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85)
헌터클럽 780화
현장에서 혼절해 버린 신소율이 정신을 차린 것은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 였다.
“아저씨…… 아저씨는……?”
초췌한 낯으로 눈을 뜬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노구덕의 이름을 연발하며 그를 찾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마침 그녀의 곁을 지키던 퀸젤의 허탈한 응답뿐이었다.
“그 사람은 없어.”
“없다니……?”
멍한 얼굴로 되묻는 신소율이 답답했는지,퀸젤은 벌컥 목소리를 높였다.
“신소율 대장,정신 차려! 당신까지 이러면 어떻게 해? 이렇게 넋 빼고 있으면 누가 군을 추스르라고? 무신과 레드레인은 전사했고,이두식 근위대장은 중환자야! 하유라는 어딜 갔는지 사라졌고,좀 전에 겨우 의식을 차린 아가레스트는 말할 것도 없지! 소냐,그 어린애에게 모 든 걸 맡길 셈이야?”
“하……”
퀸젤의 호된 충고에 불구하고,삐거덕 아래로 기울어진 신소율의 얼굴은 좀처럼 위로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죽은 거야? 정말로?”
멀거니 시선을 아래로 돌린 신소율은 불현듯 작은 주먹을 이불째로 꽉 움켜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등에서 참을 수 없는 분기가 느껴졌다.
“말도 안 돼. 난 믿지 않아. 유진 언니까지 죽었는데, 어떻게…… 그런 건 싫어.”
뚝. 뚝. 방울져 떨어진 눈물이 두꺼운 담요를 적셨다.
노구덕의 죽음.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현실이다. 어떤 난관이 닥치더라도 그만은 살아올 줄 알았다. 절대로 죽지 않는 불사신인 줄 알았다.
김정인의 말뿐이었다면 이토록 절망에 사무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냐, 그 냉철한 아이가 직접 가서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녀의 격 한 반응만 보더라도…… 노구덕이 사자가 되었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보였다.
“……안 되겠어.”
신소율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며 야전 침대 밖으로 다리를 뻗었다. 잔뜩 충혈된 그녀의 눈에선 어떤 맹목적인 의지마저 엿보였다.
“뭘 하려고?”
“소냐한테 가야죠. 가서 물어봐야겠어요. 가서 뭘 봤는지,정말 아저씨가 죽었는지.”
“내비둬. 그쪽도 두문불출인 건 마 찬가지니까. 그리고 듣고 싶은 거라면 내가 확인했어.”
“……확인했다고요?”
퀸젤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들어보니,신소율이 기절한 사이 소냐로부터 수색대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받은 모양이었다.
수색대가 만신창이의 검신을 발견 한 건 첨탑 중간쯤에 이르러서였다. 수색대와 조우한 검신은 그 자리에 서 바로 노구덕과 발레기우스의 죽 음을 알렸다. 최후의 결전을 치르던 도중,발레기우스의 발악에 휘말린 노구덕이 그만 갈가리 찢겨 죽었다 는 것이었다.
그 뒤로 첨탑 내부를 샅샅이 뒤졌지만 노구덕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초조해진 소냐가 광범위한 생 체 스캔까지 펼쳤지만 결과는 마찬 가지였다.
발견한 거라곤 격전지 중앙에 부채꼴 모양으로 진득하게 펼쳐진 커다란 핏자국과 자잘한 육편들뿐, 노구덕의 존재는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저씨는 발레기우스에게 죽었다……. 그런데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고요?”
“검신의 말만 듣자면 말이지. 생존자가 그 사람밖에 없으니 달리 물어 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 고 시체 말인데…… 동맹군 수뇌부에선 탑 상층부에서 발견한 그 살점 들을 무신의 사체로 결론지은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예요?”
“검은 마녀가 직접 확인을 거쳤어. 무신 본인의 혈육(血肉)이 맞다고.”
“데모나 언니가요?”
신소율이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본드래곤을 운용하느라 영력을 탕진,실상 전력외가 된 데모나는 줄곧 시온 바깥의 주둔지에 머무르며 원기 회복에 전념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후방으로 이송된 부상병들과 함께하고 있을 그녀가 언 제 이곳까지 달려왔단 말인가.
데모나가 주둔지에 도착했을 당시를 상기한 퀸젤은 무의식중에 고운 얼굴을 찡그렸다. 악을 쓰며 난동을 부리던 데모나의 모습이 떠오른 탓 이었다.
“……그래. 무서운 얼굴로 이곳까지 와서 검신을 찾을 땐 정말로 난 리도 아니었지. 누가 말이라도 걸면 죽일 것처럼 기세가 사나웠으니까.”
