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writer! RAW novel - Chapter 95
나는 작가다 095화
95화
행복한 왕자.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집필했던 동화의 제목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높게 세운 왕자 동상이 있었다.
값비싼 보석들로 치장한 왕자 동상은 자신을 찬미하던 마을 사람들이 가난에 허덕이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어느 겨울날, 따듯한 곳으로 가지 못한 제비에게 왕자 동상은 부탁을 한다.
아픈 아이에게 검자루에 있는 루비를 건넸으며, 가난한 작가와 성냥팔이 소녀에겐 눈에 박힌 사파이어를 주고, 자신의 몸을 치장한 금장식들은 다른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었다.
요 근래 계속 원조와 기부만 하는 날 보곤 철이가 그 왕자를 빗대기에 한마디 했다.
“인마, 버니까 그만큼 베푸는 거야.”
“그러다가 너 싹 다 잃고 거지되면 어쩔라고? 최소한 너 챙길 건 챙겨라. 알지? 가난한 마을 사람들을 도와준 행복한 왕자와 제비가 어찌 된지?”
“왕자는 볼품이 없어져서 녹아내렸고, 제비는 추위를 이기지 못해 죽었지.”
“그래, 어차피 너야 계속 잘 버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 아버지 고객들을 보면서 느낀 건데 버는 만큼 쟁여둬야 하더라. 괜히 언제 국세청한테 한 방 맞아서 물어내야 할지 모르니까. 알지? 그땐 1.5배다.”
비록 자신이 세금을 잘 처리해 주고 있긴 하지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간 절세한 것들을 내야 한다는 철이.
“그래서 너한테 엔간하면 다 내라고 하잖냐?”
“그래, 너만 한 세납자도 없긴 하지.”
어느 정도 철이가 가라로 친 장부가 아예 없진 않았지만, 엔간하면 거의 성실하게 납세했다.
난 지금 이 삶에 대해 불만이 없었다.
평범한 만년과장이 이 정도면 성공했지.
더 벌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못 번다고 아쉽진 않았다.
이미 번 것만으로도 뭘 해야 될지 모를 정도로 너무 큰 액수였으니까.
오히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까지 망해 버렸던 우리나라 장르소설계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와 같은 꿈을 가진 청춘들이 작가로 살 수 있는 사회.
이 얼마나 멋진가?
그리고 난 철이에게 행복한 왕자 이야기를 더했다.
“그리고 행복한 왕자의 끝은 그게 아니다.”
“응?”
“하나님이 천사에게 그 마을에서 가장 귀한 두 가지를 가져오라고 명령할 때, 천사는 주저하지 않고 행복한 왕자의 쪼개진 심장과 죽은 제비를 데려가서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았단 말이지.”
베푼 만큼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를 하려는데, 철이는 거기서 괜히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서 초를 쳤다.
“자식아, 천국 가면 죽는 거잖아? 인생은 즐겨야지.”
“누가 천국을 간댔냐? 남들을 도운 만큼 다 좋은 일로 돌아온단 거지.”
“알았다. 그래서 기부는 얼마나 할까?”
에티오피아에 대한 기부금.
얼추 회사 자금이 100억 정도 남았고, 거기서 10억 정도를 영화 ‘애국가를 부르며’에다가 썼다.
철이가 그때 불렀던 금액이면 큰 부담이 되지 않아 책정했으리라.
이번에도 그 정도 금액이 어떤가 싶었다.
“영화 투자금으로 쓴 만큼은 쓸 수 있지 않을까?”
“10억이나? 큰데?”
“벌면 되지.”
이젠 10억이 대수인가 싶었다.
그런 내 말에 철이가 허허허, 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게 내 친구라니 정말 좋구만. 한편으로는 부럽지만 말이야.”
내가 부럽다.
그럼 답은 하나지.
“글 쓸래?”
나만큼은 아니어도 잘 써서 대박만 치면 지금 이상을 벌 수 있었다.
게다가 정말 중요한 때 말곤 맨날 노는 철이였으니 투잡으로 뛰어도 무방했다.
하지만 철이는 작가 쪽은 관심이 없음을 밝혔다.
“됐다. 안 그래도 성용 형님한테 하나 써서 보여줬다가 원고가 피에 물드는 거 보고 난 작가 체질 아니란 걸 깨달았거든?”
관심이 없다기보단 정확하게는 까였단 게 맞겠다.
어쨌거나 성용 형님에게 원고를 보여줬다가 대차게 까였단 소식에 난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큭, 언제 그런 일을 했었냐?”
“얼마 안 됐어. 어쨌거나 난 그냥 회사랑 작가님들 세금 아껴주고 이렇게 편히 돈이나 따박따박 받을란다.”
“오냐, 그래서 에티오피아는 언제 다녀오는데?”
