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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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드래프트(Draft)
2# 드래프트(Draft)
-짜르르르릉! 짜르르르릉!
난데없는 자명종 시계 소리가 적막을 뚫고 울려댔다. 짤랑거리는 소리는, 그리 큰 소음은 아니었지만 기도비닉을 유지하느라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일행에게는 그야말로 염통이 절로 쫄깃해지는 소리였다. 일행이 망연한 얼굴이 되어 소리의 진원을 찾느라 허둥대는 사이.
-그오오오오오…….
쿵! 쿵!
놈들이 깨어났다. 하나는 앞에서, 다른 하나는 뒤에서. 막 깨어났음에도 놈들은 정확히 일행의 위치를 알고 접근하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며 잠든 척을 하고 있었다는 듯이. 육중한 발이 지면을 강타할 때마다 일행의 심장도 덜컥덜컥 흔들렸다.
“이건… 의도된 함정이군요.”
“으으. 이렇게 되면 싸울 수밖에 없겠어요.”
“씨팔! 결국 이렇게 되는구만! 오냐, 저놈들도 똑같이 대갈통을 부숴주면 되겠지!”
다들 나름대로 전의를 가다듬는 사이 하태경은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이대로 두 놈을 한 번에 상대하는 것보단 이쪽에서 선공을 하는 게 낫습니다. 처음 들어온 곳, 입구 방향의 놈부터 처리합시다. 후퇴도 염두에 두어야 하니까요. 노구덕 씨와 안혜미 씨를 제외한 근접전투원은 전원 투입, 황기종 씨와 최나연 씨는 대기합니다. 윤희지 씨와 제가 선공을 할 테니 나머지 분들은 이쪽 공격이 끝난 후에 움직여 주십시오. 그럼 갑시다. 안혜미 씨, 선두를.”
“알았어요.”
램프를 받아든 안혜미는 한 차례 심호흡을 내쉬고 땅을 박찼다. 사전에 협의된 그녀의 역할은 시야 확보. 사방을 쉬지 않고 오가며 다른 일행이 전투를 지속할 수 있도록 빛을 비추는 일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누구보다 빨리 놈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었다.
“……!”
하마터면 발목에 힘이 빠져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안혜미는 이를 악물고 놈의 정면으로 그대로 달려갔다. 놈과의 거리가 줄어들수록 그 기괴한 몰골도 점점 선명해졌다.
가까이서 본 거대 해골은 역시나 엄청난 위압감을 떨치고 있었다. 앞서 본 발과 다리는 말할 것도 없고, 두꺼운 팔과 몸 역시 온갖 뼈의 군집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간처럼 사지가 달려있긴 해도 짧은 몸통에 비해 팔다리가 긴 편이라 전체적인 형상은 상당히 기괴했다. 첨단에 달려 있을 머리는 높이가 너무 높아, 램프의 불빛으로 비추기엔 무리가 있었다.
“얼어붙은 창(Frozen spear)! 얼어붙은 창(Frozen spear)!”
하태경의 머리 위에서 생겨난 거대한 고드름들이 파르스름한 빛을 흩뿌리며 쏘아졌다. 목표는 놈의 왼팔. 뾰족한 고드름은 놈의 단단한 골격을 뚫진 못했지만 주변을 급속히 냉각시키며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태경은 처음부터 놈의 팔꿈치와 손목의 관절을 얼게 만들어 왼팔을 무력화시킬 생각이었다.
“바람의 칼날(Wind blade)! ……충격파! 충격파!”
반면 윤희지가 쏘아 보낸 바람의 칼날은 거대 해골의 오른팔을 수없이 할퀴고 지나갔지만 외골격이 자잘하게 상하는 선에서 그쳤다. 이 정도는 놈에게 간지러운 수준. 똑똑한 윤희지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처음 거대 해골을 봤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자신의 윈드 블레이드가 놈을 상대하기엔 상성이 좋지 않을 것이란 예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황기종에게 빌려 온, 충격파 마법이 충전되어 있는 완드였다. 하태경처럼 팔 자체를 무력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행동에 제약은 줄 수 있으리라.
윤희지는 잠시 뜸을 들이며 근접전투원들이 놈에게 어느 정도 접근하길 기다린 후, 타이밍에 맞춰 충격파를 날렸다.
펑! 펑!
