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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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결정체 비축 물량을 안 푼다고 하니까 레이드 시장이 나날이 발전하는군.”
유지웅은 흐뭇한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뜨거운 커피를 즐기며 국제 뉴스를 탐독했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각 나라 정부와 민관을 가리지 않고 레이드에 몰두하고 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 가득했다.
웃긴 것은 비축 물량을 비상을 대비한 재고로 남겨두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나라가 많다는 것이다.
―제니스 컴퍼니는 결정체 물량 공급을 인위적으로 조절하여 시장 가격을 통제하려 한다!
그런 분석을 철썩 같이 믿는 이들도 제법 상당했다.
상식적으로 그 많은 물량을 조금도 안 쓰고 비축만 해두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었나?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웬만해선 다 지킨 거 같은데.”
“나 같아도 믿기 힘들 거 같은데. 그렇게 잔뜩 쌓아놓고 하나도 안 풀겠다고 하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겠지.”
어느새 다가온 정효주가 옆에 앉으며 말했다.
턱을 괴고 잠시 바라보던 그녀가 화제를 바꿨다.
“장 팀장님이 미국에서 활약이 대단한가 봐.”
“내가 그 사람 싹수 파란 건 진작 알아봤어요. 아쉬워. 장 팀장님이 원거리 딜러로 각성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활약을 펼칠 수 있을 텐데. 세계 최고의 공격대장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비레이더 지휘자가 공격대장을 맡는다는 것은 레이더 정서상 힘들다.
지금이야 레이드 초기이니까 장태준이 공격대장 행세를 해도 크게 무리가 없지만, 언젠가 레이드는 일반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때가 되면 장태준은 전술팀장으로서 지휘 대행을 하는 정도에서 그칠 것이다.
레이드에 익숙해진 초능력자들은 일반인이 공격대장 지위를 맡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
“근데 켈루자는 좀 힘들게 잡는 거 같던데.”
“어쩔 수 없지 않아? 켈루자 공략을 제대로 모르니까. 그렇다고 목숨 바쳐가면서 이것저것 다양한 전략을 시험할 수는 없고. 이건 게임이 아니라 실전이라고. 까딱하다가는 목숨 날아간단 말이야.”
“지웅이 네가 살짝 귀띔해주는 건 어때? 켈루자 쉽게 잡는 방법.”
정효주가 넌지시 말하자 유지웅은 눈을 한껏 치켜뜨며 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허, 그래서는 바람직한 발전을 이룩할 수 없어요. 내가 하나부터 백경까지 일일이 챙겨줄 수도 없는 노릇인데, 그런 사소한 것부터 다 말해줘 버리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어? 온 세상이 둥지에서 어미새 기다리는 새끼새처럼 하늘 쳐다보고 입만 쩍 벌리고 있을 거 아냐.”
“그리고 너는 부지런히 먹이만 잡아다가 나르느라 날개가 부러질 것 같은 관절통에 시달릴 테고?”
“그렇지. 잘 아네.”
정효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유지웅은 장태준이, 아니 이 세상이 쉽게쉽게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가 보다. 부분적으로는 그녀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아참. 이번에 보험사 하나 샀어. 싸게 나온 매물이 있더라고.”
“보험사를? 어디에 쓰려고?”
“제니스 타운 입주민들 보험 좀 들어주려고. 하는 김에 타사 보험 든 건 싹 해지시키려고 해.”
“탁월한 선택이야. 남의 보험사 괜히 돈 벌게 해줄 필요는 없지.”
정효주는 유지웅의 옷차림을 잠시 살폈다. 그러고 보니 평소 집안에서 편히 입는 옷차림이 아니라 나들이 복장이었다.
“오늘 어디 나가?”
“아니, 손님이 있어서. 이제 곧 올 거야.”
“손님? 무슨 손님?”
“나도 오늘 처음 만나. 아, 그냥 이걸 보는 게 더 빠르겠구나. 한 번 볼래?”
“보여줘.”