“다음 주에 9박 10일 정도 다녀오려고.”
“오래도 다녀오네.”
그 정도 자리를 비워도 별탈이 없으니 정했을 터.
아무리 여자친구가 중요해도 공과 사 구분이 안 되는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우리 지혜가 일 하나 빡세게 잘해서 내가 없어도 별문제 없을 거다. 대신 돌아가면 지혜한테도 9박 10일 휴가를 주기로 했으니 그땐 내가 빡세겠지만 말이다.”
역시나 믿는 구석이 있었다.
업무상 문제가 생길 게 없다면 여행을 가도 무방했다.
난 철이에게 허락이 담긴 대답을 해줬다.
“알았다.”
* * *
“아오, 이 자식이!”
철이가 여자친구인 배우 김은정과 함께 에티오피아로 떠나고 별탈 없을 줄 알았더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회사에 큰 차질이 생기거나 하는 문제까진 아니었다.
단지 영화 ‘애국가를 부르며’의 미팅 때문이다.
어차피 투자자이니 철이가 없어도 무방한 미팅이었으나 제작사 측에서 가장 큰 투자를 해준 K E&M의 관계자 한 명이 끼었으면 한다고 연락이 왔단다.
성용 형님에게 부탁했더니 요새 계약한 작가들이 많아져서 자신이나 회사 사람 중 움직일 사람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덕분에 가능한 인원이 하나뿐이었다.
바로 나였다.
애마가 되어준 블리츠 크라울러를 이끌고 제작사 쪽으로 움직였다.
제작사의 이름은 ‘고진규 필름’.
감독 고진규가 자기 이름을 걸어서 만든 제작사였다.
어떤 사람인가 철이에게 알아보라고 했더니 꽤 유명한 감독이었다.
‘겨울나무관’과 ‘피쉬’, 두 작품으로 흥행작을 냈던.
하지만 이후 작품들이 죽을 쑤면서 앞선 두 작품의 흥행을 믿고 세 번이나 투자했던 이들이 모두 떠났단다. 그래서 우리 투자를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여러 회사들이 한 층씩 쓰고 있는 건물 1층에 주차를 한 뒤, 고진규 필름이 있는 9층으로 올라갔다.
사무실 입구에 들어서기 무섭게 여직원 하나가 내게 물었다.
“어떤 용무로 오셨죠? 오디션? 전체적으로 외모는 괜찮으니 연기 조금만 하면 뭘 해도 합격이겠는데요?”
내 외모를 위아래로 훑더니 대뜸 오디션을 보러 온 거냐고 묻는 여직원.
좀 황당하긴 했지만, 내가 온 용무를 밝히기 무섭게 태도가 바뀌었다.
“오디션은 아니고 미팅 자리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하셔서 왔습니다.”
“어머, 주책이야! K E&M에서 오신 분이군요?”
“맞습니다.”
“안내해 드릴게요. 다들 기다리고 계셔요.”
“고맙습니다.”
방금 전에는 조언해 주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내가 어디서 온지 듣곤 깍듯하게 바뀐 태도.
여직원은 날 회의실로 안내해 줬다. 그리고 먼저 회의실에 들어가더니 크게 떠들었다.
“투자사인 K E&M에서 오셨다네요, 대표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도 그가 고진규이리라.
고진규는 반가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오! 반갑습니다. 철이 씨가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해서 다른 직원분이 오신다더니 이거 여기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미남 배우분들에 못지않은 잘생긴 분이 오셨군요!”
난 고진규와 악수를 나눈 뒤 명함 한 장을 꺼내서 건넸다.
“K E&M 대표 작가 이준경이라고 합니다.”
벌떡!
“어?! 이준경 작가님이시라고요?”
처음에 내가 들어왔을 땐 그저 바라보고 눈인사만 나누던 사람들이 다들 내 이름을 듣곤 화들짝 놀랐는데, 그중 가장 깜짝 놀란 반응을 보인 건 배우 김도빈이었다.
설마 이 정도 반응을 보여줄 줄이야.
내가 TV로만 봤던 김도빈은 언제나 조용하고 시크한 미남이었는데, 저리 소년과도 같은 모습을 보이니 신기할 따름이다.
어쨌거나 날 보고 반응한 이들에게 다시 한 번 더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소개했다.
“예, K E&M 이준경 작가라고 합니다.”
김도빈이 내게 다가오더니 양손으로 손을 잡으며 흔들었다.
“저희 부모님 일에 대해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다니 영광이네요.”
“인사는 무슨요. 김도빈 씨 부모님만 도와드리려고 한 게 아니라 그쪽 지역분들을 돕다 보니 그리된 거인 걸요. 애당초 제가 안 도왔어도 김도빈 씨 부모님은 자식을 잘 두셔서 아무 걱정 없이 거처를 구하셨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연세가 있으신 분들인데 빠르게 거처를 구해서 지낼 수 있게 해주신 건 정말 감사한 일이죠.”