무릎 뒤쪽에서 연달아 터진 강력한 충격파가 터지자, 놈은 거대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의도한 바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자 윤희지는 나이스 포즈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남은 시나리오는 뒤에서 다가오는 다른 놈이 합류하기 전에, 놈을 이대로 끝장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롯이 지금 달려드는 이들의 몫이었다.
“우랴아아압!”
가장 먼저 달려 온 김규식은 무방비로 노출된 놈의 무릎을 보자 먹이를 발견한 야수처럼 눈을 빛냈다. 그는 양 손을 만세 하듯 치켜들고는, 곡괭이질을 하는 것처럼 그대로 내리찍었다.
콰지지직!
제 아무리 몇 겹으로 덧댄 골격이라도 풀스윙으로 휘둘러진 김규식의 메이스를 버티진 못했다. 일격으로 놈의 무릎을 반파시킨 김규식은 거칠게 으르렁거리며 팔뚝의 근육에 불끈 힘을 주었다. 다음 공격으로 놈을 완전히 불구로 만들어 줄 셈이었다.
그러나 고무적인 활약을 펼치는 것은 김규식 뿐, 다른 이들은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상성 탓이 컸다. 김규식처럼 ‘파괴’에 특화된 스타일이라면 몰라도 신소율의 소검, 이정한의 손도끼, 김정인의 검 같은 얄팍한 무기로는 놈의 골갑(骨甲)을 뚫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나무꾼처럼 한 곳만 집중적으로 타격하는 것이 전부였다.
‘좋지 않다.’
이대로는 하태경과 윤희지가 만들어 낸 기회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아니, 더 시간이 흘러 뒤의 녀석이 합류하면 아예 손도 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 자명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김정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새 그의 눈은 어둠 속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시야에 보이지 않는, 놈의 머리를 노려봤다.
‘지금까지 해골들은 모두 머리가 약점이었다. 이놈이라고 다를 건 없어.’
열심히 곡괭이질을 하는 김규식이 보인다. 그 위로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 놈의 거대한 허벅지가, 허벅지 위에 걸쳐져 있는 두터운 팔뚝이, 다시 그 위에 붙어 있는 넓은 어깨가 너무나 선명하고 또렷했다. 그 위로 그려지는 하나의 루트. 그것은 오직 이 순간 김정인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길이었다.
김정인은 천천히 제자리 뛰기를 시작했다.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고, 검은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이대로 뛰어 오른다면 하늘까지 닿지 않을까? 그렇게 느낀 순간, 그의 몸은 이미 크게 도약하고 있었다.
“어?”
김규식의 어깨를 밟고,
“김정인 씨!”
놈의 허벅지를 밟고, 다시 팔뚝을 밟고 뛰어올라,
“세상에……!”
3미터가 훨씬 넘는 높이를 넘어 단숨에 어깨까지 착지했다. 놈의 두개골은 바로 지척. 이대로 그 중앙에 커다란 바람구멍을 내주면 끝이었다.
그런데.
“제물……?”
놈의 머리는 온전한 두개골의 형태가 아니라, 사발 모양으로 뭉친 뼈마디 속에 걸쭉한 흑갈색의 덩어리를 담고 있는 형상이었다. 100개? 200개? 거대한 사발이 담긴 심장의 수가 몇 개나 되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이미 맥동하는 심장이라기 보단 짓무른 고깃덩이들이었다.
코를 잘라내고 싶은 악취 속에서도 김정인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 속내는 어느 때보다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저걸 어떻게 없앤다……?’
저 죽사발을 퍼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일이 다 베고 있자니 그것도 못할 짓이다.
-쿠오오오오!
기우뚱, 발판삼아 딛고 있는 어깨가 크게 흔들리며 김정인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함께 밑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악! 다 왔어! 다 왔다고! 죽엇! 마력포!”
“진정해요! 모두 한 곳으로 모여요!”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배후에서 접근하던 놈은 홀로 나타난 게 아니었다. 놈의 주변에는 수십의 해골들이 이를 딱딱거리며 포진하고 있었다. 호위병을 거느린 왕처럼 등장한 놈은 김정인이 밟고 있는 놈보다 조금 더 큰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거대 해골은 팔을 들어 최나연의 공격을 가뿐히 막아내더니 고막을 터트릴듯한 포효를 내질렀다.
-콰우우우우우—!
“으아아악!”
