌진하는 노구덕의 기세는 과연 남달랐다. 어지간한 적들이었다면 그 기개에 눌려 지레 겁을 먹거나 주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레기우스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다. 세상의 어둠을 다루는 그가 보기에,노구덕의 우레 같은 호령은 그저 하룻강아지가 짖어대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크아아아아아아!”
“무식한 놈! 머리털 하나까지 모조리 빨아들여 주겠다!”
뭉그러진 어둠 속에서 끔찍할 정도로 무서운 인력(引刀)이 뻗어 나와 노구덕의 몸뚱이를 끌어당겼다. 아 가리를 새카맣게 벌린 어둠의 구렁텅이가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끝없는 심연과 마주한 순간,온몸을 투기로 감싼 노구덕의 고리눈에 서 불같은 광망이 뿜어졌다.
저 추악한 어둠에 팔다리가 먹혀 사라져도 좋다. 머리가 반파되고,심장이 갈려나가도 괜찮았다. 한 줌의 육신이라도 남아 발레기우스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그때였다. 갑자기 그의 앞에 한줄기 바람이 스치는 듯하더니,너덜너덜한 행색에 반 토막 난 검을 꼬나 쥔 남자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왠지 화가 난 듯한,그로서는 드물게 격앙된 목소리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 앞을 가로막은 김정인의 모습은 노구덕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사라졌다.
뒤늦게 블랙홀의 중앙에서 모습을 드러낸 김정인을 발견한 노구덕은 급히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 네 힘은 안 통한다니까!”
김정인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뇌신(雷神)의 창처럼 새파랗게 빛나는 반검을 벼락 같이 내리그었다.
번쩍!
“……!”
눈을 휘둥그레 뜬 노구덕의 입술이 열없이 벙긋거렸다. 김정인의 일검이 선사한 충격은 그를 그대로 꽁꽁 언 얼음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발레기우스의 어둠이 일직선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밤의 악마가 밝아 오는 여명의 빛에 쫓겨 달아나듯 사그라든 어둠은 거검(巨劍)으로 화한 김정인의 검기에 감히 범접치 못하고 꾸물꾸물 물러나기 바빴다.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진 어둠의 바다 끝에서,경악으로 일그러진 발레기우스의 얼굴을 본 노구덕은 가까스로 정신을 찾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한순간이지만 김정인은 명백히 발레기우스를 압도했다. 시스템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발레기우스와의 정면 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한 것이 다.
정말이지 신의 실수로 태어난 돌연변이 같은 인간이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만 해도 지쳐 쓰러질 것같은 낯짝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실제로도 그는 무척 지쳐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무위를 보이다니.
실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 양파 같은 놈,아직도 이런 여력이……!’
이럴 때가 아니다. 감탄을 뒤로 한 노구덕은 힘껏 땅을 박찼다. 그러자 그와 발레기우스 사이의 거리가 마치 축지법을 쓴 것처럼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발레기우스는 코앞까지 짓쳐든 노구덕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그의 요안은 그때까지도 숨을 헐떡이는 김정인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검신! 네놈이!”
흉하게 구겨진 입에서 스산한 부름 이 터져 나왔다. 비록 짧은 시간이긴 하나,하찮게 여겼던 인간에게 밀리고 말았다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노구덕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소리 죽여 발레기우스의 턱밑까지 날아든 노구덕은 와류를 휘감은 주먹을 그 단단한 복부에 작렬시켰다.
“먹고 죽어라! 이 개자식아!”
“어리석은 놈!”
이번엔 노구덕의 얼굴이 극심하게 틀어졌다. 있는 힘껏 다해 내뻗은 주먹이 어느새 발록의 단단한 손아귀에 붙잡혀 버렸기 때문이다. 까득 까득 잇소리를 내며 팔에 힘을 줬으나,악마의 손에 붙들린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완력에 서 밀려 버린 거다.
발레기우스는 벌건 핏대를 세우며 용을 쓰는 노구덕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빈정거렸다.
“벌레는 벌레답게 굴어라. 넌 검신이 될 수 없어.”
“등신! 누가 그렇게 되고 싶다더냐?”
“뭐……?”
발레기우스는 당황했다. 노구덕의 주먹을 붙잡고 있던 손에 전해지던 무게감이 일순 사라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안면이 빠개질듯 한 고통이 밀려왔다.
