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80)
헌터클럽 775화
관리자는 실체가 없는 의식체다.
스스로의 육신을 수백만의 무수한 잔재로 쪼개버린 뒤,관리자는 시스템이란 이름하에 부유하는 유령으로 존재해 왔다.
관리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긴 하지만,본연의 관리자는 이미 어디에도 없다. 스스로를 관리자라 자칭하는 욘도,어두운 일면에서 태어난 ‘그’ 도 그저 수많은 의식체들 가운데 하나일 뿐,실제 관리자는 오래전에 소멸해 버렸다.
욘도 그랬고,‘그’도 그랬다. 실체 가 없어진 의식체들은 오랫동안 시 스템의 일부로서 세상을 관조해 왔다.
그들은 쪼개진 파편에 불과했으며, 물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스스로 힘을 행사하는 데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자유의지를 갖게 된 두 존재 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관리자의 본래 인격에 가장 가까운 욘은 관리자의 의지를 그대로 이어 받아 시스템을 유지하는 길을 택했지만,‘그’는 달랐다. 탐욕과 갈망의 결정체인 그는 숙주를 택해 이 세상 에 현신하고자 했다.
그렇게 선택된 것이 발레기우스. 고대 벌레교단의 마지막 교황이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아무도 모르 는 사이에 숙주의 의식에 침투한 ‘그’는 서서히 공을 들여 숙주의 모 든 것을 빼앗았다.
이름을 빼앗았고,세력을 갈취했으 며,종래엔 그 의식까지 꿀끽 집어 삼켜 버렸다.
관리자의 수많은 분신 중 하나이 자,이름 없는 유령 중 하나였던 ‘그’가 위원회 산하 십존,흡혈왕 발레기우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은 어디까지나 인 간. 그건 새로이 거듭난 발레기우스 의 유일한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그는 인간을 버리고자 노력했다. 수백 년의 시간 동안,나약한 인간 의 육체를 조금씩 조금씩 개조하고, 바꾸어나가며 신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었다.
인간을 뛰어넘은 초월적인 육체를 얻는 과정이란 점에서는 노구덕과 비슷했지만,그 방법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는 노구덕처럼 매번 목숨을 걸어가며 도전을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시간도 넘쳐 났고,얼마든지 실험을 반복할 자금과 권력도 있었다.
그는 신중했다. 한 번의 실험을 행하는 데에도 수십 번의 인체실험을 감행하여 만족할 만한 데이터를 얻 어낸 뒤에야 자신이 직접 실험대에 올랐다.
그야 당연하잖은가. 천신만고 끝에 잠식한 최고의 숙주를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잃어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또다시 실체 없는 유령이 되어 떠돌 아다닐 순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발레기우스는 인간의 육신을 벗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하나 모든 과정이 끝난 건 아니었다. 육신은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지만,아직 넘어야 할 난관이 하나 더 남아 있었으니까.
그건 인간 발레기우스의 영혼이었다.
교황 발레기우스의 영혼은 여간내 기가 아니었다. 그는 역대 교단의 교황들 중 최강이란 평을 듣는 주술과 사술의 달인이었고,그런 평가가 오히려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영력을 지니고 있었다.
광활한 바다 같은 그의 영력은 신의 조각인 그조차 무척 애를 먹을 정도였다.
영력이란 곧 영혼의 힘. 그 힘의 근원은 교단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교황각인과 심령차력술이 었다.
가짜 발레기우스는 결단을 내렸다. 숙주의 근간을 이루는 그 두 개의 힘을 모두 끊어버리기로.
그는 벌레교단을 버렸으며,그 규 모를 대대적으로 축소시켰다. 교단 의 질은 낮아졌고,나중에는 신도라 부르기도 어정쩡한 괴물들만 남게 되었다.
발레기우스는 교황각인도 버렸다. 교황각인의 힘은 대륙의 모든 신기 중에서도 수위에 꼽힐 만한 것이었 지만,그 위험성을 고려하면 미련 없이 버리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그렇다고 그 탐욕스런 천성이 어딜 간 것은 아니어서,그는 교황각인을 이정한에게 선심 쓰듯 주고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완벽한 신이 된 이후에 느긋하게 교황각인을 흡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그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이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 돌아올 줄은.
“그게 힌트가 되었지.”
“…….”
“일만이 넘는 동맹군을 전부 시온 으로 끌어들여 흡수하려고 했던 네놈이다. 그런 돼지 같은 놈이,다른 허접한 신기라면 몰라도 교황각인을 버린다고?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지.”
