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305)
00305 금수저를 물고 =========================================================================
“차는 마음에 들어?”
“네. 진짜 고마웠어요, 형부.”
“보험료는 내 계좌에서 빠져나가게 해뒀으니까 그런 건 염려하지 말고.”
“유지비가 걱정이에요. 언니가 알아서 하래요. 언니도 참 너무해, 친자매 맞아?”
“혜주 널 강하게 키우려고 그러는 거지.”
“쳇, 이제 다 컸는데요 뭘. 여기서 더 얼마나 키우려고.”
정효주는 교수들과 이야기를 한답시고 보이지 않았다. 심심했던 유지웅은 정혜주를 발견하고 붙잡고 이야기를 나눴다. 다들 짐을 나른다, 자리를 잡는다 어수선했지만 누구도 둘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창피해 죽는 줄 알았어요. 사람들이 다 저만 쳐다보는 거 있죠.”
“그래도 숨기지 않는 게 나아.”
“원래 숨길 생각도 없었어요. 근데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더라고요. 이름 밝히니까 과 선배가 바로 알아보던데요?”
“하긴, 얼굴 닮고 이름도 비슷한데 자매인 거 못 알아보면 그게 맹추지. 아, 금동이 보고 싶다.”
“형부도 가만 보면 은근히 팔불출이셔.”
“근데 그거 알아?”
“뭐가요?”
“사람 욕심이 참 끝이 없더라. 아들 얻으니까 이번에는 딸도 얻고 싶은 거 있지? 남자들이 딸 키우는 재미가 그렇게 좋다더라고.”
“그럼 하나 더 낳으시면 되죠. 능력 있으신데 뭐가 그리 걱정이세요?”
“그래서 힘 좀 더 써 보려고. 처제, 조카 많이 만들어줄게.”
“……언니가 갑자기 불쌍해.”
어수선한 분위기지만 관심은 이쪽에 집중되어 있다. 정혜주는 조용한 학창 생활을 보내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화려하게 주목받는 삶에 대한 동경은, 소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니.
이제 겨우 스무 살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를 일찍 체감했다. 어디를 가든, 그리고 무엇을 하든 간에 제니스 회장의 처제라는 시선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받아들여야 한다. 그 꼬리표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필연적인 선에서 적당히 이용하는 것이라면, 언니도 용납해줄 것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동생의 처지를 이해할 것이다.
당장 지금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른 동기들은 짐을 나른다, 숙소를 정한다 바쁜데 누구도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걸지 않는다. 형부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건 무관심이 아닌,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었다.
“형부, 저 그만 들어가 볼게요. 제 방이 어딘지도 알아야 하고요.”
“벌써? 좀 더 나랑 놀지.”
“저도 그러고 싶죠. 하지만 너무 떨어져 나와 있으면 동기들하고 못 친해져요.”
“어차피 순수하게 친해지는 건 불가능할 건데?”
유지웅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했다. 어떤 계산된 의도도, 사심도 담기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정혜주는 그 말이 얼마나 정확하게 자신의 입장을 꿰뚫고 있는지 이해하고, 서글퍼졌다.
“아, 저도 그건 알지만 너무 냉정하게 딱 잘라 말씀하시니까 슬퍼져요.”
“어쩔 수 없어. 네 처지가 그런 걸.”
“그래도 아쉽네요.”
“별로 아쉬워할 것도 없어. 대학교 친구들은 웬만하면 중고등학교 때처럼 순수하게 친해지기 힘들어. 그러니까 중고등학교 친구들 간수를 잘해.”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요. 아무튼 형부, 저 이만 들어가 볼게요.”
“쳇. 효주도 어디 가고 안 보여서 심심한데.”
유지웅은 궁시렁거리면서 등을 돌렸다. 이거 한가하게 호텔이나 구경해야겠다.
정혜주는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넓은 야외 풀장을 배경으로 커다랗고 화려한 호텔이 우뚝 서 있었다.
