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93)
헌터클럽 788화
218. 요람
남부 대사막에서 가장 거대한 건축물,태양궁.
그 심처에 존재하는 별궁에선 오늘도 어김없이 호화스러운 술잔치가 한창이었다.
입으나 마나한 얇은 날개옷을 걸친 무희들에게 둘러싸인 자하드의 얼굴은 대추처럼 얼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입 주변에 알싸한 술 냄새가 감도는 것이 벌써 독주를 여러 잔 들이킨 모양이었다.
“대족장님,이것 좀 드셔보세요! 아?!”
“아이,거긴 안 돼요!”
“호호호호!”
사막 왕도마뱀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소파에 몸을 기댄 그의 곁에는 깔깔 손뼉을 치며 아양을 떠는 무희들만 열 명이 넘었다. 좌우에서 하늘하늘한 부채를 흔들며 춤을 추는 여인,뒤에서 어깨를 주물러주는 여인,물과 향유로 발을 씻겨주는 여 인……. 실로 황제도 부럽지 않을 호강이었다.
“…….”
구석진 기둥 뒤에서 살빛의 향연을 지켜보고 있던 칼리드의 안색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일자로 다물린 입술 아래 돋아난 수염이 치미는 노여움으로 거칠게 요동쳤다.
대족장 자하드가 근래 별궁 출입이 잦아졌다는건 내궁에 거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젊은 대족장이 별궁에 출입이 잦아졌다.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올리 없다. 태양궁의 별궁이라면 대대로 하램의 여인들이 머무는 곳이었고,온갖 욕망과 사치로 점철된 장소였으 니까.
평소라면 그냥저냥 넘어갈 수도 있 겠지만,지금은 때가 너무 좋지 않았다. 대륙의 판도가 뒤바뀌고,자칫 모고르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이때,그 막중한 책임을 떠안은 족장이란 자가 연일 주지육림의 파티를 벌인다면 어느 누가 좋게 볼 수 있겠는가.
궁내엔 슬슬 방탕해진 자하드를 이대로 믿을 수 있겠냐는 불신론이 일고 있었다. 몇몇 큰 세력을 지닌 토호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불신론은 하루하루가 무섭도록 힘을 얻는 중 이었다.
그러나 자하드가 왕자였을 때부터 그를 보좌했던 칼리드는 그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칼리드가 다소 무리를 해서 이 자리까지 동행한 것도,궁내에 떠도는 그 소문의 실체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함이 었다.
그리고 직접 확인한 자하드의 행태 는…… 동행에 나섰던 자신의 결정이 후회될 정도로 참담했다.
‘허허,망조다! 망조가 들고 말았어!’
실의에 빠진 칼리드는 한탄을 금치 못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주변의 무희들을 희롱하는 자하드의 모습은 실로 나라를 위험에 빠트리는 혼군(昏君)의 표상,그 자체 였다.
심한 정신적 압박감에 무너져버린 것일까? 아니면 원래 그의 기질이 이러했던가? 칼리드로선 도무지 자하드가 돌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직까진 자중하고 있는 듯하지만 이런 행태가 계속되면 토호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전에 정신을 차리셔야 할 텐데……
“대족장!”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이 한창 분위 기가 무르익던 별궁 안을 뒤흔들었다. 무희가 손수 집어준 포도알을 삼키던 자하드도,주변에서 너울너 울 날아갈 듯이 춤추던 무희들도 하 나 같이 행동을 멈춘 채 소리가 들 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활짝 열린 입구 방향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이,이런……!’
쿵쿵! 험악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무리를 본 칼리드의 안색이 급변했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무리의 선두를 차지한 노인들은 최근 기행을 일삼는 자하드를 탐탁잖게 여기는 유력 토호들이었다.
“허어, 시국이 어느 때인데 이런……!”
“가관이군!”
질퍽한 연회장을 훑어본 노인들의 표정이 크게 찌푸려졌다. 그들의 칼날같이 돌아가는 시선을 마주한 무희와 종자들은 황망히 고개를 숙이고 옷매무새를 여미었다.
달콤한 열기는 사라지고,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불편함만이 남았다. 불시에 토호들을 맞이한 자하드는 취기로 떨리는 눈꺼풀을 겨우 위로 추어올렸다.
“장로들이 여긴 어쩐 일이오?”
째리는 건지 쳐다보는 건지 모를 게슴츠레한 눈에,코를 찌르는 술 냄새는 마주한 토호들의 얼굴을 더욱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이이잇! 정녕 몰라서 묻는 겁니까!”
“대족장! 지금 궁내에 어떤 추문이 돌고 있는지 알기는 하는 거요?”
“리베르타와 레그나토르의 전면전이 사흘도 남지 않았소! 그런데 미래를 대비하기는커녕,하루가 멀다 하고 별궁만 출입하는게 말이 되는 행동이랍니까? 사흘 밤낮을 정무에 힘써도 모자랄 판에!”
“예전의 총기는 어디로 사라지신 게요!”
