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797)
헌터클럽 792화
220. 강림(降臨)
굽이치며 쇄도한 검기가 새파랗게 질린 신소율의 목줄에 다다랐을 때.
김정인은 생각했다. 비로소 모든 게 끝났다고.
오랫동안 알고 지낸 신소율을 베어 버렸는데도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지인이라고 해봤자 드래프트동기였을 뿐이고, 아이리스에서 갈라진 이후엔 별다른 교류도 없이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딱 그 정도의 인연이었으니,쳐낸 다 하더라도 달리 아쉬울 리가 없다.
‘그렇다면 묻지. 윤희지,그 여자도 그 정도의 인연이었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눈치 없는 존재 가 끼어든다.
‘김정인,이젠 받아들일 때도 됐을 텐데. 이게 네 본모습이다. 괜한 자기부정은 목표에 이르는 길만 멀어 지게 만들지’
‘……본모습이라고?’
‘질시하고,시기하며,목적을 위해 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방해된다면 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버릴 수 있는 냉혈한이 바로 너란 인간이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나는…….,
‘다만,타고난 재능과 행운이 너무 나도 컸던 탓에 그간 부각되지 않았던 것뿐이다. 넌 굳이 그런 방식을 선택할 필요도 없이 강한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고고한 가면도, 그 남자를 만나면서 벗겨지고 말았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
거친 항변을 토해내던 입이 바늘에 꿰인 것처럼 다물렸다. 기억속에서 대륙전쟁의 마지막 장을 되살린 김정인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불쾌하게 거슬러 올라오는 감정의 격류를 눌러 삼켰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욘의 말은 비참할 만큼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그가 보였던 추태는 두 달 이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그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긁어대고 있었다.
‘솔직해져라. 네 모습은 인간의 평범한 본성일 뿐,나쁜 게 아니다. 그 본색이 어떻든 간에 네가 품은 이상은 훌륭하며,크게 웅비할 것이다. 이 욘의 사도로서.’
‘누구 마음대로?’
‘……!’
“……!”
청천벽력처럼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는 밀담을 주고받던 욘과 김정인의 의식을 크게 흐트러뜨려 놓았다.
‘놀고들 있군. 하는 말들이 아주 가관이야.’
조롱기 가득한 목소리가 반석처럼 단단하던 평정심을 와르르 허물어뜨렸다. 황망히 상념에서 깨어나 외부로 신경을 돌린 김정인은 눈을 부릅뜨며 신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베르타 전위대 앞에 떡 버티고 선 이름 모를 야산.
그가 떨쳐낸 검기의 파도에 휩쓸려 송두리째 사라질 예정이었던 야산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멀쩡한 게 아닌가.
당연히 그 안의 레그나토르 잔당들도 멀쩡하기는 마찬가지다. 하나같이 소스라치게 놀라 토끼눈을 한 그들은 서로의 안부를 살피며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 난들 알겠어? 이봐! 그쪽은 괜찮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건 리베르타 군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검신의 칼이 이번에도 무자비하게 적을 분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모질게 퍼붓던 검기의 폭우가 한순간 연기처럼 증발해 버렸으니…….
상식을 벗어난 기현상에 모두가 당황한 사이,요단강을 반쯤 건넜다 겨우 되돌아온 부관은 이마에 흥건한 땀을 훔치며 안도했다.
“사,살았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목숨은 건졌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놀라 달아났던 정신을 간신히 되돌린 부관은 서둘러 신소율의 안위를 살폈다.
“대장! 괜찮으십니…… 까……?”
다급히 치솟았던 음량이 막바지에 이르러 급격히 사그라든다.
“내,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왜 갑자기 허깨비가 보이지?”
너무 놀란 나머지,나무토막처럼 떳떳하게 굳은 채 입을 벙긋거리던 부관은 갑자기 자기 눈가를 박박 비비기 시작했다.
부동명왕(不動明王)처럼 흔들림 없이 선 사내는 부관의 우스꽝스런 반응에 픽 입매를 터뜨리며 실소했다.
“멀쩡한 사람더러 허깨비라니, 말이 심하군.”
“으헉!”
귀신이 이제는 말까지 한다. 연이은 충격에 개구리처럼 뒤로 벌렁 나자빠질 뻔한 부관은 부들부들 떨리는 눈초리로 재차 눈앞의 남자를 살 폈다.
거친 질감의 녹색 피부,수평선처 럼 떡 벌어진 어깨와 통나무처럼 굵고 우람한 팔다리,하늘이라도 기꺼이 떠받칠 수 있을 듯한 거구. 그리 고 중천에 걸린 태양처럼 반짝이는 민대머리는 생전에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다.
차이가 있다면 늘 야생마처럼 괄괄하게 뻗치던 기세가 정돈된 것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 정도였지만,부관은 이미 그런 차이점을 세세하게 따질 정신이 없었다.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 그는 이미 꼴딱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으니까.
