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99)
0099 / 0777 ———————————————-
22# 꽃을 취하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고, 엿새가 지나면서 마침내 열흘째가 되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노구덕이 지하를 다녀갈 때마다, 소피아의 정신은 점차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그녀의 정신 상태는 너절해진 거적때기나 다름없었다.
노구덕은 악랄하게도 딱 죽지 않을 정도의 혈액만 선심쓰듯 공급하면서 무던히도 소피아를 괴롭혔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소피아가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는 거의 같았다.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노구덕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따를 시에는 소정의 보상이 주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차마 보상이란 말이 아까울 정도의, 쥐 눈물만큼의 혈액. 소피아는 그마저도 감사히 핥아먹을 정도로 철저히 조련되고 있었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노구덕은 약간 다른 방식의 훈육을 도입했다. 그날, 노구덕은 임유진과 함께 지하를 방문했다.
소피아는 그 인기척만 듣고도 군침을 삼키며 그를 맞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파블로프의 개가 따로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인사를 하다가 그 옆의 임유진을 보더니 약간 멈칫거렸다.
“주, 주인님……. 오셨어요?”
“그래.”
노구덕은 담담하게 그녀의 인사를 받아준 반면, 임유진은 소피아의 초라한 행색에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소피아의 행색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쇠사슬로 매여 있는 그녀의 주변으로는 몸에서 나온 배설물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고, 늘 청결하던 몸뚱어리도 오물이 묻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추레하기 짝이 없었다. 개돼지나 다름없는 소피아의 몰골은, 그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임유진마저도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 생기 없는 얼굴을 한, 거지꼴의 여인이 한때 머리 하나로 라이오넬의 정상에서 군림했으며, 아이리스를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놀던 소피아가 맞단 말인가? 이성빈을 처단한 이후 노구덕의 내면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걸 감지하긴 했지만, 그가 이 정도로 소피아를 혹독하게 다룰 줄은 짐작하지 못한 임유진이었다.
그 사이, 무심하게 울리는 그의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엊그제 준 포상은 어땠어? 맛있었냐?”
“네, 네. 정말 맛있었어요.”
소피아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입맛까지 쩝쩝 다시는 시늉을 하며 과장스런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그러나 실상, 그녀가 저번에 받은 포상이란 것은 토마토 주스와 닭의 피가 반씩 섞인, 혈액이라 하기에도 뭣한 잡스런 물건이었다. 그것을 포상이랍시고 받은 소피아는 음식물 쓰레기를 입 안에 들이붓는 것 같은 끔찍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흐흐… 괜찮았다니 다행이군. 나름 공들여 만든 칵테일이었는데.”
“어, 어쩐지… 정말 맛있었어요.”
임유진은 앵무새처럼 정말 맛있다는 말만 반복하는 소피아의 입술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억지로 시늉을 한다는 것은 최소한 이성이 남아 있다는 뜻.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그런 임유진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노구덕은 대뜸 소피아에게 말했다.
“사과해라.”
“…네?”
그 뜬금없는 요구에 어리둥절해진 것은 소피아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어안이 벙벙하여 노구덕을 쳐다보았다.
노구덕은 태연한 신색을 유지한 채, 임유진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네가 저지른 일 말이야. 당사자를 데려 왔으니 사과해야지. 네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단 소리다.”
“…당사자라니요?”
“……?”
소피아는 물론이고 임유진 또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녀는 사전에 노구덕으로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언질을 들은 만큼 호기심을 조용히 억누르며 돌아가는 추이를 지켜보았다.
“뭐야. 사과 안 해?”
잠시 멀뚱하니 임유진을 바라보던 소피아는 노구덕의 다그침이 들려오자 식겁하여 허리를 구부렸다. 여전히 그녀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으나, 일단은 무조건 사죄하고 볼 일이었다. 노구덕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거슬렀다간, 또다시 이틀간 지독한 허기에 시달려야 할 테니까. 그것만은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었다.
“요, 용서해주세요. 임유진 씨.”
“…….”
소피아는 임유진이 아무 말이 없자, 불안함이 한층 더 가중되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그녀는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나불대기 시작했다.
“모두 사과드릴게요! 주인님에게 달라붙은 것도, 주제를 모르고 말대꾸한 것도 모두요! 아, 그때 제 방에서 언쟁한 일로 마음이 상하셨다면…….”
“너, 뭐하냐?”
“네, 넷?”
두서없이 있는 일 없는 일을 끄집어내어 줄줄 읊어대던 소피아는, 노구덕이 마뜩찮게 말을 끊어버리자 화들짝 놀라 목을 움츠렸다.
“가장 중요한 일은 왜 언급도 안 해? 소율이에게 할 말이 그것뿐이야? 아니면, 사과하기 싫은 거냐?”
“…신… 소율 씨요……?”