유지웅은 태블릿을 몇 번 만지고는 웹페이지를 열어서 정효주에게 내밀었다.
“대학교 대나무숲 사이트네?”
“사연이 재미있어. 읽어 봐.”
정효주는 의아한 마음을 품고 익명글을 읽어 내려갔다.
「저는 한석대학교 체육학과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보복 문제 때문에 익명으로 글을 올리게 됐습니다. ……중략…… 저희는 매일 수업이 끝난 후 4학년 선배들이 주도하는 특강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처우를 겪고 있습니다.
……중략……
아무리 아프더라도 특강을 빠질 순 없습니다. 빠지게 되면 후배들 전원 집합을 시키는데, 질병이나 부상, 시간을 가리지 않고 가혹하게 군기를 잡습니다.
……중략……
다음은 학과내 규칙입니다.
1. 신입생은 한 시간 전에 체육관에 도착해 청소를 한다.
2. 신입생은 화장, 치마, 장신구, 슬리퍼, 반바지, 청바지, 모자 달린 후드티 금지.
3. 선배에게 전화를 걸 때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파트 **학번 ***입니다.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라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
4. 신입생은 캠퍼스 내 카페를 이용해선 안 된다. 음료를 마시고 싶으면 매점이나 자판기를 이용.
……중략……
우리는 엄연히 시험을 치르고 등록금을 내며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선배들로부터 이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학생들은 평등한 대학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은 이런 악습이 하루빨리 근절되고 평등한 학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뭐, 흔한 예체능 학과 악습 문화네. 근데 이게 왜?”
“내가 조금 안 됐다 싶어서 다이렉트 메시지 보내봤거든. 사실 내가 메이저 신문사 기자인데 신문에 크게 거론해줄 테니까 인터뷰 하겠냐고. 그러니까 오겠대.”
“그런 거짓말을 했어?”
정효주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풀썩 웃고 말았다.
“아니, 왜?”
“왜긴, 재밌잖아.”
“근데 이거 거짓말이면 어떡해? 아, 거짓말이면 애초에 만나자는 말에 거절했겠구나. 지금 오는 중이야?”
“응, 수직이착륙기 타고 오는 중이야. 아, 지금 공항에 내리고 있네.”
과연 유지웅 말대로 수직이착륙기 1기가 막 공항 활주로에 내리고 있었다.
활주로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지만 탱커인 정효주는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네? 몸 제법 좋은데?”
“체육학과라고 했으니까. 그래도 얼굴 보니 애 맞네.”
갓 20살이 되어 보이는 남자는 잔뜩 주눅이 든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신문사 인터뷰 정도로 생각하고 왔는데 수직이착륙기에 활주로가 딸린 대저택이라니, 그럴 수밖에.
남자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저택으로 들어왔다. 유지웅은 응접실에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와.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지?”
“지, 지웅이 형님!”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외쳤다. 아직도 얼이 잔뜩 빠진 표정이었다.
“자, 이리 와. 편히 앉아.”
유지웅은 남자에게 착석을 권했고, 그는 엉거주춤해서 자리에 앉았다. 불안한지 시선 처리를 못하고 있었다.
“너 오는 동안에 나도 좀 알아봤는데, 거짓말한 건 하나도 없더군. 오히려 줄여서 말했던데?”
신입생은 여전히 얼떨떨한 채,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용기가 있네. 그 나이에 그렇게 글을 올리고, 또 언론사에 제보할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은데. 좋아, 내가 도와줄게.”
“어떻게 말입니까?”
“친구, 이름이 뭐지?”
“하, 한석재라고 합니다.”
“석재 동생, 네 손으로 직접 해결해. 이런 건 피해자가 직접 나서서 뒤집는 게 쉽게 뿌리를 뽑을 수 있어.”
“하지만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내가 그래서 힘 준다잖아.”
유지웅이 팔짱을 낀 채 말하자 한석재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살폈다.
“왜, 무서워? 직접 선배들한테 들이받으려니까?”
“아무래도 좀…….”
“집안 형편은 어때? 좀 사는 편인가?”