놈의 포효에 깃든 살의는 그 자체로 강력한 정신공격이었다. 끔찍한 살기로 물든 염파(念波)가 뇌신경을 강타하자, 안 그래도 사그라지던 전의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줄곧 상태가 좋지 않던 황기종이 울컥 피를 토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노구덕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더니 진짜 거북이가 된 것처럼 방패 안에 웅크려 숨었고, 최나연은 게거품을 문 채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다른 이들도 꼴사나운 모습은 면했지만 얼굴에 핏기가 없는 것이,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봐! 김정인!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멀뚱히 서 있지만 말고 끝장을 내!”
막 달려든 해골 하나를 처리한 김규식이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머리 위에 제물이 있습니다!”
“뭐라고……!”
일행은 김규식, 이정한, 신소율, 안혜미가 방진을 만들어 전투불능에 빠진 나머지 일행을 보호한 채 악전고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해골들은 어찌어찌 처리하고 있었지만, 양쪽의 거대 해골들이 서서히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만약 놈들 중 한 놈이라도 방진 한가운데를 공격한다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은 잘 다져진 고깃덩이가 돼버릴 터였다. 아니, 이건 만약이 아니라 시간문제였다.
놈들은 점점 다가오는데, 방법이 없었다. 프로즌 스피어나 윈드 커터로 머리를 조준한다? 안타깝게도 하태경이나 윤희지의 컨트롤 능력은 그런 곡사포 수준의 움직임을 구현할 수준이 못됐다. 일행에게는 4, 5미터나 되는 괴물의 머리를, 그것도 맨 윗부분을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 그나마 김정인이나 되니 거기까지 뛰어 올라간 것이지, 나머지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짓이었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하냐고! 끄아합!”
“제길. 시끄럽게 굴지 마.”
이정한도 드물게 욕설을 내뱉으며 초조한 빛을 드러냈다. 방진 속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던 윤희지는 시시각각 엄습해 오는 불길한 그림자를 떨쳐내려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다 거대 해골이 쿵! 하고 발을 내딛어 튕긴 뼛조각이 바로 앞까지 튕기는 걸 보더니, 힘겹게 몸을 일으켜서는 목청껏,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김정인 씨! 칼로 머리를 헤집어 버려요! 어떻게든 해 보란 말이에요! 이대론 다 죽어요!”
울음기마저 섞여 있는 절규. 김정인은 이미 한참 전부터 놈의 머리에 죽을 쑤듯이 마구잡이 칼질을 하고 있었다. 건더기처럼 떠 있는 심장조각들이 칼질에 휩쓸려 이리저리 사방으로 튀어나갔지만, 해골들의 움직임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아아악!”
결국 방진이 무너졌다. 첫 이탈자는 신소율이었다. 상반신만 남은 해골이 엉금엉금 밑에서부터 기어온 것을 미처 살피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뭉툭한 날에 찍힌 허벅지에서 왈칵왈칵 쏟아져 나온 피가 청바지 위를 붉게 수놓았다. 수많은 공격을 이리저리 멋지게 피해내는 것이 장기인 그녀다. 중상을 입은 다리로는 특기를 살릴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을 느낀 해골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신소율은 뒷걸음을 치다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아…….”
시야를 가득 메우는 해골들을 본 신소율의 눈빛이 암담하게 물든 찰나,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하얀 얼굴을 뒤덮었다.
“우와아아아아—!”
콰아앙!
육중한 타워실드로 전신을 가리고, 멧돼지처럼 돌진해 해골들을 밀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노구덕이었다. 노구덕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다해 해골들을 밀어낸 뒤,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뭐해! 빨리 안으로 들어가! 죽고 싶어!”
“아, 아저씨……?”
“아, 좀! 들어가라고! 나 힘들어 죽겠으니까!”
연이은 다그침에 번쩍 정신이 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가 다리를 절룩이며 향한 곳은, 방진의 중앙이 아니라 땀을 뻘뻘 흘리는 노구덕의 뒤였다.
‘이렇게 죽는구나.’
쉴 새 없이 방패전면을 난타하는 놈들의 공격을 이를 악물고 막아내던 노구덕은 점점 몸이 뒤로 밀리는 것을 느꼈다. 슬슬 힘에 부치고 있었다. 하긴 멍청한 놈들이 전면만 고집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칼침을 맞았을 테니, 잠시나마 버틴 것도 선전이라면 선전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은 꼴사납지 않아서 다행…… 엉?’
