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156)
00156 외환 =========================================================================
회유된 직원은 국정원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며 데리고 갔다. 더 이상 알아낼 것은 없었고, 안보적인 차원에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할 모양이었다. 아마 중형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지만, 유지웅은 그에게 관심을 거두었다. 돈에 넘어가서 고용주를 팔아넘긴 자를 두둔할 이유는 없다.
유지웅도 레이드 때를 제외하고는 당분간 외출을 삼가고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하지만 시간만 차일피일 흘렀을 뿐 더 이상 이상한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방학이 끝났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좋은 아침.”
첫 주 강의실에 들어서자 동기들이 인사를 해왔다. 정효주는 조바심을 안고 분위기를 살폈다.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저마다 떨떠름한 표정을 조금씩 띠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그만 한숨을 쉬었다. 박나영에게 소문이 쫙 났다고 듣기는 했지만, 첫 주부터 이런 시선이라니.
“와, 쟤 옷 좀 봐. 저거 완전 실크야.”
“저 가방도 짝퉁인 줄 알았는데 다 진짜라며? 그럼 대체 얼마야?”
“남자친구 돈 많아서 좋겠다.”
“하여튼 이쁜 것들은 얼굴값 한다니까. 우리 과 남자애들 쳐다도 안 본 이유가 있었어. 페라리 사주는 남친이 있는데 평범한 대학생이 눈에나 차겠니?”
정효주가 들어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애들이 그렇게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딴에는 멀리서, 그리고 작게 소곤거리지만 탱커인 정효주 귀에는 아주 잘 들렸다.
“근데 학교에 왜 페라리 타고 안 오는 거야?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나름 눈치 보는 거지.”
“그런가?”
“아, 근데 진짜 남친 뭐하는 사람일까? 스물 한 살이라던데 몇 억짜리 페라리를 여친한테 사줄 만한 능력이 돼? 아무리 집에 돈이 많아도?”
여자애들은 거기서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집이 부자라 해도 아들에게 페라리를 사줄 수 있을지언정, 아들 여친에게 사주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 진짜 재벌급이 아닌 이상.
“듣자니 학생 아니고 일한다던데. 무슨 벤처 사업가?”
“혹시 레이드하는 건 아니야?”
“에이, 레이드해도 그렇게 많이는 못 벌어. 우리 사촌의 친척의 사위분의 친구가 힐러 하고 있어서 내가 좀 아는데, 힐러라 해도 월 10억이 한계래. 그것도 진짜 빡세게 레이드 다녀서 월 10억이래.”
“월 10억이면 페라리 사줄 수 있네. 보름치 수입만 털면 되잖아.”
“아,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러네.”
“바보. 하여튼 여자는 예쁘고 볼 일이야. 페라리도 선물로 사주는 남자가 달라붙고.”
이윽고 교수가 들어왔다. 첫 주라 그런지 교수는 간단한 오리엔테이션만 마치고 강의를 끝냈다. 정효주는 교수의 강의 계획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과 여자애들이 자기를 놓고 수군거리고 있었기에 온통 신경이 거기에만 쏠렸다.
“언니.”
다음 강의실에 들어서자 박나영이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도 강의실내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게 느껴졌다. 정효주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박나영 옆에 앉았다.
“어떡해요? 소문 다 났어요.”
박나영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정효주는 굳은 얼굴로 가볍게 끄덕였다.
“나도 알아. 내 얘기밖에 안 들리던데?”
“그나마 언니 있는 곳에서는 조심한답시고 화제 가려서 말하는 거예요. 언니 없는 데서는 진짜 별 소리 다 나왔어요.”
“뭐라고?”
“언니가 무슨 스폰 받는 거 아니냐고요.”
“스폰? 그게 뭔데?”
“요새 그런 여대생들 많잖아요. 돈 많은 남자 하나 물어서 고정적으로 잠자리 해주면서 경제적 지원 받는 거요. 그걸 스폰 받는다고 해요. 남자를 스폰서라 하고요.”
빠드득. 이가 갈렸다.
이것이 소문의 힘이다. 한 사람, 두 사람,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살이 붙고 붙어서 결국에는 본래의 형체를 찾을 수조차 없게 된다.
박준이 목격한 것은 단지 정효주에게 동갑내기 남자친구가 있으며 그가 수억 짜리 페라리를 여자친구에게 사주었다는 게 전부였다. 그게 구전되면서 온갖 살이 붙다가 결국에는 그녀가 스폰 받는 천박한 여대생으로 몰리고 만 것이다.
‘예쁜 여대생과 페라리를 사줄 수 있는 돈 많은 남자.’
이 관계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예쁜 여자가 미모를 활용해 돈 많은 애인과 사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해석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선호한다. 그런 심리와 맞물려 해괴망측한 선입견이 만들어진 것이다.
정효주는 하루 종일 그런 해괴한 소문에 시달렸다. 다들 그녀 앞에서는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뒤에서는 온갖 수군거림을 쏟아냈다.
