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82)
헌터클럽 777화
216 사선에서
옆에서 헉하고 헛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금안을 경악으로 치뜬 아 가레스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기함했다.
“검신!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창백한 그녀의 표정은 지금 이 사 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곤혹 스럽게 이지러져 있었다.
“놀랄 거 없어. 예정된 일이 일어 난 것뿐이니까.”
좀처럼 경황을 찾지 못하는 그녀와 는 달리,김정인을 주시하는 노구덕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마 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예견 하고 있었던 것처럼.
“대체……!”
그 태연한 반응을 본 아가레스트는 더욱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백고천난(百苦千難) 끝에 발레기우스를 쓰러뜨렸다. 검신과 무신,동부 와 서부를 대표하는 두 절대자의 합 심이 일궈낸 기적 같은 결과였다.
놀라운 뒷심으로 발레기우스를 벼 랑 끝에 몰아넣은 것은 무신 노구덕 이지만,힘이 다한 그를 대신해 마 신의 숨통을 끊어버린 것은 검신 김정인이다.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없었더라 면,스퀘어의 명운은 바로 오늘 끊 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불세출의 영웅으로 등극한 두 사람 이 대업을 이루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다니. 이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이 면 좋단 말인가?
평소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이건 너무도 갑작스럽다. 솔직히,김정인이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 다. 제정신이라면 절대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현재 이 시온에는 대륙의 모든 눈 이 쏠려 있다. 남부를 제외한 각지의 동맹군들과 그 수장들이 이 추태를 알게 되는 날에는…….
아가레스트의 휘영청한 금발이 거 칠게 출렁였다. 뒤늦게 무언가를 깨 달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드높은 파도가 출렁였다.
‘없…… 어……!’
발레기우스가 죽었다. 내성과 시온 전체를 둘러싼 어둠의 기류도 물거 품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이곳,내성의 심처까지 들이닥칠 동맹군은 없다. 모두 소냐의 워프게이트를 타고 바깥으로 탈출한 지 오래였으니까.
다른 눈이 없다.
그 말은 곧,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예컨대 두 영웅 중 누 군가 다른 하나를 죽이고 공로를 독 차지하더라도 알 길이 없다는 얘기 였다.
“말씀대로입니다.”
나직하게 운을 떼는 김정인의 목소 리는 발레기우스의 피를 흠뻑 뒤집 어 쓴 모습과 맞물려,호곡성을 발 하는 귀신처럼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여러 가지로…… 형님껜 묻고 싶은게 있었지요.”
“글쎄,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만.”
“당연히 할 말이 없으실 겁니다.”
“……”
“엘리엇의 죄과를 빌미로 진주와 희지씨를 뒤에서 조종했던 일. 그 리고 크라벨과도 접촉하셨었지요. 제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대놓고 칼을 겨눈 주제에 이제 와 폭로전이라도 벌이겠다는 건가. 노구덕은 입가를 크게 찢으며 실소를 터뜨렸다.
“푸흐흐흐! 네 녀석답지 않게 주절 주절 말이 많구나.”
“……웃음이 나오십니까? 형님의 행동은 도를 넘어섰습니다. 저라면 몰라도,그녀들은……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네 여자들을 건드렸으니 난 나쁜 놈이 고,넌 착한 놈이라고? 그렇게 말하 고 싶은 거냐?”
조롱기 가득한 놀림에,진지하게 말을 잇던 김정인의 얼굴이 무섭도 록 굳어졌다. 그러나 한번 터져버린 노구덕의 힐난은 멈출 기미가 보이 지 않았다.
“아주 애처가 나셨구나. 누가 들으면 그녀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줄 알 겠어. 내가 이런 말하는 것도 웃기 다만, 애당초 그 녀석들을 그 지경 으로 몰고 간 게 누군지 그새 기억에서 지워 버린 거냐?”
김정인의 눈에서 서슬 퍼런 살기가 번뜩였다.
“말…… 다 하셨습니까?”
“아니,다 못했다. 내 탓이라고? 천만에. 그 따위 정쟁,네 말 한마 디면 깨끗하게 종식되었을 거다. 하지만 넌 그 쉬운 길을 두고도 가만 히 지켜만 봤지. 일부러 분란을 조 장한 거야. 왜? 옥석을 추려 내고 싶었으니까. 그 김상목 파벌처럼,오로지 너만을 따르는 광신도들로 정계를 재편하고 싶었던 거다. 내 말 이 틀렸나?”
