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writer! RAW novel - Chapter 99
나는 작가다 099화
99화
“아이고! 우리 조연 배우님! 나오셨습니꺼?”
“예?”
이 아저씨, 갑자기 왜 이래?
갑작스러운 신하 감독의 태도 변화에 화들짝 놀랐다.
저번 촬영까지만 해도 자신이 잘 뽑은 조연 배우라면서 뿌듯해하기만 할 뿐, 내게 이런 저자세를 전혀 보이지 않던 이였다.
근데 다음 촬영날인 오늘 나오자 갑자기 깍듯하게 대한다.
주연 배우들보다도 더.
“내가 한눈에 알아본 우리 조연 배우님 아닙니꺼? 으하하!”
도대체 날 조연 배우로 꽂은 것에 대해 왜 이리 기분 좋아 하나 싶었다.
얼마 있지 않아 난 신하 감독이 왜 날 보고 그리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우리 조연 배우님 덕분에 내가 진규 놈한테 자랑 진득허니 했다 아입니꺼?”
진규?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이다 싶은 난 한 사내가 떠올랐다.
“고진규 감독요?”
“맞습니더.”
“…….”
고진규랑 친구라니.
그럼 당연히 고진규로부터 내가 누구인지도 들었을 터.
“감독님, 잠시만…….”
“아이고! 우리 조연 배우님께서 이야기하실 게 있음 가야죠. 가시죠. 저기로 가입시더. 내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우리 조연 배우님하고 이야기할 테니 다들 이따가 좀 피우소.”
“나, 피울 건데?”
말죽거리 쌍절곤에서 주연 배우인 고상욱 다음으로 오랫동안 모든 이의 뇌리에 새겨놓을 명장면의 배우인 강선아가 담배 한 개비를 들며 한 말이다.
“아니, 누님…….”
강선아가 신하 감독보다 나이가 많았는지 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쉽게 말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닌 느낌?
거기에 대해서 강선아가 물었다.
“왜? 피우면 안 돼?”
“아입니더. 저희가 좀 옆으로 가서 피우지요. 괜찮겠습니까, 준경 씨?”
결국 강선아한텐 피우지 말라고 할 수 없었는지 그녀와 좀 더 떨어져서 이야기하자는 신하.
나야 경고만 하면 됐다.
내가 누구인지 알리지 말아 달라고.
“저야 괜찮습니다. 아니면 사람들 별로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하셔도 되고요.”
우리가 그리 자리를 옮기려고 하자 강선아는 내게 들러붙으며 말했다.
“우리 신하 감독이 뭔 이야기를 들었는지 궁금해서 엿들을 거라 따라갈 생각인데? 어휴, 잘 생겼네.”
아줌마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섬섬옥수.
그 곱고 흰 손으로 내 턱선을 부드러이 매만지는 강선아를 보고 신하가 화들짝 놀랐다.
“누, 누님!”
신하의 반응에 날 매만지던 강선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신하 감독도 알겠지만, 진규도 나랑도 친하잖아? 걔가 뭐라 했는지 궁금해서 말이지.”
“아이고! 누님요! 사내들끼리 대화하는데 끼셔 봐야 뭐 남는 게 있으시다고…….”
“흐응, 중요한 이야기인가 봐? 내가 못 끼게 하는 걸 보니.”
“그러니 양보 좀 해주이소.”
“이렇게까지 부탁하니 더 궁금한데…….”
끝까지 우리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강선아.
이래서야 제대로 된 대화가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아서 난 적당한 선에서 신하에게 경고했다.
“아뇨, 궁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여기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여기저기 이야기만 안 하셨으면 좋겠네요. 만약 그리된다면 저도 여기서 감독님 도와드리긴 힘들겠죠?”
이 정도로만 이야기해도 신하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아이고! 걱정 마이소! 내 우리 조연 배우님한테 아무 해가 안 가도록 해줄 테니께.”
“그럼 다시 대기하러 가겠습니다.”
“욕보소!”
그렇게 내가 대기석으로 돌아가려는데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하야.”
“예, 누님?”
“저 친구가 뭔데? 어디 방송국이나 기업 대표들 2세라도 되나?”
“아이고마, 그런 친구 아입니더.”
“근데 무슨 정체를 숨겨?”
정체를 숨기다니.
꼭 ‘주인공이 정체를 숨김’ 같은 제목이라도 써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어쨌거나 신하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방어했다.
