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96)
헌터클럽 791화
재정비를 마친 리베르타의 정병들 이 다시 진군하기 시작했다.
목적지인 제네시스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수만의 군세가 내뿜는 기세는 이전과 비교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마지막 주둔지에서 숫돌로 칼을 갈 고,날에 잔뜩 기름을 먹여두었으니, 이제는 바짝 날이 선 칼로 적들의 피륙을 베어낼 때다. 그리고 그 갈 고 닦은 칼끝에 노리는 건 당연히 제네시스에 주둔한 레그나토르군이었다.
작열하는 불꽃처럼 기세를 불사르는 리베르타의 병사들은 어느 누구도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이번 전쟁은 여러모로 그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단순히 리베르타가 대륙의 패자로 우뚝 서기 위한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명백히 악(惡)을 척결하는 전쟁이었다. 이를테면 거룩한 사명하에 이루어지는 성전(聖戰)이라 할 수 있었다.
마신의 패악에 맞서 온 대륙이 들고 일어난 대륙전쟁,그 숭고한 전 쟁의 막바지에 야욕을 드러내며 검신을 공격한 더러운 위선자들을 척살하기 위한 싸움이다. 만에 하나라도 패배는 용납될 수 없었다.
전력 차이는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정도로 현저한데다,온 대륙이 그들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다. 무엇 보다 살아있는 신이 그들과 함께한다.
이런 전쟁을 어떻게 질 수 있단 말인가?
승패는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고, 실상 승전고를 언제 치느냐만 남았을 뿐이다.
“……더없이 유리한 상황인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적은 바로 그 레그나토르다. 아직도 쟁쟁한 강자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지.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알겠느냐!”
“옛!”
“각 부대에 전해라! 첨병들을 사방으로 내보내라고! 긴장을 한시도 늦춰선 안 된다!”
부사령관 김상목의 호령에 따라 십 여 명의 전령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희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 샐 틈이 없네요. 이래서야 소율이가 파고들 틈도 없겠어요.”
“전쟁이니까요. 당연한 겁니다.”
“그렇죠. 당연한 거죠.”
그녀의 옆에는 김정인이 나란히 말을 타고 있었다. 최근 들어 좀처럼 바깥에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 그가 얼굴을 보였다는 건,이 전쟁의 끝 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윤희지는 힐끔 곁눈질로 김정인의 낯을 살폈다. 얼굴의 절반을 뒤덮는 투구를 눌러쓴 그의 안색은 오랫동안 햇볕을 쬐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몸은 괜찮아요?”
“문제될 정도는 아닙니다.”
말을 이어나갈 여지도 없이 무뚝뚝하게 끊어지는 대답이다. 무안할 법도 하건만,끄덕끄덕 머리를 움직인 윤희지는 별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상할 것도 없다. 근래 그와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었으니까.
터벅터벅 울리는 말발굽 소리 외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짧은 시간 침묵을 지키던 김정인은 갑작스레 물음을 던졌다.
“그녀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네. 만났죠. 어떤 아이인지 궁금해서요. 그리고 소문의 실체도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당신은 제게 어떤 말도 해주지 않잖아요?”
기다렸다는 듯 매몰차게 쏘아붙인 윤희지의 언사는 그로부터 어떤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항상 그랬듯, 김정인은 땅에 깊게 박힌 바위처럼 고요했다.
윤희지는 그 기분 나쁜 무덤덤함이 정말 화가 치밀도록 싫었다.
‘지독한 사람. 나나 수연이가 죽었어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겠지!’
“대단하네요,정말. 당신,이런 사람이었나요? 진주까지는 그렇다 쳐도,크라벨이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여자를 들이려고 해요? 애초에 애정 같은 건 없었겠지만,그래도 이건 아니죠. 그 애한테 부끄럽지도 않아요?”
적나라한 윤희지의 말은 살짝 도가 지나치다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을 수행하던 인원들의 안색이 급변했을 정도니까.
“희지 씨.”
“……”
속에 그득 얹혀 있던 것을 한바탕 시원하게 쏟아낸 것도 잠시,윤희지는 까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태연히 자신을 바라보는 김정인의 표정에서 어떤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 이다.
부동심도 정도가 있지,어떻게 저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 질린다. 이젠 정말 그가 사람이 맞는지도 의심이 될 지경이다.
