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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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내면의 그림자
마음이 참담했으나 우선은 이 난장을 수습해야 했다. 노구덕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서럽게 오열하는 신소율에게 다가갔다.
“소율아…….”
“…우으…… 끄으흑…….”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봤지만, 이불 속에서 들려오는 건 숨죽여 우는 울음소리 분이었다. 하긴, 믿었던 동료에게 겁탈을 당할 뻔했는데 어떤 위로가 그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노구덕은 착잡하게 한숨만 내쉬었다. 뭐라도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머리가 지끈거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두식아.”
“예.”
“고아원 애들 있는 곳에 가서 유진이 좀 빨리 데리고 와라. 지금 당장.”
“예, 큰형님.”
“도현이 너는 이 자식 제대로 결박해 놔. 진솔이는 문수 형님 불러오고. 이대로 죽어버리면 안되니까.”
노구덕은 망부석이 되어 있는 멤버들에게 하나하나 지시를 내려 현장을 정리했다. 주변 멤버들의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신소율이 뒤집어쓰고 있는 이불이 움찔움찔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무척 처량하고 안쓰러워, 노구덕은 이불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떨리는 몸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소율아, 나쁜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나중에 나랑 따로 얘기하자. 응?”
“…….”
“금방 유진이가 올 거야. 내가 뒤처리 하는 동안 힘든 일 있으면 혼자 삭히지 말고 유진이에게 얘기해. 알았지?”
대답은 없었지만, 이불 한 귀퉁이가 작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넋을 아주 놓아버리진 않은 것 같아 그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노구덕은 신소율을 위해 서둘러 자리를 피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를 혼자 두는 것이 불안하긴 했으나, 그는 지금 바로 일련의 사태들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그렇다고 다른 멤버들을 신소율 옆에 두자니 그도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믿을 건 오로지 임유진뿐.
그는 속으로 임유진이 빨리 도착하기만을 기원했다.
‘유진아, 빨리 와라.’
그때였다.
“어라? 벌써 끝났네에~?”
사뿐한 발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온 소피아는 거품을 물고 기절한 이성빈과 그를 단단하게 결박 중인 권도현, 그리고 멀거니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노구덕을 천연덕스럽게 살폈다.
“주인님? 어떻게 됐어요? 저, 늦게 와서 하이라이트를 미처 못 봤네요.”
“…소피아.”
까드득 잇소리를 낸 노구덕은 그녀의 소매를 낚아채어 밖으로 끌고 나갔다. 손끝의 떨림을 통해 소피아가 아등바등 발버둥치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는 전혀 힘을 풀 마음이 없었다.
“아, 이것 좀 놔주면 안 돼요? 저도 걸을 수 있다고요!”
“닥치고 따라와.”
노구덕은 그녀를 포대자루처럼 질질 끌어 그의 방 앞, 즉 4층의 복도 끝에 도착했다. 거기까지 와서야 겨우 노구덕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소피아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얼굴을 찌푸리다가, 방문 앞에 걸려 있는 노구덕의 명패를 확인하자 짐짓 수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이참, 주인님도 급하시긴. 저쪽이 얼마나 격렬하게 했으면 절 이런 곳까지… 켁!”
노구덕은 팔을 뻗어 소피아의 가느다란 목줄기를 틀어쥐었다. 숨통을 조이는 손아귀의 압력에, 그렇지 않아도 하얀 소피아의 낯빛이 표백제를 바른 것처럼 해쓱하게 탈색되었다.
“끄으읍……!”
“장난할 기분 아니다. 너, 알고 있었지? 대체 뭐냐? 이거… 네 계획이냐?”
“끕……!”
“돌이켜보면 성빈이 놈을 소율이에게 붙인 것도 네 의견이었어. 사전에 그놈하고 공모한 거냐? 만약 그렇다면 왜 날 위로 올려 보낸 거지?”
소피아의 안색이 창백함을 넘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노구덕은 그녀가 졸도하기 직전에야 겨우 손아귀의 힘을 풀어주었다.
“콜룩, 콜룩! 허어억… 흐억… 후으으…….”
