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294)
00294 바다의 황제 =========================================================================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하면 될까?
‘무지무지 예쁜 처자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아무래도 오해의 소지가 크겠지?
‘저는 임자가 있는 몸인데요?’
이건 너무 설레발을 치는 거 아닐까? 부하 대원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거면 완전히 개망신 아닌가?
“후, 훌륭한 대원입니다. 충성심도, 소속감도, 그리고 능력도 뭐 하나 나무랄 게 없습니다.”
이게 가장 무난한 대답 같다. 근데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같다. 세인은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뭐지? 설마 1번이나 2번 류의 대답을 바란 건가?
“난 그런 걸 물은 게 아닌데.”
유지웅은 당황했다. 이렇게 페이스가 말린 것도 참 오랜만에 겪는 일 같았다. 제니스 공격대장으로서 활동하면서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쩔쩔맨 적이 없었는데.
“질문을 정정하지. 테레사를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예?”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냔 말이오.”
마른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신중해야 한다. 질문의 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러니까 뭐?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그럼 테레사가 여자지 남자인가? 여자니까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거 아닌가? 저렇게 물어보는 상황이야 흔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손녀사위감으로 염두에 둔 남자라든가…….
‘말도 안 돼!’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쿤겐을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니요…….”
“마음에 들지 않소? 그 아이가?”
“여자로서 말입니까?”
“그렇소. 그걸 묻는 거요.”
“물론 쿤겐, 아니 테레사는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그녀에게 반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런 대답을 원하시는 건가요?”
“그대의 배필로는 어떻소?”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 노인네가 지금 누구를 잡으려고 저런 걸 묻는 건가! 이 대화가 와이프 귀에 들어갔다가는 당장 이혼, 아니 독수공방 신세다! 곧 애아빠가 될 행복한 유부남을 대체 무슨 지옥으로 밀어 넣으려고?
“저는 유부남입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요.”
“그럼 한 번도 그 아이한테 이성으로서 호감을 느낀 적이 없단 말이오?”
“절대로, 결단코 없습니다.”
못을 박듯이 부정하면서 내심 아주 조금은 찔렸다. 얼마 전, 위급한 상황에서 그녀에게 업히다가 엉겁결에 만졌던 가슴의 감촉이 생각났다. 꼭 이 할아버지가 그걸 알고서 묻는 것 같아서 찔렸다.
“나는 테레사 그 아이가 귀하를 원한다 해도 반대할 마음은 없소.”
“네?”
그게 무슨 망발이세요. 하마터면 그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노인에 대한 패륜인 줄 알면서도 속에서 그 말이 맴돈 것은, 그만큼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멀쩡한 유부남 혼인생활을 파탄으로 몰아 갈 일 있나?
“저는 아내가 있습니다. 그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귀하 같은 인물이 정부인 외에 여자를 여럿 더 둔다고 해서 흠 될 일은 아니지. 나 또한 젊을 적에는 아내 외에도 여자를 여럿 거느렸소.”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다른 여자한테 줄 마음은 전혀, 조금도 없습니다.”
“아무튼 내 마음은 그렇다는 거요.”
가슴이 벌렁거렸다. 이 노인,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카네기라면 그래도 유수의 명문 재벌인데, 소중한 손녀딸이 남의 첩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하다니. 그 심리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소?”
“다른 이야기요?”
“이번에 포획한 괴수 말이오. 귀하도 알겠지만 수중장비 사업에는 우리 카네기가가 주도적으로 투자를 했소. 미 정부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가문도 괴수 사육에 커다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있소. 그만큼 기대가…….”
세인의 말은 더 이상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테레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말만이 메아리처럼 자꾸만 속에서 울렸다. 만약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괴수 이야기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계획이었다면 멋지게 성공한 셈이다. 그의 진의가 어찌 되었든 간에 그는 이야기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으니까.
그는 겨우 한 마디만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지그시 그를 바라보던 세인은 아쉬워했다.
‘나름 흔들었는데, 이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군.’
한편으로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 심지의 굳건함 면에서도 제이스 록펠러보다 못할 게 없지 않은가.
* * *
검은 세단이 정지하고, 구두를 신은 발이 지면을 내딛었다. 이어 흰 지팡이가 땅을 짚었다. 노인이 차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쾌활한 음성이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세인은 순간 멈칫 했으나 곧 노회한 사업가답게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이네. 저번 주주총회 이후로 처음인가?”
“네. 그때는 여러 가지로 바빠서 미처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닐세. 자네 탓이 아니지. 록펠러 가의 후계자께서 신경 써야 할 일이 어디 한두 개인가?”
“이번 수중장비복 사업 투자에서 큰 성과를 거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니, 아직 아니야. 그렇게 단정하긴 이르다네. 포획 괴수의 소유권 문제도 아직 매듭을 짓지 못했어.”
“그 때문에 월가에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세인 회장님께서 그 일을 성사하기 위해 약혼자가 있는 손녀딸을 유부남에게 바치려 한다고요.”