“데모나 언니가 왜……:
“수거해 온 무신의 혈육을 확인한 뒤에 검신을 독대하려고 했어.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목격자에게 직접 들으려고 했던 것 같은 데…… 물론 리베르타에서 응할 리 가 없지. 너도 봤으니 알잖아? 검신은 상태가 어떤지.”
“…….”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막무가내여서…… 휴,하마터면 여기서 동맹군끼리 내전이 일어날 뻔했어. 아가레스트와 이두식 대장이 나서서 진정시키지 않았으면 정말로 사단이 일어났을 거야.”
“언니는 어디 있죠?”
“소냐와 함께 있을 걸. 한 십 분 전에 그쪽 막사로 가는 걸 봤으니 까. 내버려 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머리를 내젓는 퀸젤의 장단에 맞춰 건성으로 머 리를 주억이는 신소율의 표정은 이 전보다 더욱 암울하게 굳어 있었다.
‘그 데모나 언니가……
노구덕에게 따로 블러디미러란 주술까지 걸어둘 정도로 무서운 집착을 보였던 데모나다. 그런 그녀가 그토록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는 건…… 역시 최악의 상황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막사 바깥의 문이 나직하게 열리며 한 사람이 실내로 들어왔다. 노크 없이 난입한 그림자에 인상을 구기며 성화를 내려던 퀸젤은 급히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아가레스트?”
놀라는 퀸젤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아가레스트는 곧장 신소율에게 다가섰다.
“물어볼 게 있어요.”
“네?”
“유메르바인,콜트레인,황석문,소피아.”
현재 시온에 주둔한 레그나토르군 이외의 잔여 군단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의 이름을 차례로 댄 아가레스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들이 리베르타를 공략할 예정이 라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휘둥그레진 신소율의 눈이 어리벙벙하게 흔들렸다.
“아, 아뇨. 그런 건 나도 잘 모르 는데…… 누가 그래요?”
“아가레스트!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입니다.”
혼란과 경악, 의구심에 물든 세 여인의 눈길이 다시금 막사의 문 쪽으로 옮겨갔다. 느닷없이 등장하여 세 여인의 주의를 끌어 모은 그는 근위 대장 이두식이었다.
“실례했습니다. 먼저 노크를 하려고 했는데,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더군요.”
“근위대장. 그게 정말인가요?”
단박에 말을 끊으며 들이치는 아가레스트의 낯빛은 꽤 다급해 보였다. 이두식은 느릿하게 머리를 끄덕이며 그녀의 물음을 받았다.
“1군단에서 작전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형님과 저,전사한 부사령관님이 전부입니다. 그만큼 기밀을 요하는 작전이었으니까요.”
신소율은 천성적으로 지휘관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뿐더러,복잡한 작전이나 행정 업무라면 진저리를 치는 구석이 있다. 아가레스트는 단독 임무 중이었고, 데모나 또한 병력 지휘에는 관심이 없었으니,노구덕이 기밀을 공유한 인선은 나름대로 합당했다.
이두식의 말을 듣는 아가레스트의 낯은 무게추가 달린 것처럼 진중했다.
그도 그럴게 노구덕과 김정인이 격돌하기 전 주고받았던 그 대화가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시온에서의 대전이 끝나는 즉시, 잠재적인 가장 강력한 적대세력인 리베르타를 들이쳐서 멸망시킨다.
다른 세력의 눈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노구덕다운 과감하고 저돌적인 발상이었다.
문제는 이 시나리오가 최우선적으로 노구덕의 생존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시나리오라는 거다. 노구덕의 죽음이 기정사실화된 지금으로선 현실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
검신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리베르타를 쳐부수려면 그에 견줄 만한 대항마가 있어야 한다.
당연히 그 역할을 맡아야 할 사람은 작전을 짠 장본인,무신 노구덕이다.
그가 있어야 북부의 반발을 최소화 할 수 있고,리베르타를 압도할 수 있으며,대륙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다.
전력의 문제가 아니다. 무신 없이 대륙의 영웅이 된 검신과 리베르타를 친다는 건 온 대륙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아가레스트가 주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무신과 검신 간의 결투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입을 열 순 없었다. 그나마 사리분별을 기대할 수 있는 임유진이 살아있다면 모를까,다소 감정적인 신소율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가는 돌이킬 수 없 는 파국을 맞이할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증거도 없어.’