그게 더 괴로웠다. 차라리 대놓고 말하면 어떻게 손을 써보겠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혹은 뒤에서 수군거리고 있으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준과 얽혔던 일은 방학 중이라서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소문이 진행된 줄은 몰랐다. 개강 첫 날인데 이 정도면 남은 학창 생활은 어찌 될지 눈에 선했다.
‘찾아가?’
박준을 찾아가서 이 소문을 해명하라고 따져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선배에게 잘못 대들었다가는 일만 더 커진다. 더군다나 박준은 책임 회피를 할 게 뻔하다. ‘그냥 너 남자친구 돈 많은 것 같다는 말만 했을 뿐인데?’라고 한다면 더 이상 따질 여지가 없어진다.
“언니. 어떡해요?”
오히려 박나영이 더욱 걱정하고 난리였다. 정효주는 결국 결심을 굳혔다. 아, 조용히 학교 다니고 싶었는데.
“이 헛소문의 원인은 여자가 남자에 비해 너무 기울어 보이기 때문이야. 그럼 저울을 조금 맞추면 돼.”
“네?”
“이 수밖에 없어.”
정효주는 곧장 장길수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과에서 학장을 제외하고 그녀가 레이드 능력자이자 제니스 공격대 소속이라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부탁이 있어요, 교수님. 실은 제가…….”
“알았다.”
그녀의 부탁을 들은 장길수 교수는 흔쾌히 승낙했다.
다음 날, 정효주는 장길수 교수 강의에 나갔다. 전공 필수 과목이라 많은 학생들이 수강 신청한 과목이었다.
“……이와 같이, 이 과목은 공격대 활동이 국가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동시에 효율적인 레이드 활성화를 위해 어떤 레이드 지원 제도를 갖추어야 하는지를 공부하는 과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주라서 앞으로의 강의 계획 및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장길수 교수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비로소 정효주를 발견한 척 눈을 치켜떴다.
“어, 효주도 이 수업 들어?”
“아, 네.”
“첫 주라서 출석을 안 불러서 몰랐네. 이거 효주 덕분에 이번 학기는 수업 내용이 아주 알차겠는데? 현직 레이드 능력자가 수강생에 끼어 있으니까.”
“현직 레이드 능력자요?”
그 말에 놀란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정효주를 보는 시선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특히, 그녀를 깔아 내리던 소문에 반신반의하던, 나름대로 그녀를 추종했던 남학생들의 눈빛이 대번에 긍정적으로 변했다.
“제일 잘 나가는 공격대 소속이니까 생생한 현장 정보 얻기도 쉬울 테고, 너희들 이번 학기는 정말 알찬 수업을 보낼 수 있겠구나. 축복 받은 줄 알아라. 다른 과목에서도 과제 같은 거 하면서 많이 도움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제일 잘 나가는 공격대요?”
“설마 제니스 공격대?”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정효주를 뒤에서 씹어 내렸던 여자애들은 놀란 나머지 입을 가린 채 손을 떼지 못했다.
정효주는 창피해서 얼굴이 벌게진 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물론 적당히 꾸민 연극이었다.
“그래. 결정체학 공부하다 보면 필요한 여러 가지 유용한 정보를 효주한테 많이 얻을 수 있을 거다. 다른 데도 아니고 제니스 공격대니까.”
“우, 우와! 쩐다!”
“아, 그럼 혹시 남자친구도 같은 정공 소속?”
“뭐야, 그럼 둘 다 돈 많은 커플이었네.”
“거 봐, 내가 뭐랬어. 효주는 스폰 같은 거 받는 그런 애 아니라고 했잖아.”
“내가 안 그랬거든? 여자애들 몇몇이 그렇게 떠들고 다닌 거지.”
학생들 수군거림의 내용이 달라졌다. 남들에게 들릴세라 자기들끼리 속삭이고는 있지만 정효주 귀에는 생생하게 들렸다. 이제 순식간에 소문이 과 전체에 퍼질 것이다.
그녀가 얼굴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평범한 여대생이라는 것과 박준의 악의가 뒤섞여서 해괴한 소문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그녀에게도 충분한 재력이 있다는 것만 입증하면 얼마든지 소문 내용은 뒤집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제니스 공격대에 다닌다는 사실을 과에 흘리기로 했다. 장길수 교수에게 자기 처지를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논문 작성에 신세진 바 있는 장길수 교수는 흔쾌히 허락하고, 모르는 척 그녀가 제니스 공격대 소속이라는 것을 밝혀주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조용한 학창 시절 보내기는 틀렸네.’
레이드 능력자는 굉장한 고소득자. 그 사실이 밝혀지면 아무래도 조용한 생활을 보내기는 힘들 수밖에 없다. 대다수 레이드 능력자들이 직업을 숨기는 게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스폰서라는 헛소문에 피곤해지는 것보다는 제니스 소속이라는 선망 때문에 피곤해지는 게 나았다. 뒤에서 ‘스폰 받는 걸레.’라는 취급을 받는 것보다는 ‘돈 좀 빌려줄래?’라는 부탁을 거절하고 다니는 게 아무렴 낫지.