“이…… 놈……!”
“네가 이정한을 특별히 총애했던 게 아냐. 교황각인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거지.”
자박자박 걸어오는 노구덕의 발소 리가 가까워질수록,비참하게 널브러진 발레기우스의 육신이 보이는 떨림도 점차 커져갔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노구덕이 발레기우스의 영혼을 끄집어 내리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 단 말인가.
발레기우스는 교황이었다.
교황! 정점! 벌레교단의 정상이란 말이다!
그런 인간의 영혼이 다른 누군가에게 지배되다니! 그것도 저딴 오크에게!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흐흐,으흐흐흐흐..
넋을 놓은 채,소리 없는 아우성을 발하던 발레기우스는 뜬금없이 맥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흐느끼듯 새어나오는 웃음소리엔 지독한 자조가 스며들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발레기우스를 원망할 일이 아니다. 일찍이 노구덕은 그의 부하였던 벌레교단의 주교와 이정한의 혼과 접촉하여 그 기억과 능력을 흡수한 전력이 있었다.
탓할 상대를 찾는다면,그걸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한심하게 교황각인을 별생각 없이 버려 버린 그 자신 이다.
더욱이 그의 가장 큰 실수는 교황 각인을 버린 게 아니었다.
그간 검신에 그늘에 가려져 있었던 저자,모든 것을 망쳐 버린 저 늙은 오크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간과했다 는 거다.
저 아둔한 겉모습 때문에 종종 절로 얕보게 되지만,저 오크는 오히려 검신을 능가할 정도로 강했다. 전성기의 발레기우스조차 한참 능가 하는 영력은 전설속의 본드래곤을 마음껏 부릴 정도고, 육체적으로도 육왕각인이라는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했다.
‘어느 쪽으로도 터무니없이 밀려 버리는군. 명백히 발레기우스를 능가한다. 지배되는 게 당연한 건 가……. 크크크.’
스스로의 욕망에 자기 몸을 파 먹 혀 버린 꼴이다. 한참을 킬킬거리며 몸을 들썩이던 발레기우스는,노구덕의 기척이 지척에 도래하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패배가 바로 목전까지 도래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밑 빠진 독처럼 힘이 빠져나가며 그의 공간이 붕괴 하고 있었다. 이미 저쪽은 잿빛으로 점철된 차원의 경계가 무너져,본래 공간인 첨탑 내부가 일부 드러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이렇게 주저앉아 버리면,지난 수백 년의 세월은 뭐가 된단 말인가.
태산 같은 거구가 후드득 먼지를 털어내며 세워진다. 지옥불처럼 이글거리는 흉광을 드러낸 발레기우스 는 짐승처럼 포효하며 푸드덕 날개를 펼쳤다.
“인정할 수 없다! 네놈만은 절대로 인정 못 해!”
폭발적으로 일어난 기세에 잠시 주춤한 노구덕은 이내 입가를 피식거렸다.
“동감이다. 네 인정 따위,누가 바란다더냐?”
“발록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대로 짓뭉개 주겠다!”
위압적으로 날개를 펼친 발록이 한 걸음을 내딛자,노구덕의 이마에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아까부터 슬슬 힘이 달리고 있던 차다. 아니나 다를까,내면으로부터 욘의 충고 가 들려왔다.
‘노구덕. 더 이상은 무리다.’
‘조금만 더 버텨.’
‘무리를 하는군. 잘못하면 그릇이 깨질 수도 있다.’
‘그럼 네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겠지.’
‘어쭙잖은 도발이라니……:
‘아무튼 지금은 어떻게든 버텨라. 거의 다 왔으니까!’
눈 뜨기 힘들 정도로 거센 역풍이 불었다. 더불어 길쭉하게 늘어난 그림자가 시야를 가득 메우며 머리를 쪼갤 듯이 덮쳐왔다.
“죽여 버리겠다!”
“뒈질 놈은 너겠지.”
눈매를 가늘게 좁힌 노구덕의 오른손에 가느다란 핏빛이 솟구쳤다. 그 에게 남은 마지막 신기이자 벌레교 단 지고의 마검,갈드루핸의 무자비를 소환한 노구덕은 단숨에 차오르는 영력을 검끝에서 내뿜었다.
콰앙! 핏빛의 마검과 칠흑의 대검 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발생시켰다.
“끄으으으!”
“커헉!”