“크아아악!”
발록의 커다란 머리가 홱 뒤로 젖혀졌다. 안면을 감싸 쥔 채 비척비척 뒤로 물러난 발레기우스는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홱 내던졌다. 그것은 조금 전까지의 노구덕의 몸뚱이에 붙어 있던 팔이었다.
팔 하나를 포기하고 안면 박치기를 날린 노구덕은 놈의 상체에 달라붙은 자세 그대로 발레기우스의 목을 팔로 휘감았다. 두꺼운 목을 수도꼭지처럼 비틀어버릴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건 허사였다. 아름드리 나무처럼 두꺼운 목이 꼼짝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어느새 몰려든 어둠이 그의 주위를 덮쳐온 탓이었다. 결국 노구덕은 기껏 부여잡은 기회를 포기하고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둠을 일으켜 노구덕을 몰아낸 발레기우스는 얼굴을 감싼 그 모습 그대로 천천히, 으르렁거리며 젖혀진 목을 다시 앞으로 당겼다.
“노……구덕……!”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샛노랗게 빛나는 눈알이 증오를 담아 번뜩였다.
안면에 산이 끼얹어진 것처럼 얼얼한 게,살갗이 자글자글 타오르는 듯하다. 공성추에 비길 만한 노구덕의 박치기를 정면으로 맞받았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피륙의 상처는 문제도 아니다. 뼈 가 부러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신이나 되는 자신이 이토록 허접한 공격에 당해 비명을 질렀다는 사 실이,그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노구덕이라는게 발레기우스의 신경줄을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열 받는다. 화가 난다. 죽이고 싶다!
무생물이 아닌 한,노구덕과 상대한 모든 이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 지고한 위치에 이른 발레기우스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장난은 끝이다.”
발레기우스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지금까지는 김정인과 노구덕,두 사람의 오리지널과 능력을 흡수하기 위해 손에 사정을 두었다면,이제는 즉사를 제외한 치명상 정도는 기꺼 이 감수할 생각이었다.
쿠르르르르!
세계의 창조주,하늘에 오른 마신의 격노는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겁에 질린 하늘이 벌벌 떨며 움츠리고,갈기갈기 찢겨나간 구름 사이에 서 거센 폭풍우가 몰아쳤다. 쩍쩍 갈라진 지면에선 핏물처럼 시뻘건 마그마 흐물흐물 홀러나오기 시작했다.
세차게 피부를 때려대는 빗물이 유 난히 따가웠다. 곧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리란걸 직감한 노구덕은 먼저 선수를 쳤다. 느릿하게 펼쳐진 발레기우스의 날개 면적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총알처럼 몸을 날린 것이다.
불식간의 기습. 혜성처럼 미끄러진 노구덕의 공격은 찰나의 빛보다도 더 빨랐다.
그러나 발레기우스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노구덕의 공격을 피해 냈다. 정확히는,공격당한 명치 부근을 어둠으로 바꾸어 노구덕의 주먹을 삼켜 버렸다.
“숨은 붙여두마. 네놈들의 힘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 후엔 영혼을 뽑아버리고, 억겁의 윤회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웃기는군. 그런 말은 정말로 신이 된 다음에나 지껄여라.”
“크크크. 그래,그렇게 나와야지!”
걸쭉하게 광소를 터뜨린 발레기우스는 이어 뚝 웃음을 그치며 정색을 하더니,잔혹하게 비틀린 입술을 오므리며 중얼거렸다.
“터져라.”
의미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에 잠 깐 의아해하던 노구덕은 곧장 그 말의 효과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발레기우스의 말이 끝나자마자,아다만티움보다 강건한 그의 어깨가 대포라도 맞은 것처럼 펑! 하고 터져 나간 것이다.
“터져라.”
“으아아악!”
두 번째. 이번엔 다리였다. 왼쪽 다리를 무릎 아래까지 잃어버린 노구덕은 그제야 비로소 발레기우스의 수법을 어렴풋이 눈치첼 수 있었다.
‘기압…… 기압인가!’
“불쌍하군. 외팔이에 절름발이 신 세라니.”
“조심……!”
코앞에서 나타난 검은 악마를 본노구덕은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어떤 기척도 없이 귀신처럼 나타난 발레기우스는 김정인의 검기를 튕겨냄과 동시에 장난치듯 가벼운 손동작으로 노구덕의 가슴팍을 밀어 냈다.