말을 꺼낸들,레그나토르에 적을 둔 그녀의 주장을 동맹군 수뇌부들이 얼마나 믿어줄까? 애초에 그들이 은연중 레그나토르의 편을 들었던 건 무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전투로 인해,대륙에 군림하는 절대자는 오로지 검신 한 사람이 되었다. 장차 재편될 대륙의 정세가 검신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홀로 판도를 뒤바꿀 수 있는 절대 자의 유무(有無). 이 차이는 굉장히 컸다.
‘하지만……
아가레스트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명멸하여 흩어지는 입자 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노구덕의 얼굴이 싸락눈처럼 밟혔다.
남들은 썩은 동아줄이 되었다 말할지 몰라도,그녀만은 레그나토르를 외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레그나토르는 그와 그녀의 아이들을 품고 있는 울타리였으니까.
이미 오래 전에 죽고자 결심했던 몸이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이제 라도 그 아이들을 위해 속죄할 수 있다면 썩어 문드러져 부토가 된다 한들 상관없었다.
마침 여기 레그나토르의 최고 수뇌라 할 수 있는 세 사람이 모였다. 살짝 숨을 들이견 아가레스트는 남은 숨을 토해내며 말문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요.”
“할 말?”
“그 사람이 당한 건 맞아요. 하지만 그 사람을 죽인 건 발레기우스가 아니에요.”
“……!”
어리둥절해졌다가,멍해졌다가,급격히 아연해진다. 찰나지간 동시에 일어난 세 사람의 표정변화였다.
“아……가레스트? 이,이해가 안 되는데? 그럼 누구에게 당했다는 거야?”
“절 탑 밖으로 날린 건 그 사람이었어요. 탈진한 제가 검신과의 결전에 휘말릴까 봐 그런 거죠.”
“검신과의 결전…… 말입니까?”
소스라치게 몸을 떠는 퀸젤에 이어,이두식의 입이 망연히 벌어진다. 그 다음 이어진 아가레스트의 말은 결정타가 되어 좌중을 휩쓸었다.
“그 사람을 죽인 건 검신이에요.”
“…….”
숨 막힐 듯한 침묵과 함께 신소율의 눈자위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멍해진 머릿속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김정인의 건조한 눈초리가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뜨거워진 뇌혈관을 타고 올라온 노도 같은 분노가 텅 비 어 공백이 되어버린 뇌리를 가득 채웠다.
“김정인! 그 미친 새끼가!”
열화와 같은 분노를 터뜨리며 일어 난 신소율은 당장이라도 리베르타의 주둔지로 뛰어가 검신의 목을 따버릴 기세였다.
“일단 진정하세요.”
“진정하게 생겼어요? 그 새끼가 뭐 라고 했는데요! 씨팔놈의 새끼! 온갖 정의로운 척은 다 하더니,잘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잖아요!”
“알아요. 그러니까 지금 바로 가서 죽여야 해요.”
“그래! 당장 가서 죽여야……! 네, 네?”
스스로 거칠게 내뱉고도 뭔가 이상 하다는 것을 알았는지,씩씩거리던 신소율의 눈이 황망히 아가레스트를 향했다.
“언니…… 뭐,뭐라고 했어요,지금?”
“죽인다고요. 검신은 여기서 죽어 야만 해요.”
“제,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리 베르타를 치자고?”
다른 이들이 경악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등잔불 너머로 일렁이는 아가레스트의 얼굴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검신은 제가 전말을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리고 어차피 저 와는 상관없이,그 사람이 일군 레그나토르를 남겨둘 리가 없죠. 그 사람이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요.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검신이 힘을 되찾기 전에 치는 거예요. 레그나토르가 살기 위해선 그 길밖에 없어 요.”
“하지만 그러면 레그나토르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돼. 북부의 반발은 어쩌려고?”
“눌러야죠. 필요하다면 다 죽여서 라도요. 이 기회를 그냥 흘려 버리면…… 결국은 검신에게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세 사람의 낯이 동시에 굳었다. 아 가레스트의 주장을 반박할 다른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신의 여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힘이 얼마나 남았든 간에,상당한 힘이 소진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지푸라기만 한 기회라도 있는 건 오직 지금뿐이었다.
지이이잉…….
“……응?”
문득,우두커니 앉아 있던 신소율의 품에서 문득 낮은 진동음이 울렸다. 심각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길들 이 자신에게 쏠리자,황망히 품을 뒤적거린 신소율은 미미한 빛을 발하는 수정을 꺼내들었다.
선홍빛깔을 띠며 부르르 몸을 진동 하는 그것은 레그나토르의 최고 지휘관들이 공유하는 핫라인이었다.
“누구지? 어……?”
인상을 쓴 채 핫라인 표면에 떠오른 깨알 같은 글귀를 훑어 내린 신소율은 순간적으로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유,유진이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