“당신이란 사람은……
“레그나토르와 내통한 정황이 있더 군요. 그들이 우연찮게 북쪽으로 도망친게 마냥 행운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분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재차 가시 돋친 폭언을 퍼부으려던 윤희지는 크게 헛숨을 들이켰다. 김정인은 점차 당황으로 번져가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희지 씨의 방에서 출처가 불분명 한 연락 수정을 발견했습니다. 조사해 보니 레그나토르의 신소율과 이어져 있더군요.”
“……제 방을 조사했다고요? 누가요?”
“제가 직접 했습니다.”
“……”
기가 막힌 윤희지는 허탈하게 숨만 내쉬었을 뿐,어설픈 변명조차 입에 담지 못했다.
그녀에겐 내통이 드러났다는 사실 보다,김정인이 직접 자신의 방을 뒤졌다는 것이 훨씬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신은 절 믿지 않았군요.”
“아니요. 당신이 절 믿지 않았던 겁니다. 실제로 그러지 않았습니까? 먼저 제 믿음을 배반한 건 희지 씨 입니다.”
“하!”
내가 먼저 배반했다고? 같잖기 짝이 없다. 크게 코웃음을 친 윤희지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삭이며 말했다.
“김정인 씨? 말은 바로 해야죠. 누가 먼저 믿음을 배반했다고요? 당신 이 지금까지 내게 했던 행동, 우리에게 했던 언행을 되짚어 봐요.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걸요!”
“그게 당신의 변명입니까.”
“그래요! 이게 내 변명이에요! 그러는 당신은요? 뭐라도 좋으니 우리에게 변명이라도 좀 해봐요! 우리한테 왜 그래야만 했는지!”
들리는 것은 악다구니를 쓰는 윤희지의 고함뿐, 사위는 조용했다. 윤희지와 김정인의 주변을 둘러싼 수행원들이 미리 앞서 소리를 차단시켰기 때문이다.
소리를 지르며 원망하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김정인은,이내 대수롭지 않게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배신자와 할 말은 없습니다.”
“뭐,뭐라고?”
망연히 눈을 치뜬 윤희지는 멍청히 입을 벌렸다. 마지막에 듣는 소리가 겨우 저런 말이라니. 뒤통수를 망치로 내리찍는듯한 충격이었다.
“끌어내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대기하던 부관들이 윤희지의 양 팔을 잡아채 며 그녀의 신병을 구속했다. 그대로 넋이 나가버린 윤희지는 감히 반항 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거친 손길에 몸을 내맡길 따름이었다.
김정인은 강제로 하마(下馬)하여 구속당한 윤희지의 모습을 냉엄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단은 구금입니다. 여죄는 전쟁이 끝난 후에 묻겠습니다.”
“……”
“추후 밝혀질 죄과에 따라 극형만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경과를 지켜보도록 하지요.”
“.이 미친 자식!”
부관들에게 포박당한 윤희지는 끌려나가는 도중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저주를 퍼부었지만,김정인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향하는 일은 없었다.
‘잘되었군. 본처의 자리가 절로 비었으니,소니아를 들인다 해도 문제 될 건 없겠어.’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욘이 멋대로 지껄여대는 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김정인은 문득 눈을 들어 앞쪽에 멀리 내다보이는 산등성이를 응시했다.
얼마 뒤,검은 숲에 가려진 산으로 부터 눈길을 거둔 김정인은 옆을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김상목 대장을 불러주십시오.”
“놈들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나도 보고 있어.”
짧게 답한 신소율은 메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얼마나 긴장했는지,단검의 자루를 쥔 손이 흥건하게 젖어 미끌미끌할 정도였다.
젊은 나이와는 별개로 그녀는 산전 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은 노련한 전사다. 그런 그녀가 신출내기처럼 손을 적시며 긴장한다는 건,그만큼 상대가 벅차다는 의미였다.
‘당연하지. 상대가 누군데.’
검신(劍神).
아마도 스퀘어 역사상 다시없을 검의 귀재이며,측정 불가능한 무력을 지닌 괴물.
지금부터 그런 존재와 맞서 싸워야 할 형편이니,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퀸젤 언니한테 전해. 내가 신호하면 바로 트랩을 발동시키라고.”
“알겠습니다.”
멀어지는 수하를 뒤로 한 신소율은 땀에 전 손바닥을 옷에 비벼서 닦아 냈다.
대략 일 킬로미터. 까맣게 몰려오는 리베르타의 전위대는 그 기세만 으로 가로막는 산을 쪼개버릴 듯 무시무시했다.