물론,당사자에겐 전혀 장난으로 느껴지지 않는 손짓이었다.
“꺼어헉-!”
발레기우스의 손에 밀린 가슴께에 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눈이 까뒤집힌 노구덕은 숨넘어가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때맞춰 나타난 김정인이 있는 힘껏그의 뒤를 받쳐주지 않았다면,저 아득한 하늘 너머의 별이 되었을 만 큼 무시무시한 충격량이었다. 덕분 에 날아가는 그를 잡아챈 김정인의 팔에서도 두둑 뭔가 어긋나는 소리 가 났다.
“으윽!”
크게 휘청이는 김정인의 몸을 부여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노구덕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강한 충격에 흐트러진 내부가 금세 원상 복구되 면서,아찔아찔 흔들리던 시야가 제 자리를 찾았다.
“고맙다!”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당장은 무리다.”
터져 나간 팔과 다리가 빠르게 재 생되고 있긴 하나 본래의 민첩함을 보이기엔 조금 시간이 부족했다.
“육박전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만.”
“아니,할 수 있어. 그것밖에는 방 법이 없다.”
내심 그가 포기하길 바라는 듯 비관적인 말을 건네는 김정인이었으나,오히려 그에 화답하는 노구덕의 말투는 이전보다 더욱 확신에 차 있었다.
계획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그나마 길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그를 바라 보는 김정인의 미간은 도리어 짜증스럽게 좁혀져 있었다.
“대체……
데드라인이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울컥 역정이 치밀었다.
솔직히 노구덕이 뭘 노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언제까지 영문 모를 작전에 장단을 맞춰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다른 수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이건 아닌 것 같았다.
김정인이 보기에 노구덕의 작전은 쓸데없는 아집이었다. 애초에 노구덕의 작전이 확실하다는 보장도 없었고,적어도 지금까지는 별 실효도 없는 듯하다.
차라리 처음 시도했던대로 발레기우스에게 참격을 먹이는게 낫지 않을까? 이번에 전력을 다한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역량이 너무 부족해. 나라면……
“아무래도 작전을 바꿔야……
턱밑까지 차오른 불만이 막 목구멍을 향해 튀어나오려는 찰나였다.
“……음.”
“당했군……”
김정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지고, 노구덕의 얼굴에 씁쓸한 고소가 감돌았다.
기분 나쁜 적막이 내려앉은 사위는 온통 암흑천지다. 새까만 어둠으로 둘러싸인 주변은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육감과 기감이 극한에 다다른 두 사람이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 이에 꼼짝없이 포위망에 걸려든 것 이다. 이 공간 전부가 발레기우스의 수족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몸뚱이에 머리만 붙여두면 되겠 지. 그 정도로는 숨이 끊어지지 않을테니. 크크크!”
넘실거리며 밀려드는 어둠 속에서, 발레기우스의 진득한 조소가 들려왔다.
물결치는 어둠은 굉장히 빠르게 접 근해 오고 있었다. 새하얀 검기를 일으킨 김정인은 잔뜩 굳은 투로 말 했다.
“……힘으로 빠져나가야겠군요. 어 쩔 수 없이 말입니다.”
노구덕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했다 여긴 것일까? 그의 말투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찌 들으면 책망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어딘가를 가만히 보고 있던 노구덕은 불쑥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오고 말았군.”
“무슨……?”
“나갈 방도가 생겼어.”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계속 되는 영문 모를 소리에,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화가 난 김정인이 따져 물으려고 할 때였다.
자욱하게 끼어 앞뒤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한 자루 찬란 한 황금의 검이 그 사이를 가르고 솟구쳐 올랐다.
갈라진 공간의 틈새에서 나타난 것은 금빛 물결을 너울너울 휘날리는 여인,아가레스트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녀는 가타부타 말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의 팔을 잡아 끌었다. 가날프지만 억센 팔에 이끌린 두 사내는 어어 하는 사이에 아가레스트가 열고 나온 금광 속으로 꿀꺽 삼켜지고 말았다.
헌 터 클럽 773화
“……”
광량의 한계를 시험하듯 쏟아지던 광채가 사그라들자,노구덕은 천천히 눈을 가린 손을 치워냈다. 마침, 아가레스트의 반개한 동공도 그를 향하고 있던 차였다.