나름대로 만족스런 최후를 준비하던 노구덕은 밀려나던 등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지자 황망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창백한 얼굴에 쌕쌕 숨을 몰아쉬고 있는 신소율이었다. 당연히 후방으로 물러났을 줄 알았던 그녀가 바로 뒤에 있는 것을 본 노구덕은 기가 막혔다.
“야! 이 계집애야! 왜 말을 안 들어!”
신소율은 처연한 미소를 띠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다 죽어요. 늦게 죽으나 빨리 죽으나 상관없잖아요? 전 빚지는 거 싫거든요. 죽을 때 죽더라도 목숨 빚은 갚아야죠.”
“이게……!”
“아, 아저씨! 앞! 앞! 꺄아악!”
투콰아앙!
노구덕은 순간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포탄소리 비슷한 걸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무중력 공간에 홀로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의식이 혼미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방패를 들고 있는데 손이 가볍지?’
그리고, 정신이 돌아왔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온 몸을 벽돌로 찧는 것 같은 끔찍한 통증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
양 팔은 완전히 부러졌는지 기이한 각도로 꺾인 채 허연 뼈를 일부 드러냈으며, 형편없이 우그러진 방패는 저만치 멀리 날아가 있다. 뱃속의 창자는 도대체 몇 바퀴가 꼬인 건지 숨을 내쉴 때마다 내장이 끊어질 듯 아파왔다. 몸을 일으킬 수도 없는 걸 보니 척추도 성치는 못한 것 같았다. 아마 갈빗대나 늑골도 몇 대는 나갔으리라. 이 정도면 장의사가 얼씨구나 하고 달려올 정도의 훌륭한 반송장이었다.
아무리 불의의 일격이라지만, 단 한방에 이렇게 되다니. 노구덕은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괴물과 싸우려 했는지 깨닫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크하, 하… 씨발놈이…… 기습을 해?”
“아, 아저씨…….”
옆에서 소곤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신소율이었다. 바로 뒤에 있었기 때문에 같이 뒤엉켜 날아온 모양이었다. 노구덕은 머리를 돌리려 애썼지만, 뻣뻣하게 굳은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너… 괜찮냐……?”
“…움직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아저씨는요?”
점차 목소리가 또렷해지는 것이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아마 그의 몸이 쿠션 역할을 했으리라. 노구덕은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처음으로 자신의 뱃살에 감사했다. 적어도 하나는 살렸으니, 개죽음은 아닌 셈이었다.
“아저씨? 파, 팔이…… 다 부러졌잖아요! 왜 그래요? 눈 좀 떠봐요! 어서!”
이제야 노구덕의 상세를 보았는지, 신소율이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철썩철썩 뺨을 치기까지. 노구덕은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누가 접착제를 붙여놓기라도 했는지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았다. 그는 가물가물한 의식을 겨우 부여잡으며 말했다.
“야. 나는… 못 버텨.”
“무슨 소리에요! 살 수 있어요! 눈 좀 뜨라구요!”
뚝. 뚝. 뜨거운 액체가 안면을 적셨다. 눈을 감고 있지만 신소율이 울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노구덕은 그냥 그것으로 만족했다.
‘나 죽을 때 우는 사람은 없을 줄 알았더니……. 이것도 나쁘진 않군.’
“내 말… 잘 들어. 램프…… 있지?”
“네? 아, 네……. 있기는 한데… 지금 이 상황에 무슨……?”
“어차피… 죽는다며. 그럴 바엔… 화끈하게… 질러버려. 내 품에… 기름먹인 옷이 있으니까… 그거랑…… 램프 기름 다 털어서…… 불을 지르란 말야. 저 녀석들… 아마도… 불에 약할 테니까.”
“그게 무슨……!”
“…말대꾸하지 말고, 서둘러.”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마지막 말만은 평온하고, 또렷했다. 노구덕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얼굴엔 변함이 없었지만, 코끝의 숨소리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신소율은 받치고 있던 그의 머리를 천천히, 혹여나 다칠세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히고는 그 품에서 박정환의 겉옷을 꺼냈다. 본래는 횃불을 만들 용도로 기름을 먹여놨던 옷이었다.
이윽고, 그것을 소중히 품에 안은 신소율은 결연히 주먹을 그러쥐더니, 다리의 통증마저 무시하고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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