봇물 터지듯 쏟아진 질타에,취기로 풀어진 자하드의 낯빛이 굳어졌다. 그제야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원병은 보내지 않는다. 그걸로 결론이 난 거 아니었소? 어차피 우리와는 상관없는 전쟁인데……
그렇잖아도 딱딱하던 토호들의 표정이 더욱 무섭게 비틀어졌다. 상관이 없으니 신경 쓸 일도 아니다? 어떻게 일족의 책임자가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술김에 헛말이 나온거라 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발언이다.
자하드의 상태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허어,글렀군,글렀어. 이건 너무 심하잖은가.”
“긴말할 것 없소.”
선두의 노인이 지그시 손을 들어 분개하는 장로들을 제지했다. 허연수염이 배꼽까지 내려온 그는 올해 아흔이 되는 일족의 대장로였다. 그 는 휘청이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자하드를 꼬장꼬장하게 쏘아보며 말했 다.
“내일 있을 대회의에서 그간 대족장이 보인 추태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오.”
“대장로,그 말은 흘려들을 수 없군. 감히 날 끌어내리겠단 건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소. 그건 대회의가 결정할 사안이니까. 노부가 하고 싶은 말은,지금의 일은 대족장 당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거요.”
자하드에게 직언하는 노인의 강퍅한 얼굴엔 일말의 안타까움이 감돌았다.
선대였던 태양왕에게도 입바른 소리를 하다 수년을 빛도 들지 않는 독방에 구금되었던 그다. 그 기나긴 암흑기가 지나고,혈기방장한 자하드가 새로이 대족장이 되었을 때에는 기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만인의 귀감이었던 젊은 지배자가 어쩌다 이리 되었단 말인가.
‘성화가 기운을 잃고 사그라드니, 이제는 하늘마저 모고르를 버리심인가?’
깊은 한숨을 흘린 대장로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더 이상 자하드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계속했다가는 혈압이 올라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최후통첩을 보낸 대장로들이 막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싸우는 거야? 화내지 마아.”
고요해진 별궁 안을 울리는 목소리는 옥구슬이 데구르르 굴러가듯 청량했다.
묵묵히 선 채 장로들을 바라보던 자하드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지고,발길을 돌리던 장로들도 모두 어리둥절하여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허허허. 아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대장로는 기가 찬 듯 실소를 흘렸다. 귀에 쏙쏙 박히는 옥음의 주인공이 이 방탕한 장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찬연히 빛나는 대리석 기둥 뒤에서 빼꼼히 머리를 내민 것은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앙증맞은 여아였다.
많아봐야 여덟,아홉 살 정도나 되었을까.
발간 뺨에는 한아름 근심을 가득 품고 있는 여아의 모습은 천사가 재 림한 것처럼 비범했다. 귀엽기도 귀엽지만,그보다는 심금을 울리는 성스러움을 지녔다고 해야 할까. 말 그대로 지상에 강림한 어린 천사를 대면하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말을 잊은 대장로가 정신을 차린 것은,기둥에 바짝 붙어 있는 여아가 재차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갸웃했을 때였다.
‘무희는 아니다. 그렇다면……
여아의 옷차림을 면밀히 살핀 그는 다시 자하드에게로 눈을 돌렸다. 경륜만큼 깊은 노인의 눈썰미는 찰나에 스친 자하드의 당황한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대족장,숨겨둔 딸이 있었소?”
“……..”
자하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대장로 역시 대답을 바라진 않았는지,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목구비를 따져 보면 딸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무희일리는 없을 테고. 저 아이는 대체 누구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대장로는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듣기 전까지 물러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음…….”
낯을 붉게 물들였던 취기는 이미 달아난지 오래. 궁지에 몰린 자하드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파였다.
“말하지 않을 셈이오?”
“저 아이는……
궁색한 답변을 찾아 헤매던 자하드가 무겁게 운을 땐 찰나,갑자기 장내 한복판에 거대한 그림자가 뚝 떨어져 내렸다.
쿵!
“으악!”
“꺄아악!”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은 팽팽하게 얼어붙은 회장을 한바탕 크게 뒤집어 놓았다. 근처에 있던 장로들이 채신머리 없이 벌렁 뒤로 나자빠지고,교태를 뽐내던 무희들도 깍깍 비명을 지르며 소란을 떨었다.
“누구냐!”
친위대장 칼리드는 부하들을 이끌고 서둘러 포위망을 구축했다. 자하드와 대장로 등 요인들을 뒤로 물린 그는 고리눈을 부릅뜨며 희미해져 가는 먼지 너머를 응시했다.
“이거 미안하게 됐다. 원래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힘 조절이 영 안 된단 말이야.”
“늘 핑계를 입에 달고 사는 게 바보들의 공통점이지.”
“사실대로 말하세요. 마음이 급했던게 아니고요?”
“크흠,그런 면도 없잖아 있지.”
