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310)
310화 – 정신일도하사불성
대흥중공업 임시 주주총회가 열리는 울산실내체육관 앞은 대형스타의 공연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난리법석이었다.
“오빠. 진짜 안 들어갈 거야?”
“조심해야지. 괜히 사진 찍혀서 기사라도 나오면 곤란해지잖아. 지금도 뒤에서 조종했니 어쨌니 말 많은데…….”
“네, 알겠습니다. 겁보 유연성 씨. 나 혼자 가서 백만대군을 무찌르고 오겠습니다요.”
“직원들 잔뜩 데리고 가면서 뭐 혼자라 그래?”
“눈을 감아도 너만 보인단 말이야!”
“네, 그래요. 파이팅하세요.”
주차장에 도착한 차에서 내린 이는 이유선 혼자뿐이었다. 난 차에 짱 박혀서 이 난리판을 구경만 하고 있으련다.
주총장 앞에는 대흥중공업 노조원들이 대대적으로 집결한 상태였다. 회사에서 부른 용역들도 어마어마하게 깔려있다. 저들에게 응원봉을 하나씩 쥐여준다면 드림콘서트 입장 전 광경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주총장에 들어가겠다는 노조 측과 그들을 막으려는 용역들의 적당한 신경전이 체육관 입구를 뜨겁게 달궜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BGM으로 깔리니 식전행사로는 제격이겠다 싶다.
그때! 북적거리던 현장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홍해 갈라지듯 출입구까지 길이 확 열렸다. 이번 주총의 키를 쥐고 있는 이유선의 등장에 노조가 한마음 한뜻으로 길을 만들어준 것이다.
나도 저 기분을 느끼고 싶다. 박수를 받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주총장으로 걸어가는 느낌은 어떨까? 얼씨구? 연설까지?
이유선이 노조원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마치고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들으며 주총장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네, 삼촌!”
-어, 그래. 넌 또 어디 짱 박혀 있는 거냐?
“주차장에 차 대고 그냥 앉아있습니다.”
-들어가지는 못하겠는데, 궁금은 하고……. 그래서 멀찌감치에서 구경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하하.
“삼촌도 이리로 오시죠. 혼자 있기 심심합니다.”
마일드금융투자 박한철 회장의 전화다. 자기도 궁금해서 여기까지 와놓고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 보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박 회장이 차 창문을 두들겼다. 커피 2잔을 들고서.
“어서 오십시오. 기자 새끼들한테 안 걸렸죠?”
“아휴, 진짜 난리도 아니구나.”
“난리도 아닌 걸 알면서 여기까지 오신 심리가 뭘까요?”
“너랑 같은 마음이 아닐까? 하하.”
주주총회는 길어야 30분이다. 특히 이목이 집중된 주총일 경우엔 온갖 기술을 쓰며 10분 만에 끝내기도 한다.
짧은 시간에 끝나는 것을 알면서도 울산까지 비싼 몸을 이끌고 온 나나 박 회장이나 동변상련이랄까. 기쁜 소식을 1초라도 빨리 듣고 싶은 마음?
곧 전해질 소식에 기뻐하리란 것을 박 회장도 알고 있는 듯하다.
“대흥중공업 애들이 꽤나 신사적으로 하는 것 같아.”
“신사적이요? 지금 노조원들 주총장 못 들어가게 막고 있는 거 보면서도 그러십니까? 노조 상대로 주총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도 했는데요.”
“그거야 보여주기지. 그건 기본이니까 당연히 하는 거고. 지금처럼 이런 난리통이라면 장소 변경해서 날치기로 통과시켜 버릴 수 있단 말이지. 그런데 안 그러잖아? 이렇게 신사적으로 주총하는 경우도 또 처음이네. 하하.”
박 회장의 말을 들으니 그럴싸하다. 이 정도로 반발이 심한 주총이라면 이미 용역들이 주먹 몇 번은 휘둘렀을 것이고, 바닥에 옥수수와 케첩도 적당히 흩뿌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주총장 입구는 꽤나 평화롭다.
들어가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간의 대립이 있긴 한데……. 뭐랄까, 편의점 앞에서 싸우는 술 취한 아재들 같다고 할까? 서로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면서도 말만 주고받는 그런 느낌이다.
“대흥중공업 쪽에서도 어떤 결론이 날지 알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요.”
“내 생각도 그래. 국민연금이 애매하게 얘기하긴 했는데, 뉘앙스로는 우리 쪽 지지하겠다는 소리였잖아? 그럼 뭐, 결론이야 빤한 것이니까 괜히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 필요가 없겠지.”
“설레발은 금물이긴 한데, 오늘은 왠지 바이오리듬이 좋네요.”
“이 정도 분위기라면 김칫국물 거하게 들이마셔도 되지. 그나저나 너도 참 고생 많았다. 기어코 대흥중공업까지 손에 넣어버리는구나.”