두 남녀의 시선이 묘한 느낌으로 얽히며 기묘한 고요가 감돌았다. 속이 투명한 호박을 닮은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노구덕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오만가지 심정이 가슴에서 교차했지만,여기까지 와서 더 이상 무슨말을 하랴.
하나 다행이라면,지금의 아가레스트는 그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지극히 이성적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가 보지 못한 사이에 무슨 심경 의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혹은 퀸젤의 간곡한 설득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다.
묻고 싶은게 여러 가지 있었지만 지금은 시시콜콜한 궁금증을 풀 처지가 아니었다.
“덕분에 살았다.”
“만나자마자 화부터 낼 줄 알았는데,도옴이 됐다니 다행이군요.”
“……조금 화가 나긴 하는군.”
쓴웃음을 지은 노구덕은 농담조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가볍게 머리를 주억이는 아가레스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복잡미묘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자문했다. 과연 자신이 그녀에게 화를 낼 자격이 있는 것일까?
누차 말해왔지만 이번 전쟁은 최종 결전이자, 절대 패배해서는 안되는 싸움이다.
그러나 노구덕은 위기가 거듭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한 와중에도 끝까지 자력으로만 싸우려고 했다. 충분 히 조커로 활용될 만한 두 개의 카 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안개여왕 아가레스트와 마도왕의 제자 소냐. 한계를 뛰어넘은 그녀들 이라면 대 발레기우스 전에서도 어느정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방금 전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노구덕은 소냐에게 다른 임무를 맡겼고,아가레스트의 역할 또한 내성 진입 이전까지로 한정했다.
간단히 말해서,그녀들이 죽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까지 와서 위험하지 않은 전투가 어디있으랴마는,발레기우스 와의 결전은 그중에서도 위험도의 등급이 달랐다. 자칫 잘못하면 손짓 하나만으로 먼지처럼 지워질 수 있는 것이다.
‘강하게 억제하려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솔직히…… 이렇게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어.’
그녀들을 위한다면서,실제로는 자력 만으로 힘에 부치자 몰래 열어둔 일말의 가능성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위선적이고,이율배반적인 행위다.
자기혐오에 빠진 노구덕은 애꿎은 코허리를 꾸욱 꼬집었다. 마음 한편에서 그녀의 등장으로 안도하는 자신이 경멸스럽기까지 했다.
그때,아가레스트의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멋대로 착각하지 말아요. 당신의 속셈은 진즉에 알고 있었으니까.”
“……”
“여기 온 건 당신 장단에 맞춰준 게 아니라,온전한 내 의지예요. 마 침내 이오의 원수를,내가 겪었던 굴욕을 갚아줄 때가 왔으니까요. 그 기회를 앞두고 물러난다는 건,지난내 삶을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당신이 무슨 제약을 걸든 간에,결국 난 여기 있었을 거예요.”
도도하게 옆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 녀의 얼굴에서 차디찬 냉기가 흐른다. 대적을 앞두고 허튼 생각하지 말라는 따끔한 충고였다.
“……그랬겠지. 너는 그런 여자니 까.”
노구덕은 깨끗이 상념을 떨쳐냈다. 이런 감상은 싸움이 끝난 뒤에 하더 라도 늦지 않다. 지금은 눈앞의 발레기우스에게 온 힘을 집중해도 모자란 때다.
두 남녀 사이에 흐르던 기묘한 기 류가 어느 정도 수그러들자,그때까 지 주변을 둘러보던 김정인이 입을 열었다.
“대단하군요. 발할라의 안식처…… 기록으로만 보았는데,그걸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발할라의 검으로 신을 베어 넘긴 이에게 듣는 과찬,나쁘진 않네요.”
“이 아공간은 얼마나 유지할 수 있 습니까?”
“이미 무너지고 있어요.”
쿠르릉! 아가레스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언가가 무너져 울리는 소 리가 났다. 잠시 후,금빛 광채로 가득한 공간 저편이 시커먼 먹물에 오염되듯 흉측하게 일그러지기 시작 했다.
“하찮은 잡술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다 잡아 놓은 먹잇감을 놓친 여파 일까.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발레기우스의 음성은 짙은 피비린내가 뚝 뚝 묻어났다.