노구덕의 신랄한 말이 이어질수록,무표정한 얼굴에 차츰 생겨난 비틀 림이 점차 심해진다. 두 사람의 대 치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아가레스트는 부서진 반검의 끝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소리 없이 신음을 삼켰다.
“네 녀석은 애새끼다. 이상에 젖어 서 사는 철없는 애새끼지. 그래서 인정할 줄을 몰라. 신념이 굽어졌다는 것을 알고도 외면하지. 그래서 탓할 상대를 찾는 거야. 이 경우에 는 나지.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고 정당화한다. 아주 역겨운 짓거리를 끊임없이 반복하는게 네 녀석이 야.”
“……”
“난 틀림없이 악당이다. 윤희지, 크 라벨,이진주…… 네 말대로 모두 이용했다. 그럼 너는 뭐지? 똑같은 짓거리를 한 네 녀석이 나와 다를 게 있는 거냐?”
사람은 보통 정곡을 찔리면 반사적 으로 화를 낸다.
가장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적나라하게 맹점을 드러낸 검신 또한… 이 순간만큼은 보통 사 람과 다를 게 없었다.
지옥나찰처럼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 김정인이 마주한,노구덕의 동공에 내비친 스스로의 자화상이었다.
‘저게 나라고? 아냐…… 저건 내가 아니다. 저런 게 나일 리 없다.’
그는 부정했다.
그는 비틀어진 표정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구겨지고 일그러진 표정은 좀처럼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갑자기 신경장애라도 온 것 처럼,입매를 단단히 붙들면 눈이 제멋대로 부릅떠졌다. 그러자 동시에 자화상의 악귀 또한 그를 위협하 듯 크게 눈을 부라렸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라. 내가 거슬려서 죽이고 싶다고. 혼자서 다가지고 싶다고 말해.”
빠드득! 사나운 숨결과 함께 삐져 나온 잇소리가 귓전을 찔러왔다.
김정인은 마침내 아슬아슬하게 유 지되던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아니, 버린 것이다.
“이제야 좀 솔직해졌군.”
이죽이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이글거리는 살기로 점철된 눈초리가 노구덕의 얼굴을 향해 화살처럼 내 리꽂혔다. 근처의 아가레스트가 질식하여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무시 무시한 살의였다.
살기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노구덕의 낯짝은 이미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사라졌을 터.
그러나 정작,그 살벌한 시선과 마주한 늙은 오크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킬킬 웃고 있었다.
“욘과 무슨 거래를 했지?”
“……”
“뭐,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보나마나 발레기우스가 제안한 것과 별 다를 것도 없었겠지. 그놈이 그놈이니까.”
김정인은 아무런 말없이 천천히 노구덕에게 걸어갔다. 음침한 빛을 발하는 반검에서 피어난 검기가 주변의 대기와 마찰하며 찰랑이는 아지랑이를 만들어냈다.
쇠잔한 노구덕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진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병자처럼 맥없이 헐떡이는 숨소리가 애잔 하게 느껴질 정도다.
발레기우스에게 전력을 다한 노구덕의 기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카름화하여 검은 윤기를 띠었던 피 부는 본래의 어두운 녹색으로 돌아갔고,잔뜩 기운 누더기처럼 해진 육신은 한계에 달한 재생력을 여실 히 보여주고 있다.
멋대로 혀를 놀리고 있지만,어딜 봐도 틀림없는 허장성세다.
나약해진 남자의 모습이 조금씩 조 금씩 커져갈수록,차갑게 식은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상념이 교차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헌터로서의 재능도 없었던 하잘 것 없는 남자. 늘 성공가도를 달렸던 그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작은 남자의 그림자에 쫓기며 살게 된것은.
김정인은 까마득한 예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는 두루마리처럼 펼쳐진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 올라가며 기나긴 악연의 시초를 찾아 나섰다.
남자와의 첫 대면. 십 년이 넘게 지난 현재도 방금 전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분명,처음엔 죄책감이었다.
