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1092)
1092 < — 소모임 — >
이형원은 김범석의 말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의 말을 불신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백혈병 근로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장 쓴 돈만 130억 원이 넘는데, 그 100배도 모자랄지 모른다니.
조 단위의 지출을 해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재벌이라 해도 조 단위의 돈은 매우 크다.
아니, 재벌이기에 더욱 크다. 남들에게는 숫자일 뿐이지만 재벌에게는 당장 눈앞의 출혈이기 때문에.
“김 이사,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습니까?”
이형원은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고, 김범석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자기주장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막상 회사 오너인 부회장이 매섭게 쳐다보니 딜레마에 빠진 듯이 보였다.
이형원은 본능적으로 김범석의 말에 끌렸다. 하지만 본능은 본능일 뿐, 확인 절차도 없이 무모한 출혈을 감수 할 수는 없다.
“일단 가볍게 해봅시다.”
이형원은 전 그룹을 샅샅이 뒤져서 억울하게 산재 처리를 받지 못한 직원들을 모두 찾아내서 보상을 해주었다. 백혈병 피해자들만큼은 아니지만 그들이 뒤늦게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돈을 주거나, 혹은 복직을 시켜주었다.
그렇게 소요된 비용은 약 900억 원, 백혈병 피해자들에게 들인 돈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돈이었다.
900억 원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액수이니, 이형원은 나름대로 적절한 기대를 했다.
하지만 운명은 보기 좋게 그를 배반했다.
“자, 오늘 달립시다! 죽을 때까지 마시는 겁니다! 준비 된 세포, 아니 기업가들부터 모두 머리 위로 동글뱅이!”
이미 거한 폭탄주로 첫 잔을 시작한 이들은 유지웅의 지휘에 따라 모두 손가락을 머리로 올려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중에는 벌써부터 취기가 오르는 이도 있었다.
“자아, 마십시다! 우리 소모임의 기상을 온 천하에 보여주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술은 우리가 다 마셔버리겠다는 각오로 달려 보자구요!”
이형원은 기대를 했다. 1차가 끝나면 자신을 보내줄 것이라고. 아니, 꼭 1차 직후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보다 가장 먼저 자신을 보내줄 것이라고.
하지만 기대는 완전히 엇나갔다.
유지웅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신이 나서 부어라 마셔라를 외치고, 쉴 새 없이 병을 비웠다.
위스키와 보드카와 와인과 소주와 맥주와 탄산을 섞어 만든 폭탄주가 쉴 새 없이 만들어졌고, 유지웅의 건배 하에 다들 독을 삼키는 심정으로 잔을 받았다.
그리고 회식은 전혀 끝나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술을 준비한 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마 이 가게는 주말마다 유지웅이 여는 회식으로만 해도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지 않을까?
“부회장님, 그거 아세요?”
“뭐가?”
“이 가게, 유지웅 회장 소유랍니다. 회식할 때만 열고 그 외에는 장사 안 한대요.”
“…….”
몰랐던 진실을 알게 된 이형원은 술에 찌든 와중에도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결국 끝장을 봤다.
죽을힘을 다해 버티던 세 명이 거의 동시에 쓰러졌던 것이다. 다행히 그들이 쓰러지자마자 늦지 않게 구급대원을 동반한 의료진이 달려와서 응급조치를 취하고, 구급차에 태워서 데려갔다.
“전문 응급의료진이 의료장비 챙겨서 구급차와 함께 이미 대기 중이었답니다.”
“…….”
“틀림없어요. 오늘 누구 하나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가기 전까지 회식을 끝마칠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마침내 회식은 끝이 났다.
라테그룹 회장을 비롯한 세 명이 쓰러져서 실려 가자 유지웅이 회식 종료를 선언했던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겨우 버티고 있던 그들은 이제야 겨우 끝이 났다며 안도했다.
시간만 보면 이전보다 오히려 더 짧고 빨리 끝난 셈이다. 하지만 마신 술의 양과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 났다.
당장이라도 온몸의 세포가 으깨져서 죽을 것만 같았다.
“자, 오늘 회식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아침 일어나서 등산 합시다. 이번 주는 정기 등산일인 거 다들 알고 계시죠?”
