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81)
헌터클럽 776화
지칠 대로 지쳐 버려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하는 노구덕과는 달리, 김정인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황급히 물러나는 발레기우스를 바짝 뒤쫓으며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휘두르는 그는 피를 쫓는 승냥이를 보는 듯했다.
발레기우스가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는 집요함과 계속해서 약점을 파고드는 그 독랄함은 보고 있던 노구덕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깡! 깡! 깡!
두 개의 검이 부딪치며 생겨난 불똥이 사방에서 번쩍이는데,그 충돌음은 단타를 치듯 딱딱 끊어져서 들 려왔다. 무수한 충돌음의 중첩을 청각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김정인과 검을 맞대면 맞댈수록, 발레기우스의 손발은 점점 어지러워져만 갔다. 먹먹한 검음이 울릴 때마다 그의 급소에 어김없이 깊숙한 검상이 생겨났다.
애초에 검신이라 불리는 그와 검술로 맞부딪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결국,발록의 대검은 아우터 블레이드를 두른 김정인의 반검이 가하는 충격을 끝까지 버텨내지 못하며 산산이 깨져 버렸다.
그 바람에 틈을 보인 발레기우스는 부릅뜬 두 눈에서 피를 흩뿌리며 허물어지고 말았다.
“끄아아아아!”
얼굴을 감싸쥔 손가락 사이로 질척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눈을 잃어버린 발레기우스는 고통에 찬 신음를 내지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비루하게 움츠린 채 꿇어앉은 그는 날개를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지근거리에서 날아오는 김정인의 검기를 감지한 것이다.
이번엔 날개였다. 그림자처럼 후방 에서 나타난 김정인은 단칼에 발레기우스의 날갯죽지를 끊어버렸다.
그렇잖아도 너덜너덜한 꼴이 되어 덜렁거리던 날개는 무자비한 칼날에 썩둑 잘려 나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고통에 찬 악마의 절규가 첨탑 내부를 뒤흔들었다. 날개를 잃어버린 마신은 뒤편의 김정인에게서 도망치려는 듯 허겁지겁 앞으로 내 달렸다.
체면이나 위신도 상관없이,오직 살기 위해 쿵쾅쿵쾅 바닥을 울리며 뛰어가는 그의 모습은 우습다기보다 절정에 달한 비극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너절하게 피를 뿌리며 도망치던 발레기우스는 별안간 우뚝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불행하게도 그 방향에 노구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의 노구덕,뒤쪽의 김정인. 두 사람 사이에 끼어 갈팡질팡하던 발레기우스의 표정은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피딱지와 뒤섞여 그 어느 때 보다 참혹하게 일그러진 채였다.
저벅,저벅.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인기척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날개가 경기를 일으키듯 활짝 펼쳐졌다.
볼품없이 날개를 곤두세운 발레기우스는 다급히 팔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멈춰,멈춰라!”
뒤에서 다가오는 김정인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았지만,그의 몸을 걸레 짝으로 만든 장본인이 이제 와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리 없었다.
서걱!
외짝이 되어 거추장스럽게 보이던 날개가 뚝 떨어지며 등허리에서 피분수가 치솟았다.
웅장한 날개가 모두 잘려버린 발레기우스는 스스로가 쏟아낸 피웅덩이 속에서 몸부림치며 발악을 해댔다.
“으아아악! 이,이놈! 네 자식이 죽어도 좋단 말이냐!”
“…….!”
방금 건 효과가 있었다. 무자비한 집행자처럼 발레기우스의 몸을 썰어 대던 김정인의 검이 처음으로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스산하게 다가서던 김정인의 걸음이 멈추며,차갑게 얼어버린 얼굴이 작게 까딱였다.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뜻. 가까스로 시간을 번 발레기우스는 핏물 뒤섞인 침을 튀겨가며 말을 이었다.
“크크크……. 리베르타에서 일어난 반란은 내가 사주한 것이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보험은 들어두었단 말이지.”
“보험이라.”
“네 딸…… 최근 들어 몸 상태가 이상하지 않던가? 응?”
이죽거림을 들은 김정인의 낯빛이 서리가 낀 듯 시퍼렇게 변했다. 발레기우스의 말을 듣고서야 까맣게 잊고 있었던 딸아이의 상태를 떠올 린 것이다.
김소연. 아들에 비해 유독 잔병치 레가 많았던 딸아이.