‘김정인. 그냥 보내지는 않겠어.’
그녀가 숨어 있는 이 산을 넘어서면 곧바로 제네시스의 성벽과 마주 할 수 있다. 말인즉,레그나토르가 이용할 수 있는 최후의 천연장벽인 셈이다.
신소율은 바로 이곳에서 초전을 열 생각이었다.
뻔한 수법이긴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리베르타 군이 이 야트막한 산맥을 넘어 제니시스의 앞마당에 도달하면,그 순간 싸움이 끝날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흔히 성을 함락하기 위해선 적어도 세 배,많게는 열 배의 병력이 필요 하다고 한다. 그것이 수성(守域)을 하는 진영이 지닌 이점이었다.
그러나 그만한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성벽이 건재할 때나 해당 되는 말이다. 성벽이 없다면 결국 포위망에 갇힌 채 그대로 전부 쓸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전면전은 자살행위야. 그놈이 칼 한번 휘두르면 성벽이 통째로 썰려 나갈 테고,그러면 농성 자체가 무의미해져. 여기서 어떻게든 기선을 잡아야 해.’
검신이 포진한 군대를 상대로 기선을 잡는다? 당연히 그건 현실성 제로의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하지만 길잡이 역할을 맡은 전위대라면? 어떻게든 단시간에 끝장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위대장은 김상목,그 인간이지. 나랑 도일 오빠,두식 오빠가 합공하면 그 자리에서 죽일 수 있을 거야.’
승리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는다. 승패가 뻔히 정해졌다는 건 신소율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잘 알았다.
지금의 싸움은 그저 분풀이다. 허망하게 왕을 잃은 기사들이 다 같이 모여 잔불처럼 옥쇄하는 것에 지나 지 않는다. 하나라도 더 많은 적병들을 데려갈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히히. 마지막 가는 길에 김상목이면 대어지. 혹시 몰라,운 좋으면 더 데려갈 수 있을지도.’
이미 제네시스는 무주공산이다. 도망칠 사람은 다 도망친 뒤고, 남은 건 한사코 터전을 버리기 싫어하는 고집 센 노인들 정도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결사항전을 다짐하는 병사들과 간부들밖엔 남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제네시스에 남은 인원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점이다. 터전이 있는 일반 시민들을 제외하더라도,남아있는 병사들만 대략 2만이 넘어갔다. 승산이 없는 전쟁이란 걸 감안하면 이는 대단히 놀라운 숫자였다.
‘아저씨. 그래도 아저씨는 복 받은 사람이에요. 우중충하고 멋없는 오크라고 생각했는데,그래도 나름 인덕이란게 있었나 보네요. 뭐,유진이 언니 덕분도 있겠지만.’
“대장,뭔가 이상합니다.”
“……응?”
코앞까지 다가온 리베르타 전위대 에서 눈을 떼지 않던 부관이 갑자기 정색을 했다. 그는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 전위대의 선두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상목이가 저렇게 날렵한 체구였습니까? 제가 알기론 좀 더…… 거구로 알고 있는데요.”
“……!”
신소율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처음에는 갑옷 때문에 그런가보 다 했지만,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답답할 정도의 중무장은 듣던 대로의 김상목이었지만,그 덩치에서 차이가 꽤 심하지 않은가.
‘들킨 건가?’
당황한 신소율의 뇌리에 그런 생각 이 스친 순간,선두에서 내달리던 정체불명의 남자가 번쩍 칼을 뽑아들었다.
익숙한 자세,익숙한 칼.
“거,검……!”
비스듬히 사선으로 검을 치켜든 사 내의 모습에서 누군가를 투영한 신소율이 크게 기함하며 몸을 일으켰을 때,우윳빛 칼날이 벼락같은 섬광을 내뿜었다.
“……신!”
딱딱 이를 부딪친 신소율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온 것,그리고 섬광 속에서 피어난 노도 같은 검기의 무리가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검신이고 자시고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세상에 산등성이를 통째로 날려 버릴 만큼의 일순간에 쏘아 보 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을 테니까.
문답무용,그야말로 가차 없는 공격이다.
“젠장……!”
기습을 하려다 도리어 한순간에 씨 몰살을 당하게 생긴 신소율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건 피할 수도 없고,받아낼 수도 없다. 신소율을 포함한 레그나토르의 잔당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오직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