소피아는 멍한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임유진을 앞에 두고 신소율이 갑자기 왜 튀어나온단 말인가.
여전히 소피아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이자, 노구덕은 도리어 답답하다는 듯 혀까지 차며 그녀를 타박했다.
“허어. 네 눈은 장식이냐? 이제는 소율이도 못 알아 봐? 쯧쯧. 멍청한데다 눈까지 장님이니 이걸 어디다 쓰라고.”
“그… 그게…….”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소피아는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임유진을 세워 두고 갑자기 웬 신소율이 튀어나오나 했더니, 노구덕은 그걸 또 신소율이라 우길 모양이었다. 그간 질리도록 당한 수법이었지만, 설마 사람에 대고 수작을 부릴 줄이야. 소피아는 눈앞이 노랗게 변한 기분이었다.
“이건 완전히 깡통이 다 됐군. 네가 자랑하던 영민한 두뇌는 어디 갔냐? 그 약삭빠른 눈치는 어디 밥 말아 먹었어? 예전의 넌 내가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잖아.”
“죄, 죄송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됐다.”
노구덕은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비는 소피아를 버려두고, 임유진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저… 주, 주인님. 피… 피는요?”
“눈치가 없으면 염치라도 있어라. 무능한 노예에게 줄 먹이는 없다.”
“으으…….”
싸늘하게 내뱉은 노구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임유진과 함께 지하실을 나섰다. 지하실 문을 닫기 전, 소피아가 있는 방향에서 철퍼덕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노구덕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무정하게 철문을 닫아버렸다.
지하실 계단을 오르며, 묵묵히 앞만 바라보고 걷는 노구덕의 눈치를 살피던 임유진은 조심스럽게 심중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내놓았다.
“…너무 가혹하신 것 같아요.”
노구덕은 입꼬리를 틀며 냉소했다.
“가혹하다고? 저년이 했던 일을 떠올려 봐. 어찌 보면 성빈이 놈보다 더 악질인 게 소피아, 저년이야.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아니, 솔직히 동기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이제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이번 일을 사주한 동기가 뭐든 간에, 중요한 건 소율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 찍힐 뻔했다는 거야.”
소피아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른다.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소피아가 건드린 것이 아이리스 외부의 인사였다면 노구덕은 기꺼이 그녀의 방패막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같은 동료, 그것도 노구덕이 더없이 아끼는 신소율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다.
다행히 최악은 면했지만, 신소율은 여전히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그녀를 보며, 노구덕은 깊은 책임을 통감했다. 어쨌든 소피아를 받아들인 것은 오롯이 그의 결정이었으니까. 그는 신의를 저버린 소피아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노구덕과 함께 한 임유진이다. 그녀가 그의 이런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
“이성빈처럼 단번에 목을 치지 않은 건 아직 저 머리가 필요하기 때문이지, 저년이 예뻐서가 아니야. 한 번 뒤통수를 크게 맞은 만큼, 예전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게 놔둘 순 없지. 이번 기회에 아주 확실하게 목줄을 조여 놓을 생각이야. 누가 뭐래도 내 생각은 변함없으니까, 유진이도 이 건에 대해서는 조용히 있어줘.”
“…네. 제 생각이 짧았어요.”
노구덕의 강경한 입장에, 임유진은 자신이 뭐라고 해도 그의 결심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 또한 소피아의 처참한 몰골에 잠깐 동정심이 들었을 뿐이지, 그녀의 처우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라면, 이번 일로 노구덕의 성정이 너무 과격하게 변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정도라면, 그 가해자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임유진은 끝내 그 염려를 입 밖으로 털어놓지 못했다. 이미 노구덕이 완고한 결심을 밝힌 마당이다. 여기서 또 딴지를 건다면 불필요하게 그를 자극할 수도 있었다. 그건 그녀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좀 더 신경 쓰면 돼.’
속으로 각오를 다진 임유진은 서둘러 노구덕의 뒤를 쫓았다.
++++++++++++++++++++++++++++++
다시 한 달이 흘렀다. 이틀에 한 번은 꼭 소피아를 방문하던 노구덕이었지만, 이번에는 탐사 일정이 겹쳐 얼마간 소피아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손해 보는 일은 전혀 없었다. 노구덕과 소피아의 관계는 철저한 갑과 을의 관계였으니까. 아니, 갑을 관계라는 말은 적절치 못한 표현이었다. 따지자면 갑과 정 정도 되려나.
소피아는 노구덕에게 완전히 굴복했다. 한 톨이나마 남아 있던 자존감은 콩가루가 되어 송두리째 부스러졌다. 이제 그녀는 노구덕이 하는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만큼 철저하게 조련된 상태였다.