한참동안 기침과 심호흡을 번갈아가며 해대던 소피아는 안정을 되찾은 뒤에도 여전히 실없는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후우… 뭐가 궁금하다고요? 목이 졸려서 못 들었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저 유들유들한 낯짝을 보면 전혀 못 들은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분명 들었을 것이다. 노구덕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폐부 깊은 곳에서 살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죽일까?’
그는 짧게 고민했다. 노구덕은 소피아와 이성빈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사실 드러난 정황이 그렇기도 했다. 그러나 본인의 입으로 확실히 확인하기 전까지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이번 일… 네가 꾸민 거냐? 확실히 말해.”
“아아, 난 또… 그게 뭐 대수라고. 맞아요. 제가 꾸민 일이에요. 잘했죠?”
노구덕의 입매가 푸들푸들 떨려왔다. 노구덕은 소피아를 그대로 바닥에 거꾸로 꽂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겨우 내리눌렀다.
“…왜? 무슨 이유로?”
“에이, 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요? 신소율 씨가 주인님을 너무 좋아라 하니까, 제가 그 소원을 들어준 거 아녜요? 주인님은 이제 가서 차려진 밥상을 먹기만 하면 된다고요. 상처 입은 여심을 감싸는 데에는 사랑하는 사내의 체온만한 게 없죠.”
자기도 숫처녀인 주제에, 그녀의 말은 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이… 이 쳐 죽일 년이……! 겨우 그딴 이유로…….’
저 혼자 희희낙락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단 하나의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이건 정말 구제불능이다. 정말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미친년도 이런 미친년이 없었다. 상식의 기준이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달랐다.
노구덕은 허탈함이 짙게 밴 음성으로 말했다.
“잘못했으면 소율이가 겁탈을 당할 수도 있었어. 그건 고려하지 않은 거냐? 허, 아니… 물어본 내가 병신이지. 그 이전에 조금이라도 소율이를 생각했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짜지는 않았을 테니까.”
“뭐 어때요?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쟁취하는데 그 정도 아픔은 참고 견뎌야 하는 거 아녜요? 고작 피막이 찢어지는 정도로 엄살을 부릴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아까부터 서로의 대화 노선이 자꾸 엇나가는 느낌이었다. 노구덕은 소피아가 일부러 핵심을 피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평소에는 그토록 말귀를 잘 알아먹으면서 지금만 먹통이 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넌… 도를 넘었어. 내가 처음 널 거둘 때 분명히 말했을 텐데. 우리 애들에게 피해 주지 말라고. 넌 그걸 어긴 거야.”
“나 참, 신소율 씨는 오히려 제게 고마워해야 된다고요. 이게 어떻게 피해… 끼아아아아악—!”
소피아는 목청이 찢어질 듯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노구덕이 심령을 통해 그녀의 노예각인을 활성화한 것이었다. 각인을 통해 전해지는 고통은 말초신경을 직접 자극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통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단번에 의식을 잃은 소피아의 몸이 아직도 경련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그 정도를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노구덕이 발동한 각인은 보통의 노예각인이 아니었다. 데모나가 넵튠을 촉매로 소피아의 몸에 한땀한땀 정성스레 새겨놓은 노예각인은 일종의 저주(咀呪)도 겸하고 있었다.
그 저주란 다름 아닌 체내 마력의 말살. 한 번 발동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내부에서부터 마력이 휘도는 통로를 모조리 파괴하여 마법이란 재능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저주였다. 마력의 상실. 이 말은 곧 지금의 소피아는 그저그런 열등한 흡혈귀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노구덕이 이 저주를 발동시켰단 것은, 이미 소피아에게서 마음이 떠났다는 말과도 같았다.
“당장 목을 분질러버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싸늘한 시선이 바닥에 볼품없이 쓰러져 있는 소피아를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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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했던 파티의 다음날, 아이리스는 전례 없이 우울한 아침을 맞이했다. 클럽 홀을 싸고 도는 납덩이같은 중압감은, 건물 안을 바삐 돌아다니는 사용인들로 하여금 발소리조차 함부로 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직접 연관이 되어 있지 않은 사용인들조차 이런 분위기인데, 간밤의 사건에 연루된 아이리스 멤버들은 어떻겠는가. 개인실이 몰려 있는 4층의 복도는 오가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방문의 명패를 보면 대부분이 방 안에 있는 건 확실한데, 어떤 소음이나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리스의 모든 멤버는 각자의 방 안에서 은인자중하며 노구덕의 호출을 기다렸다.