연주대학교 이번 OT 장소는 이곳 호텔 휴양지로 선정되었다. 몇 해 전에 완공돼 영업을 시작한, 일종의 피서, 피한지인데 1,000개가 넘는 객실과 겨울에도 이용할 수 있는 야외 수영장과 스키장, 놀이시설까지 갖춰져 있는 곳이다. 바다와 바로 접하고 있고, 호텔 소유의 크루즈까지 있어 선상 파티를 즐길 수도 있게 되어 있었다.
아무리 부자 대학이라 해도 일개 신입생 환영회를 위해서 이런 휴양지를 통째로 임대하는 건 재정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환영회 장소로 이곳이 선정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소유주가 바로 유지웅이었으니까.
동해안이라 서울과 좀 거리는 있지만, 고급 휴양지를 무료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은 다른 어떤 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유지웅이 넌지시 휴양지를 제공하겠다고 의사를 비쳤을 때 학교 운영회는 두 말 않고 찬성했다.
유지웅의 후원은 학교 임원회를 감동시켰다. 빠듯한 학교 예산으로 이런 고급 휴양지를 통째로, 그것도 4박 5일을 임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후원이 아니면 언제 이런 사치스러운 환영회를 진행해보겠는가.
“와, 방 진짜 좋다.”
“대학교 오티는 다 이런 데서 하는구나.”
몇 몇 신입생들이 그런 당치도 않은 오해를 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병아리들이다.
객실 수는 충분했으나 학교 측에서는 일부러 10명씩 한 방에 묵게 했다. 그렇게 해도 방은 넓다. 또 몰려 있어야 서로 친해질 기회도 많이 만들 수 있다.
“그거 들었어? 여기 휴양지 소유주가 유지웅 선배래.”
“어머, 진짜?”
“응. 작년에 어디 이상한 산속 콘도에서 오티 보낸 거 때문에 유지웅 선배가 이를 갈았대. 그래서 우리 학교 오티나 엠티 장소로 쓰려고 여기 휴양지 사들인 거래.”
“와, 정말 스케일 장난 아니다. 엄청 비쌀 텐데. 이런 휴양지는 가격이 얼마나 할까?”
“그건 모르지만, 그 선배 입장에서는 푼돈이지 않을까? 보유 현금만 수십 조 원이라고 하던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득남하셨지?”
“크리스마스에 득남하셨지. 그때 난리 났잖아.”
“진짜 부럽다. 내가 그 아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들 심정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제니스 회장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정말 희대의 행운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한편 그 시각 정효주는 교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학생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휴양지 오너의 부인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에 알맞는 행세를 해야 했다.
“정효주 양, 이런 좋은 장소를 제공해줘서 고맙네. 부군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주게.”
“아니에요, 교수님. 후배들을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
“신입생들에게 평생의 좋은 추억이 될 게야.”
고급 휴양지에서 보내는 신입생 환영회는 즐겁고 유쾌했다. 신고식도 하고, 안면을 트면서 다들 즐겁게 보냈다. 무엇보다 유쾌한 것은 야외 온천장 이용이 가능했다는 사실. 뜨거운 수증기 덕분에 2월의 쌀쌀한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수영복으로 활보하는 게 가능했다. 근데 여학생들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풍문이 있다나 뭐라나.
호텔 직원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야외 뷔페도 분위기를 한결 후끈하게 만들었다. 소주에 맥주를 생각했던 신입생들은 갖가지 고급 와인들이 잔뜩 제공되자 환호를 질렀다. 이 모든 게 무료고 얼마든지 주문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다들 연주대학교에 들어온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특히 결정체학과 학생들은 톡톡히 체면을 차렸다.
사람의 소속감이라는 게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중요하다. 같은 과 선배가 이런 고급 휴양지를 오티 장소로 제공하고, 또 비싸고 맛있는 음식과 양주를 무제한 제공하고 있다. 제대로 대면 한 번 한 적 없지만 후배로서 타학과 학생들 앞에서 저절로 어깨가 펴지며 뿌듯해지는 것이다.
“저, 근데 교수님. 사실 제가 여쭤볼 게 있어요.”
“뭔가?”
“우리 신랑이 저번 학기에 과 수석을 했던데 저는 그게 이해가 안 가서요.”