“약속한 게 있으니 말씀드리기 그렇심더.”
“흐응, 그럼 진규한테 물어야겠다.”
“아마 진규도 안 알려줄 겁니더.”
“나랑 진규랑 친한데?”
“아이고마, 누님이랑 진규 고놈아랑 친한 거 저도 잘 알지예. 근디 안 될 겁니더.”
자신이랑 친한 고진규에게 전화해도 안 될 거라는 신하의 말에 강선아가 더욱 관심을 보였다.
“도대체 뭐하는 친구길래?”
“나중에 차차 알아가입시더. 그리고 곧 누님 연기하실 차례지 않으십니꺼? 얼른 상욱 씨랑 들가셔야지예.”
“후우, 나 궁금한 거 못 참는데.”
“그래서 NG라도 내실라꼬예?”
“아니지. 나도 이게 마지막 기회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 오히려 작정하고 덤벼들거니 잘 보라고.”
“기대하겠심니더. 누님, 다시 예전 명성 찾으셔야지예.”
“알았어.”
대기석으로 돌아와 신하 감독과 배우 강선아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피곤하구만.”
설마 두 감독이 친구였을 줄이야.
난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난감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눈앞에 매끈한 다리가 보였다.
누가 봐도 여자 다리.
“음?”
순간 당황해서 고개를 들어 올렸더니 강선아가 서 있었다.
날 보더니 싱긋 웃으며 강선아가 내게 시선을 맞추며 천천히 앉았다. 그러더니 내 허벅지를 만지면서 말하길.
“피곤해? 아이고, 단단한 거 봐. 이 누나가 피로 풀리게 한 번 해줄까?”
“……예?”
이게 뭔가 싶어 당황할 무렵 신하가 소리쳤다.
“누님요! 이제 씬 들어가셔야 혀요!”
그러거나 말거나 강선아가 여전히 내 허벅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내 마지막으로 내 허벅지를 탁! 치더니 몸을 일으켰다.
“후후후, 지금 씬 들어가기 전에 연습 한 번 해본 거야.”
찡긋.
눈웃음을 쏘아 보내곤 주연 배우 고상욱과의 연기를 위해 떡볶이집으로 들어갔다.
얼마 있지 않아 밖에서부터 고상욱이 차여서 낙담한 채 걸어오는 모습을 돌리 카메라로 천천히 찍었다. 그리고 떡볶이 집 앞에서 문을 여는 장면까지 찍고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고, 이후 촬영장비들을 안으로 집어넣고 고상욱이 들어오는 모습을 촬영했다.
고상욱이 들어가자 샤워하다가 나온 것처럼 강선아가 방에서 튀어나왔다. 그걸 보고 난 떠올랐다.
‘아! 그 장면이구나!’
말죽거리 쌍절곤의 명장면 중 하나.
강선아의 ‘한수야, 여기 한 번 만져봐’가 나오는 그 장면이었던 것이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이미 영화로 봤던 장면이다 보니 두 사람의 대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신하가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강선아는 툴툴거렸다.
“아니, 하야. 나 더 잘할 수 있다니까?”
“누님, 방금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역시 최고십니다.”
“지금 나한테 필름 더 쓰기가 아깝기라도 한 건 아니고?”
“설마요.”
절대 아니라며 손사래 치는 신하.
그리 나오니 더 이상 강선아도 무리하게 재촬영을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아쉬운 기색만 내비칠 뿐.
“후우, 알았다.”
“예,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다음 밤 배경 촬영 들어갑시다.”
본래 이 다음 씬은 고상욱이 강선아의 유혹 이후 하루가 지나가는 걸로 끝났다. 그럼 다음 날 아침을 찍어야만 했는데, 그 시간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 신하는 아예 밤에 찍어야 할 다음 씬들을 촬영할 생각이었다.
좀 더 나은 연기를 할 수 있다며 더 찍으려고 했던 강선아가 아쉬운 표정으로 내 옆에 앉았다.
“누나 연기 어땠어?”
누나라니.
나랑 거의 스무 살 차이일 텐데.
그래도 감독인 신하가 함부로 못하던 누님인 걸 보면 괜히 사이가 나빠져 봐야 좋을 게 없어 보였다.
촬영을 마음대로 못하는 걸 보면 큰 힘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유명한 배우 누님이긴 했으니까.
“좋았습니다.”
“뻥치시네. 밖에 있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 거면서.”