젓빛 공간을 온통 들쑤셔 놓은 거대한 충격파는 그 장본인들을 각기 반대 방향으로 멀리 튕겨냈다. 훌쩍 뒤로 날아가 처박힌 노구덕은 울컥 울컥 치솟는 핏물을 눌러 삼키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찬가지로 튕겨나간 발레기우스가 어느새 다시 쿵쿵 대지를 짓밟으며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채만 한 덩치의 검은 악마가 정면에서 성난 황소처럼 달려오는 광경은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그라도 살이 떨릴 만큼 위협적이었다. 하물며 반쯤 돌아간 누르스름한 눈깔에서 내뿜어지는 살기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 에야.
‘제기랄 놈. 어떻게든 나만은 죽이고 싶다는 거냐.’
물론 순순히 동귀어진의 희생양이 될 생각은 없었다. 자세를 바로 한 노구덕은 마검을 곧추세우며 곧 들이닥칠 이차 충격에 대비했다.
“쿠오오오오오오!”
“우랴아아아압 一!”
검은 악마와 녹색의 오크,필사의 기합을 발한 두 존재가 또다시 정면으로 격돌하려는 찰나,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리꽂힌 푸른 뇌전이 악마 의 하체를 낮게 스치고 지나갔다.
비끗.
돌기둥처럼 육중한 악마의 정강이가 사선으로 비스듬히 어긋나는 듯 하더니, 깊게 아로새겨진 자상에서 새빨간 피보라가 일어났다. 갑작스레 나타난 푸른색의 참격은 악마의 다리와 함께 그 주변의 젓빛 공간까지도 한꺼번에 흩어버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뇌전과도 같은 참격을 내리치며 나타난 김정인의 검은,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 꾸라지는 발레기우스의 목을 그대로 베어냈다.
“꺼르르르르……!”
몸이 지면에 처박히기도 전에 목이 베여버린 발레기우스는 입가에 피거품을 물고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모든 분노와 신경을 눈앞의 노구덕에게만 쏟고 있던 발레기우스에겐 전 혀 예상 밖의 기습이었던 것이다.
반면,얼결에 상대를 잃어버린 노구덕은 닭 쫓던 개처럼 망연한 얼굴 이 되어 김정인을 바라보았다.
발레기우스가 창조한 아공간이 햇살에 쫓겨 사라지는 안개처럼 아스라이 사라진다. 그 무대의 중앙에 선 김정인은 노구덕을 돌아보지도, 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의 손 에 들린 반검은 굶주린 이리처럼 서늘한 빛을 토하고 있었다.
벼린 칼날 같은 그 기세는 여전하지만…… 그 뒷모습이 어찐지 낯설게 느껴지는 건 그만의 착각일까. 이질감을 떨치지 못한 노구덕은 자 기도 모르게 말을 건넸다.
“너……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 끝내지요.”
“……음.”
노구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김정인의 말처럼,지금은 시시콜콜 한 잡담을 할 때가 아니다. 발레기우스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기 전에 확실히 끝장을 내야만 했다.
발레기우스는 아직 죽지 않았다. 최악의 카름 발록의 육체는 공간을 가르는 참격을 맞고도 해당 부위가 절단되기는커녕,언제 베였냐는 듯 상처가 빠르게 아무는 중이다.
“이…… 벌레 놈들……!”
아공간의 잔재처럼 떠돌던 어둠의 기류가 발레기우스의 주위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마력의 잔재를 흡수해 재충전을 할 속셈인 듯했다.
그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노구덕과 김정인은 발레기우스가 재 무장을 갖추기 전에 빛살처럼 달려 들었다.
“꺼져라!”
스각! 발작적으로 튀어나온 고함은 이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김정인이 정면에서부터 압박해 들어오는 암흑의 물결을 베어내자, 그 사이로 뛰어든 노구덕의 주먹이 발레기우스의 왼편 가슴께를 강타했다.
파드드득!
쇠뭉치 같은 주먹이 가슴뼈를 으깨 고 그 안쪽의 심장을 터뜨린 순간, 첨탑 내부에 두텁게 쌓인 먼지가 들썩거리며 뒤집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김정인의 반 검이 숱한 검기의 그물망을 펼쳐내며 발레기우스의 전신을 질퍽한 핏물로 물들였다.
“크아아아아악–!”
검은 가죽이 온통 새빨간 색으로 변한 발레기우스는 크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마구잡이로 허우적거리는 그의 손짓은 이제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애처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