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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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스 컴퍼니와 협상을 잘 마치고 왔다는 아들이 뜬금없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에 정현수는 당황했다. 아무런 예고 없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부의장님 밑에서 일해보고 싶어서요.”
“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번에 부의장님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제가 깨달은 게 많습니다. 그동안 제가 너무 좁은 물에서만 살았습니다. 이제 바다를 알게 되었으니 힘껏 나아가렵니다.”
뭔가 들떠 보이는 아들의 표정에 정현수는 정색을 하고 찬찬히 살폈다.
그러고보니 방금 아들이 뭐라고 했더라?
“회장직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선물을 받았다고?”
“예, 아버지.”
“그게 뭐냐? 혹시 제니스 컴퍼니 계열사 대표이사 자리라도 받은 거냐?”
“맞습니다.”
그제야 정현수의 표정이 다소 펴졌다.
제니스 그룹. 누구나 꿈꾸는 궁전이지만 난공불락의 요새다.
계열사 하나가 굴리는 돈이 수십 조원에서 수백 조원이 거뜬히 넘어가는, 세계 최대의 그룹.
그런에 아들이 그곳에 스카우트되었다니.
“허어……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일단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출근하는 거냐? 무슨 자리를 맡았고? 아, 그럼 효진배터리 사업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그걸 너한테 맡기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제가 맡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 겸직을 해도 상관없다고 허락 받은 거냐? 그렇다면 결정체 배터리 사업 쪽하고 밀접한 연관이 있나 보구나.”
“예, 맞습니다. 이번에 신설되는 제니스 배터리 대표이사 자리를 맡았어요. 아직 정식 취임은 안 됐지만 출근은 오늘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제니스 배터리?”
정현수는 아리송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설회사 사명이 제니스 배터리라니, 왠지 좋지 않은 느낌이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했다.
“효진배터리를 제니스 컴퍼니에 완전히 넘기고 이름도 제니스 배터리로 바꾸기로 했어요. 법인 설립 절차를 건너뛰니 지체없이 바로 근무 시작할 수 있게 됐죠.”
“뭐, 뭐? 효진배터리를 완전히 넘겨? 이름까지 바꾸고?”
정현수는 펄쩍 뛰며 기겁했다.
효진배터리를 완전히 넘기면 어제까지 아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짠 전략이 다 무용지물이 되는 것 아닌가?
미래자동차그룹의 30%를 제니스 컴퍼니에 넘겨주어 종속적 동맹 관계를 맺는다는 전략 말이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동차그룹 아들로 태어나 자동차 사업에만 매달리고, 부품 조달 궁리하고, 차량 팔아치울 생각만 평생 하며 살아와서 그런지 세상을 보는 시야가 지극히 좁았습니다.”
“지운아,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효진배터리라는 절묘한 카드를 쥐고 있으면서 너무 안일하게 생각을 했던 겁니다. 다행히 아름다우시고 너그러운 정효주 부의장님께서, 효진배터리를 부품 조달 자회사로만 봤던 저의 좁은 식견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아들아?”
“아무것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미래자동차그룹 지분 30%는 ‘제니스 배터리’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그룹 지배 체제만 조금 바뀔 뿐입니다. 효진배터리는 제니스 배터리로 사명을 바꾸고 제니스 컴퍼니 100% 소유 계열사로 들어갈 겁니다.”
정현수는 지금 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다른 건 다 그대로 하고 효진배터리를 100% 넘겨주기로 했단 거냐? 그룹 지분 30%는 효진배터리에 옮겨주기로 했고?”
“그렇습니다.”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정효주 부의장이 그렇게 하자고 이제 와서 말을 바꾼 거냐?”
“말을 바꾸셨다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분은 저의 눈을 틔워주신 것뿐입니다.”
정지운은 눈을 매섭게 뜨며 부친을 직시했다.
아무리 친부이고 또 그룹 회장이라 해도, 나의 주인님에게 그런 식으로 발언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
이제 와서 말을 바꿨다니! 어떻게 그런 불경한 표현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 일개 자동차 제조업체 따위가 결정체 배터리를 생산하는 회사를 감히 자회사로 거느릴 수는 없습니다. 결정체 배터리의 활용도가 얼마나 무궁무진한데, 겨우 한 자동차 제조업체의 전기자동차 배터리만 주구장창 공급한단 말입니까.”
“뭐, 뭣? 너 지금 대체 무슨 말을!”
“결정체 배터리는 앞으로 전기자동차 시장뿐만 아니라, 배터리가 들어가는 모든 시장을 석권하게 될 겁니다. 전 세계를 종횡무진 가로지르게 될 겁니다.”
정지운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미래를 상상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뻐하십시오. 미래자동차그룹은 그런 제니스 배터리의 가장 첫 번째 자회사가 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지운이, 네 이노옴! 대체 무슨 짓을 한 게야!”
“오, 정말이야?”
정효주의 이야기를 듣고 난 유지웅은 진심으로 기쁜 듯이 반색을 보였다. 그런 진솔한 반응에 정효주도 기분이 좋아지며,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효주도 제법인데? 어떻게 그런 괜찮은 빨대를 얻은 거야?”
“……빨대?”
“아, 있어. 충복을 부르는 나만의 애칭이야.”
정효주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야기를 몇 번 나눠보니 생각보다 괜찮더라고. 재벌 3세라서 선입견이 좀 없진 않았는데, 똘똘하게 일을 잘 처리할 거 같아.”
“흐음, 하긴 집안이나 혈통과 상관없이 타고나는 천부적인 성격은 어쩔 수가 없지. 왕의 자식이라고 반드시 왕재를 타고 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유지웅은 팔짱을 낀 채 끄덕거렸다.