주치의는 괜찮다고 했지만,윤희지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자주 고열에 시달리는 딸아이의 곁을 지키며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녀로부 터 귀에 박히도록 딸아이에 대한 걱정을 들었던 김정인은 낮게 침음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윤희지의 걱정을 신경과민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그게 발레기우스의 수작질이었다니.
낯빛이 변한 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노구덕도 마찬가지였다.
‘저놈…… 살아 보려고 별짓을 다 하는군. 이럴 때 그 패를 꺼내들다니.’
두 남자가 각기 다른 고뇌에 빠진 사이,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발레기우스는 더 이상 거칠 게 없다는 듯 김정인을 자극했다.
“네 딸은 신의 조각이 되었다. 그 것도 반쯤은 각성한 상태지. 틀을 벗어난 네놈이라면 이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겠지?”
“……”
“틀을 벗어난 헌터는 그 순간부터 시한부 인생이 된다. 힘의 사용을 자제하더라도 소용없지. 섭리를 벗 어난 힘은 계속해서 육체를 갉아먹 으니까. 바로 검신,네놈처럼 말이다.”
“뭐라고?”
아연한 외침은 노구덕의 것이었다. 경악으로 흐트러진 그의 얼굴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크게 눈을 부릅뜬 채였다.
“시한부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으하하하! 네놈은 모르고 있었나? 이거 의외로군. 네놈도 결국은 욘…… 그놈의 손 위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일 뿐이라는 거겠지.”
몸을 떨 정도로 요란한 웃음에,그의 발아래 고인 핏물에서 철벅거리 는 소리가 났다. 진득하니 비웃음을 띤 발레기우스는 파리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아가레스트를 가리켰 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네 옆에 있는 여자에게 물어봐라.”
“……사실이에요.”
목을 늘어뜨리며 수긍하는 아가레스트의 답을 들은 노구덕은 멍청히 되물었다.
“왜 말을 하지 않았지?”
“최근에 알았으니까요. ……말할 틈이 없었어요.”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본 격적으로 한계를 넘어선 건 시온 내부에 갇혀있을 때의 일. 그 뒤로는 아수라장의 연속이었으니 그런 말을 할 겨를도 없었으리라.
“……그랬군.”
얼이 빠져버린 노구덕은 허탈하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한계를 넘는다. 그 이면에 그런 대가가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달리 말해준 사람도 없 었을 뿐더러,그 자신이 그런 부작 용을 겪지 못했으니 다른 이들도 으레 그럴 것이라 지레짐작한 것이다.
면밀히 따지자면 그는 특별 케이스 다.
발레기우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신을 초월했고,욘의 축복까지 받았으니 무리 없이 신의 힘을 받아들 일 수 있었던 거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달랐다. 그들의 그릇은 신의 힘을 받아들이기에 턱없이 미약했다.
“저놈…… 그래서 갑자기 늙어 보 였던 게로군. 그런 부작용이 있었어. 흐허허허…
몇몇 얼굴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 간다. 김정인과 아가레스트, 소냐……
그들이 한계를 벗어난 순간부터 죽 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니.
진정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욘……. 네놈은 당연히 알고 있었 겠지? 알면서도 내게 말을 하지 않았군. 발레기우스 저놈처럼,이걸 약점으로 삼아 날 이용할 셈이었나? 응? 아가레스트와 소냐를 살려주겠다고 하면서?’
‘……’
‘그래,당연히 대답할 리 없겠지. 잘도 나불거리던 그 주둥이가 이럴 때는 어김없이 묵비권을 행사하는 군. 망할 개새끼 같으니라고.’
노구덕이 험하게 이를 갈았다. 그 리고 욘은…… 잠들어 버린 것처럼 침묵했다.
한편,드디어 입장의 우위에 선 발레기우스는 피로 버무려진 얼굴을 득의양양하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추레하게 굽어졌던 허리가 훌쩍 펴 지고,끊임없이 선혈을 흘려대던 상처도 거의 아물어 사라졌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발레기우스의 내심은 조급하기 짝이 없었다. 원상 복구된 발록의 모습은 허장성세였고,실상 그의 안은 속이 비어비린 깡통 상태였다.
한 줌의 힘밖에 남지 않은 그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도망칠 기회를 엿보았다. 물론,김정인의 마음을 흔들기 위한 엄포도 잊지 않았다.