그가 헌터로 다시 태어났던 그 순간부터 곁에 있었던 저 남자는 그가 짊어진 원죄(原罪)였다.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렸다. 그가 남자에게 저지른 죄는 수백 번의 사죄로도 절대 덜어낼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였다.
그도 그것을 알았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죄과를 씻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남자를 지켜주려고 했다. 그가 통 제할 수 있는 단단한 울타리를 만들 어,그 안에 남자를 들게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울타리 내부에서 어떤 위험도 없이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면 어느 정도 보상이 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그만의 착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남자는 그의 생각과 엇나가기 시작했다.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고,그의 의견에 대립했다. 심지어 지켜줘야만 하는 존재로 여겼던 남자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덕분에 울타리도 튼튼해졌다. 그러나 클럽이 커지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가슴에 품은 멍에 또한 커져만 갔다.
어느새 남자는 클럽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득히 커져버린 그의 위치는 누가 누구의 울타리에 있는지조차 모호해질 정도였다.
그때부터였다. 남자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것은.
죄책감이 책임감으로,책임감이 질투로,질투가 다시 적개심으로 변질되었다.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김정인은 더 이상 사내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후,그는 스스로 만든 울타리를 떠나 버렸다.
울타리에서의 입지를 잃어버린 그의 패배였다.
그는 그 뒤로 남자를 지켜보았다. 그에게 첫 실패를 안긴 남자를.
더 이상,남자는 지켜야할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타도해 야 할 적이었다.
그의 본능과 감각이 끊임없이 경고 했다. 언젠가,분명히 남자는 그의 앞길을 막아설 것이라고.
숙적…….
대륙의 정반대편에 있으면서도 항상 남자의 존재를 의식했다. 사소한 행보에도 신경을 기울였고,일거수 일투족을 주의 깊게 감시했다.
언제부터인가,그는 저 사내를 숙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물이 흐르듯, 나이를 먹어가듯 자연스럽게.
그런 상대가… 밑바닥을 드러낸 무방비한 상태로 숨을 헐떡이고 있다.
드디어 십 년이 넘도록 이어진 질긴 연을 끊어버릴 때가 온 것이다.
“웃고 있군.”
불과 오륙 미터. 노구덕의 코앞까지 이른 김정인은 무심결에 입가를 매만졌다. 씰룩이며 솟은 입꼬리의 모양이 손끝에 걸렸다.
갑자기, 살짝 고양되었던 기분이 음울히 내려앉는다. 비뚜름하게 올라갔던 입매의 고도가 급격히 낮아 졌다.
“어지간히 즐거운 모양이야. 좀처럼 표정관리가 안 되는 걸 보니까.”
“……더 이상 당신의 궤변에 귀 기울일 생각은 없습니다.”
‘‘호오.”
“유메르바인과 콜트레인…… 세 방향으로 나누었던 레그나토르의 나머지 부대를 리베르타의 국경 주변으로 향하도록 지시했더군요. 이 싸움 이 끝나면,바로 리베르타를 침공할 속셈이었겠지요. 당신다운 계략입니다.”
콧잔등을 접은 노구덕은 픽 쓴웃음을 머금었다. 거기까지 들켜버릴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최대한 은밀하게 이동하라 지시했는데…… 그걸 또 알아챘군. 리베르타의 정보력도 역시 무시할게 못 되는구만.”
“원망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자초한 일이니까요.”
“물론,절대 후회는 하지 않는다.”
뚝 떨어지듯 단호한 노구덕의 음성 이 울린 순간,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던 두 사내의 눈이 동시에 번쩍이는 불을 내뿜었다.
한 발 나아간 김정인의 팔이 흐릿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반월형의 새 하얀 궤적이 노구덕의 가슴으로 쇄도했다.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밀려오는 참 격과 맞닥뜨린 노구덕은 갑자기 홱 몸을 돌려버렸다. 그러더니 그 뒤에 서 조용히 기습을 준비하던 아가레스트의 팔을 불시에 잡아챘다.
“다,당신!”
“도망쳐. 방해된다.”
“잠깐……!”
다시 대꾸할 틈은 없었다. 팔을 잡혀버린 아가레스트의 몸은 붕 뜬 그대로 날아,부서진 첨탑의 창밖으로 내던져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