“폐,폐,폐,폐,폐하!”
“사람 참,숨넘어가겠군.”
“아,아,아니! 저,저,정말 폐하이십니까?”
“그럼 내가 뭐로 보이나?”
저 유들유들한 말투하며,웃을 때 마다 내 천자를 그리는 미간의 미세한 주름까지.
부관은 확신했다. 이 사람은 진짜 라고. 귀신인 줄 알았던 이 남자는 틀림없는 노구덕 본인이었다.
“부,부활하신 겁니까?”
“얘기는 나중에 하지. 술이라도 한 잔 걸치면서 말이야.”
“아,알겠습니다.”
망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부관에게서 고개를 돌린 노구덕은 그대로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러자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겨서는 다람쥐처럼 눈만 크게 치뜨고 있는 신소율의 얼굴이 보였다.
냉동고 안의 동태처럼 얼어붙은 신소율은 호흡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오직 그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바라 보고 있었다.
이대로 뒀다간 끝도 없는 눈싸움만 계속해야 될 판이다. 결국,노구덕은 먼저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인석아,언제까지 얼어 있을 거냐.”
“……익!”
흐리멍덩한 시야에 비로소 초점이 돌아왔다. 그 순간,까득 잇소리를 낸 신소율은 갑자기 번쩍 손을 치켜 들어서는 노구덕의 뺨을 세게 올려 붙였다.
“엇?”
반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젖혀 손찌검을 피한 노구덕은 머쓱하니 입맛을 다셨다. 그렁그렁 눈시울을 적신 채 올려다보는 신소율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던 탓이다.
요 두 달 간, 나날이 지옥같은 하루를 보내야만 했던 그녀다. 신소율의 맘고생을 잘 알고 있었던 노구덕은 얌전히 다른 뺨을 가져다 댔다.
“피해서 미안하다. 때릴래?”
“……됐어요. 그래도 꿈은 아닌가 보네. 내려줘요.”
사뿐히 노구덕의 품에서 빠져나온 신소율은 홍수를 이른 눈가를 닦아 냈다. 하나 봇물처럼 차오른 습기는 아무리 닦아내도 멈출 기미가 보이 지 않았다.
노구덕은 끝도 없이 눈물을 훔치는 신소율을 가만히 안아주었다. 비에 젖은 새처럼 오들오들 떨리는 작은 어깨가 한없이 안쓰러웠다. 저 빈약한 어깨로 그간 얼마나 큰 짐을 짊어져야만 했을까.
“늦어서 면목이 없다. 그동안 정말…… 정말로 고생했다.”
“흑…… 으흑…… 으아아앙……
“이제부터는 내게 맡겨라.”
온통 흠뻑 젖어 엉망이 된 신소율의 얼굴이 작게 끄덕여졌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행동은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남편이 또다시 영영 사라져 버릴까 불안했던 것일까? 돌아서는 노구덕의 옷자락을 단단히 움켜쥔 신소율은 손을 놓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재차 눈을 맞춘 그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젓자,그녀는 마지못해 손에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노구덕이 생환했다고 해서 모든 매듭이 줄줄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가장 복잡하고 거대한 난관이 남아 있었다.
중턱 아래에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저 남자,검신 김정인이라는 난관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무신의 생환.
천천히 수풀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오크의 모습은 대치중 이던 양 진영을 피아를 가리지 않고 뒤집어 놓았다.
“폐하!”
“저,정말이잖아?”
“말도 안 돼!”
적이든 아군이든 그 입에서 내뱉는 말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았다. 조금 전의 부관처럼 눈가를 비비는 자가 있는가 하면,자기 뺨을 손으로 철썩 후려치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에,세상에……!”
“형님……
두 손으로 입을 가린 퀸젤은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계속해서 ‘세상에!’만 연발했고,이두식은 끝내 참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도일 역시 말 못하는 붕어 꼴이 되어 애꿎은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반면,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리베르타 진영의 반응은 만고의 악당이 부활하기라도 한 것처럼 격렬했다.
“우우! 뻔뻔하게 낯짝을 디밀다니!”
“또 죽으려고 온 거냐!”
“차라리 잘됐다! 다시 관짝에 처넣어주마!”
수만의 혀가 뾰족한 날붙이가 되어 그를 공격했다. 불씨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들고 일어난 적의는 삽시간에 노구덕을 찢어죽일 것처럼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노구덕으로선 기가 찰 일이었다. 생전 한번 보지도 못한 자들이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격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내가 지들 부모를 죽이기라도 했나? 언제 봤다고 저 난리인지 모르겠어. 하여튼 간에 충직한 개새끼들이란 말이야.”
강아지들이 떼 지어 짖어봐야 결국은 똥강아지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 왕왕거리는 울음에 호랑이가 격동할 필요는 없었다. 노구덕은 도리어 우 우 야유하는 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귓구멍을 후비적거리며 적들을 도발 했다.