“……평범합니다. 아버지께서 회사 다니세요.”
“미친놈처럼 학과 싹 들이받아. 선배고 묵인한 교수고 가릴 것 없이. 대신 천만 달러 준다.”
그 순간 학석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만 달러면, 백억 원?
유지웅은 흔들리는 동공을 보고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통장에 천만 달러 있는데, 그깟 개 같은 군기 잡는 것들이 무서워? 닥치는 대로 들이받아. 선배 같지 않은 것들한텐 그냥 야자새끼야 하고 말 까버려. 지랄하면 너도 그 이상으로 지랄하고, 전부 다 녹음녹화 떠서 사법 처리해. 법 뒀다 뭐할 거야? 내가 법무팀도 붙여준다.”
“혀, 형님. 정말로…….”
“천만 달러 있는데, 그런 애들 들이받는 게 무서워?”
그럴 리가.
“까짓 거 왕따 되고 아싸 좀 되면 어때? 그냥 미친놈처럼 4년 내내 선배들 쫓아다니면서 물어뜯어 봐. 4년이 뭐야, 1년도 안 돼서 근절될 걸?”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것인가.
한석재는 잠시 상상해보았다. 미친놈처럼 선배들을 쫓아다니면서 악다구니를 쓰는 자신의 모습을. 선배들이 부당한 폭력을 휘두를 때마다 일일이 법으로 처리하고, 학교를 뒤엎어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잘못 돼도 백억 원이 남잖아?’
갑자기 거들먹거리면서 똥군기를 잡는 선배들이 한심하고 초라하게 보였다. 이것이 돈의 힘인가?
한석재의 눈빛이 단단하게 변했다.
“하겠습니다.”
“좋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거지? 그냥 편안하게, 지금 생각나는 대로 말해 봐.”
“제 눈에 보일 때마다 부당한 관행을 지적하고 더 이상 하지 말라고 요구하겠습니다. 사람 같은 반응이 돌아오면 존중해줄 것이고, 사람 같지 않은 반응을 보이면 저도 사람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대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학우들을 쫓아다니면서 제보하라고 귀찮게 재촉하겠습니다. 제가 인지하는 모든 사건에 제 시간과 여유가 되는 한 참석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정규 수업 중에 난리를 부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진짜 학과 내의 미친개가 되겠습니다. 학점 따위는 그냥 포기하겠습니다. 사정없이 선배들을 물어뜯겠습니다. 어차피 백억 있는데요, 뭐.”
유지웅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훌륭한 마음가짐이야. 중간중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나한테도 보고해 줘. 참, 이건 내 비서실장 명함이니까 가져가서 연락해. 법무팀하고 경호원팀이 지원해줄 거야.”
“감사합니다.”
한석재는 깍듯하게 인사한 뒤 당당한 걸음으로 돌아갔다. 이곳에 올 때와는 몸과 마음가짐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아, 간만에 소소하지만 확실한 재미가 생겼네. 이런 걸 소확행이라고 하던가? 맞지?”
“……그래, 천만 불 값은 할 것 같네.”
유지웅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들뜬 기대감이 가득했다.
학과의 관행이 부당하고 말도 안 되는 것은 알지만, 이쪽은 신입생이고 혼자다.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하던 상황.
하지만 하루아침에 생긴 백억이라는 돈은, 그런 학과 내 문제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다.
법에 저촉하지 않는 선에서 선배들을 미친개처럼 물어뜯으며 지내는 캠퍼스 라이프도 할 만할 것이다.
왜냐하면 백억이 있으니까.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부당한 악습에 홀로 저항하는 투사 역할에 심취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그걸 제3자의 시점에서 지켜보는 것은 또 얼마나 쏠쏠한 것인가.
‘이런 게 팍팍한 삶을 비추는 자그마한 행복이지.’
그렇게 즐거워하고 있을 때, 지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유지웅은 밝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유지웅입니다. 지모 대위…… 네? 뭐라고요?”
유지웅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이드 실패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