점차 커져가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새파랗게 원독 어린 시선을 보낸 아 가레스트는 잘근잘근 입술을 짓씹었다.
“……따로 작전이 있나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방금처럼 공간왜곡으로 서포트하는 것 정도인데……
“그 정도도 감지덕지지.”
노구덕이 어느새 원형을 되찾은 팔 다리를 휘휘 내젓자,옆에 있는 김정인의 눈매가 비좁게 찌푸려졌다.
“그대로 밀고 나갈 생각이십니까? 제가 보기엔……
“내 역량이 부족해 보이겠지. 터무 니없어 보일 테고.”
정곡을 찔린 김정인은 황망히 입을 다물었다.
“넌 분명 천재지만,나도 바보는 아니다. 천재의 눈으로 보기엔 허점 투성이더라도,이번 한 번은 믿어다 오. 아이리스 시절,우리가 네 뒤를 따랐듯이 말이다.”
김정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비로소 목구멍을 뜨겁게 태우는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이동하겠어요.”
밀려오는 어둠의 반대편에서 균열이 일었다. 세 사람은 잡아먹을 것처럼 덮쳐오는 어둠을 피해 무사히 아공간 의 출구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아공간이 강제로 무너진 여파 때문 인지,아가레스트의 낯빛은 처음에 비해 상당히 해쓱해진 채였다.
“후우…… 패턴을 읽혔으니,이제 방금처럼 오래 버티는 건 무리예요. 고작해야 몇 초가 전부겠죠.”
“그 몇 초가 승부를 가를 수도 있 지.”
“아무튼…… 웃!”
위협을 감지한 아가레스트와 김정인이 동시에 움직였다. 일시에 일어 난 찬란한 휘광이 음험하게 짓쳐든 무형의 기압에 짓이겨졌을 때,혜성 처럼 꼬리를 문 검광이 압력의 실체를 베어냈다.
기막히게 합을 맞춘 두 사람이 틈을 만든 사이,노구덕은 다시 한 번 발레기우스에게 돌진을 감행했다.
“이 끈질긴 놈!”
“그게 내 방식이다!”
기세 좋게 날아든 노구덕은 거센 고 함이 무색하도록 맥없이 튕겨져 나갔 다. 애당초 발레기우스의 전신을 휘도 는 어둠의 기류는 노구덕이 주창했던 육박전과 너무 상극이었던 것이다.
육박전이란 서로 격렬히 치고받아 야 성립되는 것인데,발레기우스의 몸은 실체가 없는 늪과 같았다. 때 리는 족족 블랙홀에 주먹이 잠기니 효력이 없을 수밖에. 게다가 인력과 척력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그의 능력은 아예 노구덕의 접근을 허락하 지 않았다.
거대한 제방이 미세한 구멍 하나로 인해 허물어지는 것처럼,아무리 철 두철미한 계획이라 할지라도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수완가이자 책략가인 발레기우스는 그 점을 항시 염두에 두었다.
노구덕의 주먹질에 고통을 느꼈을 때부터,그가 육박전을 입에 담았을 때부터……. 발레기우스는 노구덕과 의 직접 충돌을 내내 회피했다.
신이나 되어서 비겁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발레기우스는 전혀 개 의치 않았다. 유리한 입장이라고 굳 이 빈틈을 보일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거야말로 패배자들의 넋 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벌레 놈,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끝이다.’
연신 헛주먹질을 반복하는 노구덕 의 얼굴에 낭패감이 차오른다. 발레기우스는 입매 가득 비웃음을 띤 채 승리를 자신했다.
예기치 못한 아가레스트의 방해 때문에 확실히 끝장내진 못했지만,굳이 여기서 저 셋을 쓰러뜨려야 할 이유는 없다. 모험을 피하고,시간만 끌면 그의 승리는 확정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저들 셋은 완전한 신으로 각성한 이후에 천천히 요리해도 늦지 않는 다. 원래 맛있는 반찬은 나중에 즐 길수록 각별하지 않던가?
힘이 무한한 샘처럼 넘쳐 오르고 있 었다. 예정대로 멍청한 동맹군의 전력 이 내성 앞마당까지 모여든 게 느껴 졌다. 이 난전 속에서도 끝까지 목숨을 부지한,정예 중의 정예들이다.
그야말로 진국. 거르고 거른 스퀘 어 고대 문명의 결정체. 이제 저들을 흡수하기만 하면…….