세인은 보이지 않는 가시를 느낄 수 있었다. 젊은 혈기의 방자함으로 변명하려 해도, 제이스의 지금 언사는 분명 무례한 것이었다. 아무리 록펠러가가 카네기가보다 한끗발 더 힘을 쓴다고 해도, 제이스가 그 록펠러의 후계자라 해도, 카네기가의 큰어른인 자신에게 이래서는 안 되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제이스는 이미 확신을 품은 것이다. 자신의 진의에 관해서. 그러므로 태도는 정해졌다. 더 이상 예비신부의 할아버지가 아닌, 혼담을 방해하는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세인은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래선 안 될 이유는 또 뭔가?”
솔직한 인정. 평범한 젊은이라면 오히려 이런 당당함에 당황했으리라. 하지만 제이스는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평범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어렸을 적부터 제왕 교육을 받은, 세계 제일의 명문가 록펠러를 이끌어갈 차기 후계자였다. 혈통에서만큼은 결코 세인에게 뒤지지 않는다.
“록펠러와 카네기의 결합은 다시없을 커다란 시너지 효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전례가 없는 통합 비즈니스입니다.”
“그랬었지. 전에는 말이야.”
“하지만 회장님이 번복하신 결정은 록펠러와 카네기를 둘도 없는 원수 집안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약혼녀를 빼앗기고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남자는 없습니다. 그게 록펠러의 후계자라면 더욱 그렇지요.”
“제이스, 자네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네.”
“오해요?”
제이스는 일부러 놀란 척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보여주기 위한 반응임을 세인은 알고 있었다. 세인이 눈치 채고 있다는 것을 제이스 또한 알았다. 서로가 마음을 감추고 있지만,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감춘 마음이 어떤 것인지는 또렷이 알고 있었다.
“록펠러와 카네기의 약혼은 유효하네. 난 한 번도 그것을 깨뜨리겠다고 말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네.”
“그럼 제가 들은 이야기는 뭐지요?”
“우리 이건 확실히 해두지. 록펠러와 카네기 사이에 혼약이 맺어진 것이지, 그게 자네와 테레사 사이에 맺어진 약혼은 아니지 않은가?”
“…….”
“양가 형편상 혼인 상대로 자네와 테레사가 거론되었을 뿐이지. 그리고 테레사는 약혼녀로서는 결격 사유가 있네. 어찌 그런 아이를 염치없게 록펠러 가로 시집을 보낼 수 있겠나?”
제이스는 이를 악물었다. 판정승의 추는 순식간에 세인에게 기울고 말았다. 역시 연륜은 이길 수 없는 것일까.
“자네의 배필로 어울리는 손녀는 얼마든지 있네. 그러니 약혼이 깨진 거라고 짐짓 실망하지 말게나.”
“어르신.”
“자네가 테레사 그 아이를 특별히 생각하는 마음은 이해하고 있네. 하지만 그 아이를 자네와 맺어주는 건 불가능해. 설마 강제로 결혼식이라도 올릴 참인가? 탱커인 그 아이를?”
알고 있다. 세상 누구도 테레사의 자유를 억제할 수 없음을. 어린 시절의 학대로 인해 탱커로 각성한 그녀는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던 제이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테레사를 사랑합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부디 자네가 이해해주게.”
“어르신, 그 자에게 보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보시는 겁니까?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그리 생각하는 건가?”
세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제이스는 저도 모르게,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
상대는 거대한 카네기가를 이끄는 수장이다. 그 머릿속에는 능구렁이가 몇 십 마리쯤은 똬리를 틀고 있으리라.
어차피 가문에 있으나 마나 도움이 되지 않는 손녀딸. 그 손녀딸이 세계 제일의 부자이자, 세계 제일의 부자 가문으로 거듭날 인물과 접점을 만들어주고 있다. 버리는 카드라 생각했던 손녀딸이 대단한 조커가 되어주는 셈이다.
아마도 세인이 진정 원하는 것은, 유지웅에게 빚진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리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테레사와 그가 눈이 맞아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당장 이번 수중 레이드 뒤처리만 보아도 그렇다. 괴수의 소유권 문제에서 세인은 심리적으로나마 유지웅을 압박하는데 성공하지 않았나?
무섭도록 계산적이고 철저한 노인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읽고, 또 이해하는 제이스도 마찬가지다. 다만 둘의 차이는, 아직 마음으로 수긍하는데 차이가 벌어져 있다는 것. 그것은 세월이 좀 더 흐르면 좁혀지리라.
“저는 절대로 테레사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쥐어짜내듯이 제이스는 그렇게 말했다. 완벽한 판정패. 하지만 세인은 그 승리를 별로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짓는 미소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 나이 때는 다 그렇다네. 나 또한 그랬지.”
제이스는 이를 악물고, 등을 돌렸다. 뒤에서 느껴지는 세인의 시선에서, 비웃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분하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비웃을 가치조차 없는, 일상의 편린에 불과하다는 증거이기에.
============================ 작품 후기 ============================
글을 보다 보면 재미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근 300편 가까이 글을 본 사람들이 내가 왜 지금까지 이 글을 봤나 하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글만큼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ps : 강한 긍정은 그냥 긍정일 뿐이라니까요.. 실탄의 ㅅ은 순애의 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