정효주는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그녀는 유지웅이 과 수석을 한 것을 뒤늦게 알았다. 더 빨리 물어보려고 했는데 애도 낳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OT에 와서야 겨우 자리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교수들의 표정이 볼 만 했다. 서로 매우 당황하면서 상대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의아했다.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갔다. 못 물을 걸 물었나?
“흠! 흠! 그건 부군에게 물어보게.”
“……실례했습니다.”
안 좋은 예감을 직감한 정효주는 순순히 물러났다. 굳이 추궁해서 교수진을 난처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더욱 궁금증이 생겼다. 그냥 조금 이상해서 지나가는 식으로 물어본 건데, 저 반응은 대체 뭔가?
유지웅이 절대로 과 수석을 할 실력이 아니라는 것은 땅이 알고 하늘이 알고 그녀가 알고, 무엇보다 본인이 안다. 그런데 과 수석을 했다는 건 교수진이 밀어줬다는 이야기다. 다행히 학생들 사이에서 별 말은 나오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정효주는 평판에 부쩍 신경 쓰는 중이라 아예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해서 그녀는 유지웅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더 가관이었다.
“뭐? 내가 과 수석이라고? 저번 학기?”
“……아직도 몰랐던 거야? 성적 확인 안 했어?”
“안 했지. 뭐 하러 그런 거 확인해.”
성적 잘 받으려고 학교 다니는 게 아니다. 성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니 확인을 안 한 게 별로 이상한 짓은 아니다.
“너 혹시 나 몰래 따로 부탁한 거 있니? 교수님들한테 성적 좀 잘 달라고.”
“아니? 너도 알잖아. 나 성적 별로 관심 없는 거. 그래서 입학할 때 분명히 그냥 B 정도만 주시면 좋겠다고 했는데. 아, 가끔 A 주시는 분들도 있긴 하지만…….”
“그럼 하필이면 저번 학기에 교수님들이 전부 다 너한테 A를 주신 거네? 우연의 일치야?”
“다들 모르시는 눈치야?”
“내가 말 꺼내니까 당황하시더라. 교수님들이 일부러 의견 합치해서 A로 몰아준 건 아닌 거 같던데. 난 그래서 네가 A 달라고 부탁했나 싶었지. 아니면 공부를 열심히 했던가.”
“아닌데? 나 저번 학기에 아예 공부 안 했잖아? 문제지 받아드는데 무슨 소린지 몰라서 그냥 편지 쓰고 나왔어.”
그나마 1학기 때는 공부를 좀 해서 시험을 치렀지만, 2학기 때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공부 안 하고 학교에서는 놀기만 했다. 성적을 잘 받을 필요도 없고, 잘 받아서 다른 애들 석차 낮추는 것도 의미가 없는 짓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일등을 했다고? 왜지? 유지웅은 인상을 쓰며 그 이유를 놓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한편 그의 대답에서 걸리는 게 생긴 정효주는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답안지에 편지 쓰고 나왔다고?”
“응.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교수님한테 보내는 편지 썼지.”
“……편지에 뭐라고 썼어?”
“별로 쓸 말이 없어서 그냥 이것저것 썼어. 교수님, 자문단에 자리 하나 비어 있습니다. 효웅산업 사외 이사에 모셨으면 합니다. 감사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세종시 연구단지가 곧 개장하는데 연구 프로젝트를 맡아서 해주실 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하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뭐 그런 거?”
정효주는 허탈해졌다. 그녀는 누구보다 신랑을 잘 안다. 신랑은 별 생각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편지를 썼다. 그런 게 그에게는 일상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 편지를 받는 교수 입장은 다르다. 달라도 전혀 다르다. 누구라도 제자의 그런 구구절절한 마음이 담긴 편지를 답안지로 받아든다면, A+을 주지 않고 견딜 수 없으리라. 오해가 쌓이고 엉키고 겹쳐서 그를 석차 1위로 만들고 만 것이다.
============================ 작품 후기 ============================
편지를 본 교수가 느낀 것은 과연 기쁨일까요, 압박감일까요?