“……아니?”
시종일관 여유롭던 발레기우스의 얼굴에 미세한 실금이 생겨났다. 내 성에서 전해진 감각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없다.
사라진다.
말 잘 듣는 병아리들처럼 졸졸 따라오던 헌터들이 뭉텅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도 거의 수백 명 단위로.
알맞게 익은 음식을 꿀꺽 집어삼킬 일만 남았는데…… 이 무슨 기현상이란 말인가.
대탈출. 생각지도 못한 엑소더스다.
목구멍 끝까지 다다랐던 진미가 갑자기 사라지는 허망함이란. 얼굴에 거미줄 같은 실금을 더해가던 발레기우스는 끝내 격정을 참지 못하고 화산같은 분노를 터뜨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감히 내 영 역에서 대규모 워프게이트라니! 티렐이 살아 돌아와도 불가능하다! 대 체 누가……!”
“있지. 그런 마법사가.”
“네놈!”
곧장 터져 나온 발레기우스의 고함은 분노가 아닌 경악에 가까웠다.
시커멓게 변한 노구덕의 얼굴. 갑충의 키틴질처럼 번들거리는 그 얼굴이 역장을 뚫고 바로 지척에서 웃 고 있었다.
김정인이 모든 여력을 내보이지 않았듯,노구덕 또한 카름화라는 비장의 한수를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찌이이익–!
거무튀튀한 근육으로 꿈틀거리는 팔 이 그가 자랑하는 블랙홀을 종잇장처럼 찢어내자,발레기우스의 노릿한 눈 이 격한 당혹감으로 일렁였다.
노구덕이 카름으로 변이할 수 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나 그렇다 해도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의 예상 범위를 훌쩍 뛰 어넘은 위력이었다.
“노구덕! 네놈 설마…… 크허어어 억– !”
쇠망치 같은 주먹이 코뼈를 으깨고 틀어박히자,그 고통을 이기지 못한 발록의 거대한 날개가 미친듯이 퍼덕였다. 급격히 뒤로 젖혀진 목 위로,꾸깃꾸깃 망가진 얼굴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듯,어처구니없는 빛으로 얼룩져 있었다.
다음 순간,덩치에 맞지 않게 비틀거리던 발레기우스의 동체가 자취를 감추었다. 검은 악마가 다시 나타난 곳은 그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뚝뚝 코피가 떨어지는 안면을 부여 잡은 발레기우스는 피묻은 주먹을 늘어뜨린 노구덕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이 힘. 신에 다다른 그에게 쌍코피를 터뜨린 이 힘은 완전히 그와 동류(同流) 였다.
카름의 힘,오리지널의 힘,그리고…… 그의 반신(半身).
“두 놈…… 두 놈이었구나! 욘! 네 가 거기 숨어 있었어!”
삿대질까지 하며 발광하는 발레기우스와 마주한 노구덕은 마찬가지로 인상을 쓴 채 마뜩찮게 내뱉었다.
“나도 불러내긴 싫었다만,네놈 덕분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거 지.”
‘배신자. 넌 내 말을 무시하고 흡정마공을 익혔다. 음흉하기 짝이 없군!’
안팎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왱 왱거리는 벌 떼처럼 시끄럽다. 특히 카름화한 육체에 반응하여 되살아난 욘은 의식의 한 자리를 차지하자마 자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해댔다.
“종알종알 시끄러운 건 두 놈이 똑같군! 네놈도 멋대로 내 몸에 보험을 든 건 똑같잖아!”
‘내가 힘을 빌려줄 거라 생각하나?’
“여기서 협상이라도 하잔 거냐? 좋을대로 해라,기생충 2호. 아니,1 호인가? 뭐,상관없겠지. 내가 여기 서 끝장나면 너도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 아예 저놈에게 다 넘겨주고 다 같이 뒈져버리든가.”
욘은 말이 없었다. 이제는 아주 막 나가는 노구덕의 태도가 기가 막힌 것인지,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또 알 필요도 없었고.
어차피 욘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이번만은…… 대의를 위해서 협력하지. 나중은 없다.’
“대의는 개뿔. 자길 위해서겠지.”
거창한 변명에 가당찮다는 둣 코웃음을 친 노구덕.
이윽고,검게 물든 그의 육신에 또 다른 신이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