끝났다는 안도감은 잠시, 다시금 스산한 죽음의 기운이 그들을 뒤덮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회식 이후, 등산을 하기 전 유지웅은 잠시 스트리밍 방송을 켰다.
방송을 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청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기특하게도 이 시간까지 자신이 방송을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는 애청자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자주 방송을 하기는 하지만 시간을 특별히 공표하지는 않았는데, 켜자마자 이렇게 밀려들다니.
뿌듯한 마음을 안은 채 시청자 명단을 눈으로 확인하던 유지웅은 별안간 굳어버렸다.
「Moneybeomseok」
머니 범석.
눈에 몹시 익은 시청자 아이디에 시선이 꽂힌 채, 그는 한동안 입을 열 줄을 몰랐다.
‘범석이가?’
자신의 충견이자 오른팔이었던 김범석, 그가 설마 이 차원에도 있었단 말인가?
‘우연의 일치겠지.’
하지만 가슴이 뛰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우연의 일치라 생각하기는 쉽지만, 머니범석이라는 아이디를 철자 하나까지 똑같다는 게 쉬운 일인가?
‘아니야. 더는 생각하지 말자. 정말로 그냥 똑같은 것일 뿐일 수도 있으니까.’
유지웅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모니터 너머 어딘가에서 빛나는 머리를 가진 김범석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자신의 방송을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마음가짐이 평소와 달랐다.
“동생들도 알겠지만 조만간 제니스 타운이 정식으로 입주민을 받기 시작할 거야. 제니스 타운은 전 지역이 한창 개발 중이지만 내가 돈을 처발라서 공사 기간을 앞당기고 있어. 그렇다고 부실공사 같은 것은 일절 없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입주하도록 해.”
―형님, 정말 삼천만 명 이상 받으실 생각이신가요?
“전제가 틀렸어. 삼천만 명 이상 받을 생각이 아니라, 삼천만 명부터 시작하는 거야. 나는 원래 숫자에 있어 한계선을 두지 않아. 한계선은 발전의 잠재력을 가로막기만 할 뿐이거든.”
―역시 지웅이 형님이십니다.
―이러다가 우리나라 인구 전부가 지웅이 형님이 세운 도시에서 거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연봉 세지, 근로 환경 좋지, 거주도 거의 무상에 가깝지,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전부 제니스 타운으로 고고 할 거 같은데? 나만 그래?
“안타깝게도 모두가 제니스 타운에서 살 순 없어. 오늘은 그 부분에 관해서 짧게 짚고 이야기를 하려고 해.”
듣고 있지, 김범석?
유지웅은 전파 너머 어딘가에 닿을 그를 생각하며, 평소보다 좀 더 근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얼마 전부터 꽤 많은 쪽지가 왔어. 자기는 몸도 건강하고 학벌, 스펙도 나쁘지 않은데 왜 제니스 타운에 취직이 되지 않느냐, 왜 서류 전형에서 곧바로 탈락하느냐, 탈락이라면 왜 알려주지도 않고 아무 대답도 없어서 사람 미치게 만드냐, 그런 문의가 쪽지로 참 많이 왔어.”
―그런 일이 있었어요, 형님?
―근데 학벌 스펙 괜찮은데 서류 전형에서 탈락이 돼요? 그리고 탈락 통보도 없어요? 그럼 뭔가 전산 오류 같은 거 아닌가요?
“전산 오류 같은 거 아니야. 아마 그 탈락자들 중에서 이 방송을 보고 있을 건데……결론을 말하자면 통보도 없이 서류 전형 탈락한 사람들은 블랙리스트 1단계에 등재됐기 때문이야.”
유지웅이 사적으로 블랙리스트를 운영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1단계라는 표현은 시청자들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1단계요? 형님, 그게 뭐죠? 블랙리스트가 있는 건 알고 있었는 단계도 있다는 건 처음 듣네요.
―1단계면 혹시 블랙리스트 중에서 가장 쎈 건가요?