“고맙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살았어요.”
강의가 끝나고 남몰래 장길수 교수를 찾아간 정효주는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장길수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잘한 건지 모르겠구나. 과 애들이 돈 빌려달라고 졸라대면 꽤 피곤할 텐데.”
“괜찮아요. 설마 그러겠어요?”
“모르는 소리. 다른 학교 교수들 이야기 들어보면 그런 애들 굉장히 많다고 하더라. 노파심에 말해두지만 절대로 그런 애들한테 돈 빌려주지 말아라. 과가 시끄러워져.”
“네, 알고 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교수님.”
“감사하면 밥 한 번 사는 게 어떠냐? 우리 돈 잘 버는 제니스 대원은 어떤 밥 먹는지 궁금한데.”
“식사요? 네, 근사한 데서 모실게요.”
정효주는 순간 흠칫했으나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선선히 끄덕였다. 어쨌든 교수 도움을 얻은 것은 사실이니까 그 정도 보답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조금 걱정인 것은 아무리 사제지간이라 해도 외간 남자와 단둘이 식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녀 성격상 남편이 있는 몸으로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정화목제일주의였다.
‘아, 지웅이도 같이 나가면 되겠네.’
남자친구를 소개한다고 할까? 아니면 남편을 소개하는 자리로 할까? 정효주는 집에 가서 신랑과 그 부분을 의논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어섰다.
하루 만에 평판이 바뀌었다.
은연중에 벌레 보듯 하던 시선이 선망의 눈길로 바뀌었다. 그냥 레이드 능력자도 아니고 제니스 공격대 대원이란다. 평범한 대학생으로서는 쳐다보기도 힘든, 상위 클래스 인물인 셈.
만약 다른 학과였으면 그냥 돈 많이 버는 동기생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과는 결정체학과였다. 과 특성상 레이드 공격대와 밀접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 보통 정공도 아니고 우리나라, 아니 세계 제일의 공격대 소속이니 친분을 맺어두기만 하면 장차 사회로 진출했을 때 대단한 인맥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비유하면 이해가 쉽다. 법조인 진출을 목표로 하는 법대생들에게 연 10억을 버는 벤처 사업가 동기생은 그냥 좀 부러움을 사는 정도로 끝난다.
하지만 현직 대법원장을 부친으로 두고 있으며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해 이미 사법연수를 밟고 있는 동기생은 두고두고 인맥을 맺어둬야 할 대상이다. 결정체학 전공도에게 제니스 공격대 소속 대원은 바로 그런 존재라 할 수 있다.
“언니, 평판이 확 바뀌었네요. 나도 그냥 속 시원하게 커밍아웃할까 봐요.”
“됐어. 피곤하기만 해.”
“아는 동료 대원 막 소개팅해달라고 여자애들이 아주 난리 치는 거 디게 웃겨요. 언니 보고 스폰 받는다고 할 땐 언제고, 언니가 제니스 대원이라니까 말 싹 바뀌는 거 봐. 언니 신랑이 누구인지 알면 여기서 얼마나 더 뒤집어질까요?”
“……그건 절대로 말하면 안 돼.”
뒤집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과에 폭풍이 불지도 모른다. 그녀가 제니스 메인 탱커이자 공격대장의 아내라는 것은 학교 총장도 모르는 사실이니까.
그렇게 하루아침에 바뀐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며 박나영과 강의실로 향하던 중 복도에서 박준과 마주쳤다. 박준은 차마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미, 미안하다.”
그녀가 흘끔 지나치려는 찰나 박준이 어렵사리 사과했다. 박준도 장차 결정체 취급 기업에 진출하려고 생각 중이었다. 헌데 레이드 능력자, 그것도 제니스 소속 인물의 심기를 거슬린다면 영업하는데 두고두고 지장을 받게 된다. 회사에서도 좋지 않게 볼 것이다.
“선배. 여자한테 거절당했다고 그런 소문 퍼트리는 분인 줄 몰랐어요. 솔직히 실망했어요.”
“미, 미안.”
“그냥 안 보고 지냈으면 좋겠어요. 죄송해요. 후배 돼서 선배한테 할 말 아닌 거 아는데요, 만약 제가 레이드 능력자 아니었으면 선배가 낸 소문 때문에 학교 못 다니고 결국 자퇴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선배가 얼마나 큰 잘못 저질렀는지 반성하신다면 제가 모질다고 못하실 거예요.”
비난을 담고 있지만 어투는 전혀 비난기가 없다. 마치 책을 읽듯이 담담하고 조용했다. 그게 더 박준의 마음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가볼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
박나영이 속이 후련하다는 눈으로 박준을 흘끔거리고는 종종걸음으로 정효주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