“밖에서 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잘하셨으니까.”
자신의 연기를 칭찬하자 아쉬워하고 있던 강선아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어느 정도 내게 관심을 보이는 듯한 느낌도 담은 채.
“흐응, 그래?”
“예.”
“끝나고 뭐하니?”
갑자기 끝나고 뭐할 진 왜 물어보나 싶었다.
촬영이 모두 끝나고 나면 내가 할 일은 뻔했다.
“집에 가야죠.”
“집이 근처야?”
“아뇨, 버스 타고 가야죠. 서울이니까.”
“서울이야?”
“예.”
“누나 차 타고 편하게 갈래?”
뜬금없이 나한테 왜 자기 차를 타고 가자는 건지.
평범한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다면 당혹스러웠겠지만, 왠지 내 촉이 말하고 있었다.
잘못 엮이면 피곤할 수도 있겠다고.
난 자기 차를 타고 가자는 강선아의 제안을 거절했다.
계속 촬영을 하면서 웅철 형님과 더불어 친해진 엑스트라들까지 언급하며.
“괜찮습니다. 같이 오신 형님들도 있고 해서 버스가 편합니다.”
“그래?”
“예.”
“혹시 너 말이야.”
“예?”
“내가 잡아먹을까 무섭니?”
왠지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어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적당히 둘러댔다.
“아뇨, 그건 아닌데요.”
“그래?”
“예, 정말 아는 형님들하고 같이 차 타고 올라가는 게 편해서 그래요. 솔직히 갑자기 조연 배우로 발탁된 것만으로도 놀랍고 미안하거든요.”
“그렇구나. 잘되겠네.”
“예?”
“사람들 챙길 줄 아는 배우들치고 실패한 사람 못 봤거든. 괜히 자기 잘난 맛에 살면 실패하게 될 거야, 나처럼.”
“에이! 선배님께서 어찌 실패하신 배우십니까? 방금 전 그 연기는 평생 남을 명장면이 될 겁니다.”
있는 사실 그대로 이야기해 줬다.
정말로 강선아의 방금 전 연기는 평생 명장면으로 불리게 될 테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런 소리는 강선아에게 불손한 오지랖이 되어 버렸다.
“그래?”
“예.”
“이런 연기가 평생 남을 명장면이면 난 에로나 찍어야겠네.”
씁쓸한 미소로 말하는 게 완전 말실수 제대로 한 기분이다.
하기야 어느 여배우가 자신을 그쪽으로 생각해 주면 좋아할까?
큰 실수를 했단 생각에 손사래 치며 사과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말을 실수했네요.”
하지만 강선아는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갑자기 충고 하나를 던졌다.
“배우될 거면 여자 조심해. 언제 훅 갈지 모르는 게 이쪽 업계니까.”
“감사합니다.”
“아냐, 젊은 친구가 연기도 잘하고 보기 좋게 생겼으니 잘될 거야. 그러니 관리 잘해. 안 그러면 나처럼 나이 먹고 이런 연기라도 붙잡아야 하는 꼴 될지 모르니까.”
“감사합니다.”
배우를 할 건 아니나 진실 어린 충고를 해주니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게 강선아가 유심히 쳐다보며 조심스레 다른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말이야.”
“음?”
이번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또 충고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강선아의 입에선 전혀 예상지 못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자기 작가니?”
일순간 당혹스러웠다.
설마 신하나 고진규가 말한 걸까?
아니다.
만약 그들이 내 정체를 밝혔다면 이렇게 넌지시 묻진 않았을 터.
일단 모르쇠로 일관했다.
“예?”
“신하랑 진규랑 정체를 꽁꽁 숨기려고 하는데, 문득 이름이 낯익더라고. 얼마 전에 뉴스랑 신문에서 이름 대문짝만 하게 나왔던 게 너니?”
“그런 대단한 작가님이면 여기서 이러고 있지 않겠죠.”
“그런가?”
“그렇죠?”
절대 작가 이준경이 아닌 척했다.
그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하가 이제 내 촬영씬이라며 불렀다.
“준경 씨! 이제 준경 씨 차례입니다!”
“예! 제 차례라서 이만…….”
차라리 촬영에 임하며 자리를 뜨는 쪽이 나아 보였다.
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체가 들통 나고 싶진 않았으니까.
내가 연기를 하러 가겠다고 하자 강선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눈 호강이나 하자. 얼른 연기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