그 시각, 개인집무실에서 날밤을 샌 노구덕은 아침이 되자마자 두 명의 멤버를 호출했다. 그가 호출한 사람은 데모나와 임유진이었다.
임유진 역시 밤새도록 신소율을 돌보느라 한잠도 자지 못했는지, 노구덕과 마찬가지로 부스스한 얼굴이었다. 반면 데모나는 간밤에 난 사단을 알고 있을 텐데도 역시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노구덕이 두 사람을 부른 것은 이성빈과 소피아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기 전에 조언을 듣기 위함이었다. 공식결정은 멤버들을 소집한 뒤에 내려질 테지만, 개인적으로는 가급적 지금 결단을 내리고 싶었다.
그는 두 사람을 앞에 앉혀두고 어제 있었던 일을 토씨하나 빠뜨리지 않고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된 거다.”
노구덕이 이야기 하는 동안,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머리를 갸웃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표정변화를 보여주던 임유진은, 그의 말이 끝나자 애매모호한 낯빛이 되었다.
“이상하네요.”
“이상하다고?”
“네. 소피아 씨의 행동은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러워요. 굳이 이런 일을 벌인 동기는 제쳐두고라도, 그녀의 머리라면 이성빈 헌터와 전혀 엮이는 일 없이 계획을 진행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구덕 씨의 말을 들어보며 그녀는 마치…….”
“…마치?”
“고의로 구덕 씨를 자극한 것 같아요. 공범임을 대놓고 흘린 것도 그렇고, 그 이후의 언행도 꼭 도발하는 것처럼 자극적이잖아요? 괜히 당신의 신경을 긁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이건 정말 미심쩍네요.”
“으음…….”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당시의 소피아는 어딘가 좀 이상했다. 그 열 받게 하는 대사들도 그렇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노구덕의 신경을 건드렸다. 노구덕은 의아했다. 대체 자신을 화나게 해서 뭘 얻겠다고?
“이만 죽고 싶나보지.”
“데모나?”
“뭘 고민해? 궁금하면 그년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각인까지 썼다며?”
“그래.”
“죽고 싶은 게 소원이라면 더 잘됐네. 그년도 이제 헌터 생명이 끝장난 거니까, 미련 없이 죽을 수 있을 거 아냐? 아, 그냥 죽이는 건 그건 너무 관대하니까, 차라리 창녀로 팔아버리는 건 어때? 얼굴은 반반하잖아.”
역시 소피아와 사이가 나쁜 그녀답게 한마디 한마디가 잔혹하고 살벌했다. 노구덕은 그녀의 생각에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간밤에 했던 생각 중에는 데모나의 말처럼 소피아를 성노로 팔아버리는 선택지도 있었으니까.
“이성빈 헌터는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노기가 치미는지 이성빈을 언급하는 임유진의 눈가에 옅은 붉은색 기운이 어렸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도 신소율을 보살피고 있었기에, 당사자를 제외하면 그 누구보다 이성빈에 대한 분노가 큰 사람이었다.
“생각할 것도 없어요. 이성빈 헌터가 저지른 행위는 즉결처형을 해도 무방해요. 동료를 강간하려고 한 시점에서 이미 그는 헌터 자격을 상실했으니까요. 지금은 리버로 대우해도 상관없다고 봐요.”
“나도 마찬가지야. 그놈 관련해서는 이미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소피아는 고민의 여지가 있었지만, 현행범인 이성빈은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노구덕은 이미 그에 대한 판결을 마친 상태였다.
대강 두 사람의 조언을 참고한 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누적된 피로로 가벼운 현기증이 밀려왔지만, 몸에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 가시게요?”
“지하에. 본인에게 직접 들어봐야지.”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소피아가 수감되어 있는 아이리스 라인 지하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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