“오히려 정지운 같은 그런 친구는 누군가로부터 지배받고 통제당하고, 또 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인생을 즐거워할 수도 있어. 마치 범석이처럼 말이지.”
“그래도 오십 넘은 아저씨인데, 그런 친구라고 표현하니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주종관계에 나이가 어디 있어. 서열만 있는 거지.”
물론 유지웅은 직함에 상관없이 존대를 사용하고 인간적인 존중을 해준다. 다만 김범석처럼 막 다뤄지는 것을 오히려 선호하는 이들에게는 별도의 태도를 취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듯이, 집사나 머슴의 씨도 따로 없는 법이거든. 그럼 배터리 제조업은 아예 그쪽으로 맡기려고?”
“특허권 소유만 그쪽으로 돌려서 관리하려고. 어차피 교통정리는 해야 하니까.”
“효진배터리인가 하는 회사 900억 밖에 안 된다던데, 전 세계 수요를 감당할 수 있을까? 미래자동차 공급량만 겨우 커버치는 거 아니야?”
“생산라인을 늘리든지 다른 제조업에 라이센스 생산을 일부 맡길 건지, 그건 이제 정지운 사장이 알아서 하겠지.”
“아주 좋은 마인드야. 역시 내 반려다워.”
유지웅은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우며 밝게 웃었고, 정효주도 우스워서 피식거렸다.
“정현수 회장 성격에 구급차 불러야겠네. 애지중지했던 미래그룹이 일개 자회사로 전락하고 마는 셈이니까.”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기에 부친이 시작한 자동차 사업을 지금의 규모만큼 크게 키워 놓았다.
제니스 컴퍼니에 지분 30%를 나눠주고 백기사로 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건 미래자동차그룹이 제니스 배터리의 자회사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불같은 자존심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약간 양심이 가책이 느껴지긴 해.”
“왜?”
“괜히 부자지간에 피바람 부는 싸움 유도한 게 아닌가 싶어서. 살짝 미안하기도 하고.”
“애초에 그런 재벌가는 왕자의 난을 피할 수 없어. 좋게 좋게 나가는 것은 무리야.”
“그렇지? 내가 순리를 따른 게 맞지?”
“암, 그렇고말고.”
정현수 회장은 대노했다.
그는 미래자동차그룹의 회장으로서 철통같은 자존심을 갖고 있었다. 곧 죽어도 남의 밑으로 들어가지는 않겠다는.
필요에 의해서 잠시 굽히고 거래를 맺는 것과, 아예 남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아들이 그룹을 통째로 갖다 바치고 왔다.
제니스 컴퍼니는 말이 30%의 주주이지, 사실상 51% 이상의 지분을 가진 오너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어차피 배터리를 공급받지 못하면 결국 또 다른 자동차 회사의 하청기업이 되고 말 운명이었습니다. 아버지도 그걸 아셨기에 처음의 그 제안을 승낙하신 거 아닙니까.”
“내가 원한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지분 30%를 내주고 대신 안정적으로 배터리를 공급받는 것! 네가 지금 저지른 것은 엄연한 월권이다!”
“그럼 이제 와서 뒤집으시렵니까? 정효주 부의장님께 찾아가셔서 석고대죄해서 없던 일로 만드실 겁니까? 그렇다면 아버지가 직접 찾아가서 하십시오! 전 그렇게 못합니다!”
“석고대죄는 네가 해야지! 이놈아!”
“제가 왜 석고대죄를 합니까? 전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아버지가 정효주 부의장님 찾아가셔서 석고대죄 못하게 가로막아야지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입니다.”
살벌한 아들의 눈초리에 정현수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너, 너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그분께서 너그러운 마음에 이런 큰 배려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 은혜를 거둬달라는 불충한 언사로 그분의 귀와 마음을 더럽힐 수야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석고대죄하러 가신다면 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겁니다. 절대로 그러지 못하게 할 겁니다.”
“아니, 그래도 이놈이!”
혈압이 치솟은 정현수는 순간 눈앞이 어질어질한 느낌을 받았다.
회장실에 죄인처럼 서 있던 정지운의 다른 형제들, 그리고 고위 임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얼른 부축했다.
정현수의 장남이자 정지운의 형인 정택운이 눈알을 부라리며 말했다.
“너 아버지한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형님이야말로 생각 똑바로 해. 지금 아버지 편을 들 때가 아니란 걸 몰라?”
“뭐, 뭐야?”
“야, 정지운!”
“지운이 형님! 대체 왜 이러십니까! 아버지 앞에서 얼른 싹싹 비세요!”
다른 형제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저마다 입을 열며 정지운을 나무라고 나섰다. 정현수는 이마를 짚은 채 비틀거리면서 눈살을 있는 힘껏 찌푸렸다.
정지운은 한숨을 쉬며, 형제들을 둘러 보았다.
저마다 눈동자 속에 희미한 탐욕을 감추고 있다.
자신이 부친의 분노를 샀으니, 후계 경쟁구도에서 밀려나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 한 명이 떨어져 나가면 그만큼 다른 형제들이 나눠 가질 계열사가 늘어날 테니까.
‘어리석고, 한심하고, 답답하구나.’
정지운은 불현듯 정효주를 떠올렸다.
아름답고 너그러우신, 내가 평생을 모셔야 할 주인님.
그분이 미래자동차그룹에 내려주신 천금 같은 기회가 지닌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형제들이 한심했다.
“형님들, 지금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데.”
“뭐, 뭐야?”
“아버지가 지금 전혀 몰라서 저러시는 게 아니야. 평생을 바친 그룹에 대한 애착 때문에,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지. 진정한 효자라면 아버지의 그런 혼란을 꿰뚫어보고, 하루빨리 마음 편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해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