“아니, 블랙리스트 단계는 숫자가 커질수록 심각한 거야. 1단계는 그래도 가장 낮은 축에 속하지. 불법 바이럴 마케팅이나 어뷰징 작업 하던 애들이 주로 블랙리스트 1단계에 이름이 올라 있어.”
―불법 바이럴 마케팅이 뭐죠, 형님?
―바보냐. 댓글알바 말하는 거잖아. 포탈 기사나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공들여서 여론 작업 하는 애들.
“기업이나 정치 세력의 돈을 받아서 불법 댓글 알바 하던 애들에게 제니스 타운의 문을 열어줄 수는 없지. 탈락 통보조차 못 받았다면 자기의 경력을 한 번 되짚어 봐.”
―그럼 기간은 얼마나 되나요?
“기간이라니? 블랙리스트는 단계와 상관없이 한 번 이름 올리면 영원히 방출되지 않아. 오로지 티어 승급만 있을 뿐, 티어가 떨어지는 일도 없어.”
“이거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김범석은 부리나케 차를 준비해서 전남 제니스 타운을 향해 달려갔다. 이형원 부회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전화로 이야기할 만한 내용도 아닐 뿐더러, 이형원은 회식의 후유증으로 이번 주에는 전남에서 요양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전남으로 내려왔지만 바로 접견을 할 수는 없었다. 이형원은 회식과 등산의 부작용으로 이틀 넘게 뻗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모임 일정이 완전히 끝나고 사흘이 지나서야 이형원은 겨우 정신을 차렸고, 김범석도 그를 접견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보고했고, 이형원은 끝까지 듣고 난 후에 신음을 흘렸다.
“정말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까?”
“네, 유지웅 회장은 인위적인 조작으로 형성된 여론을 매우 혐오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 그룹에서는 알음알음 사설 바이럴 마케팅을 하고 있지요. 제품뿐만 아니라 그룹에 대한 이미지, 심지어 정치권에 대한 영향력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 모두를 즉시 중단하면 될 것 같습니다. 비용도 전혀 들지 않죠.”
담성그룹은 여론의 흐름을 지배하기 위해 사설 바이럴 마케팅을 운영하거나, 하청을 주거나 외주를 맡긴다. 거기에 나가는 비용만 일 년에 기천 억 원에 달한다.
담성그룹 관련 기사나 게시물에 무차별적으로 긍정적인 댓글을 달고,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의견에는 여럿이 달려들어 물어뜯음으로써 여론을 조장한다.
“분명 유지웅 회장은 우리 그룹이 운영하는 사설 바이럴 업무를 알고 있을 겁니다. 만약 그것을 전격적으로 중단한다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유지웅 회장의 호의를 살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김범석은 며칠 전에 유지웅이 언급한 블랙리스트 1단계까지 곁들여서 설명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이형원은 결심을 굳혔다.
“좋습니다. 그럼 그룹 차원에서 전격적으로 바이럴 마케팅을 중지하세요. 단, 임시 조치입니다. 만약 효과가 전혀 없을 시에는 다시 가동할 수 있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한밤중, 힘든 몸을 겨우 일으켜 욕실로 간 이형원은 면도를 하기 위해 물을 틀었다.
뭔가 이상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든 그는 소스라치게 놀랄 뻔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이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거울이 아니라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일란성 쌍둥이가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꿈인가?’
기괴하게도 거울 속의 자신은 죽은 사람처럼 안색이 어두웠다. 심지어 입에는 한 줄기 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치이익…… 치익……
‘석호야…… 이석호……. 해냈구나.’
‘이석호?’
이형원은 당황스러웠다. 거울 속의 자신이 왜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치이익……
‘세계선이…… 붕괴하고 있다……. 네 옆에서 조언하는 자를…… 조심해라…….’
“당신, 누구야! 왜 나와 똑같은 얼굴로……!”
‘어쩌면…… 그런 세상도…… 나쁘지 않을 지도…….’
치이익, 치익…….
“으아악!”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이형원은 온몸이 흠뻑 젖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기분 나쁘게 무슨 악몽이 이렇단 말인가.
============================ 작품 후기 ============================
실탄 월드의 다른 세계선에서는 이형원이 주인공 손에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에요ㅋ
크게 중요한 건 아니라서 꿈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