개처럼 짖으라면 짖었고, 극심한 굶주림 속에서도 노구덕이 명령하면 목전에 싱싱한 핏물을 두고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반복된 길들이기를 통해, 그녀는 노구덕의 충실한 애완견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구덕은 좀 더 완벽하게 그녀를 옭아 맬 수단을 원했다. 이 정도 안전장치로는 소피아라는 괴물을 풀어놓기에 충분치 않다고 여겼다.
“읊어봐.”
“네?”
줄이 풀린 인형처럼 앉아 있던 소피아는 깜짝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그 잘난 머리로 어떻게 하면 내가 널 믿을 수 있을지, 방법을 강구해서 읊어보란 말이다. 더불어 널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도 말해봐.”
스스로 자신을 옭아맬 방법을 고안해야 하는 기막힌 처지. 그러나 그녀에게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소피아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는 듯 했다.
“절 피의 권속으로 삼아 주세요.”
“피의 권속?”
“네. 흡혈귀 사회를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에요. 상급의 흡혈귀는 보다 저급의 흡혈귀를 피의 권속으로 삼아 혈족(Clan)의 일부로 받아들여요. 피의 권속이 되면 해당 흡혈귀는 그 주인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죠.”
가만히 듣고 있던 노구덕은 이마에 몇 줄의 주름을 만들었다.
“말만 들어서는 노예각인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게다가 난 흡혈귀도 아니고.”
“권속의 맹약은 주인이 흡혈귀가 아니더라도 충성의 증거로써 간혹 사용되곤 해요. 이 경우 권속이 된 흡혈귀는 오직 주인의 피로만 연명할 수 있게 되죠. 주인과 권속이 운명공동체로 묶이게 되는 셈이에요. 단, 주인이 흡혈귀가 아닐 때에는 단 한 명의 권속만 거느리는 게 가능해요.”
소피아는 노구덕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피의 권속은 노예각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강력한 심령 금제예요. 주인은 심지어… 권속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대강 알 수 있게 되니까요. 주인을 거역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노구덕은 크게 만족했다. 독심술도 아니고, 권속의 생각까지 읽을 수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던 확실한 통제수단이었다. 물론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은 없었다.
‘피의 권속이라. 따로 조사를 해봐야겠군.’
그러는 동안에도 소피아는 노구덕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약장수처럼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며 노구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절… 권속으로 삼아주신다면, 정말 쓸모가 있을 거예요. 마법은 잃어버렸지만, 고위 흡혈귀가 되어 제약에서 벗어나면 다시금 정령을 부릴 수 있어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원래 제 장기는 마법이 아니라 정령술이에요. 제가 불러내는 혼돈의 정령은 과거 라이오넬에서도 손꼽히는……”
“자랑은 그만하면 됐다.”
“…예.”
“이따 시중을 들어줄 사용인을 보낼 테니, 네 방으로 가서 몸을 씻고 차림을 정갈히 하도록 해라. 저녁에 만날 사람이 있으니까.”
전혀 뜻밖의 말에, 소피아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세찬 떨림을 보였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후들거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여길… 나가서요?”
“그래.”
딱딱하게 대꾸한 노구덕은 언제나처럼 냉정한 눈길로 소피아의 얼굴을 흘겨본 뒤, 출입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피아는 인사를 하는 것도 잊은 채, 그의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도 망부석처럼 굳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점심이전에 한편 더 올리겠습니다.
가식적썩소 / 일등 감사합니다!!
카모카베 / 정령은 봉인되어 있죠 ㅎㅎ
Rasclmagic / 삼등 감사합니다.
태산(太山) / 사등 감사합니다!!!
기적_그자체 / 이 정도면 만족하십니까? 아직 끝나진 않았지만요..
에보커 / 멘탈붕괴ㄷㄷㄷ
月夜之主 / 악랄해져야죠 ㅎㅎㅎ
JackDaniel / 본인이 방법까지 다 생각해냈답니다
장마와방 / 저도 굶는거랑 못자는게 제일 힘들더라고요
여관집아들 / ㅋㅋㅋㅋㅋㅋ 저도 쓰면서 좀 웃었습니다.
Blood╋Moon / 칭찬 감사히 받겠습니다 ㄳㄳ
느린시간 / 유쾌상쾌통쾌?
우서 / 까라면 까!
카론느 / 리플에서 코난느낌을 좀 받았습니다.
희망의불씨 / 흡혈귀는 주식이 하나 뿐이니 ㄷㄷㄷ
은신설야 / 나쁜놈이라 죄송합니다 ㅠㅠ
벌레 / 짐이 곧 법이니라
코드표 / 최대한 치사하게!
힘의PoWer / 효과는 직빵이죠
마녀예린 / 소피아는 워낙 정신이 강해서 이정도로는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snew7002 / 애정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소피아 화이팅
봉황의시대 / 적당히 완급조절을 해야지요
아토므스크 / san치가 뭐지요?
세린,아르카즈,마리스 / 정령 가능해지면 예전보다 더 강력해지겠죠. 장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