머쓱해하는 한 남자의 목소리와 각기 다른 톤을 지닌 두 여인의 목소 리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장내의 상 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한가로웠다.
서서히 선명해지는 침입자들의 윤곽을 노려보던 칼리드의 표정이 묘해졌다. 침입자 세 사람 중, 남자의 목소리가 어쩐지 굉장히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산악처럼 거대한 덩치도….
잠시 후,어렴풋이 드러난 녹색의 피부를 목격한 칼리드는 숨이 멎을 정도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다,당신은!”
“친위대장 칼리드. 오랜만이군. 그 새 주름살이 많이 늘었어.”
칼리드는 사내의 말을 제대로 이해 할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사고회로는 침입자의 얼굴 윤곽을 확인한 그 순간 기능을 잃고 정지해 버렸다.
늘 평정을 유지해야만 하는 친위대장의 역할을 감안한다면 분명한 실 책이다. 하나 그렇다고 그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남자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테니 까.
“어헉!”
“무,무신!”
먼지구름 속에서 두 명의 여인을 대동하고 나타난 사내. 그는 두 달 전에 전사했다고 알려진 무신 노구덕이었다.
“폐하!”
혼비백산한 인파를 헤치고 뛰어온 자하드는 체면 따위 저 멀리 집어던 지고 곧장 무릎을 꿇었다.
노구덕은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아, 부르르 떨리는 자하드의 어깨를 굳게 잡아주었다.
“자하드,수고했다.”
“……당치 않습니다……!”
그 한마디,노고를 치하하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이마를 바닥에 댄 자하드는 북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폐하 본인이 맞는 겁니까?”
“도,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돌연한 사태를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노구덕의 생환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눈치였다. 사실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긴 했지만.
하나 노구덕은 일일이 문답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맡긴 걸 찾으러 온 것이 지,청문회에 참석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울먹이는 자하드의 어깨를 두드려 준 노구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의구심과 경악으로 뒤섞인 좌중의 얼굴을 한 바퀴 죽 둘러본 노구덕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희들은 운이 좋다.”
“……예?”
“이 자리에서 약속하마. 모고르는 다시금 중흥기를 맞이할 것이다. 전부 사려 깊은 이 남자를 족장으로 둔 덕분이지.”
어느새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져 있었다. 태산처럼 일어난 노구덕의 기세에 압도된 사람들은 숨도 쉬지 못한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장로,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갑작스레 지목당한 대장로는 의아하게 눈을 치떴다.
“무슨….”
“내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현재의 레그나토르는 검신 나부랭이가 버티고 있는 리베르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전력이 아니지. 백 번 싸운다 면 백 번 질게 뻔한 전력 차이다. 모고르의 족장은 그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거다.”
영문 모를 말이었다. 뻔한 승패 때문에 원병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고 해도,매일같이 별궁에 출입하며 술잔치를 벌인 게 어떻게 부족을 위한 선택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또, 저 남자는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수없이 많은 의문이 잇따랐지만,대장로는 내색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 습니까?”
“자하드가 내 충실한 수족이란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 바꿔 말하면, 설령 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언젠가 리베르타에선 자하드를 쳐냈을 거란 거다. 특히 이번처럼 물어뜯기 좋을 경우엔 필요 이상으로 신을 내는 자들이 있거든.”
‘설마……!’
홱 돌아간 대장로의 시선이 자신을 뒤따르던 몇몇 이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색하게 눈을 피하는 그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강경하게 자하드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들이었다.
“간자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어딘가와 끈이 닿아 있는 것만은 분명 하지. 저놈들은 그게 리베르타인지도 모를 테지만.”
“대족장의 방탕한 일상이 간자들을 추려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그건 부수적인 거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렇지?”
“……맞습니다.”
멍하니 풀려 있던 자하드의 고개가 삐그덕 앞으로 미끄러졌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떠안았 던 고민을 대체 그가 어떻게 알았는 지 경이롭기만 했다.
갑갑하게 닫혀 있던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자하드의 낯은 편안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칼리드,그리고 대장로. 미리 말하 지 못해서 미안하오. 도처에 리베르타의 귀가 도사리고 있다 생각하니 도저히 함부로 발설할 수가 없었소.”
그는 우두커니 선 칼리드와 대장로에게 번갈아 고개를 숙였다. 친위대 장 칼리드와 대장로는 서운한 빛을 감추지 못했지만,곧바로 이어지는 자하드의 말은 미미하게 남은 앙금 조차 날려버릴 정도로 놀라운 것이 었다.
“나는 성화를 지켜야만 했소. 성화가 없이는 모고르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예? 성화라니요?”
“대족장,그게 무슨 말이오? 성화는 소멸한 게 아니었소?”
“아니오.”
자하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길게 설명하는 대신,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두 달 전,별궁 지하에서 새로운 불씨가 생겨났소. 그게 저…… 분이오.”
그의 손끝이 머문 곳에는 초롱초롱 하게 눈을 빛내며 사람 구경에 여념 이 없는 여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