“저,저놈이!”
“죽일 놈!”
그 제스처를 본 리베르타의 병사들은 눈에 핏대를 세우며 분노했다. 수많은 헌터가 일시에 피워 올린 살기는 찌익찌익 울리던 벌레 소리조차 멈추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행동에 나서는 자는 없었다. 사냥개들의 주인,검신의 명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사이 숱한 야유를 받으며 마침내 평지까지 내려온 노구덕은 약 이백여 미터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김정인과 마주했다.
“흐흐. 이거 완전히 천하의 대악당이 되고 말았군. 우리 김정인 씨의 솜씨가 아주 대단한걸? 원래부터 추잡스러운 놈인 건 알았지만,이건 정말 갈 데까지 갔군그래?”
“……당신은 분명 죽었을 텐데.”
“놀랐나? 하긴,다 끝나서 샴페인 터뜨릴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갑자기 웬 놈이 지옥에서 기어 나와 재 가루를 뿌려대니 열이 뻗치겠지.”
“……”
“나도 내가 정말 끝장난 줄 알았거든.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너희 두 놈을 그냥 내버려 두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더란 말이야.
길쭉하게 돋아난 송곳니가 턱 끝까지 다다랐다. 쿵! 별안간 크게 발을 구르며 버티고 선 노구덕은 적의를 내뿜는 수만의 군세를 향해 천둥 같은 포효를 터뜨렸다.
“김정인!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검신이고 나발이고,그 역겨운 가면을 오늘 깨끗하게 벗겨주마!”
“무엄하다!”
“배신자 주제에 잘도 지껄이는구나!”
생신(生神)으로 떠받들어지는 검신의 면전에서,대놓고 그를 죽여 버리겠다 선포했다.
용수철이 누르면 튕겨 나오듯,격한 반응이 뒤따르는 건 당연한 일.
“배신자라고?”
끝이 말려 올라간 입술이 더욱 사 납게 비틀렸다. 따갑게 쏟아지는 수 만의 야유가 가소로웠다.
“뭐 하나 물증도 없이 김정인 저놈이 지목하면 그저 배신자라는 거냐? 짹짹대는 앵무새만도 못한 놈들이 군. 생각 없이 주둥이만 나불거릴 거면 어깨 위의 그건 왜 달고 있는 거냐?”
“뭐,뭐라고……!”
“그래,이해한다. 우릴 어떻게든 배신자로 몰아야만 너희들이 득세하니까. 언제나 정도를 표방하는 검신,리베르타의 방식치곤 치졸하지만 어쩌겠나? 너희들은 원래 그런 놈이었던 걸.”
한껏 달아오른 심장이 요동치며 날 뛰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뜨거운 피를 맛보고 싶다고,이 갑갑한 제 약을 풀어 달라 외쳐댔다. 무의식의 기저에 잠들어 있던 잔혹한 야성이 혈향을 맡고 깨어나기 일보직전이다.
점점 붉게 얼룩지는 시야가 이렇게 반가울 수 있을까. 신경 줄 마디마디가 저릿하도록 용솟음치는 활력이 더없이 상쾌하다.
컨디션은 최고조. 살육을 벌이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다.
“……나는 너희들을 탓하지 않는다. 설득할 생각도 없고,그럴 시간도 없지. 그러니까 너희들도 날 탓 하지 마라. 그냥 머리는 비우고 부딪치면 되는 거야. 이긴 쪽이 살아남는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겠지?”
검을 고쳐 잡은 김정인은 끈적이며 달라붙는 노구덕의 살기를 담담하게 받아냈다.
“다시 죽길 바란다면,못해 드릴 것도 없겠지요. 어차피 살려둘 생각도 없었습니다.”
“흐흐흐, 좋다. 그렇게 나오셔야 지.”
딱! 노구덕의 손가락이 기다렸다는 듯 튕겨졌다.
그 순간,리베르타 군의 후방으로 부터 살을 에는 한파가 불어닥쳤다. 동장군이 친히 입김을 불어넣은 듯 한 강추위는 삽시간에 권역을 넓혀 나갔다.
햇속까지 스미는 엄동설한에 노출 된 병사들은 딱딱 이를 부딪치며 괴로워했다. 창백하게 뜬 얼굴엔 벌써부터 하얀 서리가 끼는 중이었다.
“으으으으으……!”
“이,이건……!”
뒤늦게 이상을 알아차린 김상목은 딱딱하게 얼어버린 수염을 떨며 기함했다.
자로 젠 듯 정확히 리베르타의 병력만을 권역에 집어넣은 강추위,그리고 점차 느려지는 마력의 유동(遊 動). 대륙에 이 정도 규모의 마력동결을 일으킬 수 있는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서리여왕 하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