“아직 모릅니다. 주총 끝나서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려봐야죠. 그런데 벌써부터 회고에 들어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박 회장은 이미 게임이 끝난 걸로 여기고 있었다. 아직은 어찌 될지 모르니 결과를 기다려봐야 한다는 내 지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 10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되뇌는 중이다.
“나도 참……. 너한테 엮여서 10년을 이 고생이다. 하하.”
“고생이라고 하기엔 재미를 너무 많이 보신 거 아닙니까? 마일드금투가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증권사로 성장하는데 제가 자그마한 기여를 했다고 보는데요.”
“그건 그렇지. 네가 그 미친 짓을 한다고 했을 때부터 난 올가미에 걸렸다고 해야 할까? 금융위기를 예측하고 거기에 배팅하는 미친놈이 내 옆에 있다는 걸 상상이라도 했겠어? 하하.”
“그래서 10년 동안 기분 좋았다는 말씀이시죠?”
“너나 나나 고생 많았다 이 말이지. 누구나 창업하면 세계 1위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지만, 그걸 실제로 이뤄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네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면서 그걸 해냈으니…….”
“삼촌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쉽지 않았을 겁니다.”
“금융과 산업의 바람직한 만남이라고 할까?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말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박 회장의 회고담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 덕에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진 않았는데……. 커피 마시면서 얘기를 듣고 있자니, 이뇨작용이 너무 활발하단 말이지.
주총이 끝날 때가 됐겠구나 싶다는 생각과 박 회장의 회고는 대체 언제 끝나는 것인가라는 의문, 소변이 마려운 데 화장실 갔다가 카메라 세례를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혼재돼 있는데, 박 회장이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재차 말을 걸어왔다.
“그래, 넌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뭐, 대답하기 전에 나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겠지? 하하. 그래서 우리 회사에 대해 먼저 얘기하자면-”
“생명보험회사도 하나 인수하셔야죠? 그리고 대형 증권사도 매물로 나오니 마니 말 나오고 있으니까, 그거 인수할 준비도 하실 테고……. 맞죠?”
“어? 내가 너한테 얘기했던가?”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뭐 척 보면 척이죠. 우리가 한솥밥을 한두 끼 먹었습니까?”
“너의 신통력은 여전하구나. 하하. 손해보험사 운영해 보니까 이제 생명보험 쪽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 이 금융 쪽은 누가 더 덩치를 키우느냐의 싸움이라, 여전히 전쟁터지. 그래서 넌?”
“전 이제 한량처럼 살 생각입니다.”
“응? 놀겠다고?”
“네.”
뭘 그리 놀라나.
아쉽게도 이제 내 신통력은 없다. 또다시 죽었다 깨어나면 모를까, 나에게 더 이상 미래를 내다볼 능력 따윈 없다. 그렇다면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옳은 선택이 아닐까?
“역사적으로 정복군주가 수성군주로 성공적으로 변신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운 좋게도 회사를 잘 키워내면서 세계 1위로 만들어냈지만, 그것과 계속 1위 회사로 유지하게 만드는 건 아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기껏 고생해서 회사를 이렇게 키워놓고 2선으로 물러나겠다?”
“회사마다 등기이사로 등재돼 있으니까 두둑한 월급 받아먹으면서 이사회나 꼬박꼬박 참석하면 되겠죠, 뭐.”
“이야. 팔자 좋게 살고 싶다고 그리 노래를 부르더니만……. 한편으론 부럽긴 하네.”
“회사에 기름밥 몇십 년씩 먹은 베테랑 아재들이 득실거리니까 가능한 일이죠.”
“그 베테랑들을 믿고 회사를 맡기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야. 재벌 오너들이 너처럼 행동했다면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박스피니 하는 소리는 안 나왔을 거다.”
재벌 오너들이 나처럼 회귀하지 않았으니까 그러겠지.
두 번째 삶을 살아보니까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더라고. 그래서 사람은 다들 한 번씩 죽어봐야 해.
아직 죽어보지 않은 박 회장은 여전히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큰 전투의 승리 소식을 기다리다 보니 엔도르핀이 쏟아져 나오나 보다.
“그나저나 주총이 왜 이리 오래 걸리냐? 길어야 30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찬반 토론이 계속되나 봅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좋은 신호겠죠?”
“그렇지. 어떻게든 강행 처리하려고 맘먹었으면 진즉 끝났겠지. 그래서 2세 계획은 아직이고?”
“생뚱맞게 2세 계획이요?”
“하하. 뭐, 이런저런 얘기하는 거지. 우리가 이렇게 마음 편히 얘기한 적이 얼마나 있었냐.”
대화 한 번 논리정연하게 흐르네.
“뭐……, 지금도 노력하고 있는데, 대흥중공업 일이 정리되면 더 열심히 노력해야죠.”