김도빈에 갑작스러운 접근으로 밀려났던 고진규는 다시 내게 인사했다.
“이야, 철이 씨한테 말로만 들었던 저희 진짜 투자자인 작가님께서 오실 줄이야. 정말 반갑습니다, 작가님.”
“다들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제가 남우세스럽군요.”
“남사스러운 거 아닙니까?”
“보통 그리 말하긴 하는데, 표준어는 이쪽이라서요.”
그냥 있어 보이려고 한 말인데, 다들 날 보며 ‘작가는 다르구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거 괜히 한 것 같은 느낌인데?
어쨌거나 고진규 역시 감탄하며 박수를 짝! 쳤다.
“역시 작가님답군요.”
다들 별거 아닌 거에 너무 격한 반응을 보이니 실토했다.
“그냥 있어 보이려고 해본 말입니다.”
“뭐요? 으하핫! 작가님, 완전 마음에 드는군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자, 그럼 대본 미팅을 할 테니 한 번 보시겠습니까?”
최대 투자자다 보니 혹여나 원하는 게 있으면 수정사항을 받으려고 부른 미팅이었다.
굳이 난 안 해도 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이가 제작사 측에서 꼭 누군가 와서 봐 달라 했대서 와버렸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배우들의 ‘애국가를 부르며’ 대본 미팅이 시작됐다.
다들 오늘 치 분량의 대본을 리딩해 나갔다.
그때였다.
아직 배역을 정하지 못한 조연의 자리나 엑스트라 자리는 대체로 고진규 감독이나 그 외 스탭이 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내게 역할 하나를 부탁했다.
“혹시 제가 너무 많은 대본을 리딩해서 그런데, 이준경 작가님께서 한 역할만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투자자로서 수정사항 같은 걸 말할 생각도 없었으니 가만히 구경만 하던 나한테 갑자기 이게 무슨 부탁인가 싶었다.
배우물을 쓸 생각이 있던 내게 나쁘지 않은 제안이기도 했다.
언제 이렇게 배우들 사이에 끼어서 대본을 읽어보겠는가?
그래도 처음엔 거절했다.
괜히 내가 끼어서 대본 리딩에 진척이 생기면 미안했으니까.
“제가 하면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에이, 괜찮습니다. 그렇게 대사가 많은 역할도 아닙니다.”
대사가 많진 않다고 하니 엑스트라 정도겠거니 해서 이번엔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여기 있습니다.”
내가 거부하지 않을 의사를 보이기 무섭게 고진규 감독이 내밀었다.
‘영진’이란 이름에 형광펜이 체크된 대본을.
이미 대본을 읽어봤기에 난 그 인물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꽤나 감초 역할로 조연 배우를 하던 ‘강형종’이란 배우가 맡는 역할로 주연인 김도빈과 장두준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비중이 있던 인물이었다.
“아니, 이게 대사가 안 많은 인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영진이란 캐릭터가 어떤 역인지 알고 있자 고진규는 더욱 기뻐하며 반응했다.
“오! 혹시 철이 씨가 가져간 대본을 읽으셨던 겁니까?”
“읽어보긴 했습니다만…….”
“그럼 더욱 잘됐네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리딩해야 할 대본이 이리 많아서 말이지요.”
“괜히 대본 리딩 분위기 이상해져도 제 탓이 아닙니다?”
“아무렴요. 저도 리딩은 개판인걸요.”
자기도 못하니 개판 쳐도 상관없다는 고진규.
이렇게까지 나오니 별수 있나?
해야지.
“끙,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못해 대답하며 영진의 차례인 대사를 훑어봤다. 거기서 영진 역에 맞는 감정을 잡았다.
감정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나 내가 담당하던 작가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거다.
작가들에게 자연스러운 문장과 대사를 쓰고 싶을 때 시키던 방법이 하나 있었다.
‘입으로 소리 내서 읽어보세요.’
지문이나 대사를 독자가 자연스럽게 읽힐 수 있도록 쓰던 방법이다. 때문에 캐릭터에 동화돼서 대사를 읊는 건 그리 어색한 일까진 아니었다.
이미 대본과 영화로 영진이란 캐릭터를 익히 알던 나였기에 감정이입을 하는 건 더욱 쉬웠다.
모두가 영진의 대사를 읊는 날 조용히 쳐다봤다.
적막감으로 찬 회의실을 나지막이 흘러나온 내 육두문자로 시작된 대사가 가득 채웠다.
“니미럴, 이 개 같은 전쟁을 누가 이기건 무엇이 그리 중요한데? 어째서 같은 피를 나눈 가족들끼리 서로 대갈빡에 총이나 싸재끼냔 말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