“검신! 네 딸자식이 살아남으려면 다른 신의 조각처럼 카름으로 변하 거나,아니면 나의 힘으로 흡수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
“명심해라! 내가 죽으면 네 딸도 죽는다는 것을! 크흐흐흐홋!”
김정인이 자신을 벨 수 있을리 없다.
발레기우스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 순간, 무심히 늘어져있던 김정인의 칼끝이 간데없이 자취를 감추 었다.
그리고,또 다시 진한 핏줄기가 솟 구쳤다.
“꺼어어어억–!”
눈이 까뒤집힌 발레기우스의 손이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더듬는다. 거대한 도끼에 찍힌 것처럼 깊게 갈라진 상처가 꾸역꾸역 생명수를 토해 내는 게 느껴졌다.
깊게 파고든 검신의 칼날은 발록의 피륙을 가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경추 한복판을 말끔히 가르고 지나 갔다.
급소에 자리한 상처는 점점 그 면 적을 넓히고 있었다. 갈라진 공간의 절단면이 치명적인 맹독이 되어 그의 육신을 야금야금 갈아먹는 중이 었다.
목을 부여잡은 발레기우스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그 앞에 선 김정인의 얼굴은 다 꺼진 불씨처럼 탁하기만 했다.
“이…… 지독한…… 놈……!”
지독한 놈. 그것이 발레기우스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높게 치솟은 발록의 머리가 공중에 서 두어 바퀴 회전하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오래된 유적의 돌기둥처럼 처량하게 남은 몸뚱이도,크게 열린 공간의 틈새에 절반 정도를 파 먹히자 밑동이 썩은 나무처럼 쓰러 져 버렸다.
데구르르르…….
노구덕은 자신의 발치까지 굴러온발레기우스의 머리를 물끄러미 내려 다보았다. 거슬리는 숨소리를 씩씩 거리며 눈을 껌벅이는 머리는 아직도 그 기능이 멈추지 않은 듯했다.
마치 머리가 끊어졌음에도 끈질기 게 꿈틀거리는 벌레 같은 모습이다.
“그렇게 벌레,벌레 거리더니…… 정말 벌레 같이 죽어버렸군.”
노구덕은 자기 몸통만 한 크기의 머리통에 지그시 손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꼭 펄떡펄떡 맥이 뛰는 것처럼 박동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점차 강해지는 그 박동은 흡사 마 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발레기우스의 발악처럼 느껴졌다.
“이젠 정말…… 끝이다.”
맞닿은 그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악마의 수급이 급격히 생기를 잃고 쪼그라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 력과 체내 수분까지 모조리 빼앗긴 발레기우스의 머리는 이내 자욱한 먼지가 되어 휘날렸다.
-크흐흐흐흐……
“……?”
잘못 들은 것일까?
바람결에 흩어지는 먼지 사이로 희 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미간을 좁힌 노구덕은 날카로운 눈 초리로 주변을 살폈지만,그의 감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착각인가?’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발레기우스의 최후다. 솔직히 아직도 얼떨떨해서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니,한순간 풀려버린 긴장의 끈이 환청을 들려 줬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착각이겠지.
노구덕은 그렇게 치부했다.
사실,그에겐 그 이상 의혹을 이어 나갈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한 계를 넘어선 전투와 연이은 정신적인 충격에 혹사당한 그의 심신은 생 각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지 쳐 있었다.
“끝…… 인가요?”
아가레스트의 목소리가 울컥 치솟 는 격정으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녹초가 되어버린 그녀 역시 아직도 발레기우스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반신반의한 얼굴이었다.
“그래,끝이다.”
노구덕은 허물어지려는 다리에 억 지로 힘을 불어넣어 몸을 바로 세웠 다. 뿌드득! 쇠잔한 척추가 거센 비명을 지르며 기립했다.
“……이 스테이지는 말이야.”
“네?”
“이젠 다음 스테이지가 남아 있 지.”
삭풍을 타고 흘러든 살기가 코끝을 아릿하게 적셔왔다. 크게 숨을 들이 켠 노구덕은 억세게 말아 쥔 주먹을 흔들며 한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차르록!
늘어진 칼끝이 바닥을 긁으면서 튀 어 올라,정면을 향해 곧게 겨누어 진다.
마신을 베어버린 검신.
그 첨예한 칼끝이 노구덕의 미간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