“질부가 바로 애를 가질 생각인가 보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낳고 싶은가 봐요. 유선이 걔가 늦둥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어렸을 때 장인어른이 힘들다고 잘 안 놀아줬다고 하더라구요.”
“하하. 그 말도 맞지. 애랑 놀아주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너도 체력관리 잘 해놔야 해.”
“네. 인생 선배님 말씀 잘 새겨듣겠습니다.”
그러고도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한참이나 이어졌다. 슬슬 방광의 용량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제발 주총 좀 빨리 끝나라.
커피를 빨리 마셔버리고 빈 컵에 처리할까, 아니면 인적 드문 곳으로 가서 대자연에게 거름을 줄까,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데, 밖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오케이! 이제야 끝났구나!
“오호! 주총 끝난 모양이다. 질부한테 아직 연락 안 왔지?”
“네. 아무래도 주총 끝나고도 기자들한테 붙잡혀서 한참 인터뷰하고 오지 않을까 싶네요.”
이유선에게 연락은 없지만, 결과를 알 것 같다. 밖에서 대기하던 노조원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으니 말이다.
이윽고 박 회장의 휴대폰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마일드금융투자, 이스턴캐피탈 대리인으로 주총에 참석한 직원들의 전화가 분명하리다.
“어, 그래. 주총 잘 끝났어? ……. 하하. 그거 잘됐네. 그래, 고생했어. ……. 어, 그래, 그래. 자세한 얘기는 올라가서 나누자고. 울산 온 김에 고래고기나 맛보고 올라와. 하하.”
박 회장이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오케이!
“연성아, 부결됐단다. 이제 바로 주총 열어서 이사회 싹 갈아치울 일만 남았다. 하하하. 고생했다, 고생했어.”
“잘됐네요.”
생각보다 덤덤했다. 이번 생의 목표를 이미 달성해 버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패션잡지를 사고 싶어서 힘들게 돈을 모았고, 결국 1만 원짜리 패션잡지를 샀는데 3만 원짜리 부록이 딸려오는 느낌이 이런 건가 싶다.
비싼 부록이 생겨서 좋긴 한데, 내가 원한 건 잡지 그 자체였단 말이지. 그래도 이유선 앞에서 진심으로 기뻐하는 척하자고.
아니나 다를까 이 여사님께서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양복쟁이들을 이끌면서 주차장으로 나타났다. 위압적인 포스에 수중에 있는 돈을 다 상납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오빠! 이겼어!”
“야호! 우리가 이기다니! 정말 기쁘다.”
“아, 됐어. 연기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마나님은 여전히 예리하시다. 차 안에 박 회장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말들을 마구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부담이 컸을 텐데, 고생 많았다. 이제 바로 임시 주총 소집해야지?”
“네, 회장님. 승기를 잡았으니까 바로 후속 조치 들어가야죠.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세요. 이번에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하하. 뭐, 큰 도움까지야……. 그냥 있는 그대로 얘기했을 뿐이지. 뭐, 아무튼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차차 하기로 하자고. 주총 끝났는데 여기 계속 있을 필요가 없지. 다들 바쁘니까 본진으로 빨리들 넘어가자고.”
박 회장의 해산선언으로 울산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통영으로 차를 돌렸다. 가는 동안에 편의점이 보이자마자 달려가 물을 버려야 했고.
“아휴, 죽을 뻔했네. 이제 좀 세상이 보이네.”
“오빠. 진짜 방광에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애가 안 생기는 것도 그렇고, 괜히 의심쩍네.”
“아, 진짜. 멀쩡하다고. 커피를 많이 마셔서 그래. 그래서 주총은 어땠어?”
“은근슬쩍 말 돌리는 것도 그렇고…….”
“주총 어땠냐고!”
“뭘 어때. 우리 쪽에서 계속 발언권 얻어서 주구장창 얘기했지. 찬성하는 쪽에서 그만 얘기하라고 소리치긴 했는데, 분위기가 쏠리니까 쪽을 못 쓰더라고.”
“몇 대 몇으로 이긴 거야?”
“50% 가뿐히 넘었지. 하하.”
열심히 모은 지분에 국민연금의 참전, 그리고 우리사주를 들고 온 노조의 협력까지. 완벽한 승리다.
“우리 이 여사님, 앞으로 바빠지겠네.”
“바빠져야지. 이사회 갈아치워서 회사 장악하고 나면 그때부터가 시작이야.”
“애 빨리 낳겠다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 바쁜 일들이 가능하겠어?”
“전쟁통에도 애 생긴다는데 못할 게 뭐 있다고. 오빠 몸이나 신경 쓰셔.”
“오냐. 내가 오늘 대흥중공업 차지한 기념으로 아주 매운 맛을 보여주겠어!”
“말은 아주…….”
자존심 상해서 안 되겠다. 통영 도착과 동시에 정신일도 하사불성 들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